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10. 12:26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부처님의 준엄한 명령

 

 

 

시간이 남으면 무엇을 할까?

 

시간이 남으면 무엇을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유익하게 보내려 할 것이다. 미래를 위하여 자기계발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을 위하여 운동에 열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TV를 보면서 지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독서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나에게 서너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까? 지체없이 글을 쓴다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글은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잘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바삐 사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갑자기 시간이 남아 돌았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 TV시청 등으로 무기력하고 소극적으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늘 글쓰기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서너 시간이 주어진다면 글쓰기 좋은 시간이다. 그 시간이면 글이 한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틀 연속으로 글을 못 올렸을 때

 

매일 글을 쓰다가 글을 못쓰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이틀 연속으로 못 쓸 때가 있다. 그럴 경우 방문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같은 빌딩에 작은회사를 꾸려 가는 사장이 있다. 말이 사장이지 직원 세 명과 함께 일하고 있는 미니사장이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일인사업자라도 사장이라 불러 준다. 그래서일까 사람이 혼잡한 거리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사장님!”하고 부르면 뒤돌아 쳐다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큰 회사의 사장도 사장이고 일인사업자도 사장이라 부른다.

 

그 사장이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일감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이틀 동안 글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으로 이 사람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고 궁금하였다는 것이다.

 

그 사장에게 블로그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다. 다만 일 때문에 만난 관계이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무실에 사부니까야와 법구경, 숫따니빠따 등 초기경전이 책장에 그득한 것을 보고서 일도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보고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검색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알려 주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검색하여 글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장이 불교신자는 아니다. 무종교인이지만 이야기를 해 보면 불교와 정서가 가깝다. 그래서 만나면 일 이야기 하는 것 만 아니라 불교이야기도 많이 한다.

 

그 사장은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주로 듣는 입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신이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종종 커피 한잔 하러 내려 가도 될까요?”하는 문자가 온다.

 

처음 들어 온 이가 남긴 글

 

그 사장이 지금 이 글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있는 것 같다. 법우님들도 있고 친구도 있다.

 

최근 학교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더 이상 회사에 취업할 수 없어서 보험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장차림으로 나타난 그와 식사도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 도중에 블로그를 한 때 열심히 보았다고 하였다. 친구들에게 블로그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면 있는 사람들이 블로그를 꾸준히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면이 없는 사람들도 꾸준히 블로그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이는 종종 댓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들어 오는 이들도 있다.

 

그동안 쓴 글이 2500개 가량 된다. 그것도 최근에는 썼다 하면 A4로 열 장 가까이 되기 때문에 검색하면 대부분 걸리게끔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불교와 근본주의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생입니다. 어릴때야 그냥 학교가서 공부하고 놀고 먹는게 다인줄 알았는데, 자라면서 책도읽고 생각도 하게되고 하다보니 세상의 진리에 대해 궁금해지기도 하고, 겪는 여러가지 일에 다양한 감정과 고통을 느끼면서 또 생각을 하게 되면서 어떤 '목마름'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걸 가지고 보통 사람들이 '정신적 방황을 한다' 라고 하지요.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하나씩 가지고 그것을 열렬히 믿으며 불안을 잠재우려 하기 마련인데, 때문에 저도 철학과 사상이나 다른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았습니다만, 역시 크면서 '이 세상에 확실한 어떤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알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 이것도 관두게 되었습니다만 오히려 그 때문에 마음이 늘 심란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목하게 된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입니다. 이전까지는 불교는 그냥 절에가서 절하고 시주하고 천도재 지내고 그런게 전부인줄 알았는데 고등학교때, 윤리와 사상 시간에 불교에 대해 아주 얇게나마 알게 되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이 고통에 가득찼다는 표현이 매우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제가 어떤 진리도 알지 못함으로 고통받는 것도 이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 알아보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고통에 가득 차 있고, 석가모니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결법을 제시했다' 라고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문제는, 이 불교라는 것도 사실 들여다 보니까 참 복잡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불교 사상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최근에는 보니 '대승비불설' 이라고 해서 대승불교의 사상과 세계관이 모두 거짓이다라고 하여 또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에 주목할텐데, 불보살이 어떻고 과거와 미래가 어떻고, 무슨세계에 용이니 천신이니 아수라니 제석천이니 하는 것들을 이야기 했을리가 없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석가모니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으니 이 또한 짐작일 뿐 알수가 없습니다.

 

(A법우님)

 

 

글을 주신 법우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렇게 인사말과 함께 장문의 글을 올린다는 것은 관심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 양해를 빌며

 

법우님은 비밀댓글로 글을 주었다. 최근 댓글금지로 하여 글을 쓰고 있지만 한달 이전에 올려진 글은 댓글을 쓸 수 있고 또한 스크랩도 가능하다.

 

먼저 법우님에게 양해를 빈다. 그것은 글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이렇게 공개하게 된 것은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나 교리에 대하여 혼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라 판단해서이다.

 

글을 주신 법우님은 현재 대학생이라 하였다. 이렇게 청년이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을 매우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기독교가 대세이고 또한 기독교국가화 되고 있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제시는 불교만한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우님의 글을 읽어 보면 왜 불교가 필요한 종교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에서

 

지금 당면한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에 대한 물음을 불교에서는 제시하고 있다. 법우님도 마찬가지로 세상이 고통에 가득 찼다는 표현이 매우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라 볼 수 있다. 사성제는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우님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법우님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에서 표현 된 것처럼 대승불교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인데 대승에서는 근본 가르침과 달리 불보살이 등장 하는 등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법우님은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아마 내세윤회에 대한 것이라 본다. 그래서 법우님은 괴로움에 대한 사성제 하나면 되었지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과학으로 증명 되지도 않는 것들에 대하여 의문시하고 있는 듯하다.

 

6개항 질문을 보면

 

이와 같이 법우님은 자기소개와 함께 자신의 겪고 있는 사상적 혼란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6개항에 달하는 질문을 하였다.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1.
석가모니가 말한 '깨달음'이 곧 지금의 불교교리(백과사전이나 책 등에서 설명하고 있는)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2.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과 열반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해탈을 하면 마치 초월자가 된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데, 진정한 해탈은 어떠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3.
불교의 교파(상좌부, 대승...)가 너무나 많습니다. 다 떠나서, 현재 석가모니께서 당대에 친설하신 내용이라고 가장 신뢰되는 것은 무엇이며 제가 어디서 접하거나 볼 수 있겠습니까?

4.
석가모니께서 현실적 깨달음 이외에 초월적 존재들이나 비현실적 세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혹은 그것을 말씀하셨다 하시면 비유적 표현입니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게 있다고 하신것입니까? (ex 석가모니 본인 이외의 부처들, 보살들, 팔부신중, 천왕등... 윤회, 33, 극락 등등)

5.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상과 여러 종교가 존재합니다. 다른 종교와 사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현실적 관점으로 봤을때 각자의 것을 믿으면서도 공존하면서 돕는것이 옳은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6.
석가모니께서 생존에 근본주의를 불식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근본주의와 데바닷타의 근본주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A법우님)

 

 

6개항의 질문을 보면 법우님은 이미 불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질문내용과 사용된 용어가 이를 말해 준다. 이런 질문에 즉답을 하지 못하였다. 6개항에 대한 답신을 하려면 짧은 시간에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로그내 검색창을 활용하라고 권고 하였다.

 

블로그내 검색창을 활용하라고

 

블로그안에 검색창이 있다. 블로그에 올려진 모든 글을 이 검색창을 이용하여 찾을 수 있다. 글을 쓰면서 이 검색창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면 오래 전에 올렸던 글도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그래서 이전에 올렸던 글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보면 자기표절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이 논문 쓰는 것도 아니고 학회에 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게의치 않는다. 왜나하면 이 블로그에 있는 글은 보통불자의 삼류 B급에 해당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보통불자의 삼류 B급 글쓰기

 

삼류 B급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 하였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비주류이다. 그래서 비주류, 삼류, B이다. 왜 그런가?

 

현재 한국불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비주류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주류인 마하야나에 비하여 비주류라 볼 수 있다.

 

삼류라 한 것은 스님도 학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은 일류이다. 아무리 계행이 엉망이어도 승복만 걸치면 승복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누구나 우러러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학자들은 일류 다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PHD(박사)일지라도 스님아래에 해당된다. 이는 비구위주의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스님도 아니고 그렇다고 PHD가 있어서 학자도 아닌 것이 글을 쓰고 있다. 이런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비난도 하고 비방도 하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스님도 아닌 것이 학자도 아닌 것이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오직 쓸뿐!”이다. 다만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하여 쓸 뿐이다. 이렇게 스님도 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삼류이다.

 

다음으로 B급이라 하였다. 글쓰기가 B급인 이유는 법문도 아니고 논문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쓰기 특별한 형식이 없다.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다. 글과 함께 사진도 싣고 동영상도 올린다. 그리고 음악동영상을 만들고 음원을 링크도 시켜 놓는다. 이렇게 자유롭게 글을 쓰지만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하여 쓴다. 그러나 주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삼류이고 B급이라 할 것이다.

 

네 번째 질문, 초월적존재와 비현실적 이야기들

 

6개항의 질문에 대하여 블로그내 검색창을 활용하라고 하였다. 사실 6개항의 질문 내용을 보면 오래 전부터 관심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6개항이 블로그에 올린 글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개항의 질문중에 네 번째에 주목한다. 부처님이 현실적 고통을 떠나 다른 가르침에 대하여 말하신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초월적존재나 비현실적 이야기들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있다. 그 중에 예로 든 것을 보면 윤회도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우님의 글을 접하고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우려스럽기도 하였다. 반가운 것은 청년층에서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도 마하야나가 아니라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근본불교를 말한다. 그런데 법우님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초월과 신비, 비현실적 이야기 등에 대하여 혼란 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우려스런 일이다.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다닐때이다. 불교종립중학교에 배정 되어 들어 간 것이 불교와의 첫인연이다. 그런데 중학교 불교시간에 배우던 교재에는 부처님일생위주이다. 불보살이나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이야기, 비현실적 이야기는 없었다.

 

중학교에서 부처님 일생 위주로 배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성제나 십이연기 등 근본 가르침 위주가 된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을 받아 들이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럼에도 그런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알았다는 것은 큰 수확이라 본다. 비록 그 당시에 사성제에 대하여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랐으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불교라는 사실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았다.

 

이렇게 중학교 시절 불교를 접하고 한동안 불교와 인연이 없었다. 그러다가 정확하게 십년전인 2004년에 다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도심포교당에서 운영하는 불교교양대학이다.

 

그런데 불교대학에서 접한 불교는 중학교 당시 배우던 불교와는 많이 달랐다. 관세음보살을 찾고 기도 위주의 불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받아 들였다. 그러나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쓰면서 이것 저것 검색도 하는 과정에서 초기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후 오로지 초기불교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니까야를 중심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초기경전을 근거로 글을 쓰면서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뿐만 아니라 초월적존재나 비현실적 내용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

 

빠알리니까야에는 하늘사람(Devata)나 악마(Mara)나 하느님(Brahma) 등 초월적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특히 상윳따니까야 1권에는 이들을 주제로 하여 경이 구성되어 있다.

 

경전에서 초월적인 존재들이 등장한다고 하여 있을 수 없는 허구나 거짓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받아 들이는 것이다.

 

누군가 이들 초월적 존재가 후대에 지어낸 것이라거나 과학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확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부정한다면 자신만 손해일 것이다. 왜 그런가? 니까야에 초월적존재가 등장하고, 육도윤회와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기설법(對機說法, pariyāya-desanā)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법문이 무려 84천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중 부처님이 설한 법문은 82천개 가량되고, 나머지 2천개는 제자들이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방대한 빠알리니까야를 한곳에 모으면 책장에 가득 찬다. 실제로 사부니까야와 소부경전 일부를 구입하였는데 책장에 가득 찼다. 구입 금액으로 따졌을 때 백만원가량 들었다.

 

 

 

 

 

 

이렇게 부처님이 84천 가지 법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르침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타고난 성향 또한 다르듯이,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것도 각자 다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성제에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한 마디만 알려 주어도 감동을 한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성향이 다르듯이 각자 받아 들이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 눈높이에 맞추어 설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법하는 것에 대하여 ‘대기설법(對機說法, pariyāya-desanā)’ 또는 ‘방편’이라 한다 .

 

그러나 받아 들이는 사람에 따라 가르침을 즉각적으로 이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방편 없이 설명하였다. 이렇게 근기를 전혀 고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설법한 것이 근본가르침이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것이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사성제로 요약된다. 마치 코끼리발자국이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용하듯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사성제의 범주에 들어가 있다. 러나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비단계를 필요로 한다. 믿음과 지계와 보시가 그것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삼보를 믿어야 한다. 그것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다. 이렇게 삼보를 믿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 것에서부터 불교는 시작된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를 믿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에 오계준수를 서약한다. 그래서 불자라 함은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오계를 철저하게 준수 하는 자를 불자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삼보에 대한 믿음이 약하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삼보를 의심하면 이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경전을 부정하는 자들

 

자칭 불자라고 하지만 삼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이 있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어져 있는 경전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전승된 빠알리니까야를 모두 다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니까야에 표현되어 있는 초월적 존재와 비현실적 이야기에 대하여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스님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조계종 스님들의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한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계율을 전공한 스님이 제석천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니까야를 번역한 스님은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이런 답변을 듣고 계율전공스님은 청중을 향하여 혹시 누군가 제석천을 본 분이 있으면 저에게 문자 넣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초기경전에 표현된 하늘사람, 마라, 브라흐마 등 초월적 존재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초월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신비한 이야기등도 믿지 못하겠는 것이다. 예로 들면 청원경에서 브라흐마 사함빠띠가 부처님 앞에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경에서는 팔을 굽힌듯한 사이에 나타났다라는 식으로 표현 되어 있다. 갑자기 나타난 것에 대하여 마치 힘센 사람이 팔을 굽히듯이 매우 짧은 시간에 하고 나타나듯이 표현한 것이다.

 

회의론자에게는 브라흐마(하느님)도 믿을 수 없지만 더구나 하고 팔굽힌 사이에 나타나는 것은 더욱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청원경에 실려 있는 내용이 모두 허구이고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할까?

 

감각적인지와 과학적검증의 잣대

 

경전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그것은 오로지 근본주의 가르침만을 진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과학의 시대에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의 감각적인지와 과학적검증의 잣대를 들이대어 경전을 보다 보니 경전에 쓰여 있는 내용을 불신하게 된다. 그 결과 부처님은 오로지 현실적인 가르침만 펼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게 된다.

 

더구나 회의론자들은 윤회사상이 힌두사상에서 유입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힌두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브라만교가 있었다. 부처님은 이 브라만를 비판하였다. 브라만교에서 존재의 근원 또는 창조주 등으로라 불리우는 브라흐마와 개아에 영혼처럼 변치 않는 아뜨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또한 부처님은 연기법으로서 육사외도의 견해를 부수었다.

 

힌두교는 기원을 전후하여 인도라는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종교이다. 어찌 보면 브라만교가 환골탈태한 것이 힌두교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원 전후에 일어난 대승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인도불교사에 따르면 대승불교가 부파불교를 비판하고 성립한 면도 있지만 힌두교의 발흥에 영향을 받아 성립한 것으로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대승불교이지 초기불교가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초기불교는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까야에 힌두교의 윤회사사상이나 업사상이 실려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시대에 이런 주장이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로 초기경전을 재단하려 하는 것이다.

 

인터넷시대 사생아, 단멸론자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누구나 검색창에 키워드 몇 개를 집어 넣으면 원하는 것을 찾아 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다 있는 것은 아니다. 알짜 정보는 인터넷에 올려 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넷에서는 온갖 정보로 넘쳐난다. 그 중에는 진주와도 같은 값진 자료도 있지만 고려할 만한 가치도 없는 쓰레기정보도 가득하다. 특히 불교와 관련된 것을 보면 더욱 더 그렇다.

 

인터넷시대에 볼 수 있는 현상중의 하나가 단멸론에 대한 것이다. 마치 인터넷사생아처럼 불교사이트에 단멸론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몇몇 단멸 카페를 보면 공공연하게 단멸론을 전파하고 있는데 대부분 불교근본주의를 가장하고 있다. 부처님은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등 현실적인 가르침만 이야기 하였을 뿐 업이나 내세, 윤회와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빠알리니까야에 업, 내세, 윤회 등 검증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신비적이고 비현실적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은 후대에 모두 편집된 것이라 보고 있다. 그래서 니까야를 맹신하지 말자고 한다.

 

이렇게 인터넷단멸론자들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부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단멸론자들의 주장이 먹혀 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보를 인터넷검색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단멸론에 솔깃 할 수 있다. 마치 일베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일베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감염되어 일베충이 되는 것처럼, 누군가 단멸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오취온타령에 현혹되어 단멸론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니까야에 표현되어 있는 브라흐마, 마라, 제석천 등의 이야기가 나오면 허구라거나 꾸며낸 이야기, 소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멸론자들은 그 어떤 근거도 제시 하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이 사이트 저 사이트 기웃거리다 보면

 

인터넷시대에 불교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이 사이트 저 사이트 기웃거리면 단멸사이트에 접속하기 쉽다. 교묘하게 교리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단멸론자들의 주장에 먹혀 들어가면 결국 니까야를 부정하게 된다. 가르침이 담겨 있는 니까야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삼보를 부정하게 된다.

 

삼보를 믿지 않는 자를 불자라 볼 수 없다. 말이나 글로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들먹이지만 니까야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받아  들이거나 왜곡한다면 불자가 아니라 외도에 가깝다. 이처럼 불자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외도들이 많다.

 

제가 여러분과 다른 길을 걷는 외도인지 모릅니다

 

그런 외도에 대한 글을 하나 보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흔히 이런 류의 글을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특별한 주장을 하기 위해선 특별한 증거가 필요하다. 어떤 분의 말씀이지요. 그 주장의 근거가 단지 천년전에 쓰여진 책이라면 누구든 의심을 던질 수 있을 겁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전부 진실은 아닐 수 도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현명한 이의 자세임이 분명합니다. 지금 제가 주장하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닐 수 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장이 무엇인 문제이고 어떻게 잘 못 되었는지는 누구라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반론 또한 전제되어야 합니다. 언제든 제 생각이 잘 못 되었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성경은 신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일주일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낸 위대한 역사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은 믿지만 과학의 세례를 입은 현대인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니까야는 어떨까요? 세기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죠. 광음천에서 홀연히 화생하여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날아다니며 산다고 합니다. 성경보다 좀 더 심하죠.

 

니까야를 근거로 말한다면 생명체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곳곳에 생명체의 윤회를 증거하는 담론들이 촘촘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경전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서로 어긋나는 논리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붓다는 무기경을 통해 세계의 영원함과 영원하지 않음, 끝이 있는 가없는 가에 대해서 삿된 견해라고 하고 물리쳤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다른 경에서는 나름 세계의 기원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하시고 계시지요. 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세요. 세기경이라고 디가니까야에 있죠.

 

어디 어긋나는 것이 한두 군데는 아니죠. 고타마는 조금은 현명한 분이신 것 같아요. 당시 주류사상계에 대해서 분명히 다른 견해를 계시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반기를 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단지 그들이 쓰고 있는 단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을 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후대에 제자들도 헛갈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업과 윤회는 주류브라만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이것을 깨지 않고는 새로운 변혁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붓다 당시에 숱한 외도들의 등장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거기엔 단멸론자도 있습니다. 죽으면 다음 세상은 없다는 주장이지요.

 

무아윤회이든 유아윤회이든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는 생명체가 나고 죽으며 그 업에 따라 삶을 되풀이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길고 긴 윤회의 흐름 속에 생명체가 떠돈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지은 업력에 따라서요.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입증할 수 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얘기를 하지요. 이것을 부정하면 단멸론자라고 하더군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단멸론자가 분명한 것 같군요. 제가 보는 윤회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는 윤회는 생명체의 회가 아니라 행위의 윤회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행동이든지 말이지요.

그 행위가운데 어떤 행위는 삶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열린 사고와 자발적인 선택과 노력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어떤 행위는 주류이념의 세뇌, 메스컴의 세뇌에 의해, 국가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멍청한 백성 만들기,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세뇌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향을 받으며 그것을 진실이라 생각하고 그 행위를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삶을 보면 알죠. 메스컴은 끊임없이 자극적인 상품들을 선전하지요. 저 물건을 사지 않으면 내 삶이 불행한 것 같고, 시대에 뒤쳐진 후진 인생이 된 것 같게 만들지 않습니까? 내 가 지금 입은 옷도 아마 그럴듯한 브랜드일 확률이 클 겁니다. 늙어 죽을 때 까지 열심히 일하고 소비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까? 불교용어로 객진번뇌라 하데요. 바깥에서 들어 왔다구요. 이 번뇌는 반드시 행위를 강제합니다. 하지 않고는 베기를 못하죠. 우린 그걸 업이라고 합니다. 그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르지요. 과보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수반되는 즐거움이죠. 즐겁지 않습니까? 쇼핑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쇼핑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에 한 번 생각해보지요. 이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달리 과보를 설명해도 됩니다. 그건 생략하죠.

 

그렇게 우린 우리가 받아들인 외부에서 강제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면서 삶을 살아가죠. 그런 삶을 정말 자신이 선택한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신견이라 보면 됩니다. 이 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신견이라는 기존의 견해와는 좀 다르죠.

 

제가 보는 윤회는 이런 것입니다. 전 이런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이렇게 번뇌 업 과보가 우리 삶속에서 꼬리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뜻으로 삼사라(윤회) 하고 했던 것이지요. 다른 윤회는 잘 모릅니다.

 

별로 관심도 없고, 관심을 가진다 해도 알 수 가 없지요. 그저 경전에 쓰인 그대로 믿어야만 가능한 것이지요. 저는 그런 윤회를 믿지 않고, 제가 분명히 아는 윤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 얘기의 근거가 뭐냐고요. 근거가 그리 중요합니까? 당신 삶에 유익하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버리세요. 제가 여러분과 다른 길을 걷는 외도인지 모릅니다. 뭐 어떻습니까? 전 제 길을 묵묵히 가렵니다.

 

(어느 네티즌)

 

 

단멸사이트에 올려진 글이다. 추적을 해보니 종교 모조리 사기다라는 사이트에 연결되어 있다.

 

철저하게 자신의 깜냥(感量)에 의존하여

 

글을 보면 가장 먼저 증거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단멸론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 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태도이다. 이렇게 자신의 감각적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고 경을 재단하고 불교를 바라 보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깜냥(感量)에 의존하는 단멸론자에게 있어서 업이나 내세, 윤회는 관심사항이 아니다. 죽어 보지 않아서 모르고, 또한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단멸론자들은 경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글에서도 부처님이 딴소리를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이 이 몸안에서 세계가 있다고 해 놓고는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말씀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니까야를 읽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니까야를 부정하는 자들이 니까야를 근거로 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이 딴소리 하는 것으로 오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깜냥에 의존하여 경전을 부정하는 단멸론자이다. 그래서일까 단멸론자들은 의심이 많다. 그래서 경전에 쓰여져 있는 것을 맹신하지 말자고 강조한다.

 

하지만 성자가 되는 조건에 의심에 대한 극복이 있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가지 족쇄 중에 유신견을 타파하고, 회의적 의심을 하지 않고, 계금취라 하여 잘못된 수행을 하지 않는 것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조건이다.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법에 대한 의심이다. 이는 곧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는 연기법을 의심한다는 것은 결국 인과를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연기법은 다름 아닌 인과법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런데 니까야를 의심하는 것은 연기법을 의심하는 것이고 결국 부처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그러다 보니 단멸론자들은 업이나 내세를 의심한다. 그래서 윤회를 의심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의심으로 가득찬 자들이 단멸론자들이다. 원인과 결과 마저 의심하니 업과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단멸론자들은 오로지 현세에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 한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한 것도 현세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일 뿐이라며 그 이상 의미를 두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고 안락하게 잘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Catunna ariyasaccāna

yathābhūta adassanā,

Sasara dīghamaddhāna

tāsu tāsveva jātisu.

 

Tāni etāni diṭṭhāni

bhavanetti samuhatā,

Ucchinna mūla dukkhassa

natthidāni punabbhavoti.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Koigāmasutta-꼬띠가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56.21,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니까야 중에서도 가장 고층이라 불리우는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다. 그런데 똑 같은 게송이 디가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부처님이 열반할 때 사성제를 이야기 하면서 읊은 게송으로 되어 있다.

 

게송에서는 사성제에 대하여 감흥어로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반드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만 말씀 하시지 않았다.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Sasara dīghamaddhāna tāsu tāsveva jātisu)라 되어 있어서 윤회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윤회라는 말이 삼사라(Sasara)이다.

 

삼사라(sasāra)에 대하여

 

삼사라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asāra

 

: 'round of rebirth', lit. perpetual wandering', is a name by which is designated the sca of life ever restlessly heaving up and down, the symbol of this continuous process of ever again and again being born, growing old, suffering and dying.

 

More precisely put, sasāra is the unbroken chain of the five-fold khandha-combinations, which, constantly changing from moment to moment follow continuously one upon the other through inconceivable periods of time.

 

Of this sasāra , a single lifetime constitutes only a tiny and fleeting fraction; hence to be able to comprehend the first noble truth of universal suffering, one must let one's gaze rest upon the sasāra , upon this frightful chain of rebirths, and not merely upon one single life-time, which, of course, may be sometimes less painful. - Cf. tilakkhaa, anattā, paramattha, paisandhi.

 

(빠알리사전 PCED194)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삼사라에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일생윤회이고 또 하나는 순간윤회이다. 그래서 일생윤회에 대하여 “this continuous process of ever again and again being born, growing old, suffering and dying.”라고 설명 되어 있어서 태어나서 늙어 죽어 가는 것이 끊임 없이 계속 된다는 것이다.

 

삼사라에 대하여 순간윤회로도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a single lifetime constitutes only a tiny and fleeting fraction”이라 하였다. 고성제를 예를 든다면 고통이라는 것은 단지 작은 조각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하나의 일생이라 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말하기를 이러한 무시무시한 재생의 체인(chain of rebirths)’에 대하여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삼사라가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고통은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는 일생윤회와 순간윤회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삼사라에 대한 제일의 뜻은 일생윤회이다. 태어나서 늙어 죽는 일생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전적으로도 명쾌히 설명 되어 있고 또 부처님에 감흥어로도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삼사라에 대하여 순간윤회에 대한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죽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단멸론적 견해이다. 그래서 단멸론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생멸하는 것에 대하여 윤회라 보는 것이다.  이처럼 단멸론자들은 경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왜곡하기 일쑤이다.

 

당신 삶에 유익하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버리세요?

 

단멸론자들은 오로지 현세적인 가르침만 받아 들인다. 그래서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이야기, 비현실적 이야기가 나오면 허구라 한다. 누군가 소설을 쓴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단멸론자는 제 얘기의 근거가 뭐냐고요. 근거가 그리 중요합니까?”라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당신 삶에 유익하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버리세요라고 말한다. 이 말을 보면 한편으로 맞는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경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이야기, 비현실적 이야기는 자신이 처한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소설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에는 하늘사람, 악마, 하느님, 제석천 등 초월적존재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그리고 부처님과 대화를 나눈다. 이런 초월적 존재들이 나온다고 하여 소설로 보고 또한 무익한 것이라 하여 무조건 배척하면 어떻게 될까?

 

악마, 악마라고 하는데

 

악마와 관련하여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māro māroti bhante, vuccati kittāvatā nu kho bhante māro vā assa mārapaññatti vāti?

 

[싸밋디]

 세존이시여, ‘악마, 악마라고 하는데, 어떻게 악마가 있을 수 있거나, 악마에 대한 묘사가 있을 수 있습니까?”

 

(Samiddhi-mārapañhasutta-사밋디의 악마에 대한 질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65,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라자가하 벨루 숲에 있는 깔란다까니바빠에 계셨을 때이다. 이때 제자인 사밋디가 부처님에게 악마라는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어라 답하였을까?

 

 

Yattha kho samiddhi atthi cakkhu atthi rūpā atthi cakkhuviññāa atthi cakkhuviññāa viññātabbā dhammā. Atthi tattha māro vā mārapaññatti vā.

 

[세존]

싸밋디여, 시각이 있고 형상이 있고 시각의식이 있다면, 시각의식에 의해 인식된 것들이 있다면, 그곳에 악마가 있거나, 악마에 대한 묘사가 있다.”

 

 

사밋디가 악마가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리고 악마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여섯 가지 감각기각 기능중의 하나인 시각능력에 대하여 말씀 하시고 있다. 마치 선불교에서 동문서답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부처님은 경에서 여섯가지 감각인식이 악마라고 하였다. 눈으로 보아서 인식하는 것, 귀로 들어서 아는 것 등이 바로 악마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악마라는 개념은 반드시 귀신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악마는?

 

초기불교에서 악마는 죽음의 신을 의미한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보는 악마(마라)는 항상 부처님과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과 항상 반대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이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무아를 말할 때 마라는 ---을 말한다. 이렇게 악마가 반대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라가 반대편에 서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 밝힐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마라(악마)가 수 없이 등장한다. 등장하여 부처님과 대화를 나누고 제자들을 유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마라는 어떤 성격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 특징으로 분류한다.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와 같이 다섯 종류의 악마가 있다. 이 다섯 종류의 마라는 모두 경전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부처님이 다섯 종류의 마라를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알면 즉시 사라진다

 

그런데 마라는 항상 부처님에게 패배한다. 마라가 부처님과 반대편에 서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넘어 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패배한 마라가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은 나에 대해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라는 정형구이다.

 

이 정형구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알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몰랐을 때 무서운 것이지 알고 나면 두렵지 않음을 말한다. 마치 깜깜방에 들어 가면 무엇이 튀어 나올지 무섭지만, 막상 불을 켜면 순식간에 환해지져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알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통증이 왔을 때 알아차리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통증이 오면 그 통증을 지켜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 차리면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이 병을 고치는 것으로도 활용된다. 그래서 알면 즉시 사라진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주옥 같은 가르침을 놓칠 것인가?

 

초기경전을 보면 수 없이 초월적 존재가 등장한다. 그리고 수 없이 신비한 이야기와 수 없이 비현실적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고 하여 이를 무시할 수 있을까? 자신의 깜냥으로 확인 되지 않는 것이라 하여 허구로 보고 소설썼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초월적존재와 비현실적 이야기에 대하여 자신의 감각적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내밀어 무시한다면 자신만 손해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옥 같은 가르침을 놓치기 때문이다.

 

또 감각적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내밀면 단멸론자가 되기 쉽다. 단멸론자들의 오취온타령 등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에 현혹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니까야를 부정하게 된다. 니까야 부정은 결국 삼보를 부정하는 것과 된다. 단멸론자들의 근거 없는 이야기를 듣고 주옥 같은 가르침을 놓칠 것인가?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

 

여기 초기경전이 있다. 방대한 초기경전에는 직설적인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뿐만 아니라 근기에 맞추어 설한 방편 법문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방편법문은 모조리 부정하고 오로지 근본가르침만 강조하였을 때 업과 내세와 윤회 등을 부정하는 단멸론자가 되기 쉽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단멸론자의 말을 믿어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이런 사태를 부처님이 예견하신 듯 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Attadīpā bhikkhave,

viharatha attasaraā anaññasaraā.

Dhammadīpā dhammasaraā anaññasara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Attadīpa sutta-자신을 섬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4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분명히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이것은 준엄한 부처님의 명령이다.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 할까 단멸론자의 말을 믿어야 할까?

 

누군가 나를 믿어라할 수 있다. 자신이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공양해야 한다고 하였을 때 그를 믿어야 할까? 부처님은 경에서 분명히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anaññasaraā)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명령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가르침외에 다른 대상을 믿거나 공양하거나 의지하는 것은 부처님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런 자를 불자라 볼 수 없다. 또 가르침외에 다른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제자가 아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현실세계에서 가르침이외 대상에 의지하는 것은 불교라 볼 수 없다. 또한 인터넷등에 난무 하는 오취온타령이나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적 견해에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인터넷에는 온갖 정보가 난무한다. 그 중에는 보석 같은 자료도 있지만 쓰레기로도 넘쳐 난다. 이렇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곳이 사이버공간이다. 이런 때 불자들은 초기경전의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단멸론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믿어야 할까?

 

 

 

2014-05-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