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번역과 윤문(潤文)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18. 19:35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번역과 윤문(潤文)

 

 

 

주제넘게 번역비교한다고

 

니까야 번역비교를 하고 있다. 번역비교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주제넘은 짓이라 말한다. 빠알리어 문법도 모르고 빠알리어 원전 해독능력도 없는 자가 번역비교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번역비교를 하는 목적은 단순하다. 호기심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승가에서는 재가에서 번역한 것에 대하여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 것 같다. 오류투성이라서 스님들이 승가대학 교재로 채택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이 번역한 니까야가 승가대학 교재로 채택 되는 듯 하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오류가 많길래 스님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였다.

 

승가집단이기주의인가?

 

현재 출간된 니까야에 대하여 일대일 번역비교 하고 있다. 상윳따니까야 1권 부터 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작업이다. 더구나 빅쿠보디의 영역을 추가 하여 비교하고 있다

 

번역비교를 해보니 승가의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승가에서 번역한 것에서 오류가 더 많이 나왔다. 명백한 오역도 있었고, 심지어 심지어 같은 문장에 대하여 니까야마다 정반대의 번역을 싣기도 하였다. 또한 용어선택에 있어서 부적절한 것도 많았다. 또 빅쿠보디의 영역에 지나치게 의존한 듯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승가에서 스님들이 재가의 번역에 대하여 오류투성이라 말하며 승가대학 교재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승가집단이기주의의 발로라 보여진다.

 

 

 

 

 

 

 

 

 

 

 

 

 

갈팡질팡번역

 

먼저 오역에 대한 것이다. 이는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갈팡질팡 번역을 보고(2013-10-21)’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왜 갈팡질팡번역일까? 그것은 브라흐마짜나경(S6.1)에서 ‘pamuñcantu saddha’번역에 대한 것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 전재성님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고 정반대로 번역하였다. 이 구문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라는 번역을 소개 하였다.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펼쳐 줄 것을 요청하자 부처님이 그 전제조건으로 “pamuñcantu saddha라 하였다. 그런데 아직 가르침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대뜸 믿음을 보여라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이것은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것과 다름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이지 믿어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 각묵스님이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이다. 그런데 최근 발행된 개정판에서는 이를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로 바꾸었다. 그러나 대림스님이 번역한 맛지마니까야(M26)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같은 연구원에서 번역자마다 번역이 다른 것에 대하여 갈팡질팡번역이라 한 것이다.

 

촌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자는 것인가?

 

용어선택에 있어서 부적절함이다. 과연 부처님이 이런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싶을 정도로 저속한 표현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히 사투리라 불리우는 지방어를 쓴 듯한 것도 종종 보인다. 부적절한 용어 선택의 예로서 촌스럽다라는 말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빠알리니까야에서 선가(禪家)용어(2013-05-13)’에서 비판한 바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hīno gammo pothujjaniko’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라 번역하였다. ‘Gammo’에 대하여 촌스럽다고 번역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에서는 비속하고라 번역하였다. ‘Gammo’에 대하여 촌스럽고비속하고라고 번역됨으로서 번역자마다 번역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촌스럽다라는 말은 저속한 용어일 뿐더로 자칫 하면 촌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말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못난 자들뿐인가! 촌에 사는 자들은 모두 무능력자들이고 세련되지 못하고 무지랭이들뿐이란 말인가! 그런 면으로 본다면 촌스럽고라는 번역어는 매우 부적절해 보인다.

 

, 열받쳐!”

 

부적절한 용어선택의 또 하나의 예가 있다. 그것은 속상하고 열받는이라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은 교양인들이라면 좀처럼 쓰지 않는다. 중고등학생들이 이야기할 때 , 열받쳐!”라 한다. 이처럼 막말로 사용하는 듯한 용어가 열받는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니까야 번역서에 버젓이 속상하고 열받는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어서 놀라울 뿐이다. 이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 특징 가지(2012-10-24)’에서 언급한 바 있다.

 

속상하고 열받는이라는 번역은 초불연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 경(M2)’에 보인다. 번역된 경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그에게 속상하고 열 받는 번뇌들이 일어날 것이다.(M2)”라 되어 있다. 과연 부처님이 , 열받아!”식의 표현을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수행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이라 번역되어 있다. “열받고고뇌에 가득 찬의 차이이다.

 

깜냥과 멍텅구리

 

초불연 번역어 중에 깜냥이라는 번역을 보았다. 띳사까경(S6.8)에서 “[자기 깜냥으로] 재어서 억측을 한다는 말입니까?”라는 표현이다. 대괄호치기로 하였지만 부처님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에서 깜냥이라는 표현은 지나치다고 본다. 대체로 교양인들은 깜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의미를 강조할 때 깜냥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또한 구문에서 멍텅구리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akissava를 옮긴 것이다. Akissava지혜가 없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일까 성전협에서는 어리석은 자로 옮겼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멍텅구리라 하였다. 멍텅구리라는 말은 경전에서 사용하기에 부적절한 말이라 본다.

 

억수로겁나게

 

한편 사투리를 사용한 듯한 번역어도 보인다. “억수같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억수같다라는 말은 대체로 영남지방에서 사용하는 말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부산에서 많이 사용된다고 보여진다. 부산출신들의 경우 억수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서 억수같이라는 표현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이에 대하여 명칭이나 말에 속지 말자, 전도된 지각 상락아정(常樂我淨)(2013-11-08)’에서 비판한 바 있다.

 

억수같이라는 번역어는 기반경(S12:23)’에서 보여진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이러하다. 산꼭대기에 억수같이 비가 내리면…(S12:23)”라고 되어 있다. 비가 많이 내리는 것에 대하여 억수같이 비가 내리면이라 하였다. 성전협에서는 비가 굵은 알갱이가 되어 떨어질 때…(S12:23)”라 하였다. “억수같이굵은 알갱이가 되어의 차이이다.

 

억수같다라는 표현에 대하여 사투리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댓글을 주신 어느 법우님에 따르면 억수로라고 말하면 사투리이고, “억수같이라고 하면 사투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억수같다라는 말은 특정지역에서 사용되는 사투리라 보여진다. 만일 사투리를 번역어로 사용된다면 억수로에 해당되는 겁나게도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쩨쩨하다고?

 

또 한가지 초불연 번역어중에서 놀라운 말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쩨쩨하다라는 말이다. 맛차리경(S1.49)에서 이 세상에서 인색하고 쩨쩨하기도 하고라고 되어 있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번역에서 쩨쩨하기도라 하였다. 쩨쩨하다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좀스럽고 인색하다라는 뜻이다.

 

쩨쩨하다라고 번역된 빠알리어가 ‘kadariya’이다. 이는 ‘miserly; stingy’로서 인색한의 뜻이다. 그런데 번역어에서 쩨쩨한으로 번역하였다. 과연 부처님이 쩨쩨하다라는 비속어 개념의 말을 사용하였을까? ‘kadariya’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재물을 아끼고라고 번역하였다.

 

누구나 번역비교를 할 수 있다

 

보통불자가 주제넘게 번역비교를 하고 있다. 빠알리도 모르고 불교학을 연구한 학자도 아닌 자가, 더구나 수행경험도 없는 자가 번역비교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짧고 긴 것은 대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빠알리어를 모르고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비교해 보면 금방 드러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말로 번역 된 것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번역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번역비교를 하면서 느낀 점은 번역자의 역량에 따라 번역의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 많은 오역, 탈역, 용어선택함의 부적절함 등이 발견된다. 그런 것들은 굳이 빠알리어를 깊게 모른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지적할 수 있다. 비교해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누구나 빠알리어사전을 다운 받아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검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빠알리사전 PCED194 에서는 검색창에 원하는 단어만 집어 넣으면 매우 상세하게 문법적인 설명까지 되어 있다. 그리고 해당단어가 적용되는 경과 경에서 사용된 문구까지 소개 되어 있다. 따라서 빠알리어를 모르더라도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빠알리 사전을 통하여 번역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번역비교는 피할 수 없는 것

 

번역비교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이미 이 세상에 번역서가 나온 이상 비교되는 것은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비교하지 말란다고 하여 비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승가에서는 재가에서 번역한 것이 오류투성이라 하기 때문에, 그런 이유에서라도 비교하고픈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다. 승가에서는 스님이 번역한 것을 선호 하는 것 같다.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프로에서 미산스님은 스님이 번역한 니까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높게 평가하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승가에서는 스님이 번역한 것에 대하여 더 가치를 두고 승가대학교재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승가에서 스님이 번역한 것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번역한 번역서에 오류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번역비교를 해보면 수 많은 오류가 발견된다. 그래서일까 최근 초불연에서는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 같다. ‘윤문팀발족이 그것이다.

 

초불연의 윤문팀 운영

 

초불연에서 윤문팀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에 나왔다. 초불연에서 사부니까야가 완역 된 것은 2012 11월이다. 그 때 봉은사 맞은 편에 있는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봉헌법회가 열린 바 있다. 이때 참석하여 초기불교 맏형론, 초기불전연구원 4부 니까야 완역봉헌법회에서(2012-11-18)’이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 때 당시 윤문팀운영 이야기가 나왔다. 사부니까야를 완역하였으니 문장을 좀 더 부드럽게 다듬고 용어나 잘못된 표현을 바로 잡기 위하여 윤문팀을 운영하겠다고 하였다.

 

윤문(潤文)이란 글을 다듬고 고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번역자만이 할 수 있다. 주변에서 오류를 지적해 줄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번역자이다. 따라서 윤문이라는 것은 번역자의 고유권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윤문하는 것에 대하여 번역자가 직접하지 않고 동호회회원 중에 선발하여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다. 윤문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업으로서 번역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데 이를 타인에게 맡겨 작업을 하게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무한책임이라는 말이 있다. 제품을 개발하면 개발자가 무한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제품에 대하여 개발한 사람이 가장 많이 알기 때문에 제품에 하자가 생겼을 때 이를 개선하는 것은 개발자의 몫이다.

 

그런데 개발한 제품을 다른 사람이 수정하거나 개선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 개발자의 개발의도를 먼저 파악해야 하고 그 의도에 맞추어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더 그렇다. 그래서 남이 해 놓은 것을 수정하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새로 하는 것이 더 빠르다고 한다.

 

이처럼 남이 해 놓은 것을 타자가 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좀 비속하게 표현하면 남이 똥싸 놓은 것 치우는 격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가급적 자신이 개발한 것은 자신이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개발에 임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개발자의 도리인 것이다. 번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번역자가 윤문을 하지 못하는 이유

 

방대한 니까야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오류가 없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번역자가 서로 다를 경우 용어통일도 안되어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타자가 이를 윤문한다면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까? 더구나 동호회에서 선발된 불자들이 윤문에 임하였을 때 얼마나 신뢰성이 있을까?

 

니까야번역비교하는데 있어서 주제넘은 짓이라 질타를 하는 마당에 남이 번역해 놓은 것을 윤문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 윤문팀이 출범하였다. 이에 대한 글을 카페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글에 따르면 각묵스님이 윤문을 직접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내가 하면 되는데 제가 못하겠습니다. 그게 가장 큰 요인이 뭐냐면 변명 같지만 아파서 못합니다. 제가 못하거든요 ~.........~적어도 2년은 누군가가 현실적인 입장에서, 누군가가 고쳐줘야 됩니다.

 

(5 11 2 윤문팀 모임 후기, 2014-05-12)

 

 

 

 

글에 따르면 번역자가 윤문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건강을 들고 있다. 방대한 번역서에서 용어를 통일하고 문장을 부드럽게 만들고 오류를 잡아 나가는 과정은 번역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작업이 2년 가량 걸릴 것이라 한다. 그런데 번역자는 번역자가 건강상 이유로 누군가 고쳐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2년간의 교정과정을 거쳐

 

초불연에서 사부니까에 대한 윤문작업은 윤문팀에서 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태도는 성전협 전재성님과 매우 비교된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빠알리어로 전승되어 온 경전에 대하여 함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심지어 조사 하나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머리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이 초역 전집에는 <<쌍윳따니까야>> 5편을 초판본 한글판 11권 전집으로 엮어내어 순차적으로 낼 때만 하더라도 번역조건이 너무나 열악한 나머지 교정진 조차 없이 발간하는 바람에 많은 오타, 착간뿐만 아니라 간혹 오역도 발견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룩하고 고귀한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훼손하지나 않았나 하는 송구스러움이 있었는데, 이책을 사랑하여주신 많은 독자의 성원에 힘입어 초판본 완간 4년 만에 2년간의 교정과정을 거쳐 꼼꼼히 교정하고 편집을 새로 하고 주석을 증보한 개정판을 내게 되었습니다.

 

(전재성박사, 개정판 쌍윳따니까야 머리말)

 

 

전재성님은 초판본이 나온 후에 만 2년간의 교정을 보았다고 한다. 초판본에서 발견된 오류를 바로 잡고 윤문을 하는 등 2년이라는 각고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처럼 교정을 하고 윤문을 하는 것은 번역자의 고유권한이다. 그럼에도 이를 타인에게 맡긴다면 번역이 어떻게 될까?

 

 

 

2014-05-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