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공업(共業)론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세상을 바라 보는 두 가지 눈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15. 09:40

 

 

공업(共業)론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세상을 바라 보는 두 가지 눈

 

 

 

의식개혁과 제도개혁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갖가지 해법이 제시되고 있다. 방송과 신문, 그리고 인터넷 등에서는 여러가지 사고재발방지대책이 제시되고 있는데 크게 요약하면 의식개혁제도개혁에 초점이 모아진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선장과 승무원들, 그리고 오로지 이익추구에만 눈이 먼 회사를 비난하며 의식개혁을 촉구한다. 또 한편으로 이번 기회에 국가개조를 해야 한다며 국가안전처신설을 추진하여 제도개혁을 하고자 한다. 이렇게 대형사고가 터질 때 마다 항상 이야기 되는 것은 의식개혁과 제도개혁이다.

 

공업이 어떻고 운운하던 분들도…”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불교계에서는 어떤 해법을 제시하였을까? 사고가 일어난지 한달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 미디어붓다에 이학종기자의 칼럼이 실렸다. 그 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계는 이번 참사에 대해 안타까움과 애도를 표명하고 있지만, 어떻게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교학적 규명이나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승가 교육의 방향을 책임지는 교수아사리들 모임에서조차 ‘기도 밖에 달리 할 방법이 없다’는 발언이 맥없이 터져 나올 뿐이다. 연기적 구조가 어떻고, 공업이 어떻고 운운하던 분들도 이번 세월호 참사에는 웬일인지 입을 닫고 있다.

 

([이학종 칼럼]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게 드리는 , 미디어붓다 2014-05-13)

      

 

이학종기자는 불교계의 해법제시에 대하여 실망을 표시하고 있다. “기도 밖에 달리 할 방법이 업다는 식의 조계종 책임자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러면서 공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제까지 공업 운운하던 사람들이 왜 이번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지에 대한 질타이다.

 

공업(共業)이란 무엇일까?

 

공업이란 무엇일까? 공업은 한자어로 共業으로 표시된다. 문자 그대로 풀이 하면 함께 짓는 업이 될 것이다. 공업에 대한 네이버 인터넷사전을 보면 “<불교> 저마다 공동으로 선악의 업을 짓고 공동으로 고락(苦樂)의 인과응보를 받는 일라 되어 있다. 공업은 불교용어로서 공동으로 업을 짓고 또한 공동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라 한다.

 

공업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보면 공동으로 짓는 업이 있음에 틀림 없다. 업이라는 것이 개인이 짓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가족이나 단체, 사회, 국가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업을 지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공업에 대하여 가장 많이 거론 한 사람이 있다. 동국대 박경준교수이다.

 

박경준교수의 공업론

 

박경준교수의 공업론에 대하여 많이 들어 보았다. 특히 불교방송에서 공업론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다. 또 불교평론과 같은 매체에다 논문을 싣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종 기고문을 통하여 공업에 대하여 말하였다. 검색하여 보니 다음과 같은 공업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부처출현에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란?(2012-12-30)’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 있는 내용이다.

 

 

아비달마에 의하면, 중생의 행위에 의해 생긴 업력은 두 종류의 과보를 발생시킨다. 하나는 정보(正報)로서 중생을 발생시키고, 다른 하나는 의보(依報)로서 국토를 발생시킨다.

 

결국 유정세간은 유정의 업력에 의해 초래된 정보의 세간이며, 기세간 역시 유정의 업력에 의해 초래되는 의보의 세간인 것이다. 또한 유정 각자의 차별적인 운명과 현실(유정세간)은 불공업(不共業)에 의해서 결정되고, 유정이 함께 공유하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기세간)은 공업(共業)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아비달마는 설명한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유마경〉 ‘불국품’에서는 정보인 내 마음이 청정해짐으로써 의보인 국토와 환경이 청정해진다고 설한다.

 

(불교는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박경준교수, 2005)

 

 

블로그내 검색을 해 보니 2005년도에 올린 글이다. 아마 신문사이트에 실려 있는 기사를 올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어느 사이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제목으로 검색해 보아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박경준교수 글에 따르면 공업에 대하여 아비달마에 기반을 하여 설명 하고 있다.아비달마에서는 개인적인 업 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만든 공업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은 공업으로 결정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자연을 홰손하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한다. 도시가 확장 됨에 따라 자연이 파괴되고 또 자동차가 많아 질수록 오존층이 파괴 될 것이다. 그에 따라 지구온난화 같은 기상이변을 초래한다면 이는 공업의 결과로 본다는 것이다. 자연재해나 사람으로 인한 인재도 공업의 결과로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 된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하여 재난 또는 재앙이라 한다. 이런 재난이나 재앙은 주로 자연적 현상과 사회적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지진, 쓰나미, 태풍과 같은 것이 자연적 재앙이라면,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비행기나 기차, 선박 등에서 일어난 사고는 인간에 의해서 초래된 재난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적 재난에 대하여 천재(天災)’라 하고, 인간에 의한 재난을 인재(人災)’라 한다. 이렇게 천재와 인재로 인한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 하였을 때 이에 대하여 공업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업이 우주적 에너지라고

 

아비달마에서는 세간과 기세간으로 나누어 불공업과 공업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세간은 무엇이고 기세간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아비달마연구의 권위자인 권오민교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된다.

 

 

유정은 각자가 지은 업에 따라 3 5취를 윤회하지만, 그들의 삶의 토대가 되는 세계(이를 器世間이라고 한다)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유정의 업에는 크게 유정 각각의 개별적인 업(別業)과 그들 공동의 업(共業)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가 유정 각자의 삶을 결정짓는 업이라면, 후자는 객관의 세계를 형성하는 업으로 말하자면 우주적 에네르기라고 할 수 있다.

(아비달마 불교 (2) / 권오민교수)

 

 

권오민교수에 따르면 삶의 토대가 되는 세계를 기세간(器世間)’이라 하였다. 그런데 기세간이 만들어지는 원리에 대하여 객관의 세계를 형성하는 업이라 하였다. 객관적인 세계라는 것이 개별적인 업이 함께 모여서 짓는 업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공업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하여 기세간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공업에 대하여 우주적 에너지’와 같은 것이라고 알기 쉽게 설명 하였다. 

 

유정중생들의 삶의 토대가 되는 곳이 기세간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런 기세간은 유정중생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인가?

 

기세간(器世間)에 대한 설명을 보면

 

권오민교수의 글에 따르면 기세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구사론에 실려 있다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아가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세계가 각기 일천 개가 있는 것을 일 소천세계(小天世界) 하고, 천 개의 소천세계를 일 중천세계(中天世界)라고 하며, 천 개의 중천세계를 일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 우주에는 10억 개의 이 같은 수미산의 세계가 있으며, 1대겁에 걸쳐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한다.

 

(아비달마 불교 (2) / 권오민교수)

 

 

 

 

universe-outer-space

 

 

 

이것이 아비달마불교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우주론이라 볼 수 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여 일소천세계가 있고 또 천개의 세계가 있어서 중천세계라 하고, 또 천개의 중천세계가 있어서 대천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금강경에서 그렇게 많은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에 쓴다면 그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以用布施, 得福多不?)”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삼천대천세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권오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삼천대천세계를 숫자로 환산하면 무려 10억개에 달하는 수미산과 같은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아비달마불교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 스케일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10억개나 되는 수미산과 같은 세계에 사는 중생들은 마치 갠지스강의 모래 보다 더 적고, 손톱끝에 있는 티끌 보다 더 미미한 존재이다. 그렇게 미미한 존재에게서 일어나는 고통은 삼천대천세계와 비교한다면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정병조교수는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서 우주와 비교하여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한존재에게서 발생한 괴로움은 삼천대천세계와 비교하면 극히 미미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공업이라는 말의 근거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기세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비달마불교에서는 공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런데 공업이라는 말은 대승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화엄경 여래수량품에 다음과 같은 공업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불자들이여, 비유를 들자면 삼천대천세계가 한 가지 인연이나 한 가지 사실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써 이루어진다. 이른바 큰 구름을 일으켜 큰 비를 내리고 네 가지 풍륜이 서로 지속하여 의지가 된다.

 

네가지란, 하나는 능히 지님[能持]이니 큰 물을 지니기 때문이며, 둘은 능히 소멸함[能消]이니 큰 물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며, 셋은 건립함이니 모든 처소를 건립하기 때문이며, 넷은 장엄함이니 장엄하여 퍼뜨림이 다 교묘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마땅한 대로 받아서 쓰게 한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으로 삼천대천세계가 이루어지는데 법의 성질이 으레 그런 것이고, 내는 이도 없고 짓는 이도 없고 아는 이도 없고 이루어지는 것도 없지만 저 세계가 성취된다.

 

(화엄경, 여래수량품, 신역화엄경-동국역경원, 법정스님역)

 

 

화엄경에 따르면 중생들의 공업이라는 말이 나온다. 초기경전에서 공업이라는 말을 볼 수 없지만 화엄경에서 공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래서 박경준교수가 공업론을 이야기할 때 이 화엄경의 구절을 근거로 하고 있다.

 

니까야에도 공업이라는 말이 있을까?

 

초기불교 경전에서 기세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존재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보이긴 하다. 디가니까야의 브라흐마잘라경(하느님의 그믈의 경, D1)’아간냐경(세계의 기원의 경, D27)’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우주론에 대하여 설명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여 삿된 견해가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 브라흐마잘라경(D1)’이고, 어떻게 하여 사성계급이 생겨 났는지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 아간냐경(D27)’이다.

 

부처님이 세상의 발생에 대하여 설명하였다고 하여 우주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중생들의 삶의 토대가 되는 세계라는 뜻인 기세간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또 불공업과 공업이라는 말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눈이 있는데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눈이 있다. 하나는 세상이 있어서 그 세상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내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이에 대하여 나약한 지성 이어령(李御寧)(2010-11-1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세상을 보는 첫 번째 방식은 세상속의 나이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세상이 있었고, 내가 죽어도 세상은 존속할 것이다. 이런 세상보기 방식에 따르면 나는 내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 의해서 태어난 존재이고, 나는 이 세상의 후차적인 존재 즉, ‘종속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으로 이 세상을 넘어 우주전체로 밀고 나가면 우주를 만든 ‘신’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존재론이다. 이처럼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고 보았을 때 나를 존재하게 만든 하나의 원인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상정된 창조주 또는 존재의 근원을 하나의 시발점 내지 원인이라 생각하여 우리자신을 하나의 객체로 보고 , 구제 받아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날 유일신교 종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세상을 보는 두 번째 방식은 내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세계관을 가지만 창조주가 주체가 되고 내가 객체가 되는 세계관을 받아 들일 수 없다. 이미 세상이 있어서 그 세상 속의 일원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연기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가능하다.  이렇게 내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바라 보는 방식이 불교적 세계관이고 불교적 지혜라 볼 수 있다.

 

발생원리에 대하여 접촉으로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내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다. 세상의 발생원리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Lokasamudayasutta-세상의 생겨남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10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상의 발생원리에 대하여 접촉으로 보았다. 시각과 형상과 시각의식 이렇게 세 가지가 화합(삼사화합)하여 세상이 발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청각이나 후각, 미각, 촉각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식론이다. 이런 인식론은 철저하게 연기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접촉에 따라 조건발생적 연기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

 

인식론에 따르면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 된다. 그래서 각자의 세상이 있게 되어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세상이 있고 개()는 개로서의 세상이 있게 된다. 비록 사람과 개가 한 공간에 있을지라도 인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인식하는 세상도 다르다. 따라서 존재마다 각자 인식하는 세상이 다른 것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차이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세상이 있어서 내가 있다고 보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내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차이라 볼 수 있다.

 

존재론은 무한소급하다 보면 존재의 근원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을 창조한 존재의 근원 또는 창조주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창조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종말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존재론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면 존재의 근원을 찾을 수밖에 없고 존재의 근원 또는 창조주로부터 구원을 받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유일신교 종교가 대부분 이와 같은 존재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아비달마불교나 대승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세간과 기세간으로 나누고, 또 불공업과 공업으로 구분한다면 이는 존재론적 사고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존재론적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지 않았다. 초기경에서 세상의 발생의 원리에 대하여 알 수 있듯이 접촉에 따라 세상이 발생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접촉에 따라 세상이 발생한다면 괴로움 역시 접촉에 따라 발생한다. 이렇게 모든 현상은 접촉에 따라 발생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고 동시에 인식론이다. 불교가 존재론이 아니고 인식론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공업(共業)론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이학종기자는 칼럼에서 공업이 어떻고 운운하던 분들도 이번 세월호 참사에는 웬일인지 입을 닫고 있다라고 비판하였다. 세간과 기세간으로 나누고, 또 불공업과 공업으로 나누어 설명하던 사람들이 이번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한마디도 못하고 있음을 비판 한 것이다.

 

만일 공업론자들이 이번 세월호 참사와 관련 하여 한마디 한다면 유정 각자의 차별적인 운명과 현실(유정세간)은 불공업(不共業)에 의해서 결정되고, 유정이 함께 공유하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기세간)은 공업(共業)에 의해서 결정된다라고 말할 것이다.

 

 

 

2014-05-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