진흙속의연꽃

행복을 바라는 목마른 자의 갈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18. 13:27

 

 

행복을 바라는 목마른 자의 갈애

 

 

 

사랑가에서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누구나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행복이 될수 있으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특히 어렵게 얻어진 행복일수록 그렇다. 그래서일까 ‘사랑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무서워요 두려워요 이 행복이 부서질 것 같아 사라질 것 같아요

내 맘엔 사랑이 깃들 수가 없나요 꼭 붙들어야죠 달아나지 않도록

내 마음에 깃든 이 큰 사랑 무서워요 두려워요 이 큰 행복이

 

(사랑가, 한네의 이별 중에서,  김영동 글.)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큰 행복을 얻었다. 그래서 남자는 “해가 가고 달이 가도 내 사랑 위해 죽기라도 하겠네.”라며 이 큰 행복이 오래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자는 이 큰 행복에 대하여 두려워 하고 있다. 행복이 너무 커서 금방 깨질 것 같고 달아날 것 같다고 노래한다.

 

이고득락(離苦得樂)

 

지금 행복한 자는 이 달콤한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지금 불행한 자는 이 지긋지긋한 괴로움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5세기 스리랑카의 붓다고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노래 하였다.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

평온은 고요하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설하셨다.

이 세 가지 느낌은 갈애의 조건이기 때문에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대성인께서 설하셨다.

느낌을 조건하지만 잠재성향이 없이는 갈애가 없다.

그러므로 청정범행을 닦은 범천에게는 그것이 없다.

 

(청정도론 제17 238)

 

 

게송에서 ‘괴로움(Dukkhā)’과 ‘행복(sukha)’과 ‘평온(Upekkhā)’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한고 행복한 자는 더 많은 행복을 원한다. (Dukkhī sukha patthayati, sukhī bhiyyopi icchati)”고 하였다. 이 말은 지금 괴로운 자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바라는 것이고,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시한다면 ‘이고득락(離苦得樂)’이 될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이런 괴로움과 행복은 모두 ‘느낌 (Vedanā)’이라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다름 아닌 갈애의 조건이 된다. 지금 괴로운 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갈애가 일어 나고, 지금 행복한 자는 행복이 더 지속되기를 바라는 갈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고사는 “이 세 가지 느낌은 갈애의 조건”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대성인께서 설하셨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대성인 (mahesinā)은 부처님을 말한다.

 

행복(sukha)은 느낌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괴로움(Dukkhā)’과 ‘행복(sukha)’과 ‘평온(Upekkhā)’이라는 것은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느낌(Vedan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sukha)은 느낌이다.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이 법이다. 따라서 법은 생주이멸하므로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고 하여 그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사랑가에서 이 행복이 부서질 것 같아 사라질 것 같아요라고 노래 한 것도 조건에 따라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행복한 느낌을 꼭 붙들어 매고자 한다. 한 번 행복한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얻어서 맛을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을 맛 본 자들은 계속 행복한 맛을 찾는다. 음식을 먹을 때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연인과 함께 하는 것도 행복하다고 한다. 일에 몰두할 때도 행복감을 느낀다.

 

등산할 때나 마라톤 할 때 비록 힘들고 지쳐가지만 한계를 넘어 설 때 희열과 함께 행복감을 맛본다. 이는 선정삼매에 들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대상에 대하여 집중하여 사유와 고찰에 따른 희열과 행복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선에서는 희열과 행복만 일어나고, 삼선에서는 행복만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희열과 행복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But as to the other word: pleasing (sukhana) is bliss (sukha). Or alternatively: it thoroughly (SUþþhu) devours (KHÁdati), consumes (KHAóati), bodily and mental affliction, thus it is bliss (sukha).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Bhikkhu Ñáóamoli)

 

 

나머지 [술어인] 행복이란 행복해 함이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움을 몽땅 먹어버리고 뿌리째 뽑아버리기 때문에 행복이라 한다.

 

(청정도론, 4장 땅의 까시나 100,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 따르면 행복이란 괴로움을 몽땅 먹어버리기 때문에 행복이라 한다. 그런데 빅쿠 냐나몰리의 표현에 따르면 pleasing (sukhana) is bliss (sukha)”라 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즐거운 것이 행복이다라는 뜻이다. 영어 bliss행복, 환희, 더 없는 기쁨의 뜻이다. 이렇게 행복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즐겁고 기쁜 것이다.

 

지금 행복한 자에게 괴로움이란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처리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라 본다. 또 청정도론에서는 행복에 대하여 즐기는 것도 행복이라 하였다. 이 대한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And wherever the two are associated, happiness is the contentedness at

getting a desirable object, and bliss is the actual experiencing of it when got.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Bhikkhu Ñáóamoli)

 

 

비록 어떤 [마음]에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지만 원하는 대상을 얻음에 만족이 희열이고, 얻어서 맛을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청정도론, 4장 땅의 까시나 100, 대림스님역)

 

 

대림스님의 번역을 보면 얻어서 맛을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빅쿠 냐나몰리는 “bliss is the actual experiencing of it when got.”이라 하였다. 행복은 그것을 얻었을 때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 이라는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감각적 접촉에 따른 행복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행복해 하는 표정 같은 것이다. 그리고 연인과 사랑을 나눈 후에 행복한 표정 같은 것이다. 이렇게 오감의 접촉에 따른 만족함을 얻었을 때 행복으로 보는 것이다.

 

희열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다

 

그렇다면 행복과 유사한 뜻으로 보이는 희열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Where there is happiness there is bliss (pleasure); but where there is bliss there is not necessarily happiness. Happiness is included in the formations aggregate; bliss is included in the feeling aggregate.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Bhikkhu Ñáóamoli)

 

 

희열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다. 그러나 행복이 있는 곳에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희열은 행온(行蘊) 포함되고, 행복은 수온(受蘊) 포함된다.

 

(청정도론, 4장 땅의 까시나 100, 대림스님역)

 

 

빅쿠 냐나몰리는 희열(piti)에 대하여 bliss (pleasure)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행복(sukha)에 대하여 happiness라 하였다. 그래서 희열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지만, 그렇다고 행복이 있는 곳에 희열이 있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초기경전의 선정단계를 보면 명확하다.

 

이선정에서는 희열(, pīti)과 행복(, sukha)이 함꼐 있지만, 삼선정에서는 오로지 행복만 있다. 따라서 희열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는 것은 성립하지만 그 역은 성립 하지 않는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이어지는 문장에 표현 되어 있다. 희열은 행온(formations aggregate)에 속하고, 행복은 수온(feeling aggregate)에 속하기 때문이다.

 

공중부양도 가능한 희열(piti)

 

아비담마에 따르면 희열(piti) 52가지 마음부수 중에 때때로 같아지는 것들에 속한다. 이는 선심이나 불선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나타는 것이다. 어떤 특별한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희열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희열은 선한 것일 수도 있고 불선한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도둑질 하면서 희열을 느낀다면 이는 불선한 것이다. 그러나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졌을 때 희열이 일어 날 수도 있다. 이는 선한 것이다. 그런데  희열에는 몸의 털이 곤두서는 작은 희열이 있는 가 하면 환희용약하는 희열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기리깐다까(가시나무 산) 사원 근처에 있는 왓따깔라까 마을의 한 선여인에게도 일어났다. 그녀는 부처님을 대상으로 강력한 용약하는 희열을 통해 공중에 뛰어올랐다.

 

어느 날 저녁에 그녀의 부모는 법을 듣기 위해 사원으로 가면서‘사랑스런 딸아, 너는 임신 중이니 부적당한 시간에 나다니는 것은 옳지 않구나. 우리가 너를 위해 법문을 듣고 오겠다.’라고 하면서 나갔다고 한다.

 

그녀는 비록 가고 싶었지만 부모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집에 남아 정원으로 가서 달빛으로 기리깐다까에 있는 아까사(허공) 탑을 보았다. 탑에 등불을 공양하는 것을 보았고, 사부대중이 꽃과 향으로 탑에 헌공한 뒤 오른쪽으로 탑돌이 하는 것을 보았다.

 

비구승가가 함께 염송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그녀가 ‘사원에 가서 이러한 탑전에서 거닐고, 이렇게 감미로운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한 이들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진주 덩어리와 같은 탑을 볼 때 용약하는 희열이 생겼다. 그녀는 공중에 뛰어올라 그녀의 부모보다 먼저 공중에서  탑전으로 내려 탑에 예배한 뒤 법을 들으면서 서있었다.

 

그때 그녀의 부모가 도착하여 ‘사랑하는 딸아, 어느 길로 왔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길이 아니라 공중으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번뇌 다한 이들이나 공중으로 다닌다. 어떻게 네가 공중으로 왔냐?’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제가 달빛으로 탑을 바라보면서 서있을 때 부처님을 대상으로 크나큰 희열이 생겼습니다. 그때 저는 제  자신이 서있는지 앉아있는지 몰랐습니다. 제가 얻은 표상으로 공중에 올라 탑전에 서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와 같이 용약하는 희열은 공중에 뛰어오를 수 있다.

 

(청정도론, 4장 땅의 까시나 96-97, 대림스님역)

 

 

희열은 선한 마음과 불선한 마음에 모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삼보에 대한 믿음에 따른 희열은 공중부양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희열은 대상에 대하여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인 고찰을 해야만 일어날 수 있다.

 

희열에 뒤이어 일어나는 것이 행복이다. 그래서 행복으로 대표되는 삼선정도 희열과 삼매의 이선정 다음에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행복에 있어서 희열은 필요 조건임을 알 수 있다.

 

행복은 느낌의 무더기(受蘊)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이 청정도론에서 수온, 즉 느낌의 무더기로 정의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나하면 행복이라는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조건에 따라 일시적으로 형성된 행복한 느낌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느낌에 지나지 않는 행복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있다. 희열과 함께 행복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If a man, exhausted in a desert, saw or heard about a pond on the edge of a wood, he would have happiness; if he went into the wood’s shade and used the water, he would have bliss.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Bhikkhu Ñáóamoli)

 

 

희열은 사막에서 목말라 기진맥진한 사람이 숲 속의 물을 보거나 혹은 들을 때와 같고, 행복은 숲 속의 그늘에 들어가 물을 마실 때와 같다.

 

(청정도론, 4장 땅의 까시나 96-97, 대림스님역)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는 자자 있다. 이렇게 길 잃은 자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다. 이는 영화 웨이백(The way back, 2010)’에서도 물을 찾기 위한 처절한 사투가 묘사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웨이백(The way back, 2010)

 

 

 

그런데 목마른 자에게 있어서 사막의 오아시스는 생명이나 다름 없다. 그런 오아시스를 발견하였을 때 온 몸에 희열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단숨에 달려 갈 것이다. 이렇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강력한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날아가듯이 오아시스에 도착하여 물을 입에 대는 순간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강한 행복을 느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행복이다. 맛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희열과 행복에 대하여 사막의 목마른 자의 비유를 들었다.

 

아이들이 웃다가 울다가’ 

 

아비담마에 따르면 행복이라는 것은 느낌임에 분명하다. 그런 느낌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조건이 바뀌면 지금 행복한 느낌도 사라진다. 마치 아이들이 웃다가 울다가 하는 것처럼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느낌이다. 행복 역시 느낌이기 때문에 변한다. 다만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에 불과 하다. 이렇게 행복이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괴로움(dukkha) 역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뉴스를 듣다 보면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한다. TV를 보면 항상 행복한 사람들로 넘쳐 나는 것 같지만 종종 뉴스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울하게 만든다.

 

최근 어느 연예인의 비극적인 가족사에 대하여 뉴스로 접한 바 있다. 팔순 부모를 모시고 있는 육십대가 노부모를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을 말한다. 내용을 알고 보니 치매에 따른 고통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최근 접한 뉴스에 따르면 뇌경변을 앓고 있는 아들에 대하여 25년간 병수발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자살하였다고 한다. 이런 뉴스를 접하였을 때 항상 행복한 사람들만 보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지옥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 생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방송에서 독거노인의 말을 들어 보면 어서 죽는 것이라 한다. 죽음이 모든 것에서 해방시켜 줄 듯이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의 게송에서와 같이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한다.(Dukkhī sukha patthayati)”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괴로움도 느낌이다

 

괴로움은 느낌이다. 행복(sukha)와 마찬가지로 조건에 따라 형성되는 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복과 괴로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라 무엇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느낌이다.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의 느낌이란 이런 것이다.

 

(Aṭṭhasatapariyāyasutta- 백여덟 가지에 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22,전재성님역)

 

 

느낌에는 좋은 느낌 뿐만 아니라 싫은 느낌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이를 감지 하지 못하는 중립적인 느낌도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를 즐거운 느낌(sukhā), 괴로운 느낌(dukkhā),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adukkhamasukhā)이라 하였다.

 

이처럼 괴로움이라는 것은 행복과 함께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이 영원하지 않듯이 괴로움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행복한 자는 더 행복하기를 바라고, 괴로운 자는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갈애에 속한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나는 것처럼, 갈애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근원적인 욕망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죽어 버리면

 

지금 너무 괴로워 죽고 싶다라고 하였을 때 이는 갈애에 해당된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갈애에 해당된다. 그런데 행복을 성취하면 이번에는 그 행복이 더 오래 지속 되기를 바란다. 심지어 영원히 지속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행보을 향유하는 자들은 지금 이대로 영원히!”라든가, 심지어 죽어도 좋아!”라고 외친다. 지금 여기에서 괴로운 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에서 죽어 버리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게 되는데 이는 단멸론적 사고방식에 지배당하였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행복에 대한 갈애가 지나치면 영원주의로 발전 된다고 본다. 또 괴로움에 대한 갈애가 지나치면 허무주의로 전락된다고 본다.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는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는 상견단견에 빠져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자는 마치 천국과도 같은 행복이 영원히 오래 지속 되기를 바라고, 지금 죽지 못해서 사는 자들은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구원으로 받아 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업이 남아 있는 한 그 업을 대상으로 하여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재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이대로!”를 외치는 영원주의나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허무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은 행복이나 불행이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인 현상에 대하여 영원하거나 단멸한다고 보는 전도된 지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허무주의적 견해가 가장 치명적인데 이는 보통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른 바 명사라는 분들에게도 볼 수 있다.

 

나는 죽는 순간에 나는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유튜브 동영상 강연에서 본 김용옥 교수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영혼이 영생한다 그거지. 영혼이 변하지 않고 계속 그게 댕긴다 그거지.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없어? 나는 현실적으로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철학자로서 내가 생각하는 바는 나는 죽는 순간에 나는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김용옥교수,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08 술과 수학)

 

 

김용옥 교수는 죽는 순간에 나는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하였다. 이는 철학자로서 한 말이라 한다. 종교인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검증을 요하는 철학이나 과학을 탐구 하는 학자의 입에서 이와 같은 단멸론적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철학자나 과학자가 윤회가 있다라고 하였을 때 이를 검증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검증이 되지 않는 윤회를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 본다. 이런 태도는 소위 불교학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다만 종교인이라면 윤회가 있느니 없느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윤회는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다. 이는 부처님이 초기경전에서 무수하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자들은 영혼이 윤회한다는 힌두교의 아뜨만 윤회는 받아 들일 수 없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윤회와 힌두교의 윤회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막에서는 윤회는 영혼의 동일성(Identity)의 지속이라는 전제가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윤회에 대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 보여진다. 이는 다름 아닌 힌두교식 윤회를 말한다. 힌두교 윤회라는 것은 지금 나와 동일한 영적인 어떤 것, 즉 영혼이 윤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아를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힌두교의 영혼이나 브라만교의 아뜨만 윤회는 받아 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아뜨만론을 비판하고 성립한 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김용옥 교수는 영혼 윤회에 대하여 나는 현실적으로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라 고 한 것도 힌두교 윤회를 받아 들일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무아윤회론적으로 보았을 때 아뜨만 윤회, 영원주의, 허무주의가 왜 모순일까?

 

깟짜야나곳따경(S12:15)에서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성립할 수 없음을 논파 하였다. 대표적인 경이 깟짜야나곳따경(S12:15)’일 것이다.

 

경에서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라 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였고,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 하여 영원주의를 논파하였다.

 

이렇게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을 명백히 밝혔음에도 아직 까지 사람들은 힌두교나 기독교 등에서 말하는 사후에 대한 이야기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네 가지 윤회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 댓글을 남겨 주신 법우님이 있다. ‘네 가지 윤회라는 글이다. 이를 메모해 놓았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네 가지 윤회

 

 

영혼(靈魂) 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육체를 움직이면서 정신활동을 하고 있는 무엇을 '영혼'이라고 한다면, 영혼이 없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별적인 영혼은 불교에서는 부정하고 있다.
 
개별적인 영혼이 없는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미린다왕문경이란 경에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네 가지 경우를 따져 본다.
 
-
개별적 영혼이 존재하지만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 (기독교 계통)
-
개별적 영혼이 존재하며 그 영혼이 윤회한다고 말하는 경우 (흰두교 계통)
-
개별적 영혼은 없으며 윤회도 없다고 말하는 경우 (쾌락주의, 허무주의)
-
개별적 영혼은 없으며 윤회는 있다고 말하는 경우 (불교)
 
(1)
개별적 영혼이 존재하지만 윤회하지는 않음 (기독교 계통)
 
사람이 되기 전에는 영혼이 어디에 대기하고 있다가 인간으로 태어나고 죽으면 어딘가에서 영원히 영혼이 머물게 된다. 그곳이 지옥이던지 하늘 나라 이던지 ...
 
여기서 육신도 없이 지옥에서는 어떤 식으로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일까? 인간의 몸을 가지고 하늘나라나 지옥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몸은 알다시피 없어진다.
그래도 만일 몸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간다면, 꽃다운 이팔청춘에 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영혼이 하늘 나라에 있다가 인간으로 태어난 후에 다시 하늘 나라에 간다고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다시 하늘 나라에 있게 되기 때문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하늘 -> 인간 -> 하늘 -> 인간 .....
결국 윤회이다.
 
개별적 영혼이 존재하지만 윤회는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많다.

 

(2) 개별적 영혼이 존재하며 그 영혼이 윤회함 (흰두교 계통)
 
개별적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금생에 한 행위에 의하여 환생 윤회를 한다고 말하는 경우로 대부분의 윤회관이 여기에 해당한다.
 
개별적인 영혼이 항상하면서 있다면, 오래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여도 바로 직전의 전생 일인 임종은 기억나야한다. 그런데 태어나면 바로 직전 전생의 기억도 전생에 그렇게 많이 사용했던 언어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가 정지되면 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윤회를 이끄는 업도 영혼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뇌 속에 있다고 해야한다. 왜냐하면, 업은 생각이 제일 기초업이다. 그 위에서 말과 행위의 업이 있다. 그리고 생각은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언어도 기억이다.
그렇다면 업인 카르마는 영혼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에 있는 것이 맞다. ''가 정지하면 언어가 없어지기 때문에 언어로 인한 모든 기억도 없어지고, ''가 정지하면 ''의 대부분도 사라지고, 사라졌으니 결과인 과보도 있지 않게 된다.
 
태어났을 때에 그 전에 죽을 때의 기억과 전생에 그렇게 많이 사용했던 언어 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개별적인 영혼이 윤회한다 단정해서 말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3) 개별적 영혼도 없으며 윤회도 없다 (쾌락주의, 허무주의)
 
영혼도 윤회도 없다는 이야기는 내세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살아서 무슨일을 했던지 죽으면 깨끗하게 끝이다. 살아서 어떤 짓을 해도 관계없다. 개별적 영혼도 없기 때문에 상호간에 책임 져야할 것도 완전하게 없다.
내가 아무리 악하고 나쁜 일을 많이해도 죽으면 그 결과는 받지 않는다. 인생의 끝은 허무이며 해결책도 없다.  열심히 사는 것도 무의미하고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자손과 정이 붙어서 죽은 후에도 자손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죽으면 끝이기에 답답하고 허무하다.
 
신이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죽으면 ''는 없는데 신의 말을 들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도 인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남의 것을 훔치면 왜 그렇게 마음에 죄의식이 생기고, 열심히 살지 않고 적당하게 살려고 하면 손가락질을 받는 이것은 무엇일까?
 
인과도 업보도 없고, 개별적 영혼도 없는데 내가 어떤 잘못이 있길래 원수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힘들어야 하는가?
 
도무지 어떤 것도 설명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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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는 몸을 받아서 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인도의 전통적 윤회와 불교의 윤회가 다르다인도의 전통적인 윤회는 개별적인 영혼이 있는데 그 영혼이 환생한다고 하는 윤회'이다. 이러한 '개별적 영혼' '아트만'이라고 말한다.
 
불교의 윤회는 윤회의 주체인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윤회'이다. '윤회'는 말할 수 있지만 '윤회'의 주체인 '영혼'은 없다는 것이 불교의 윤회이다.
 
그런데 윤회가 말해질려면 정말로 '영혼'이 없어야지만 깨끗하게 윤회를 말할 수 있다불교의 윤회는 인도의 환생적 윤회를 부정하면서 바르게 윤회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그 내용에 대하여는 다음에 살펴본다.
 
어떤 종교인은 윤회를 부정한다윤회를 긍정하고 부정하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부정할 수도 있다. 단지 부정하기 전에 먼저 윤회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고서 부정을 해야한다. 차칫 불교도가 아니라고 윤회를 부정하다가 자기 종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부정하게 될 수가 있다.
 
윤회가 말해지려면, 먼저 인과법칙이 인정이 되어야한다. 인과법칙은 불교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하는 분들의 인과율은 앞의 복음의 내용을 빼고서는 반쪽만 말하고 있다.
 
서로 다르게 태어나야하는 원인이 없는데, 다른 환경에서 탄생하는 결과가 있다. 어떤 이는 좋은 환경에 태어나고 어떤 이는 나쁜 환경에서 태어나는 결과는 분명한데 그 원인이 없다. 또한 살면서 지은 여러가지 원인을 뿌렸는데 죽으면 그 결과를 받지 않는다.
 
결국 예외가 있는 인과법칙이 된다. 기독교의 인과가 "뿌린데로 거둔다" 이다.
 
결국 태어남은 누군가가 임의의 권능으로 태어나게 만든 것이고,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만 뿌린데로 거두는 인과 법칙이 적용되고죽으면 인과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태어나기 전과 죽은 후는 인과에서 예외가 적용되는 시간과 공간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뿌린데로 거둔다'는 시공의 제한을 받는 것이기에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데 기독교에서는 이를 섭리라고 말한다.
 
"
뿌린데로 거둔다"가 기독교 섭리로서 완전해지려면영원성 속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궁극이 '부활과 영생'이다. 다음을 한번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과 + 영원성(영생) = 삼세(전세.현세.내세) 윤회
 
인과와 영원성(영생) 두가지를 다 말하는 종교는 윤회를 부정할 수가 없으며 부정해서는 안된다.

 

(불법승님, http://blog.daum.net/bolee591/16155668, 2013.09.11 1)

 

 

법우님은 네 가지 윤회에 대하여 알기 쉽게 글을 남겨 주셨다. 그렇다고 하여 개인적인 견해라고 볼 수 없다. ‘밀린다왕문경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이다.

 

법우님이 올려 주신 글을 보면 1번에서 3번 까지는 설명되어 있지만, 4번항 개별적 영혼은 없으며 윤회는 있다고 말하는 경우 (불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연기법적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앞서 예를 든 깟짜야나곳따경 (S12:15)’이 대표적이다.

 

삶이 권태로울 때

 

삶이 권태로울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고 의미가 없어 보일 때를 말한다. 이는 행복에 겨워하는 말일 수 있다. 괴로움은 없고 오로지 행복만 계속 되었을 때 자칫 무료함, 권태, 무기력에 빠질 수 있음을 말한다. 과연 이런 상태는 어떤 것일까? 최근 교계사이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다.

 

 

“천국 같은 세계가 권태로워지고 괴롭게 되면서 지옥으로 변하지 않게 하려면, 그 자신이 스스로 욕심이나 증오심을 제어할 수 있어서 항상 마음이 맑고 밝고 따뜻하고 고요해질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 김진태 박사, ‘천당과 지옥은 번지수가 없다’ 출간, 미디어붓다 2014-01-14)

 

 

김진태교수의 책을 소개하는 글이다. 김진태 교수의 강연을 10여 차례 들어 보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익숙하다. 글을 보면 천국 같은 세계가 권태로워 지면 그곳이 바로 지옥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지금 천국에 태어난 자가 하루 종일 하프만 켜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행복할지 모른다. 그런데 하프 켜는 일을 영원히 계속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매일 똑 같이 올라 오면 식상하듯이 지금 행복으로 가득찬 생활이 영원히 계속 된다면 틀림 없이 무료무기력권태를 느끼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런 느낌을 갖는 순간 더 이상 천국이 아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사실상 알고 보면 지옥에 사는 것이나 다름 없다.

 

김진태교수의 출간 이야기를 듣고 책을 샀다. 180여 페이지에 밖에 되지 않는 얄팍한 책이다. 그러나 제목을 보니 이전에 들었던 내용들이다. 특히 천국에 대한 묘사를 보면 천당과 지옥은 번지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종교인들이 천국과 지옥을 들먹이는 것은 왜 그럴까? 그것은 한마디로 장사속이라 하였다. 그래서 천당으로 유혹하고 지옥으로 협박하여 수금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국을 들먹이며 영원한 즐거움과 행복만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곧바로 실망하게 될 것이라 한다. 누구이든지 그곳 생활에 익숙해지면 슬슬 권태가 생기기 때문이다. 마치 돈 많은 자들이 심심해지는 것과도 같다.

 

돈 많은 부자들도 고민은 있다. 오늘 점심에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며 맛집을 찾아 다니고, 오늘 오후에는 어떤 일로 시간을 때울까 하며 고스톱을 친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자주 하다 보면 싫증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면 갈수록 먹는 것도, 즐기는 것도 심드렁해지고 의미가 없어진다.

 

대부호 상인의 아들 야사 이야기

 

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항상 즐거움만 있는 천국에서 권태로움이 생겨 날 때 밥먹는 것도 잊어 버리고 행색도 초라해질 때 죽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라 한다. 이처럼 지금 행복한 자가 권태와 무료, 무기력을 느낄 때 괴롭게 된다. 그럴 경우 천만금 가진 부자도 결코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야사의 출가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부처님 당시 최고로 번성했던 부유한 도시 바라나시에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부와 권력이 허락하는 모든 혜택을 다 누리면서 안락하고 유쾌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날 재벌2세에 해당하는 삶을 살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의식주를 위해서 노동할 필요가 없는 그는 24시간이 온통 여가 시간이다. 게다가 모든 종류의 쾌락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을 다 가지고 있다. 눈과 귀를 기쁘게 하고, 코와 입을 즐겁게 하며, 미인의 감촉과 감미로운 감정과 향락적인 상상을 다 만족시킬 수 있다.

 

하루 종일 이렇게 살고, 한 평생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부와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아닌가?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대중은 가진 자들은 아마도 모두 그렇게 살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런 삶을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부유한 자들에게도 고통은 있다. 쾌락이 보장된 삶에 권태라는 것이 끼어든다. 한 때 즐거움을 주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들해진다. 쾌락의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것이다.

 

경탄할 만한 경치도 자꾸 보면 그냥 배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영혼을 울리는 음악도 오래 들으면 청각을 무디게 만든다. 뇌쇄적인 미인의 섹시미도 자주 보면 시들해지고, 입맛은 까다로워지고, 취향은 세련되어진다. 만족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호사와 사치와 모든 유흥과 향락이 권태로워진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 전위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해본다. 변태성 섹스에 마약까지도. 과도한 쾌락은 심신을 소진시키고, 권태는 정열을 식게 만든다. 삶은 무의미해지고 무력감에 빠진다. 어릴 때부터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누리고 소비하고 즐기는 식으로 살아왔으니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젠 누리고 즐기는 일조차 심드렁해졌다. 남아나는 게 시간이라, 눈을 뜨면 ‘오늘은 뭐하고 지내지, 뭐 재미난 일 없나?’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뭐 한번 해봤으면 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 방황의 끝은 어디인가?|, 원담스님)

 

 

청년 야사는 부처님 당시 대부호 상인의 아들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2라 볼 수 있다. 재벌 2세에게 있어서 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은 없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 대부호 아들인 야사 역시 무엇이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고 살았다.

 

정말 괴롭구나, 괴로워

 

대부분 부유한 자제들이 그러하듯이 야사도 향락을 마음껏 즐겼다. 마치 천국과도 같은 생활을 날이면 날마다 반복한 것이다. 그런 생활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진수성찬에 황제와 같은 식사를 하고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는 삶도 심드렁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만족되지 않아 아예 무기력하고 무료하고 심심하고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노는 것도 괴로운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서 내 뜻대로 되는 것이라 하지만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이 있을 때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이런 쾌락의 모습 속에서 환멸과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정말 괴롭구나, 괴로워.”

 

(율장 마하왁가 1 7:1-15,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에서)

 

 

야사이야기는 율장에 쓰여 있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재벌 2세와 같은 야사의 입에서 정말 괴롭구나, 괴로워.”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지금의 생활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임을 말한다.

 

목마른 자의 갈애

 

지금 행복한 자가 더 많은 행복을 바라지만 그 행복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다. 설령 행복을 향유한다고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해 권태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또 다른 행복을 찾아 나선다. 마치 사막에서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는다. 그러나 결국 무료, 무기력,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 불행한 자가 있다. 죽지 못해서 사는 고통에 처해 있지만 그 고통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행복을 찾지만 결국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괴로운자 가 행복을 원하는 것 역시 갈애에 속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에 답이 있다.

 

 

Ya pare sukhato āhu tadariyā āhu dukkhato,
Ya
pare dukkhato āhu tadariyā sukhato vidu.

Passa dhamma durājāna sampamuhettha aviddasu,
Nivut
āna tamo hoti andhakāro apassata

 

 

다른 사람들이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즐거움이라고 안다.

알기 어려운 진리를 보라.

무지한 사람들은 여기서 헤매게 된다. (stn762)

 

(Dvayatānupassanā sutta-두 가지 관찰의 경, 숫따니빠따 Sn3.1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괴로운 것이라 하였다. 또 사람들이 괴로운 것이라 하는 것에 대하여 즐거운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왜 거꾸로 이야기 하였을까? 그것은 있는 그대로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나 괴로움이라는 것은 단지 느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기에 목숨을 건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죽어도 좋아!”하며 행복에 올인 하는 것이다. 또 지금 죽지 못해서 사는 자들은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면 죽고 싶어!”라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올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한 느낌이다. 그런 느낌에 올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하는 것도 아니다. 느낌은 단지 조건에 따라 발생되는 일시적현상일 뿐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라는 말은 목마른 자의 갈애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014-01-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