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스님들이 장사하나? 신도를 대상으로 수익사업을 하는 승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2. 14:47

 

스님들이 장사하나? 신도를 대상으로 수익사업을 하는 승가

 

 

 

스님들이 장사를 하다니!

 

최근 교계신문사이트에 따르면 조계종에서 단행된 인사소식을 짤막하게 전하고 있다. 그 중 눈에 띈 것은 수익사업담당 종책특보에 설암 스님(전 사회국장), 사찰음식 담당 종책특보에 대안 스님이 임명됐다.(불교닷컴, 2014-05-30)”라는 내용이다. 불교와 전혀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수익사업이라는 말이 충격을 준다. 수익사업이란 좋게 말하면 비즈니스이고, 천박하게 말하면 장사를 뜻하기 때문이다.

 

종교단체에서 장사를 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불자들은 스님들이 마치 이슬만 먹고 살고 화장실도 가지 않을 것 같은 성스런 존재로 여긴다. 그런데 신도를 대상으로 장사를 한다니 이게 왠말인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서는 오래 전부터 장사를 해 왔다. 특히 자승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문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본격화 되었다. 장례사업, 생수사업, 음식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폐업을 결정한 사찰음식전문점

 

조계종단에서는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하고 있는 사업은 잘 되고 있을까? 여러가지 사업을 하고 있는 승단에서 음식과 관련된 사업이 있다. 사찰음식이다. 그렇다면 사찰음식사업은 얼마나 잘 되고 있을까? 교계신문사이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대한불교조계종 국제선센터 1층에 입주한 발우공양 공감(대표 대안 스님)이 끝내 폐업했다. 2011 5 4일 문을 연 이후 33개월 만에 적자가 가중되면서 지난 21일 문을 닫았다. 조계종 총무원과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은 종무회의 등을 거쳐 지난해 12월 말 폐업을 결정했다.

발우공양 공감 폐업 원인은 적자였다. 개점이후 폐업 결정 때까지 적자 폭이 약 6,000만원에 달했다. 지난해에만 약 4,000만 원 이상 적자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선센터는 1층에 입주한 발우공양 공감이 수익을 내지 못하고 관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판단, 지난해 10월말발우공양 공감 사업 종료를 총무원과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협조를 요청했다.총무원, 한국불교문화사업단, 국제선센터 관계자들이 실무차원에서 검토한 뒤 사업단장과 선센터 주지도 이 문제를 논의했다.

총무원은 지난해 12월 초 부·실장 간담회를 거쳐 폐업안을 종무회의에 상정키로 했고, 12 24일 종무회의에서 최종 폐업이 결의됐다. 총무원과 사업단은 1월초 발우공양 공감 관리인 대안 스님에게 폐업에 따른 협약 해지를 통보하고 1 21일 최종 폐업했다.

발우공양 공감은 국제선센터 1층 약 70평의 공간에 80석 규모로 문을 열었다. 위탁관리는 금당사찰음식문화원(원장 대안 스님)이 맡았다.

 

(국제선센터 발우공양 공감 ‘폐업’, 불교닷컴 2014-02-06)

 

 

기사에 따르면 국제선센터 내부에 있는 사찰음식전문점이 폐쇄 되었다고 한다. 원인은 누적된 적자에 따른 것이라 한다. 한마디로 장사가 안되어서 문을 닫았다고 볼 수 있다.

 

사찰음식전문점은 조계종총무원에서 사활을 걸다시피 추진하는 사업이다. 자승총무원장스님이 뉴욕과 파리에서도 사찰음식을 선 보였고, 사찰음식에 대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키우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에 사찰음식전문점을 내고자 프랑스의 유명 업체와 협의도 있었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키우고자 하였던 것이 사찰음식이다. 그런데 총무원에서 설립한 사찰음식전문점이 찾는 이들이 없어서 폐업 되었다니 장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조계종총무원에 직영하는 수익사업

 

조계종에서 추진하는 수익사업에 대한 비판의 글을 여러 차례 올렸다. 블로그내 검색을 하여 보면 ‘1) 조계종 총무원은 종교단체인가 이익단체인가(2012-06-21), 2) 수익사업에 뛰어든 스님들과 승단(2013-01-19), 3) K팝처럼 한류열풍을 기대한다고, 총무원의 사찰음식 대중화(2011-08-09)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글을 통하여 과연 종교단체가 신도들을 대상으로 해서 장사를 해도 되는지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으로 글을 올렸다. 그렇다면 현재 조계종총무원에서 직영하고 있는 수익사업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No

사 업

   

  

1

생수사업

-'산은 산이요 물은 감이로다'란 상표

-산업재산권(상표등록)을 특허청에 출원함

-하이트진로그룹 '석수&퓨리스'와 함께 생수를 판매 계약

-500ml, 2L,18.9L 생수 3

-전국의 조계종 소속 사찰 불교용품점 등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판매

-자승스님의 적극홍보

2

사찰음식사업

- 사찰음식교육관 ‘향적세계(香積世界)’ 운영 (국제선센터의 지하)

- 프랜차이즈 사업 개시(현재 3호점)

-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갈르리 라파예트 본관에서 한국 사찰음식을 전시 · 판매할 계획

- 조계종 문화사업단에서 추진

-총무원장의 뉴욕과 파리 방문시 사찰음식 적극 홍보

3

상조사업

-재향군인상조회와 ()향군가족 과 영업협약체결

도심사찰을 중심으로 가입캠페인 벌임

4

출판사업

-조계종출판사를  주식회사로 전환

- 종단의 인쇄물을 모두 조계종출판사를 통해 제작

-불교 서적 전문총판인 운주사와 법우당 등에 총판 사업 업무 제휴

-전국 100여 곳에 달하는 사찰 내 서점에 불교 서적을 공급 계획

출처조계종 총무원은 종교단체인가 이익단체인가(2012-06-21)

 

 

이 표는 2012년에 작성된 것이다. 표를 보면 조계종총무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은 크게 생수사업, 사찰음식사업, 상조사업, 출판사업 이렇게 네 가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중 사찰음식사업에 대단히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래서 총무원에서 직영하는 사찰음식직영점이 조계사 앞에도 있고 신정동 국제선센터 앞에도 있다.

 

사찰음식점에서 술도

 

그런데 총무원직영음식점에서는 청결한 사찰음식만 파는 것이 아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식사와 곁들이는 반주도 이곳에서는 조금 더 특별하다. 일반 주류가 아닌 곡차다. (절집 밥상… 곡차 한잔… 오묘한 法華 깨달음, 이코노미리뷰 2011, 5.13)”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사찰음식점에서 술도 팔고 있는 것이다. 술은 불자들이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찰음식전문점에서 술을 팔다니 이래도 되는 것일까?

 

유별난 스님들

 

우리나라 스님들은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등 못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일까 TV를 보면 종종 유별난 스님들이 출연한다. 이를 저속하게 표현하면 별종스님들이다. 남보다 튀어야 돋보이듯이 별난 행동을 하는 스님들이 예능계에서는 특종대상인가 보다.

 

별종은 신부나 목사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TV에서 신부나 목사들이 별종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스님들은 유별나다. 머리를 깍고 승복을 걸쳤다면 인천의 스승으로서 위의를 갖추어야 하나 마치 연예인들이 장기를 자랑하는 것처럼 개인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세상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들

 

스님들은 이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들이다. 부모형제와도 인연을 끊고 새롭게 살아 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머리를 깍는 순간 이전의 자신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머리를 깍고 회색승복을 걸쳤다는 것은 다시태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출가라는 것은 이전의 자신은 죽었고, 출가를 통하여 거듭태어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이유 내지 출가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속사람들이 하는 장사를 한다니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세상에서도 그다지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일에 대한 것이다. 점을 보고, 사주관상을 보고, 음악을 하고, 미술을 하고, 무용을 하고, 음식을 하는 등 세상사람들이나 해야 할 일들을 스님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서 그것도 총무원에서 직접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생수사업, 사찰음식사업, 상조사업, 출판사업을 말한다.

 

어떤 근거로 수익사업에 뛰어 든 것인가?

 

그렇다면 조계종총무원에서는 어떤 근거로 수익사업에 뛰어 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불교포커스에 올려진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조계종수익사업 컨설턴트회사의 대표가 쓴 글이다. 글에 따르면 불교계가 수익사업을 진행할 때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것을 열거 하였다. 주요골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사업이 불조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가.
둘째, 그 사업에 불교의 가치와 철학을 담고 있는가.
셋째, 사업을 통해 대중을 선도하거나 포교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가.
넷째, 그 사업이 사회에 대한 기여와 봉사 등의 공익성을 띄고 있는가.
다섯째, 사람과 일을 조직하고 키워가는 사업인가.
마지막으로 명분이 있는 사업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적 수익모델의 - 종단 수익사업에 대한 생각 3, 불교포커스 2011-03-31)

 

 

이 글은 경영컨설팅 산림(山林)’의 대표인 김관태님이 작성한 글이다. 주로 사찰의 경영컨설턴트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사찰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글을 보면 불교수익사업 당위성에 대하여 여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마지막 항목에 명분이 있는 사업인가?”라는 말이 있다. 현재 조계종총무원이 생수사업, 사찰음식사업, 상조사업, 출판사업 등을 하고 있는데 이런 사업을 하는 것이 과연 명분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가격에도 중도(中道)가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을 하던지 목적이 있어야 한다. 사업을 한다면 매출을 극대화하고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갖가지 전략과 경영기법이 도입된다. 이처럼 돈벌기선수들이 모여서 하는 것이 비즈니스이다. 그럼에도 출가수행자들이 수익사업에 뛰어 들었다니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비즈니스는 철저하게 주고받는 행위이다.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 자체가 주고받기(Give & Take)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주고받기를 잘 해야 거래가 성립 될 수 있다. 그것은 가격으로 나타난다.

 

스님들이 장사를 한다는데 가격을 어떻게 책정할까? 상당히 궁금한 사항이다. 그러나 의외로 간단하다. 사업을 추진하는 스님에 따르면 불교적 해법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부처님이 강조하신 중도라 한다. 중도의 정신으로 가격을 매기면 성공적으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가격중도라 하였다.

 

가격중도란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도사상을 적용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 가격중도의 예가 하나 있다.

 

가격중도로 결정된 국수값이 4,000

 

조계사에 가면 조계종총무원에서 직영하는 국수집이 있다. 이름하여 승소(僧笑)’라 한다. 국수는 수도승도 미소 짓게 할 정도로 스님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 한다. 그렇다면 가격은 얼마나 될까? 실제로 가서 먹어 보았다.

 

승소의 국수가격은 4,000원이다. 국수를 기본으로 하지만 밥은 자유롭게 셀프로 먹을 수 있다. 그래서 한끼 식사로도 가능하다.

 

 

 

 

 

국수맛은 어떨까? 시중에서 먹는 국수맛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4,000원으로 가격을  정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된 가격중도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몇 해전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승려도박사건 주인공중의 하나인 T스님은 가격중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승소의 메뉴는 비빔국수, 열무국수, 미역옹심이국수 등 세 가지다. 식당에서 직접 파는 게 아니라, 조계사를 방문해 매점에서 파는 식권을 사와야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사찰 구내식당이다. 한 그릇 값은 4000. 비싼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공짜도 아니다. 토진 스님의 독특한 '중도(中道) 실천 생산불교' 주장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중도'란 유()와 무(), ()와 낙() 등의 대립과 집착을 떠나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국수 한그릇에 담은 中道… 탐욕 빼고 깨달음 팔다, 오마이뉴스 2011-07-22)

 

 

T스님은 국수가격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적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국수 한 그룻에 4,000원을 책정하였다고 한다.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고 가르침을 모독하는

 

국수한그릇에 4,000원이라는 금액은 사람에 따라 많다고 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적당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싼 값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찰에서 파는 음식치고는 그다지 싼편이 아니다. 시중에서는 3,000원부터 국수가격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시중에는 첨가되는 재료에 따라 4000원 이상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총무원직영점에서 운영하는 가격중도라는 것은 중간값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사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만일 가격중도에 대하여 중간값 개념으로 본다면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중간길로 되어 버린다. 3차로가 있을 때 중간길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중간길이 아니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중간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길을 의미하다. 그 바른길이 바로 팔정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S56.11)”라 하였다. 그럼에도 음식가격을 매기는데 있어서 양극단을 거론하며 가격중도운운한다면 이는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부처님에 대한 모독이라 본다.

 

명분으로 삼은 부처님의 전도선언

 

사찰경영컨설턴트 전문업체 대표에 따르면 종단에서 수익사업을 추진 할 때 그 사업이 불조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가?”등 여섯 가지 사항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종단에서 수익사업을 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경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컨설턴트는 전도선언을 소개 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포교를 명하신 전도 선언에서 무슨 사업의 기준이 있을까 의아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전도 선언을 곰곰이 살펴보면 그 안에 불교라는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인가,
둘째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
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한 것인가,
셋째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것인가,
넷째조리와 표현을 갖춘것인가,
다섯째원만 무결하고 청정한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일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그로 인해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적 수익모델의 - 종단 수익사업에 대한 생각 3, 불교포커스 2011-03-31)

 

 

어떤 일이든지 명분이 있어야 한다. 특히 불교에서 수익모델을 선정하여 사업화 하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명분으로 삼은 것이 부처님의 전도선언이다.

 

전도선언은 ‘1)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 2)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 3)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4) 조리와 표현을 갖춘, 5)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6)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렇게 여섯 가지로 요약된다. 이 조건에 맞아야 사찰수익사업에 적합한 아이템이라는 것이다.

 

종단수익사업을 위한 당위성은?

 

그렇다면 이 여섯 가지 사항에 대하여 어떤 명분을 부여 하였을까? 컨설턴트의 글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No

전도선언(S4.5)

수익사업당위성

1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

공익성을 띄고 있어야 함

2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

자연과 환경에 문제가 없어야함

3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시작과 결말이 모두 좋아야 함

4

조리와 표현을 갖춘

명분이 있어야 함

5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

6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

-

 

 

총 여섯 항목에 대하여 네 가지에 대하여 수익사업당위성을 제시 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억지춘향격이다. 억지춘향이라는 말이 원치 않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함을 이르는 말이지만, 조계종의 수익사업당위성을 보면 억지당위성이 엿보인다. 장사 또는 비즈니스를 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억지로 꿰어 맞춘 것에 불과하다. 특히 세 번째 항의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에 대하여 시작과 결말이 모두 좋아야 함이라 한 것은 가격중도를 연상케 할 정도로 부처님 말씀을 왜곡한 것이다.

 

전도선언의 본래 의미는?

 

조계종총무원에서 수익사업당위성을 위하여 활용하고자 하였던 전도선언의 본래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선언문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Caratha bhikkhave cārik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 Mā ekena dve agamittha. Desetha bhikkhave dhamma ādikalyāa majjhekalyāa pariyosānakalyāa sāttha sabyañjana kevalaparipuṇṇa parisuddha brahmacariya pakāsetha.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

 

(Dutiyamārapāsasutta-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S4:5, 전재성님역)

 

 

초불연 각묵스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유행을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법을 설하라.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한 [법을 설하고],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내어라.

 

(Dutiyamārapāsasutta-마라의 올가미 경, 상윳따니까야S4:5, 각묵스님역)

 

 

같은 부분에 대하여 빅쿠보디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Wander forth, 0 bhikkhus, for the welfare of the multitude, for the happiness of the multitude, out of compassion for the world, for the good, welfare, and happiness of devas and humans. Let not two go the same way. Teach, 0 bhikkhus, the Dhamma that is good in the beginning, good in the middle, good in the end, with the right meaning and phrasing. Reveal the perfectly complete and purified holy life.

 

(Mdra's Snare, CDB S4.5, 빅쿠보디역)

 

 

 

불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선언문에 여러 가지 전도요청사항이 있다. 그 중에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ādikalyāa majjhekalyāa pariyosānakalyāa)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성전협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에서 처음은 계행, 가운데는 멈춤과 통찰과 길, 마지막은 경지와 열반을 말한다. (Srp.I.172)”라고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처럼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라는 말은 단지 좋은 말이라는 표현이라기 보다 빠짐 없이 가르침을 전달하는 말과 같다. 이는 불교의 목적이 단순하게 행복을 추구한다라기 보다 궁극적으로 열반에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CDB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Spk explains the threefold goodness of the Dhamma in various ways pertaining both to practice and doctrine. For example, virtue is the beginning; serenity, insight, and the path are the middle; the fruits and Nibbiina are the end;

 

 

(CDB 273번 각주, 빅쿠보디)

 

 

이렇게 주석에서는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라는 말에 대하여 처음은 계행, 가운데는 멈춤과 통찰과 길, 마지막은 경지와 열반을 말한다라고 설명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도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전도선언을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율장(Vin,i.20)에서는 위 마라의 올가미경’1(S4.4)에 해당하는 가르침의 앞에 본경이 나타나고 있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율장에서 전도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초불연 번역서에는 율장에 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최근 성전협에서는 율장이 번역되어 출간 되었다. 율장 대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이 그 존자들에게 구족계가 되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그들 수행승들에게 법문으로 교화하고 가르침을 주었다. 세존께서 법문으로 교화하고 가르침을 주자, 그들의 마음은 집착없이 번뇌로부터 해탈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 때 예순한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

 

(율장대품, 오십명의 재가친구 출가이야기, 전재성님역)

 

 

이것이 전도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야사와 야사의 친구가 출가함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모두 아라한이 되었을 때 경에 따르면 예순한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라 하였다. 61명에는 부처님도 포함되어 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번뇌 다한 거룩한 성자들이 전도사가 되어 법을 전파하였을 때 그 영향은 어떤 것일까?

 

거룩한 사람을 접하였을 때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을 접하였을 때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그것은 인품이나 인격뿐만 아니라 청정한 기운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거룩한 사람 앞에서면 그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 자체만으로 커다란 희열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 다한 아라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아라한에 대한 번역어가 있다. 전재성님은 거룩한 님이라 하였다. 번뇌가 다하여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성자로서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한역경전 그대로 아라한이라 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그 자체와 같다. 그런데 거룩한 님이라 하였을 때 그 어감이 다르다. 거룩한 자는 바로 성스런 자, 성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하였을까?

 

61명은 모두 아라한들이다. 부처님을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들은 모두 거룩한 님들이다. 이런 거룩한 님들에게 부처님은 전도명령을 내렸다. 단 조건이 있다. 그것은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Mā ekena dve agamittha)”라 하였다. 부처님은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 지식 Q&A를 보니 다음과 같은 답이 있다.

 

 

1) 같은 길을 가지 마라고 하신 것은 가급적인 서로 다른 곳으로 가서 보다 많은 중생들에게 법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2) 둘이 함께 같은 길을 가지마라, 고 하신 말씀은 그만큼 열심히 포교하라는 뜻으로 해석하시면됩니다.

 

3) 둘이 함께 가지 말라는 것은 가르침의 이치를 달리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가르침의 이치가 같고 도달한 목적지가 같다면 둘이 아니라 백명이 함께 한들 무슨 다툼이 있겠습니까?

 

(둘이 같은길을 가지마라?, 다음 지식 Q&A)

 

 

둘이서 함께 같은 길을 가지 말라는 것에 대하여 세 가지 답이 있다. 첫번째 것을 보면 가급적 널리 포교하기 위한 방법이라 한다. 두번째는 혼자서 열심히 포교하라는 의미라 한다. 세번째는 교리에 대하여 다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마쓰다니 후미오의 견해는?

 

둘이서 한길로 함께 가지말라는 것에 대하여 일본불교학자 마쓰다니 후미오의 견해가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이런 것과 비교해 볼 때 "둘이서 한 길을 가지 말라."는 붓다의 말씀의 뜻도 스스로 명백해진다. 여기에는 박해의 예상이란 조금도 없었음이 확실하다. 오직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가는 것이니까. 또 사람들이 그들을 공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도 생각되어 있지 않다. 오직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이 법은 설해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런 전도의 정신은 붓다의 전 생애를 일관하여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또 수천 년에 걸친 불교의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불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 전파 되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 전도는 평화와 환영 속에 수행 되었고, 불교의 이름 밑에 피를 흘린 역사는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두가 교조 붓다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마쓰다니 후미오)

 

 

마쓰다니 후미오에 따르면 홀로 떠나는 것에 대하여 박해가 예상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기독교에서 둘씩 둘씩 보내시며라는 말과 대조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혼자 전도를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이기 때문이라 한다. 한손에는 코란, 한손에는 칼을 들도 포교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룩한 사람을 보았을 때

 

둘이서 한길로 함께 가지말라는 것에 대하여 인터넷 지식사이트와 마쓰다니 후미오의 견해를 보았다. 개인적인 견해를 들라면 이렇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를 명령하였다. 그런데 전도명령을 받은 자들은 모두 아라한들이다. 거룩한 님들이다. 그런데 거룩한 사람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람들은 거룩한 모습을 접하였을 때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질 것이다. 그리고 희열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도효과는 이미 달성된 것과 다름 없다. 그럴 경우 둘이서 떠날 필요가 없다. 혼자 떠나서 전도하여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Mā ekena dve agamittha)”라 하였다. 모두 아라한이기 때문에 굳이 둘이서 다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할 수 있도록

 

부처님은 둘이서 함께 같은 길을 가지말라고 하였다. 이는 아라한 한명으로도 교화가 충분함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아라한들이 이미 준비된 자임을 뜻한다. 이미 알만큼 알고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홀로 출발해도 충분한 것이다. 이는 아라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율장대품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전도선언 이전의 경에서 세존께서는 그들 수행승들에게 법문으로 교화하고 가르침을 주었다.(율장대품)”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60명의 아라한들은 이미 부처님으로부터 교화방법에 대하여 배운 것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법문으로 교화하고 가르침을 주어 깨달았듯이,  아라한들 역시 전도지에서 똑 같은 방식으로 법문을 하고 교화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둘이서 갈 필요가 없다. 그런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전도선언에 설명되어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ādikalyāa majjhekalyāa pariyosānakalyāa, S4.5)이라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할 수 있는 가르침을 펼치라는 것이다.

 

왜 가르침을 빠짐없이 전해야 하는가

 

전도선언에서 중요한 말이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훌륭한 가르침이다. 이를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전재성님역)” 또는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각묵스님역)” 또는 “with the right meaning and phrasing (바른 의미와 어법과 함께, 빅쿠보디역)”라고 볼 수 있으나 더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빠짐 없이 가르침을 설하라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계정혜삼학과 열반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차제설법을 뜻한다. 초심자에게는 도덕적이고 봉사하는 삶에 대한  시계생천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무르익으면 사성제와 같은 근본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오로지 보시만 강조하여 시계생천가르침에 머문다면 이는 전도선언의 정신에 어긋난다. 절에 10, 20, 30년을 다녀도 오로지 보시만 이야기 할 뿐 사성제나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가르침을 설하라고 특별주문 하였던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전달하라는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디가니까야에서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는 전도선언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나 율장대품에서는 볼 수 없는 문구가 추가 되어 있다. 그것은 어떤 내용일까?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tasmātiha bhikkhave ye te 2 mayā dhammā abhiññā desitā, te vo sādhuka uggahetvā āsevitabbā bhāvetabbā bahulīkātabbā yathayida brahmacariya addhaniya assa ciraṭṭhitika.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

 

katame ca te bhikkhave dhammā mayā abhiññā3 desitā, ye vo4 sādhuka uggahetvā āsevitabbā bhāvetabbā bahulīkātabbā yathayida brahmacariya addhaniya assa ciraṭṭhitika.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 Seyyathīda,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attāro sammappadhānā, cattāro iddhipādā pañcindriyāni, pañcabalāni. Satta bojjhagā, ariyo aṭṭhagiko maggo.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그대들은 그것을 잘 배워서 곧 청정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어떠한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그대들이 그것을 잘 배워서 곧 청정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네 가지 새김의 토대, 네 가지 올바른 노력, 네 가지 신통의 기초, 다섯 가지 능력, 다섯 가지 힘,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은 37조도품에 대하여 말씀 하시고 있다. 그런데 이전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있어서 전도선언과 비슷하다. 그러나 전도선언과 다른 점은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어떻게 닦고 실천해야 될 것인가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도선언의 목적에 대하여 대부분 중생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이는 선언문에서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bahujanasukhāya)”라는 문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자가 전도할 수 없다. 계행이 엉망인자가 전도한다고 하였을 때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계행을 잘 지키는 자라고 할지라도 지혜가 없는 자 역시 가르침을 설할 자격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계정혜 삼학이 완성된 자이어야만 가르침을 제대로 전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디가니까야에서는 어떻게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물의면서 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 를 시작으로 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인 37조도품을 닦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전도선언이라는 것이 단지 부처님의 말씀을 빠짐 없이 전달하는 것을 넘어 전도자 자신이 성자의 반열에 들어가야 함을 말한다. 그래야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장사꾼, 승가는 이익단체

 

조계종에서 수익사업을 하고 있다. 종교단체도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생수사업, 사찰음식사업, 상조사업, 출판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들 사업은 총무원에서 직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발한 신조어가 탄생하고 있다. ‘가격중도로 하여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패러디 하고 있는가 하면,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수익사업에 진출한 당위성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모독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부처님가르침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수행자와 승단은 어떠한 수익사업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일 스님들 누구나 수익사업을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수행자라 볼 수 없다. 만일 수행자가 장사를 한다면 그는 장사꾼이지 더 이상 수행자가 아니다. 이는 “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 행위로 인해 상인이 되고 ,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Sn3.9)”라는 가르침이 말해 준다. 더구나 종단에서는 대규모 생수사업, 사찰음식사업, 상조사업, 출판사업 등 직영사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더 이상 불교종단이라 볼 수 없다. 하나의 사업체를 꾸려 가는 이익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가르침을 왜곡하여 수익사업을 벌이고 있다면, 스님들은 장사꾼이고 종단은 이익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신도들을 대상으로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

 

신도를 대상으로 장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전혀 맞지 않는다. 또 수행과 포교라는 본분에 어긋나는 일이다. 부처님은 스님들에게 수행하고 포교하라고 명령하였지 장사하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에 표현된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Ime kho bhikkhave dhammā mayā abhiññā desitā. Te vo sādhuka uggahetvā āsevitabbā bahulīkātabbā yathāyida brahmacariya addhaniya assa ciraṭṭhitika,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nti.

 

수행승들이여,

내가 이러한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그대들이 그것을 잘 배워서 곧,

청정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한다.”(D16. 94)

 

 

이렇게 본다면 청정한 삶을 사는 것 자체가 포교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청정한 삶을 살아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중생들에 대한 이익과 행복이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열반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뭇삶들도 고통에서 해방되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르침을 따르면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불쌍히 여겨라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님에게 공양하였을 때 커다란 공덕을 지을 것이다. 그래서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길로 가신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 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 (stn227)”라 하였다. ‘복밭(福田, puññakkhetta)’이 되면 공양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굳이 스님들이 부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승가에서는 소탐대실만 초래하는 수익사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014-06-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