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노년출가의 어려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17. 11:54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노년출가의 어려움

 

 

 

릴레이 하듯 피는 꽃

 

꽃들이 릴레이 하며 피듯이 한다. 모란과 작약이 대표적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서로 구분이 되지 않는 듯하지만 잘 보면 다르다.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다. 모란의 경우 사월말에 피고, 작약의 경우 오월 초순이나 중순에 피기 때문이다. 대체로 모란이 지고 난 후 이어서 작약이 핀다. 그래서 비슷하게 생긴 꽃이 마치 릴레이 하듯 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모란 (4 26일 촬영)

 

 

 

 

 

 

 

 

 

 

 

 

 

 

 

 

 

작약(5 10일 촬영)

 

 

 

꽃잎이 넙적한 것은 보기가 좋다. 특히 빨강색 등 컬러풀한 경우 사람들의 눈길을 더 끈다. 그러나 꽃잎이 질 때 되면 매우 지저분해 보인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흙이 손톱만큼만 있어도

 

꽃잎이 큰 경우 보살펴 주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다. 스스로 노지에서 자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작은 꽃잎이 있다. 대게 하얗거나 노란색깔이다. 대부분 이름도 알 수 없는 야생화나 잡초화이다. 특히 잡초는 어디서든지 자란다. 심지어 흙이 손톱만큼만 있어도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꽃을 피워 낸다.

 

 

 

 

 

잡초에서 피어난 작고 갸날픈 노란꽃을 보았을 때 감동한다. 더구나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에서 피어난 꽃을 보면 경이로움을 느낀다. 온실이나 화단에서 넓은 꽃잎을 가진 꽃 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폭발하듯 성장하는 새

 

봄이 되면 식물들은 앞다투어 꽃을 피워 낸다. 아마 이것도 생존전략일 것이다. 시기를 놓치면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새 역시 짧은 기간내에 알을 낳고 부화를 시켜 새끼를 키운다.

 

새에 다큐멘터리 프로를 보면 늘 감동받는다. 봄이 되어 그 짧은 기간내에 수태수태부터 탄생, 그리고 양육까지 불과 두세달만에 모두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새들은 봄이 되면 짝을 찾는다. 그리고 교미를 하고 알을 낳는다. 알을 품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온다. 새끼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입을 찢어질 듯 크게 벌려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러면 어미새는 부지런히 먹이를 잡아 나른다.

 

그런데 새끼새가 자라는 속도를 보면 마치 폭발하는 듯 하다. 점차적으로 자란다기 보다 마치 폭발하듯이 커진다.  요즘말로 폭풍성장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불과 두달여 만에 폭풍성장한 새끼새는 이제 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창공을 힘차게 날아 올라 둥지를 떠난다.

 

 

 

 

Bird

 

 

짧은 시간에 해야 할 것들

 

봄이 되면 식물이나 새들이나 자신의 할 바를 다한다. 식물은 짧은 기간에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새들은 알을 낳고 부화시켜 열심히 길러서 마침내 하늘을 날게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매우 짧은 기간에 모두 다 이루어진다. 따스한 봄날 세 달 안에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부를 할 때 공부를 해야 하는 등 모든 것은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돈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을 때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거의 대부분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하여 바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일과중의 대부분 시간을 직장이나 일터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터에서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을 보내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정년이 되어 직장을 떠나거나 도중에 퇴출 되는 케이스가 이에 해당된다.

 

정년이 되거나 퇴출 되어 집에 있게 되었을 때 갑자기 허무한 생각이 들 것이다. 그 동안 시간과 정력을 바쳐 일을 해 왔지만 남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이 들 때이다. 한평생 돈을 벌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 돈이라는 것이 무상한 것이어서 조금만 지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계발을 위하여 노력한 것도 아니라면 더욱 더 늙어지는 것이 서럽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서 노년이 되어 돈도 없고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을 때 마치 날개 부러진 왜가리와 같은 신세가 된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Acaritvā brahmacariya

aladdhā yobbane dhana

Jiṇṇakoñ-cā va jhāyanti

khīamacche va pallale.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Dhp155)

 

 

Acaritvā brahmacariya          

aladdhā yobbane dhana          

senti cāpārikhīnāva             

purāāni anutthuna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

 

 

노인의 비애에 대한 게송이라 볼 수 있다.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하였다는 것은 되는 대로살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탐욕으로 성냄으로 어리석으로 막행막식하며 산 것이다. 이렇게 탐진치로 살다보니 모아 놓은 재산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이다. 이런 늙은이에 대하여 늙은 백로쏘아져 버려진 화살로 묘사 하고 있다. 그래서 오로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에 대한 게송이라 볼 수 있다.

 

노년출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탐진치로 막행막식하며 살다 보면 날개 부러진 늙은 백로나 쏘아져 버려진 화살 같은 신세가 되기 쉽다. 그래서 공부할 때 공부 해야 하고 돈을 벌 수 있을 때 벌어 놓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하고 돈을 벌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특히 노년에 출가하여 도와 과를 이루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노년출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Pañca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dullabho buḍḍhapabbajito. Katamehi pañcahi?

Dullabho bhikkhave buḍḍhapabbajito suvaco, dullabho suggahītaggāhī, dullabho padakkhiaggāhī, dullabho dhammakathiko, dullabho vinayadharo.

Imehi kho bhikkhave pañcahi dhammehi samannāgato dullabho buḍḍhapabbajito'ti.

 

 

[세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성취한다는 것은 노년의 출가자가 얻기 어렵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가지 원리를 성취한다는 것은 노년의 출가자자 얻기 어렵다.

 

(Dutiyabuḍḍhapabbajita sutta-노년의 출가의 어려움에 대한 경2, 앙굿따라니까야 A5.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노년에 출가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다. 이를 다섯 가지로 말씀 하셨다.

 

1)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고, 2)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고, 3)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고, 4) 설법을 하기 어렵고, 5) 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노년출가가 어려운 여덟 가지 이유

 

그런데 노년의 출가의 어려움에 대한 경1 (Pahamabuḍḍhapabbajitasutta, A5.59)에서는 노년에 출가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로서 역시 다섯 가지로 설명하였다. 그것은 1) 총명을 얻기 어렵고, 2) 위의를 갖추기 어렵고, 3) 박학하기 어렵고, 4) 설법을 하기 어렵고, 5) 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2번 경과 중복되는 사항은 4번항의 설법과 5번 항의 계율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1번 경과 2번 경에서 언급된 노년 출가에 대한 어려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총명을 얻기 어렵다

2) 위의를 갖추기 어렵다.

3) 박학하기 어렵다.

4)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5)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6)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7) 설법을 하기 어렵다.

8) 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

 

 

이렇게 노년 출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여덟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탐진치로 오염될 대로 오염되어 막행막식하며 살다가 늙어 버린 자가 마치 날개 꺽인 늙은 백로신세처럼, 또는 이미 쏘아져 버려진 화살과 같은 신세가 되었을 때, 새롭게 발심을 하여 출가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노년에 출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면 출가라는 것은 나이가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그렇다고 하여 너무 이른 나이에 출가하면 어떻게 될까?

 

너무 이른 나이에 출가하면

 

우리나라에서 동진출가라는 것이 있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들어 십세 전후로 출가 하는 케이스를 말한다. 과연 이런 나이에 출가가 가능한 것일까?

 

십세를 전후하여 출가하였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출가하였다기 보다 차라리 맡겨 졌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 하다. 삶이 힘들어 맡긴 경우도 있고 또 다른 이유로 맡겨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스스로 출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맡겨져 출가한 경우 대부분 청소년기가 되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 간다고 한다. 스스로 본인의 의지에 의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절에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는 일들을 이것 저것 하게 된다고 한다. 종종 스님들이 기행을 하고 막행막식을 하는 등 일탈행위를 하는 것은 세상것들에 대하여 호기심이 많아서 일 것이다.

 

공포의 법랍이야기

 

동진출가하면 법랍이 높아 진다. 이에 대하여 주경스님은 공포의 법랍이라 하였다. 주경스님의 공포의 법랍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수덕사에서는 일명공포의 법랍(스님이 된 후부터 세는 나이)’이라는 말이 있다. 워낙에 동진출가자(어려서 출가하는 스님)가 많아 스님들 나이에 비해 법랍이 많아서 생긴 말이다.

 

보통은 출가가 빨라도 고등학교를 마치는 20세 전후인데, 동진스님들의 경우 대개 13세에 계를 받는다. 이 동진출가자를 일명 올깨끼라고 한다.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에 나오듯이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동진스님들은 뼛속부터 온전하게 승려의 생각과 모습, 행동을 갖추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주경 스님/서산 부석사 주지, 나의 도반 이야기,  불광에 연재된 글)

 

 

공포의 법랍은 동진스님을 두고 지칭하는 말이다. 아주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 왔을 경우 13세에 계를 받는다고 한다. 13세라면 초등학교 6학년에 해당된다. 그 어린 나이에 사미계를 받아 스님이 된 것이다. 이렇게 13세에 계를 받으면 나이가 33세가 되면 법랍이 20년이 된다. 비구계를 받고 20년이 지나면 대덕이라 하는데 사미계를 받고 20년이 지났다면 스님중에서도 고참에 해당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출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세 이후에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조계종 법규를 보면 출가자격에 대하여 15세 이상으로 고등학교 이상 학력이라고 규정 되어 있지만 대체로 20세 이상 출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런 구분이 없어서 절에 맡겨진 아이들이 13세가 되면 사미계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더 이상 13세에 수계를 받는 경우는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13세에 수계를 하면 나이가 들수록 법랍이 높아진다. 그래서 대학을 마치고 군대를 갖다 와서 출가한 스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13세에 수계한 같은 나이의 스님을 바라 보았을 때 차이가 엄청 나게 벌어진다. 그래서 공포의 법랍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출가를 해야 할 마땅한 이유는?

 

노년출가가 어렵다고 한다. 이 말은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출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출가하는가? 출가를 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랏타빨라경을 들 수 있다.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보면 왜 출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랏타빨라경에서 출가이유에 대한 게송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도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 얻어맞아 누웠으나

현명한 자는 죽음과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재산보다 탁월하고

지혜로 궁극적인 목표를 이룹니다.

 

생에서 생으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가니

다른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윤회합니다.

 

적은 지혜로써 그것을 신뢰하는 자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갑니다.

 

마치 도둑이 강도에 사로잡혀

악한 행위에 괴로워하듯이

사람들은 죽은 후에 다음 세상에서

악한 행위로 괴로워합니다.

 

감미롭고 즐거운 다양한 감각적 쾌락이

여러 가지 형색으로 마음을 교란시키니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

 

 (랏타빨라 경-Raṭṭhapalasutta, 맛지마니까야 M82,전재성님역)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보면 명확하다. 그것은 윤회의 종식을 위해서이다. 따라서 다시는 모태에 들지 않기 위하여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 (M82)”라 하였다. 이렇게 뚜렷한 출가이유가 있었을 때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를 소멸하는 것 외에 달리 집중할 것이 없다.

 

눈물없이 읽어 나갈 수 없는 경

 

또 하나 출가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걸식경이다.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눈물없이 읽어 나갈 수 없는 경이라 설명되어 있다. 걸식경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이 세상에는 ‘그대는 바루나 들고 다녀라!’라고 하는 저주가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Piṇḍolya sutta-걸식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0, 전재성님역)

 

 

걸식경을 보면 출가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바루를 들고 마치 걸인처럼 음식을 얻어 먹는 행위에 대하여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에서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끝을 뜻하는 안땅(anta)이라는 말은 ‘최후의, 가장 낮은’ 또는 ‘하찮은, 형편없는, 나쁜’의 동의어라 한다. 그리고 “그대는 바루나 들고 다녀라!”라는 말은 ‘저주’라 하는데, 이는 세상사람들이 분노할 때 하는 말이라 한다. 그래서 “중옷이나 입고, 그릇을 들고 밥이나 빌러 돌아다녀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왜 바루를 들고 빌어 먹고 사는 것일까?

 

그렇다면 출가하여 왜 바루를 들고 빌어 먹고 사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Piṇḍolya sutta-걸식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그대는 바루나 들고 다녀라!”라는 말은 저주의 말이라 하였다. 이런 말은 세상사람들이 분노할 때 하는 말이라 한다. 우리말에 에이, 빌어 먹을 놈!”하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출가자자들은 왜 빌어먹는 일을 자처 하는 것일 것?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명쾌하게 말씀 하셨다. 괴로움의 종식을 위하여 빌어 먹는 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종식이다. 랏타빨라경에서처럼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고 출가를 한 것이다.

 

TV에서 미남스님이 출연하였는데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출가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한다. 언젠가 TV에서 미남스님이 출연하였다. 얼굴도 잘생기고 더구나 학력도 좋고 더구나 박사스님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두루갖춘 스님에 대하여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스님으로 살기에 아깝다는 것이다. 주로 일반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또 한 부류는 스님생활을 그만 둘까봐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주로 불자들이다. 이렇게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젊은 나이에 스님으로 살아 가는 것이 아깝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인 것이다.

 

청춘을 마음껏 즐기라고

 

그런데 경에서는 젊은 빅쿠에 대하여 유혹하는 장면도 있다. 악마가 열심히 수행중인 젊은 수행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daharā bhavanto pabbajitā susukālakesā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ā pahamena vayasā anikīitāvino1 kāmesu, bhuñjantu bhonto2 mānusake kāme, mā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itthāti.

 

[빠삐만]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 전재성님역)

 

 

악마 빠삐만은 젊은 수행자에게 청춘을 마음껏 즐기라고 말한다. 마치 우리나라노래 민요 중에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 노나니와 같은 말이다. 이처럼 악마는 열심히 수행중인 자에게 접근하여 쾌락을 즐기라고 말한다.

 

이런 장면은 초기경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악마가 빅쿠니에게 접근하여 그대는 젊고 아름다우며/ 나 또한 젋은 청년이니/ 사랑스런 이여, 오라. / 다섯 악기로 즐겨보세.(S5.4)”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출가자를 유혹하여 이 순간에 젊을 즐기자고 한다. 이런 말을 바꾸어 말하면 수행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고 나중에 늙어서 출가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자는 것이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악마의 유혹에 젊은  수행자는 무엇이라 답하였을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Na kho maya brāhmaa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āma, kālikañca kho maya brāhmaa hitvā sandiṭṭhika anudhāvāma. Kālikā hi brāhmaa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ū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Sandiṭṭhiko aya dhamm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3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ti.

eva vutte māro pāpimā sīsa okampetvā jivha nillāletvā tivisākha nalāena lāika uṭṭhāpetvā daṇḍamolubbha pakkāmi.

 

 

[수행승]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우리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1, 전재성님역)

 

 

콜록콜록 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성직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라에게 수행승이 한 말이다. 수행승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Na kho maya brāhmaa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āma)”라 하였다. 이말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에 대한 답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알쏭달쏭한 말은 무슨 뜻일까?  

 

빅쿠보디의 설명을 보면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사밋디경에도 나온다. 사밋디경에서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 (Tasmā abhutvā bhikkhāmi mā ma kālo upaccagāti, S1.20)”라는 구절이다. 

 

두 게송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것은 시간(kala)’이다. 그래서 시절이 지나치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는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미를 든다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음을 말한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과 같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In padas ab of his reply Samiddhi speaks with reference to the time of death (maranakiila), which is hidden (channa) in that one never knows when it will arrive. In pada d he refers to the time for practising the duty of an ascetic (samanadhammakaranakrfla), as it is difficult for an old person to learn the Dhamma, practise austerities, dwell in the forest, and develop the meditative attainments.

(Abhutvā bhikkhasi bhikkhu na hi bhutvāna bhikkhasi 에 대한 빅쿠보디 각주)

 

AB구절에서 사밋디는 죽음의 시간과 관련하여 그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도 알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C구절에서 하늘사람이 금욕수행에 대하여 언급하자 사밋디는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담마를 배우는 것도 어렵고, 금욕수행도 어렵고, 숲에서 머무는 것도 어렵고 향상으로 이끄는 명상을 계발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빅쿠보디각주 번역)

 

 

게송에서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Don't let the time pass me by!)"라 한 것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죽음의 시간과 관련하여 그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시간에 대하여 죽음과 연결하여 설명한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비록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매일 매순간 일어나고 있다.

 

멀쩡하던 체육관 지붕이 갑자기 무너져 신입생들이 많이 죽었다. 또 최근에는 여객선이 전복 되어 꽃다운 고등학생들 수백명이 죽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뉴스에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세월호 선내에서는 기다려라!”라고 방송하였다. 그 결과 수 많은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 것처럼 청춘도 젊음도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공부해야 할 때 공부를 하지 않으면 달리 공부할 시간이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수행을 해야 할 때 수행을 하지 않으면 달리 수행시간이 없다.

 

지금 젊다고 하여 마음껏 쾌락을 즐기고 공부나 수행은 늙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의 시간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 따라서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감각적 쾌락에 얽매이지 않고 수행을 하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젊은 수행자는 우리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kho maya brāhmaa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āma, S4.2)”라고 하였을 것이다.

 

 

 

2014-05-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