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2030에서 한국불교의 희망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27. 11:15

 

2030에서 한국불교의 희망을

 

 

글이 고파서

 

글쓰기는 일상이다. 때 되면 밥먹듯이 밥먹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배고프면 밥생각이 나듯이 글이 쓰고 싶어지는 것이다. 밥을 안먹으면 배고프듯이 글을 쓰지 않으면 글고프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글이 고프다라 할 때 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와 같은 것이라 본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에 대하여 마슬로는 생리적 욕구 등 오단계로 설명하였는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오욕락과 유사하다.

 

식욕, 성욕, 수면욕, 재욕, 명예욕을 특징으로 하는 세상의 오욕락은 누구나 추구하는 근본적인 욕구로서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슬로나 오욕락을 보면 지식욕에 대한 것은 빠져 있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힌다는 말이 있지만 알고자 하는 욕구는 크게 취급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식욕과 더불어 알고자 하는 욕구는 동등하게 취급되어 있다. 자양분의 경(S12.11)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 vā sattāna hitiyā sambhavesīna vā anuggahāya. Katame cattāro? Kabalikāro āhāro o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a catuttha. Ime kho bhikkhave, cattāro āhārā bhūtāna vā sattāna hitiyā sambhavesīna vā anuggahāya.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첫째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 둘째 접촉의 자양분, 셋째 의도의 자양분, 넷째 의식의 자양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들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Āhārasutta-자양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1,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네 가지 자양분이 언급되어 있다. 이런 자양분은 삶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 요소라 하였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 ‘물질의 자양분(Kabalikāra āhārā)의 경우 밥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어서 신체적인 몸의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의식도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네 번째 의식의 자양분(viññāa āhārā)이 그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식식(識食)’이라 한다. 이 식식은 경에 따르면 다시 태어날 때 명색을 산출하는 특수한 조건이 되는 자양분이라 하였다. 이를 다른 말로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접촉에 따른 인식의 작용은 모두 재생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이 글이 고프면 글을 쓴다. 그런데 글쓰는 행위는 업을 유발한다는 사실이다. 업이라는 것은 결국 과보를 가져 올 것이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는 구업에 대한 과보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가장 먼저 자기만족이고 다음으로 보아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2030세대에 관심을 갖는다.

 

학생에게 댓글을 받았는데

 

비밀댓글을 하나 받았다. 20세대로서 학생의 글이다. 최근 블로그에서 벌어지고 치열한 댓글공방에 대한 우려의 글이다. 비록 비밀댓글의 형식으로 글을 남겼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공개 한다. 장문의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흙속의연꽃님.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블로그 꾸려가시느라 수고가 많으시고, 글을 쓴다는 것 그 자체와 정리된 많은 자료들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는 5~6년전 불교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불교방송국의 반야심경 금강경 유식 정도만 들은 재가불자도 아닌 일반학생입니다. 당시의 인연으로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품게되었고 올해 초부터 실행에 옮겨 공부를 시작하면서 우연히 진흙속의연꽃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공부해 나가는데...그런데 대체 이거 뭔가 싶고 공부에 대한 혼란과 불교 자체에 대한 회의가 생겼습니다.

망설여지는 말씀입니다마는....

진흙속의연꽃님이나 댓글을 다시는 분들 글을 보면 저같은 초보에게는 굉장한 깨달음을 가지신 것처럼 보여집니다. 알 듯 모를 듯한 용어에 막혀 한숨짓다가도, 승부가 날 듯 안나는 댓글 경합 속에 미묘한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따라오는 느낌은 불법을 알아갈수록 자만심만 늘고 남의 꼬투리나 잡고, 마치 스스로가 더 깊이 있는 앎을 깨우친 양 상대를 비아냥거리고... 불교 공부하면 이렇게 자신만의 지식으로 상대방을 재단하고 생각이 다르면 비비꼬는 습성이 커지는구나 싶습니다. 비꼬는 방법도 온갖 불교용어 내지 현학적 문구를 동원하여 도대체 뭔소린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내용을 들먹이며 상대를 깔아뭉게고는 자신은 "나 이만큼 안다"는 것을 드러내고, 또 일부는 스스로 대견해하며 자기만족에도 빠지고....나 역시 지금보다 더 이렇게 되겠구나 싶고.... 죄송하지만, 심지어 젊잔코 공부많이 하신 진흙속의연꽃님도 "안 그런 척 할 뿐"이라는 불필요한 망상까지 따라옵니다.

차라리 이렇게 믿고싶습니다... "이 모든 행위가 불교공부해서 이전보다 성숙한 모습이라고...."

이게 불교공부에 대한 회의가 따라오는 대목입니다. 불법을 몰랐다면 상대방의 생각이 틀린 점도 몰랐을 것이며 역시 비꼬는 마음 또한 생기지 않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차라리 공부하지 말아야 뭘 모르니 상대에게 상처주고 읽는사람 비위 상하는 표현도 적게할 것 아니겠습니까? 글도 자신의 생각만 드러낸다면 무난하겠으나, 토의하다보면 아집과 감정, 상대에 대한 인정요구, 결국 비난도 드러내겠지요. 거의 이렇게들 살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논란의 당사자들은 엄청난 공부를 하신 분들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스스로 자제하려는 모습들도 보이고는 있으니까요. 물론 감정적인 대립 부분이야 당사자들 스스로 해소해야 하는 것이니 누구도 간섭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진흙속의연꽃님께 이런 글을 올리게 된 동기는 "불교 공부"를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하나의 눈과 생각으로 돌아가지는 않기에 대립되는 상황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겠지요. 진흙속의연꽃님글을 바라보는 견해가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는 겁니다. 제가 뭘 알아서 옳다 그르다 판단한 것이 아니라, 오가는 대화를 보니 서로 반론을 제기하고있고, 그것은 누군가의 의견은 틀리다는 유추입니다. 가뜩이나 모르는데 무엇을 "바른가르침"이라 배워야할지. 제 소견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같은 '걸이'임에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양면성을 나타내니 정말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대립되는 의견이 모두 옳다해도 참이 성립하는 부처님 말씀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마져 듭니다.

일견 진흙속의연꽃파와 YBS파로 양분되어 의견을 나누시는 것 같은데, 혹시 진흙속의연꽃파들은 진흙속의연꽃님의 의견에 토를 달지만 않을 뿐 아닐까요? 워낙 공부많이하신 분들이고 또 나름의 깨우침이 있는 분들이시니, 일부 진흙속의연꽃님 의견과 다르거나 원불사측 견해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겠으나, 오히려 그런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지않음은, 침묵을 가장한 부정이고 굳이 밝히지않은 이유가 있지않나 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연꽃을 보려함이지 진흙을 보고싶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 깊은 공부로 깨달은 분들의 의견임에도 대립되는 의견이 있음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부정을 위한 부정이든 바른가르침을 위한 부정이든, 어느 한 쪽이 맞거나 틀리고, 혹은 둘다 맞거나 틀린 것이므로, 이래서는 갓 배우는 입장에서 바른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바른가르침" "바른가르침"을 부정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 같이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입장에서 보면 혼란만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조용히 불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바른 길을 인도하려면, 누군가가 정리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진흙속의연꽃님도 한번쯤은 느끼시지 않았을까요....

그 바른 길이 어느쪽인지 진흙속의연꽃님도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만약 진흙속의연꽃님이 이런 혼란도 상관없으며 글은 오직 쓸 뿐 이라는 입장이시라면 할 말 없습니다. 파워/인기/클릭회수 지향 블로거라면 이 글 자체가 죄송스럽기조차 합니다. 저도 이 분위기에 적응해서 비꼬는 풍월도 배워가며 공부하는 수 밖에 없겠지만 말입니다. 허나 자칭 타칭 공부하시며 전법 하시는 불자분이시라 믿습니다. 그래서 공적인 파워블로거이신 진흙속의연꽃님의 글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이므로, 진흙속의연꽃님의 주장은 펴시되, 반론이 발생하면, 고집하는 주장이 아닌 토론한 결과나 재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나름의" 바른가르침을 찾아 주신다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이 곳이 불교 공부에 도움이 되는 블로그라 믿습니다.

모든 질문이나 비판에 대하여 답한다는 것은 힘드시겠지만, 간간이 심각한 의견 대립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진흙속의연꽃님의 분명한 의견을 제시하여, 교통정리를 해 주신다면 부처님 말씀이 무엇이었든 이 블로그에서만큼은 혼란이 적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이 맞다면 직접 그 자리에서 증명을 하시고, 자신이 틀렸다면 쿨하게 인정을 하거나, 또한 모르면 모른다 하시면 후련하겠습니다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치더라도.... 그리고 글을 올리는 이유와 한계를 명확히 하고 그에 따른 논조로 쓰신다면, 여러 비판에도 당당할 수 있을 것이고요. 경전해석 공부야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이런 토론 과정과 모습에서도 큰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제 생각 일 뿐이나 선지자로서 "꽃처럼 말씀해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S법우님, http://blog.daum.net/bolee591/16155879 )

 

 

정성스럽게 작성된 장문의 글을 주신 법우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그리고 항상 지켜 보아주시고 성원하여 주심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블로그방문 연령별 분포

 

글을 주신 법우님은 학생이라 하였다. 일반학생이라면 20세대로 보인다. 이렇게 20세대가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우리나라 불자인구가 톱을 달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40 50 60 세대로서 나이든 시니어 계층이다. 그럼에도 주니어 계층이라 볼 수 있는 2030에서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을 갖게 만든다. 참고로 블로그를 찾아 주시는 연령별 분포는 다음과 같다.

 

 

 

 

 

 

 

최근 주별통계

 

 

최근 일주일 간 통계 자료이다. 방문자 분포도를 보면 20세대가 6%, 30세대가 9%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050에 비교하면 1/2내지 1/3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2030에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하여 크게 고무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불교의 미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법우님들의 사연을 들어 보면

 

2030에서 불교에 관심을 보여 주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불교라는 것이 나이 든 세대의 전유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경험상 나이든 세대들이 불교를 접하는 이유는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었기 때문이다.

 

10년전인 2004년 정식으로 불교에 입문한 이래 법우님들의 사연을 들어 보니  한 가지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IMF 국가 부도 사태로 인하여 온 가족이 거리에 나 앉은 것으로 인해 불교에 입문한 법우님, 아주 잘 아는 사람에게 거액을 맡겼다고 고스란히 날리게 되어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하게 된 법우님이 기억난다. 자녀의 수능시험을 앞두고 아쉬운 마음에 불교대학에 다니게 되었다는 법우님도 있었다. 이렇게 갖가지 이유와 사연으로 불교와 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2030의 경우 불교와 인연을 맺는 것은 좀 더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라 보여진다. 인생의 굴곡이나 아쉬워서 인연을 맺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더 알고 싶어서라고 보여 진다. 주로 배우는 학생이라 본다. 그래서 블로그를 찾는 것인지 모른다.

 

학생들에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고자

 

블로그에는 불교와 관련 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어떤 법우님은 검색창에 불교관련 키워드를 넣으면 다음은 물론 네이버 등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방문하였을 것이라 본다.

 

방문자 중에는 표현은 하지 않지만 꾸준히 보고 있는 사람도 상당수 달할 것이다. 실제로 알고 지내는 노보살님의 경우 블로그에 올라 온 내용을 빠짐 없이 보고 있다고 하였다. 다만 글을 남기지 않고 있을 뿐 이렇게 지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있다는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보고 있는 사람중에는 스님도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확인한 것인데 어느 비구니승가대학의 학인 스님도 자주 본다고 하였다. 이렇게 한 번 올려진 글은 시간과 공간을 띄어 넘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학기중에 20의 비율이 급증한다. 그래서 학기 중에는 10%에 육박하기도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20의 상당수가 학생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지켜 보고 있는 사람중에는 2030도 상당수 일 것이다.

 

2030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낀다. 특히 진리를 탐구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에 더욱 더 신중하게 글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가급적 경전을 인용하고 주석을 참고 하여 주관적인 내용을 최소화하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래서 경전의 근거를 밝히고 가급적 빠알리 원문을 싣는다. .한번 올린 글이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투구 양상에 대하여

 

S법우님은 장문의 글을 통하여 현재 블로그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솔직하게 비판 하였다. 모두 구구절절 새겨 들어야 할 내용이다. 먼저 댓글공방에 따른 이전투구양상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 하였다.

 

법우님은 글에서 댓글 읽는 재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글에 대하여 무례하고 자만심에 가득찬 것이라 하였다. 남의 글을 꼬투리를 잡고, 비야냥 대는 등의 행위가 과연 불교인으로서 할 짓인가에 대한 의문이라는 것이다.

 

S법우님은 상대방을 깔아 뭉게는 듯한 행위에 대하여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불교에 대하여 잘 알고 많이 공부하였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이전투구 양상에 대하여 블로그 주인장의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그래서 안 그런 척 할 뿐이라 하여 방조하고 있는 듯 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침묵을 가장한 부정이라 하면서  굳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이런 이전투구양상에 블로그 주인장도 분명히 책임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피하는 것이 상책

 

이런 지적에 대하여 겸허히 수용한다. 그러나 말려 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실 본문을 왜곡하여 불선심을 조장하는 글에 일일이 대응할 시간도 없다. 설령 대응한다고 해도 S법우님의 글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에 대응하면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다. 그래서 결국 진흙탕에서 싸움 하는 똑 같은 개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Dhp227)

 

 

법구경 227번 게송 중에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불교에 대하여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마치 입에 도끼를 문것처럼비난을 일삼을 때 일일이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노의 경(M2)’에서도 피함으로서 번뇌를 없앨 수 있다고 하였는데 보기 싫은 것은 안보면 그만이다.

 

어떻게 나이는 쳐 드셨어요?”

 

S법우님은 학생신분이다. 그래서 마치 입에 도끼를 문듯 서로 찍으려는 악의에 가득찬 글을 보면 배우는 학생신분의 입장에서 혼란만 가중 된다고 하였다. 안볼것을 보는 것 같고 못볼꼴 다 보고 있다는뜻이다. 그것도 나이가 든 40 50 60 시니어 세대의 교리왜곡, 음해, 욕설이 난무하는 이전투구를 보면서 2030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030이 우려 하고 있다. 이는 40 50 60 시니어 세대의 책임이 크다. 나이를 먹었으면 그에 걸맞게 모범을 보여야 하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시니어 세대의 이전투구에 대하여 2030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어떻게 나이는 쳐 드셨어요?”라고 말하지 않을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부처님 가르침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나이와 무관하다. 절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불교에 대하여 안다고 볼 수 없다. 비록 나이가 어리다 할지라도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 들여 실천하면 누구나 장로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법구경 게송에서도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 단지 나이가 들었으나 헛되이 늙은 자라 불린다. (Na tena thero so hoti yenassa palita siro paripakko vayo tassa moghajiṇṇo ti vuccati. Dhp260)”라 하였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나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260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거룩한 경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고 “한 장로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들은 보지 못했다고?

 

“세존이시여. 한 사미를 보았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는 사미가 아니라 장로이다.

 

“세존이시여, 지나치게 작았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이가 들었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고 장로의 자리에 앉았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는다. 진리를 꿰뚫고 많은 사람에 대하여 불살생을 확립하면, 그를 장로라 한다.

 

(법구경 Dhp260  인연담, 전재성님역)

 

 

나 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여 그가 나보다 더 존경받아야 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다만 연장자로서 예우는 갖추어 주어야 하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말한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상대방에 대하여 모두 틀렸다라든가 엉터리이다라고 말한 다면 단지 나이만 먹은 늙은이의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고 할지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장로라 불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이가 나 보다 비록 어리더라도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 하고 있다면 약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

 

S법우님은 블로그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 양상에 대하여 강하게 책임을 묻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방조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블로그 조회수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닌지 의문하고 있고, 오직 쓸뿐!”이라는 명제 때문에 방관하는 것이 아닌지 묻고 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블로그가 만들어진지 십년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도 많이 변하였다. 처음 블로그를 만들었을 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십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 블로그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글쓰기에 대하여 어떤 이는 격려한다. 반면 어떤 이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비방하기에 바쁘다. 특히 댓글을 통하여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공방전은 살벌하기까지만 하다.

 

동창이나 알고 지내는 법우님도 종종 블로그를 본다고 한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댓글공방이 너무 치열하여 마치 전쟁터 같은 분위기라 하였다. 그래서 알고 지내는 사람을 만나면 가급적 댓글달기를 자제하라고 말한다. 혹시라도 말려 들어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댓글을 폐쇄하라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본문 글만 보고자 한다. 그러나 댓글이 있음으로 해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악의에 가득찬 댓글을 보면 불선심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댓글을 폐쇄하라는 뜻으로 말한다. 하지만 미디어다음에서 제공하는 블로그서비스에서 댓글을 폐쇄 하는 기능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왜곡된 주장이나 악의에 가득찬 쓰레기 같은 말을 방치 할 수는 없다. “다 틀렸다라거나 모두 엉터리다등의 표현을 예사로 하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표현을 밥먹듯이 하는 자의 불순한 의도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불순한 의도는 다름 아닌 블로그폐쇄이다. 불로그에 글을 쓰지 못하게 하거나 비공개로 돌리게 하거나 아예 블로그 문을 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갖은 중상모략과 자극적인 언어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금칙어이다. 다음블로그에 금칙어 기능이 있는 엉터리, 헛소리 등의 부정적인 용어와 눈쌀을 찌뿌리게 하는 욕설에 대하여 금칙어를 설정한 것이다.  

 

2030에서 한국불교의 희망을

 

S법우님의 긴 글을 감사히 읽었다. 이렇게 장문의 글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일부로 시간을 내서 글을 주신 것은 보다보다 참지 못해서라 본다. 그렇게 된 것에 있어서 블로그 주인장의 책임이 크다.

 

비록 십년전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블로그로 출발하였지만 지금은 영향력 있다 하여 누군가는  파워(Power)’자를 붙여 주고 있다. 그러나 한번도 파워블로거라 생각한 적이 없다. 다만 글이 고프기 때문에오늘도 내일도 썼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직접 작성한 글이 2500개에 이르렀고 검색하면 대부분 걸리게 되었다. 이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고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오늘도 내일도 썼을 뿐인데 누군가 파워자를 붙여 주고 또 누군가는 검색창으로 해서 들어 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고 쓰는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 경전을 인용하고 후학들을 위하여 근거로 남겨 놓는 것이다. 이렇게 2030이 지켜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보고 동시에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본다.

 

 

 

 

2013-03-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