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스님인가 작가인가? 차라리 승복을 벗어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29. 23:45

 

스님인가 작가인가? 차라리 승복을 벗어라!

 

 

 

단순작업을 할 경우

 

한 순간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특히 마음에 적용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한 순간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한 작업일 경우는 가능하다. 라디오를 들어 가며 작업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조립이나 밭매기등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할 때 라디오를 듣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다지 큰 집중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종 소리를 들으면서 작업할 때가 있다. 두 눈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작업하고, 두 귀는 대담프로를 들으며 작업하는 것이다. 대담프로는 주로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불교방송이나 불교tv 사이트를 통해서이다. 두 사이트에서는 법문이나 강좌 등 들을만한 것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런 대담 프로 중에 BBS초대석이 있다.

 

BBS초대석에서

 

BBS초대석은 다시듣기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다시듣기 서비스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음악에 대한 저작권료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담 도중에 음악을 들려 주는 시간이 있는데 이 음악에 대한 저작권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는지 한동안 다시듣기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시 듣기 서비스가 되고 있음을 확인 하였다. 그러나 올려진 대담은 불과 다섯 편에 불과 하다.

 

BBS초대석은 들을 만 하다. 매주 일요일 아침 오전 8시부터 한시간 동안 방송되는데 최정희님이 진행을 맡고 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프로는 불교와의 인연으로 자기 삶을 발견한 법사외 스님등을 모시고 세상사는 이야기, 불교가 자기 삶에 끼친 영향등을 대화를 통해 들어 보는 시간라고 설명 되어 있다.

 

부처님한테 죄송한 일이에요

 

다섯 개의 대담가운데 4 27일자 방송된 것을 들어 보았다. 목어조각가이자 화가로 활동중인 ‘S스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행자가 소개 하는데 스님 앞에 붙는 수식어가 두 가지이다. ‘목어조각가이고 화가라 하였다. 스님이면서 조각도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스님이 조각가로서 화가로서 삶을 살아 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은 목어를 만들고 그림을 한다는 것은 부처님한테 죄송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부처님제자가 될려면 사문이 되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거야. 그래서 부처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고 내 이게 아닌데….

 

처음 출가하였을 때는 굳은 마음으로 내가 출가를 했는데 지금 와서 이게 상황이 바뀌어져 가지고… . 제가 하는 이야기는 '스님네들이나 수행하는 분들이 이걸 취미로 삼아야지 자기 전업으로 삼으면 안되겄다' 그런 생각이 많습니다.

 

(BBS초대석, S스님, BBS 2014-04-27 다시듣기)

 

 

S스님은 목어를 조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하여 사문이 할 일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래서 머리깍고 조각가로서 화가로서 삶을 살아 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한테 죄송한 일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거야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이는 처음 출가하였을 때와 방향이 많이 달라져 있음을 말한다.

 

스님의 말을 들어 보면 지금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스님은 방송을 통하여 스님네들이나 수행하는 분들이 이걸 취미로 삼아야지 자기 전업으로 삼으면 안되겄다. 그런 생각이 많습니다.”라고 말한다.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스님의 본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업에 불과한 것을 마치 본업인 것처럼 열중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안타까워 하는 것 같다.

 

거리에서 스님에게 반배하는 이유

 

재가불자들은 출가한 스님들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리 계행이 엉망인 스님이라도 일단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이 불자된 도리라 한다. 이는 불교교양대학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일까? 그것은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버렸다라는 말은 매우 광범위하다. 가장 먼저 부모와 형제와 인연을 끊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세상과 등졌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소유를 실현하고 청정한 삶을 살아 가겠다는 것으로 받아 들인다. 그래서 세상에서 누구나 추구하는 감각적 욕망이나 재물, 명예, 권력 등을 포기하였다는 말과 같다.

 

세상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포기 하지 못한다. 그러나 출가한 스님들은 식욕, 성욕, 재욕, 안락욕, 명예욕 등 소위 오욕락을 포기 한 것으로 본다. 세상사람들이 포기 할 수 없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 한 것이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스님을 만나면 반배하라고 한다. 설령 그 스님의 계행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포기하였다는 그것 자체만큼은 존중할 만한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었다는 것은

 

이처럼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서나 추구하는 오욕락을 끊은 출가수행자는 다시 태어나는 것과 다름 없다. 이는 포기함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죽었음을 뜻한다.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었다는 것은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그래서 출가하였다는 것은 한번 죽고 난 다음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한번 죽었기에 부모형제와 인연이 끊어진 것이고 세상을 등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한번 죽고 다시 태어난 출가수행자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가르침 대로 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 길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거듭 태어난 출가수행자임에도 그 본분을 망각한 채 S스님의 말대로 이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거야라고 볼 수 있다. 머리 깍은 스님들이 회색승복을 걸친채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고 춤을 추는 등 세속사람들이나 하는 행위를 말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대중생활을

 

방송에서 S스님은 토굴이야기도 하였다. 여기서 토굴이란 스님들의 개인수행처를 말한다. 그런 토굴은 반드시 이나 초막만을 뜻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토굴개념이 확장 되어서 주택은 물론 아파트, 오피스텔도 토굴로 보기 때문이다. S스님은 토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한테 항상 미안한 생각을 말씀 드렸는데, 그거는 내가 지금 토굴에서 살다보니까 그 토굴에 얽매여 가지고 토굴이 주인이 되고 나는 토굴의 노동자가 되는 거야.

 

이게 난 아닌데, 내가 얼마나 어렵게 출가를 해 가지고 살고 있는데 토굴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건 아니다. 공부하는 생각으로 살고는 있어서 사실은. 살고 있는데 행동이 안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지금 산골에 가면 고추도 심어요. 고사리도 따야 하고, 또 녹차도 만들어야 하고, 그냥 새벽부터 일어나가지고 노예가 되는 거에요. 심부름꾼이 되는 거에요. 밥 네 끼 먹는 것도 아닌데 다들 세 끼 아니면 두 끼 먹고 사는데 그걸 먹기 위해서 그냥 새벽부터 발버둥치는 거에요 밤 잘 때까지.

 

그래서 머리깍은 사문으로서 수행자로서 나는 절대 밑에 후배들이 토굴에 가고 싶다면 절대 나는 반대해요. 토굴에 한번 가면 빠져서 거기에 노예가 된다. 수행자는 큰절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대중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해야지 떨어져 나오면 그건 머리 깍은 사문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BBS초대석, S스님, BBS 2014-04-27 다시듣기)

 

 

S스님은 토굴생활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개인수행을 목적으로 혼자 살고 있지만 토굴에 얽매이는 삶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진행자가 토굴관리자?”라고 하였듯이 혼자 살다 보면 해결 해야 될 일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토굴생활을 하려면 먹고 살기 위하여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S스님은 고추를 심고, 고사리를 따고, 녹차를 만드는 등 노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새벽부터 밤늦게 일한다고 하였다. 마치 일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처음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다고 하였다. 토굴에서 혼자 살다 보니 노동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는 어렵게 출가한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한다. 그래서 후배스님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대중생활을 하면서 공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행위에 의해서 농부가 되기도 하고

 

초기불교경전을 보면 출가한 빅쿠는 탁발에 의존하여 살아 간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빅쿠는 직업을 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오로지 출가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행에 전념함을 뜻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승가공동체이다. 이를 상가라 한다.

 

그렇다면 왜 함께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함께 살아야 계율이 지켜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승가의 계율은 모두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해야만 지켜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수행을 목적으로 토굴에서 나홀로 살아 간다면 이를 빅쿠라 볼 수 있을까? 나홀로 살아 가는 사람에게 수백가지에 달하는 구족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비구계를 지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는 더 이상 비구라 볼 수 없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에게 비구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승가공동체에서 함께 살아 가야만 자자포살등을 할 수 있어서 계율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토굴에서 나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빅쿠라 볼 수 없다. 더구나 농사까지 지어가면서 생계를 꾸려 간다면 더욱 더 빅쿠라 볼 수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행위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Sn3.9)”라 하셨다. 지금 스님이 고추 밭을 매는 등 농사일을 하고 있다면 농부가 되는 것이다. 지금 스님이 조각을 하고 있다면 그 순간은 스님이 아니라 조각가인 것이다. 이처럼 행위에 의해서 농부가 되기도 하고 상인이 되기도 하고 도둑이 되기도 한다.

 

미얀마에서 스님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방송에서 스님은 어렵게 출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런데 겉 모양은 스님이지만 실질적으로 조각가이자 화가이다. 그래서 스님은 스스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나홀로 토굴에서 살며 고추도 심고, 고사리도 따고, 또 녹차도 만드는 등 새벽부터 밤 늦게 까지 일을 한다고 하였다. 마치 부업이 본업이 된 것처럼 처음 발심출가하였을 때와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마치 이건 아니다와 같은 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대담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진짜 참스님이 되려면 목어를 만든다 이런 것이 참 쓸데 없는 거야. 내가 다음 생에 태어나서 스님으로 수행자로서 태어나고 싶어요. 진짜 다른 생각없이 수행자다운 수행을 하고 싶다 그래서 버마나 네팔이나 그런데서 아주 수행만 하는 곳에서 태어나고 싶은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BBS초대석, S스님, BBS 2014-04-27 다시듣기)

 

 

S스님이 목어 만들기 전문가로 목어를 조각하고 있지만 마음 한켠에는 구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각하는 것에 대하여 참 쓸데 없는 거야라며 말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스님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였다. 그것도 오로지 수행만 하는 수행의 나라라 불리우는 미얀마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하였다.

 

다음 순간 무엇이 일어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S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스님은 출가를 잘 못한 것 같다. 스님이 한국에서 출가하였기 때문에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생에 태어난다면 수행의 나라인 미얀마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하였다. 과연 그렇게 될까?

 

누구나 이 시간 이후를 장담하지 못한다. 내일이 있다고 하여도 오늘 잠들면 내일이 시작 될지 내생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현재 한국에 아잔브람빅쿠가 와 있다. 그래서 법문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법문을 들은 원담스님이 자신의 카페에 소감을 적어 놓은 것이 있다. 올린 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뭄바이(Mumbai, 인도 남부에 있는 큰 도시, 영국 사람들이 봄베이Bombay라고 했다)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려고 택시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도인 택시기사가 시내 지리를 잘 모르는지 같은 곳을 뱅뱅 돌면서 공항으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타고 있던 승객이 화가 점점 올라와 “야이, 멍청한 놈아. 택시 운전사라는 놈이 공항으로 가는 길도 못 찾다니 말이나 되냐?” 어찌어찌 해서 택시가 막 공항근처로 왔을 때는 승객이 타야할 비행기가 방금 이륙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비행기를 놓친 것이죠.

 

승객은 운전수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비행기를 놓쳐서 낙담되기도 하여 기분이 영 잡쳐버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엄청난 굉음이 들리더니 이륙했던 비행기가 폭발하여 땅으로 추락했습니다. 큰 폭발음이 들리는 곳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앰벌런스 경적소리와 비상벨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돌아온 승객이 “아이구, 택시 기사님. 당신이 제 목숨을 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길을 못 찾아 헤맨 것이 의미심장한 하늘의 뜻이 있었습니다그려.” 감개무량하여 기사에게 “여기 100, 아니 300불을 드립니다.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사양반.

 

그렇습니다. 다음 순간 무엇이 일어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하십시오. 지금 삶이 순탄하다면 즐기십시오. 당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한탄하지 마세요. 길을 가다가 개똥을 밟았다면 떼어내려고 애쓰지 마세요. 잘못하면 손까지 더러워집니다. 그냥 개똥을 묻힌 채로 걸어와 자기 집안 정원의 사과나무 밑으로 가세요. 그리고 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개똥을 털어서 거기에 넣으세요. 다음 해 여름쯤이면 그 나무에 사과가 열릴 것입니다. 그 사과는 유난히도 달게 느껴질 것입니다. 개똥이 거름이 되어 사과나무를 기름지게 했으니까요.

 

살다보면 당하게 되는 고난과 역경은 개똥과 같습니다. 개똥을 떼어내려 애쓰지 마세요. 오히려 개똥을 거름으로 재활용하세요. 그러면 맛있는 사과를 따먹을 수 있어요. 삶에서 저지른 실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잘 겪어내면 지혜와 인내심이 길러지고 경륜이 쌓입니다. 모든 것이 거름이 되어 인생의 과실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십시오. 지금 행복하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만족할 수 있습니다.

 

(원담스님, 아잔브람 명상캠프 리포트-4, 2014-05-28)

 

 

원담스님이 아잔브람 빅쿠로부터 들은 법문을 올려 놓은 것이다. 법문의 요지는 다음 순간 무엇이 일어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기대를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는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집중하며 알아차리라는 말이다.

 

발판을 마련해 놓지 않는 한

 

다음 생에 빅쿠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빅쿠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설령 지금 스님으로 살고 있다고 해서 또 다시 스님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있을까? 더구나 수행과는 무관한 일을 하였을 때 가능성이 있을까? 머리는 깍았지만 조각, 그림, 음악, , 음식 등 부업에 열중한다면 스님이 아니라 조각가, 화가, 음악가, 무용가, 쉐프 등으로 불릴 것이다.

 

만일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이전에 하였던 일을 계속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스님이지만 한평생 화가로 살았다면 다음 생에서는 스님이 아니라 화가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Sn3.9)”라 한 것이다.

 

이번 생에 불자로 살았다고 하여도 다음생에 불자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이번 생에 스님으로 살았다고 하여도 역시 다음생에 스님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왜그럴까? ‘발판을 마련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판은 다름 아닌 수다원을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야만 다음생에도 불교와 인연을 맺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여기에서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구체적으로 수행자의 삶의 결실은 어떤 것일까?

 

현세에 결실을 맺어야

 

디가니까야에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에 따르면 현세에 결실을 맺어야 한다고 하였다. 현세를 떠나 내세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대왕이여, 예를 들어, 산꼭대기에 맑고 고요하고 청정한 호수가 있는데, 그 곳에 눈 있는 자가 언덕에 서서 조개류나 모래와 자갈이나 물고기의 무리가 움직이거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호수는 맑고 고요하고 청정하다. 이곳에 조개류나 모래와 자갈이나 물고기의 무리가 움직이거나 서 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마음이 삼매에 들거나 청정해지고 고결해지고 티끌없이 오염을 여의어 유연해지고 적응성이 뛰어나 부동에 도달하여, 마음의 번뇌를 부숨에 대한 궁극의 앎으로 마음을 지향하게 하고 기울이게 하여,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았을 때, 그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무명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궁극의 앎이 일어나며,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압니다.

 

대왕이여, 이것이 또 다른, 현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입니다.

 

대왕이여, 이것과는 다른,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은 없습니다.

 

(Sāmaññaphalasutta-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수행자의 결실은 ‘윤회의 종식’이다. 청정범행을 닦아 더 이상 태어남을 가져오는 업을 짓지 않았을 때 수행자의 삶에 대한 결실은 완성되는 것이라 하였다.

 

책의 출간에 대하여

 

이렇게 본다면 수행하는 것 외 다른 행위는 엉뚱한 짓에 해당된다. 본업인 수행과 포교를 내 팽개친채 취미생활에만 몰두 하는 것은 S스님의 말대로 엉뚱한 짓에 해당된다. 점이나 사주관상을 봐주고,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음식을 만드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이런 식으로 범위를 확대하여 가면 책을 내는 행위 역시 본분과 어긋나는 행위라 볼 수 있다. 출가자에 있어서 책이라는 것은 전승되어온 경전으로 족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고 가격을 매겨 판매하고 더구나 판매된 책에 대하여 인세을 받는다면 출가자의 본분에 어긋나는 것이라 본다. 출가자가 책을 쓰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자는 어떤 경제적 행위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범주에 번역도 포함시킨다면 너무 과도한 것일까?

 

번역승의 경우

 

번역승이 있다. 외국어로 된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스님을 말한다. 이런 번역승은 각국마다 있을 것이다. 먼 과거에는 구마라즙이나 현장스님이 유명하였다. 요즘 영어권에서는 빅쿠보디빅쿠냐마몰리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들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번역하는 것은 빅쿠의 영역이 아니라고 본다. 물론 빅쿠들의 암송에 의하여 가르침이 전승되어 왔고, 빅쿠들이 문자로 기록 하여 가르침이 보전 되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빅쿠들의 번역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번역된 책을 출판하여 값을 매겨 판매하고 이득을 취한다면 빅쿠가 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번역만을 전문으로 하는 자를 번역가라 한다. 번역을 하기 위한 식견과 소양을 갖춘 자를 말한다. 경전 번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번역은 학자나 전문번역가들의 고유영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출가수행승이 오로지 번역에만 매진 한다면 이는 출가자 본분을 망각하는 것이고, 또 한편 번역가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다. 더구나 출가자자가 번역된 것을 책을 만들어 영리를 취한다면 출판인이라 볼 수 있다. 머리 깍은 스님이 현세에 열반실현이라는 본분은 내버려 둔채 번역과 출판에만 몰두 한다면 스님이 아니라 번역가나 출판인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차라리 승복을 벗어라

 

우리나라에서 매년 3월 경에 불교박람회가 열린다. 연등축제에 이어서 또 하나의 불자들의 대잔치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스에 가보면 스님들이 앉아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소위 화가스님을 말한다. 또 사찰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들도 있다. 이런 스님들을 볼 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차라리 승복을 벗어 버리고 전업으로 나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스님이면서 동시에 화가라면 대체 본업은 어떤 것일까? 다음생에 태어나도 다시 스님으로 살아 갈 수 있을까?

 

스님들이 부업을 가지는 것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으로 비추어 지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스님이라 불러야 할지 작가로 불러야 할지 애매모호할 때가 있다. 이렇게 스님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라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차라리 승복을 벗어라!

 

 

2014-05-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