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속이 꽉 찬 사람, 그윽한 맛을 내는 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23. 11:09

 

 

속이 꽉 찬 사람, 그윽한 맛을 내는 사람

 

 

 

머그잔을 이용한 원두커피만들기

 

지난 2012년에 쓴 글 중에 세라믹필터가 있는 머그컵으로 원두커피 만들기(2012-08-02)’라는 글이 있다. 그 때 당이 글을 쓰면서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글을 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방식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머그잔을 이용한 원두커피만들기이에 대한 것이다.

 

 

 

 

 

 

 

 

 

 

 

 

봉지커피보다 원두커피를 좋아한다. 위가 약해 봉지커피를 마시면 탈이 날 듯하다. 실제로 봉지커피를 마시고 배탈이 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것은 봉지커피가 너무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프림과 설탕이 잔뜩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달달한맛과 함께 매우 자극이 강하여 식사 전에 봉지커피를 마시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봉지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원두커피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분쇄된 원두를 사서 내려 마시는 방식을 말한다.

 

원두커피를 마시려면 전자제품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원두내리는 전자제품을 말한다. 그러나 사용하기가 불편하다. 그리고 시간이 꽤 걸린다. 종이필터를 갈아 끼우고, 물을 넣고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한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기 지루하여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있다. 그것은 머그잔을 이용한 원두커피 내리는 방법이다.

 

지난 2012년 일본성지순례 당시 큐슈에 있는 유후인(由布院)’에 들르게 되었다. 일본의 온천관광지이자 민속촌 유사한 성격이다. 거기에서 머그잔을 하나 사게 되었다. 그런데 이 머그잔은 다른 머그와 달리 부속물로서 세라믹필터가 있었다. 세라믹 필터안에 일회용 녹차나 커피봉지를 넣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직접 머그잔에 봉지를 담구어 마신다. 그러나 세라믹필터가 있는 머그잔의 경우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필터안에서 걸러지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차나 커피를 마시면 깔끔하게 마실 수 있다.

 

이처럼 봉지를 담가서 마시는 용도로 활용되는 세라믹필터붙임머그잔을 원두커리 내리는 용도로 활용할 생각을 한 것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즉각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이런 방법에 대하여 글을 올린 것이 앞서 언급된세라믹필터가 있는 머그컵으로 원두커피 만들기(2012-08-02)’제목의 글이다.

 

일배용기에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면 어떨까?”

 

이번에도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배용기를 이용한 원두커피만드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이런 방식이 이미 인터넷에 올려져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한 방식은 이전에 세라믹필터가 있는 머그잔에 원두만들기에 버금 가는 발견이라 본다. 방법은 이렇다.

 

일배용기가 있다. 녹차를 내리는 용기로 사용되기 위하여 개발된 것이다. 녹차잎을 올려 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려 내는 방식을 말한다. 찻잔으로 딱 한잔 나오기 때문에 일배용기라 한다. 이 일배용기를 이용하여 원두커피가루를 넣어 원두커피를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일배용기에는 필터가 있다. 아주 미세하고 촘촘한 간격의 철망구조이다. 이 미세한 철망이 있기 때문에 찌꺼기가 내려 가지 않는다. 꼭지를 누르면 물만 밑으로 빠지고 녹차잎은 그대로 남아 있는 구조이다.

 

최근에는 어느 법우님이 스리랑카 순례에 다녀온 후 선물로 실론티를 주었다.  이 실론티는 우리나라 녹차와 달리 굵은 거친가루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실론티를 찻잔으로 한 스픈 넣고, 그 위에 물을 부은 후 약 일이분 지나면 주황색의 녹차가 만들어진다. 이 녹차 맛은 깊고 그윽해서 우리나라 황차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렇게 녹차를 만들어 마실수 있는 일배용기를 이용하여 이번에는 일배용기에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면 어떨까?”하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오른 것이다.

 

녹차를 내려 마시는 일배용기에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겠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그런데 한번 이런 생각이 들어가자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즉시 실천에 옮겼다.

 

먼저 일배용기의 필터그릇에 원두커피 한스픈정도 넣었다. 분쇄된 원두가루는 실론티의 가루와 마찬가지로 거친입자의 가루형태로 되어 있다. 미세하지 않고 알갱이가 굵고 거친 가루이기 때문에 촘촘한 철망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 이렇게 원두커피가루를 한스픈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리고 일이분 후에 꼭지를 눌러 물만 내려 가게 한다. 그러면 원두특유의 색깔과 향과 함께 원두커피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맛은 세라믹붙임머그잔을 이용한 방식과 달랐다. 종이필터를 통과할 때 이미 원두맛이 잃어 버리기 때문에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배용기의 철망을 통과하기 때문에 원두의 맛과 향기가 살아 있다. 그 맛은 커피전무점에서 마시는 것과 유사하였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원두 그대로의 향과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원두커피 만드는 방식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녹차를 우리는 일배용기를 이용하여 원두를 내리는 용도로 활용하는 것은 발상의 전환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발상의 전환이 들어 맞았을 때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생각하였던 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 성취감을 말한다.

 

뒤끝이 개운치 않은 경우

 

요즘 사람들은 봉지커피맛에 익숙해져 있다. 이는 아마도 자판기커피의 영향일 것이다. 한국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커피가루와 프림과 설탕을 절묘하게 배합하여 만든 것이 자판기 커피이다. 이런 배합이 봉지커피에도 적용 되어서 누구나 자판기커피 맛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자판기커피나 봉지커피의 경우 뒷맛이 그다지 좋지 않다. 마실 때는 쌉싸름하기도 하고 달달하여 맛있게 마시나 마시고 난 다음에는 영 개운치 않다. 이처럼 마시고 난 후 개운치 않은 것은 인스턴트 식품의 공통된 특징이다.

 

라면도 대표적인 인스턴트 식품이다. 뜨거운 물에 단지 몇 분 담가 놓으면 완성 되기 때문에 누구나 라면을 끓일 수 있다. 요즘에는 컵라면도 있어서 단지 뜨거운 물만 붓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늘 느끼는 것이지만 라면을 먹고 나면 뒷끝이 개운치 않다는 것이다. 먹을 때는 맛있게 먹으나 먹고 난 후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라면국물과 우동국물의 차이는?

 

그러나 같은 인스턴트 식품이라도 우동은 약간 다르다. 우동집이나 고속도로휴게소 등에서 판매하는 우동의 맛은 깊고 그윽한 맛이 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라면과 우동은 똑같이 인스턴트 식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먹고 난 후 뒷끝에 대한 것이다. 라면의 경우 뒷끝이 좋지 않다. 그러나 우동은 반대이다. 이런 차이는 에 있다고 본다. 라면의 경우 제공된 스프로 맛을 내지만 우동의 경우 간장이 첨가 되기 때문이라 본다. 음식에 장이 들어가면 깊고 그윽한 맛이 나듯이 우동에 간장이 들어갔기 때문에 뒷맛이 깔끔한 것이 아닐까?

 

된장국을 즐겨 먹는 이유

 

음식은 장맛이라 한다. 여기서 장이라하면 반드시 간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장에는 간장뿐만 아니라 된장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장과 된장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면 깊고 그윽한 맛이 난다. 그리고 뒷맛도 좋다. 대표적으로 된장국을 들 수 있다.

 

된장국을 즐겨 먹는다. 속이 좋지 않을 때 된장국을 먹으면 속이 개운해 진다. 대체로 된장국에 밥을 먹으면 뒷끝이 좋다. 그런데 라면 국물에 밥을 먹는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먹을 때는 맛이 있을지 모르지만 먹고 나면 뒷맛이 개운치 않을 것이다.

 

맵고 짠 맛에 취하여 순간적으로 맛을 느껴 라면을 먹는다. 그러나 먹고 나면 개운치 않다. 그것은 인스턴트식품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라면국물과 된장국이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라 볼 수 있다.

 

어느 음식이든지 장이 들어 가면 깊은 맛이 난다. 그러나 인스턴트 식품에서는 깊은 맛을 느낄 수 없다. 이런 결국 장맛으로 결정 난다고 볼 수 있다.

 

뒤끝이 지저분 한 사람과 뒤끝이 개운한 사람

 

자판기커피나 봉지커피는 인스턴트식품이다. 미리 준비된 인스턴트 재료에다 단지 물만 부으면 불과 10초도 되지 않아 만들어진다. 마실 때 순간적으로 단맛을 느껴 자극을 주지만 마시고 나면 무언가 허전하고 개운치 않다. 하지만 원두를 내려 마시면 깊고 그윽하다. 설탕이나 프림을 넣지 않아도 맛이 좋다. 더구나 향기까지 나기 때문에 분위기도 좋다. 이렇게 인스턴트 봉지커피와 원두커피 맛은 천지차이다.

 

장이 들어간 조리된 식품 역시 깊고 그윽한 맛이 난다. 그래서 먹고 나서도 그 기분이 오랫동안 유지된다. 간장으로 맛을 낸 우동이나 국수, 그리고 된장과 간장으로 맛을 낸 된장국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그윽한 맛은 스프로 맛을 내는 라면과 다른 것이다. 맵고 짠 것을 특징으로 하는 라면이나 컵라면을 먹고 나면 개운치 않다. 그러나 된장국을 먹고 나면 개운하다. 이런 맛의 차이는 장에 있다고 본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람중에도 인스턴트식품과 같은 맛을 가진 사람도 있다. 또 사람중에는 장맛처럼 깊고 그윽한 맛을 내는 사람도 있다. 사람중에는 봉지커피와 같은 맛을 가진 사람도 있고, 사람중에는 원두커피향 같은 맛을 가진 사람도 있다. 사람중에는 라면국물맛 같은 사람도 있고, 사람중에는 우동국물이나 된장국물맛 같은 사람이 있다. 이런 차이는 무엇일까? 결정적으로 뒷끝에 있다.

 

뒤끝이 지저분하면 인스턴트 식품 같은 사람이고, 뒷끝이 개운하면 장맛을 내는 사람과 같다. 이처럼 사람에 따라 자극적인 사람이 있는 가 하면 깊고 그윽한 맛이 나는 사람이 있다.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한 사람들

 

인스턴트식품의 특징은 맵고 짜고 자극적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맛을 내어 구미를 당길지 모르지만, 먹고 난 후에는 마치 독극물을 먹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설탕과 프림이 잔뜩 들어간 봉지커피를 마셨을 때 마치 독극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이처럼 맵고 짜고 자극적인 사람들이 있다.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좋으면 거머 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한다. 그래서 좋고 싫음이 명확하다.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사람들이다.

 

호불호가 명확하면 한번 싫으면 죽도록 싫어 하고. 한번 좋으면 죽도록 좋아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순간순간 좋고 싫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순간순간 마음이 변한다. 그래서 항상 즐거운 대상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구 성질을 낸다. 이처럼 좋으면 거머쥐고 싫으면 밀쳐 내며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탐진치로 살아 간다는 것이다.

 

탐진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스턴트 식품과도 같은 사람들이다. 인스턴트 식품의 특징이 맵고 짜고 자극적이듯이 탐진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즐길거리를 찾아 두리번 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런 속성이 라면의 스프와 같다.  

 

라면 스프가 들어간 라면국물을 마시지 않는다. 마시고 나면 뒤가 영 개운치 않기 때문이다. 마치 봉지커피를 마시고 나면 어떤 경우 독극물처럼 생각되듯이 라면국물 역시 짜고 맵고 자극적이어서 마셔 보았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 역시 상대해 보았자 뒷끝이 개운치 않다. 마치 봉지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마치 라면국물을 먹는 것처첨 뒷맛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였을 것이다.

 

법구경에 어리석은 자의 품이 있다. 탐진치로 살아가며 뒤끝이 좋지 않은 어리석은 자에 대한 게송 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악행이 여물기 전까지는

어리석은 자는 꿀과 같다고 여긴다.

그러나 악행이 여물면,

어리석은 자는 고통을 경험한다. (Dhp69)

 

 

봉지커피의 맛이 달달하여 순간적으로 땡기지만 마시고 나면 뒷끝이 좋지 않다. 그래서 개운치 않은 맛을 씻어 내기 위해서는 이를 상쇄할 수 있는 그윽한 맛을 내는 것을 다시 마셔야 한다. 라면을 먹을 때 라면국물까지 모두 다 먹는 사람들은 드믈것이다. 아무리 허기가 져도 라면국물을 남김 없이 먹지 않는 이유는 뒷끝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들은 본능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봉지커피와 같고 라면국물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들과 접하면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 어리석은 자의 품에서는 또 하나의 게송이 있다.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61)”라는 게송이다. 어리석은 자와 절대 함께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항상 즐길거리만 찾아 다니는 자,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마구 화를 내는 자와 사귀자 말라는 것이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내치는 사람들은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욕심잘 내고 화를 잘낸다. 이처럼 탐욕으로 성냄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 보다 낫거나 나와 동등하지 않는 자를 만나지 못하면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그윽한 맛을 내는 사람

 

커피봉지 같은 사람이 있고 라면스프와 같은 맛을 내는 사람이 있다. 반면 원두커피와 같은 사람, 차맛과도 같은 사람, 장맛과도 같은 사람이 있다. 모두 깊고 그윽한 맛을 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뒤끝도 개운하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Ta nadihi vijānātha

sobebhasu padaresu ca,
Sa
antā yanti kussobbhā

tuahi yāti mahodayi.

 

여울들이나 골짜기들과

흐르는 강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작은 여울들은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 없이 흐릅니다. (stn720)

 

 

Yadunaka ta saati

ya pura sattameva ta,
A
ḍḍhakumbhupamo bālo

rahado purova paṇḍito

 

 

모자라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찬 것은 아주 조용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물을 채운 항아리 같고,

지혜로운 님은 가득찬 연못과 같습니다. (stn721)

 

 

숫따니빠따 날라까의 경(Nālaka sutta, Sn3.11)’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전재성님의 번역이다.

 

경에서 큰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고 하였다. 이는 여울물과 다른 것이다. 산의 계곡에서는 벌려진 틈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른다. 더구나 틈과 바위가 많고 낙차가 클 경우 더 큰 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강줄기에서는 물흐르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특히 강이 크면 클수록, 강이 깊으면 깊을수록 물흐르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게송에서는 물항아리와 연못의 비유를 들었다. 반쯤 채운 물항아리를 이고 갈 때는 찰랑 거리면서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찬 물항아리를 이고 갈 때는 물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두 개의 게송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성자의 삶에 대한 것이다.

 

성자의 마음이라는 것은 크고 거대한 강물과 같아서 소리없이 흐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성자의 마음은 가득 채운 항아리 같고 가득 찬 연못과도 같은 것이라 하였다. 마치 원두커피처럼, 우동국물처럼, 된장국처럼 깊고 그윽한 맛이 나는 사람들이다. 이는 탐진치로 살아가는 자들과 다른 것이다.

 

속이 꽉 찬 사람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은 틈이 벌어진 작은 여울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반쯤 찬 항아리 같은 것이다. 그래서 늘 요란하다.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기 때문에 마음이 텅 빈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작은 자극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좋으면 좋다라고 한다. 그것도 죽도록 좋다고 것이다. 그래서 죽어도 좋아!”라 하며 좋은 느낌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반면 싫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는 그냥 싫은 것이 아니다. 죽도록 싫은 것이다. 그래서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은 죽겠네!”이다. 이처럼 탐진치로 살아가며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보면  좋아 죽겠네!”라 한다. 싫은 사람을 보면 보기 싫어 죽겠네!”라 한다. 마치 라면스프국물과도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속이 꽉찬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속이 꽉찬 항아리에서 물소리가 나지 않듯, 큰강에서 흐르는 물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듯, 속이 꽉찬 사람들은 호불호에 크게 좌우 되지 않는다. 설령 누군가 칭찬을 해도 거기에 고무되지 않고, 혹시 누군가 비난을 하여도 동요되지 않는다. 이처럼 속이 꽉찬 사람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Eka caranta muni appamatta
Nind
āpasasānu avedhamāna,
S
īhava saddesu asantasanta
V
ātava jālamhi asajjamāna,
Paduma
va toyena alippamāna
Net
āramaññesamanañña neyya
Ta
vāpi dhīrā muni vedayanti.

 

홀로 살면서 방일하지 않은 성자,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자,

현명한 님들은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 (stn213)

 

 

이 게송은 모두 칠행시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구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후대에 삽입된 구절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3. 4, 5번 구절이다. 이는 게송에서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3),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4),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5)” 에 대한 구절이 해당 된다. 3, 4, 5번 구절을 빼고 다시 써 보면 다음과 같은 사구게가 될 것이다.

 

 

Eka caranta muni appamatta
Nind
āpasasānu avedhamāna,

Netāramaññesamanañña neyya
Ta
vāpi dhīrā muni vedayanti.

 

홀로 살면서 방일하지 않은 성자,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자,

현명한 님들은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

 

 

속이 꽉 찬 사람은 큰 강과 같고 가득 찬 물항아리와도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 어떤 비난이나 비방에도 흔들리지 않음을 말한다. 동시에 칭찬이나 격려에도 들뜨거나 고무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항상 평정을 유지 하는 것은 알아차리는 힘 때문 일 것이다. 항상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알아차릴 때 칭찬이나 격려, 비난이나 비방은 단지 알아차릴 대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가 성자라 하였다.

 

 

 

2014-05-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