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꽃이 필 때, 진리의 눈이 생겨 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26. 17:13

 

꽃이 필 때, 진리의 눈이 생겨 날 때

 

 

 

봄비를 촉촉히 맞은 개나리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린다. 반가운 비다. 이번 비로 인하여 그야말로 세상이 확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봄비가 내리면 마치 죽어 던 것이 다시 부활하는 듯 하다.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인다. 이른 아침 봄비를 촉촉히 맞은 개나리가 노랗게 활짝 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 ‘개’자 붙으면 별 볼일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개꿈이니 개죽음이니 개똥이니 하는 말 들이 그것이다. 식물이름 앞에도 자가 붙은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개나리이다. 이외 개살구, 개복숭아 등이다. 자가 붙은 말이 있다.' 대표적으로 지위가 낮은 병사를 뜻하는 졸병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하찮고 볼품없는 것을 지칭할 때 쓰인다. 식물에서는 졸참나무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개자나 졸자가 붙어 별볼일 없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꽃이 필 때가 있다. 꽃이 피게 되면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 본다. 이전에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지만 꽃이 만개 하였을 때 비로서 관심을 갖는다. 아파트 단지 앞에 한껏 피어난 개나리를 보고 잠시 멈추었다.

 

청춘의 꽃이 필 때

 

사람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도 꽃이 필 때가 있다. 청춘이다. 추리닝 걸쳐도 몸매가 나고 화장을 안해도 얼굴이 빛나는 청춘이다. 더구나 별볼일 청춘이라도 한복이나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 활짝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다. 이렇게 청춘이 인생의 꽃이라면 이는 외형적인 것이다.

 

진정한 인생의 꽃은?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사유기능이 있어서 내면적인 꽃이 필 수 있다. 그것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진리의 눈이 생겨 났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S56.11)”라 하였다.

 

이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꼰단냐에게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Imasamiñca pana veyyākaraasmi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 vītamala dhammacakkhu udapādi: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 하였다.

 

여기서 공통적인 말은 우다빠디(udapādi)’이다. 이는생겨나다의 뜻으로 번역되었다. 진리의 눈, 법안(dhammacakkhu)’열리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생겨나다라고 한 것이다.

 

‘우다빠디(udapādi)’에 대한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면 ‘arose; originated.。生起’의 뜻이다. 없던 것이 생겨남을 뜻한다. 마치 꽃이 피듯이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진정한 인생의 꽃은 진리의 눈, 즉 담마짝꾸(법안)가 생겨 났을 때 일 것이다.

 

모든 현상에 대하여 앎과 봄을 지니고

 

담마짝꾸가 생겨 난 것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앎과 봄냐나닷사낭( ñāadassana)’이다. 이를 다른 말로 ()와 견()’ 이라 한다.  ñāa가 ‘wisdom; insight, , 智慧’를 의미하고, dassana는 sight; intuition; insight, , ’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로 보았을 때 냐나는 아는 것’, 닷사나는 보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본다는 것일까? 냐나닷사나와 관련하여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Mohantarā yassa na santi keci
Sabbesu dhammesu ca ñ
āadassī,
sar
īrañca antima dhāreti
Patto ca sambodhimanuttara
siva
Ett
āvatā yakkhassa suddhi
Tath
āgato arahati puraāsa.

 

 

그에게는 어떠한 것에도 어리석음이 없고,

그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앎과 봄을 지니고

최후의 몸을 가지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이처럼 최상의 청정함을 얻었으니,

이렇게 오신 님은 헌과를 받을 만합니다. (stn478)

 

(Sundarikabhāradvājasutta -쑨다리까 바라드와자의 경, 숫따니빠따 Sn3.4, 전재성님역)

 

 

바라문 쑨다리까가 부처님을 찬탄 하는 게송 중의 하나이다. 두번째 구절에서 ñāadassī가 ‘앎과 봄’에 대한 빠알리어이다.

 

신호등의 비유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앎과 봄에 대하여 일체지자로서의 세존의 증득이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앎과 봄은 일체의 현상에 대한 앎과 봄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호등의 비유를 들고 있다.

 

 

맹인에게는 붉고 푸른 신호등에 대한 앎이 있어도 봄이 없기 때문에 소용이 없고, 유아에게는 붉고 푸른 색을 구별하더라도 신호등에 대한 앎이 없으므로 봄이 소용없다. 앎과 봄을 모두 갗추어야 한다

 

(1221번 각주, 앎과 봄, 전재성님)

 

 

맹인은 신호등에 알지만 볼 수 없어서 봄이 없다. 유아는 신호등을 보지만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앎이 없다. 그래서 앎과 봄을 모두 갖추어야 제대로 길을 건널 수 있음을 말한다.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냐나닷사나(앎과 봄)에 대하여 또다른 각주에서는 상윳따니까야를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Jānato'ha bhikkhave,

passato āsavāna khaya vadāmi.

No ajānato no apassato.

 

수행승들이여,

나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알고 또한 보는 사람에게서 번뇌가 소멸한다고 말한다.

 

(Vāsijaopama sutta-도끼자루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101, 전재성님역)

 

 

 

알고 볼줄 알아야 번뇌가 소멸함을 말한다. 경에서는 물질, 느낌 등 오온에 대하여 이러한 것이 발생이고 소멸이라는 것을 알고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와서 보라하였을까?

 

앎과 봄은 부처님이 강조하신 것이다. 그것도 ‘있는 그대로 (yathābhūta)’ 알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게 “믿어라!”가 아니라 “와서 보라 (ehipassika)!”라는 것이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믿음은 별로 의미를 가지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초전법륜경에서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 āañca pana me dassana udapādi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S56.11)”라는 구절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앎과 봄이라 말한 것이 냐나와 닷사나이다. 그래서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는 것은 앎과 봄이 생겨났다는 말과 동의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현상에 대하여 보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볼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볼 수도 있고 알 수 도 있다. 이는 초기경에 따르면 법안이 생겨난 자라 하였다. 콘단냐가 설법을 듣고 진리의 눈이 생겨 났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고 초전법륜경에 소개 되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장애를 가졌다

 

TV에서 시각장애인과 신체장애인 부부에 대한 프로를 본 적이 있다. 남자는 시각장애를 가져서 앞을 보지 못하고 여자는 신체장애를 가져서 불편하지만 부부가 서로 힘을 합쳐 살아 가는 감동적인 프로이었다.

 

신호등을 보지 못하면 길을 건널 수 없다. 반면 신호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면 교통사고가날  수 있다. 그러나 신호등을 볼 줄 알고 의미를 안다는 것은 대로를 안전하게 건너 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 지식은 있지만 지혜가 없어서 알지 못한다. 이렇게 앎과 봄이 없을 때 장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장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꽃은 피어야 돋보인다. 그래서 쳐다 보게 된다. 동물은 오로지 먹는 것과 자손을 남기는 것이 본능이다. 그래서 오로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을 (sukha,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사실상 동물과 다름 없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 정신능력이다. 정신능력이 있기 때문에 앎과 봄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매우 단순해 보이는 가르침에 대한 앎과 봄이 생겨났다는 것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음을 뜻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진리의 눈, 법안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없던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하였다. 마치 꽃이 피면 새로운 우주가 열리듯이 새로운 눈이 생겼을 때 또 하나의 우주가 열린 것이라 볼 수 있다.

 

 

 

2013-03-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