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스님들과 학자들은 글을 안쓰는 것인가 못쓰는 것인가? 양식(糧食)이 되는 글을 쓰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18. 09:58

 

 

스님들과 학자들은 글을 안쓰는 것인가 못쓰는 것인가? 양식(糧食)이 되는 글을 쓰고자

 

 

 

도중에 글의 내용을 수정하였는데

 

최근 넷상에서 해프닝이 있었다. 사건이라면 사건이고 사고라면 사고이다. 그것은 일종의 필화와 같은 것이다. 글을 매일 쓰다 보니 발생한 사건이라 보여진다. 마성스님의 글에 대한 비판을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강력한 항의를 받고 글의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이처럼 도중에 글의 내용을 수정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과의 메일을 발송하고

 

글의 내용은 현법열반론에 대한 것이었다. 마성스님이 불교닷컴에 기고한 글을 보고서 비판한 것이다. 이렇게 비판글을 쓰게 된 것은 수용 가능할 줄 알았기 때문에 쓴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사과의 글을 메일로 전송하였다.

 

 

메일 잘 보았습니다.

 

 

올린 글로 인하여 마음을 상하고 명예가 실추 되었다면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 드립니다. 올린 글에 대해서는 문제 되는 부분 삭제 하겠습니다.

 

현법열반론에 대한 글은 잘 보았습니다.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외도의 견해로 알고 있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현법열반론이 불교의 목적이다라고 하였을 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기회가 되면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사과를 드립니다.

 

 

 

 

 

 

사과의 메일을 발송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삭제하였다. 그러다 보니 글의 내용이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이전 글에서는 비판위주이었으나 바뀐 글에서는 찬탄위주의 글이 되었기 때문이다.

 

180도 달라진 글을 보고

 

이렇게 도중에 글이 바뀐 것에 대하여 의아해 하는 법우님도 있다. 어느 법우님은 다음과 글을 주었다. 메일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참으로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스님의 지나치게!~통렬한 지적을 보고 있으려니요.

먼저 저 맨 위의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 진흙속의연꽃이 왜 외도가 되는지요?

 

스님의 그 단어의 사용은 타 종교로 비교할 것 같으면 파문과도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진흙속의연꽃 뿐 아니라 불교를 지향하게 된 저나 진흙속의연꽃 블로그의 다른 독자들에게도 아마 같은 충격일 것 같습니다.

(연꽃님은 문제가 된 그 글의 내용을 180도 다르게 바꾸셨군요. 그 정도로 스님은 의미가 있는 분이십니다.) __()()()__

 

(K법우님)

 

 

 K법우님에 따르면 글의 내용이 180도 달라진 것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외도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거론 하고 있다. 그러면서 파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런 메시지를 마성스님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답신을 못 받았다고 하였다.

 

잘못을 지적해 주신 마성스님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매일 글을 올리는 보통불자이다. 매일 가르침을 접하면서 글을 쓰는 것을 으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업에 소홀한 경우도 있다. 생업이 본업이고 돈도 안되는 글쓰는 것이 부업이라 하였을 때 어느 경우 부업에 너무 치중하여 본업과 부업의 위치가 뒤바뀌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항상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경전의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아직까지 다 읽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실수할 수도 있다. 더구나 생업 때문에 매우 빠른 속도로 미친듯이쓰다보 면 놓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한자어 사용 같은 것이다.

 

한자용어 중에 대기설법이 있다. 이를 大機說法이라 하였다. 이런 지적을 마성스님이 해 주었다. 이런 실수가 나온 것은 남의 글에서 가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잘못 올려 놓은 글을 아무 생각 없이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잘못 적용된 한자어가 권위 있는 책에서도 종종 보이는데 이를 의심 없이 받아 들였을 때도 발생된다. 이럴 경우 차라리 한글로 대기설법이라고 표현 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확신이 서지 않고 대충 감으로 하였을 때 꼭 문제가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스님이 지적해 준 한자어는 對機說法이었다.

 

마성스님의 지적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올린 글로 인하여 스님의 또 다른 면모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경계에 부딪치면 누구나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글을 쓰지만 스님의 강력한 경고에 따라 전문을 올리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파워블로거라 하였다. 이는 칭찬과 비난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하루 방문객 천명 이상이면

 

지난달 연등축제날 조계사에 갔었다. 약속이 있어서 갔는데 시간이 남아 서점에 들렀다. 오랜만에 간 서점에서 이책 저책 구경하였다. 그 중에 눈에 확 띠는 책이 있었다. 그것은 파워블로그가 되는 방법에 대한 책이었다. 호기심에 책장을 열어 보았다.

 

여러 내용이 있었지만 그 중에 눈에 띠는 말이 조회수에 대한 것이었다. 그 책에서는 일일방문자 천명이상이 되면 파워블로그로 본 것이다. 하루 방문객이 천명 이상 되면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블로거라 하여 파워 블로거라 한다는 것이다.

 

파워블로거라 생각한 적이 없지만

 

아직까지 파워블로거라 생각한 적이 없다. 창문밖에 있는 저 관악산이 언제 관악산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이 없건만 사람들은 관악산이라고 부르듯이, 교계신문 사이트에서 어느 기자가 기사에서 파워블로거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블로그가 소속되어 있는 미디어다음에서 단 한번도 파워블로그로 선정해 준 적도 없다. 그리고 메인뉴스에 올려 준 적도 없다. 오로지 알고 찾아 오는 네트즌들 뿐이다. 아마 즐겨찾기로 찾아 오는 분도 있을 것이고, ‘검색을 통하여 우연히 방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찾아 오는 네티즌들의 숫자가 월별 43,868명에 이른다. 이를 30으로 나누면 일평균 1,462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갈증이라 보여진다. 실제로 글을 남겨 주시는 법우님들에 따르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 가급적 개인적인 이야기 보다 경전위주로 쓰고자 한다. 방문자들이 그런 글을 원하기 때문이다.

 

스님도 학자도 가만 있는데

 

하지만 보통글자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무엇을 얼마나 알기에 글을 쓰냐는 식이다. 또 오랫동안 수행을 한 스님들도 가만 있고,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가만 있는데 보통불자가 무엇을 얼마나 알기에 글을 쓰느냐고 질타를 하고 불편해 하는 법우님들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결같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쓸뿐!”이다. 글을 쓰는 것이 스님이나 학자. 또는 기자나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땅에서 동시대를 살아 가는 보통불자에게 글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안쓰는가 못쓰는가?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그렇게 수행을 많이 한 스님과 PDH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왜 글을 쓰지 않는 것일까? 보통불자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해 하면서 정작 글을 써야 될 사람들은 침묵하는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하여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스님이나 학자들이 안쓰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못쓰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안쓰는 경우라면 너무 바빠서일 것이다. 수행하기에 너무 바쁘고 포교할동하기에 너무 바쁜 스님이라면 인터넷에 글을 못 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교수라면 학생들을 가르치고 수업준비를 하고 때로 논문을 써야 하기 때문에 인터넷에 글을 올리지 못할 수가 있다.

 

또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인터넷에 글을 쓸 시간에 책을 한권 쓰는 것이 더 낫고, 돈도 안되는 인터넷에 글을 쓸 여유가 있다면 학회에 발표할 논문을 쓰는 것이 더 낫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쓰레기정보로 넘쳐 나는 인터넷에 글을 쓰는 행위가 품위를 손상하게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스님들이나 학자들, 그리고 작가들이 인터넷에 지속적으로 글을 올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인터넷이 생활화 되어 있는 시대에 불자들은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그래서 이사이트 저사이트 기웃거리면서 정보를 얻고자 한다.

 

스님들이나 학자들 또는 작가들이 인터넷에 글을 쓰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못써서 글을 못쓴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안쓰는 것과 다른 것이다. 글을 쓸 줄 몰라 못쓰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글을 써야 할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첫째로 글을 쓰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글을 못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직무유기와 한국불교의 수치

 

만일 글을 써야할 스님들이나 학자들 또는 작가들이 인터넷에 글을 쓰지 않는다면 이는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아무리 바쁘기로 일주일에 글 한편, 한발 더 양보 하여 한달에 글 한번 올리기 힘들까? 그래서 직무유기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절망스런 것이 있다. 그것은 글을 쓸 줄 몰라 못쓰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만일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글을 쓸 줄 모른다면 이는 한국불교의 망신에 해당된다. 수행을 그렇게 오래하고 불교를 그토록 오래 연구하였으면서도 인터넷에 글 하나 제대로 올리지 못할 정도라면 이는 한국 불교의 수치에 해당된다.

 

어떻게 글쓰기를 하는가

 

이른 아침 사무실로 부리나케 달려 간다. 글을 쓰기 위해서이다. 요즘은 일거리가 좀 있어서 가급적이면 글을 빨리 쓰려고 한다. 이전에는 오전을 글쓰는 시간으로 할애 하였으나 고객들이 출근 하기 이전인 9시 이전에 끝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아침 일찍 사무실에 가야 한다.

 

사무실이 집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전 7시전후로 도착한다. 그리고 사무실로 걸어 가면서 글의 줄거리를 생각해 본다. 글이라는 것이 논리이기 때문에 논리가 서지 않으면 글이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론에는 어떤 이야기를 집어 넣을 것인지, 본론에는 어떤 경을 인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걸어 가면서 생각해 둔다.

 

그리고 사무실에 도착하여서는 컴퓨터를 켜고 엠에스워드를 띄어 하얀여백과 마주한다. 이때 가장 행복한 시간이자 긴장되는 순간이다. 앞으로 어떻게 글을 전개 해 갈 것인가 또는 오늘 글을 잘 써 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 그날 글을 쓸 줄거리를 생각 해 놓았기 때문에 단지 자판만 두들기면 된다. 그렇게 정신없이 쓰다 보면 A4사이즈에 폰트사이즈 12로 하여 10페이지 가까이 된다.

 

글을 썼다고 하여 다 끝난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가며 바로 잡는다. 동시에 소제목을 단다. 그리고 화룡점정이라 할 제목을 붙인다. 그리고 검색한 사진을 첨부하여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이는 숙달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TV에서 생활의 달인이 보지 않고도 공을 던져도 빈바구니에 들어 가는 것 같다.

 

이렇게 정신없이 미친듯이 글을 쓰다 보면 두 세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글의 내용이 길거나 검색을 필요로 하고나 자료를 찾는 시간이 많으면 점심시간을 넘기기 일 쑤이다. 이런 생활을 8간 해 왔다. 그렇게 해서 쌓이고 쌓인 글이 ‘2500에 육박하고 지금까지 누적 조회수가 ‘397만명에 달하여 400만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양식(糧食)이 되는 글을 쓰고자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누군가는 칭찬한다. 반면 누군가는 불편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악의적인 비난과 비방을 서슴지 않는다. 빚진 것이 없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오직 쓸뿐!”이다.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악의적인 비방을 일삼는 자들도 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오질 쓸뿐!”이다. 다만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여 쓴다. 그래서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되는 글을 작성하고, 또 매일 먹는 밥처럼 양식(糧食)’ 되는 글을 쓰고자 한다.

 

 

 

201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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