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역동성인가 집단광기인가? 월드컵 새벽길거리응원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18. 17:40

 

역동성인가 집단광기인가? 월드컵 새벽길거리응원을 보고

  

 

월드컵시즌이 되었는데

 

월드컵시즌이 되었다. 4년 마다 열리는 월드컵 시즌이 되면 평소 축구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이 때 만큼은 관심있게 지켜 본다. 대체로 약자를 응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과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예외 없이 대규모 길거리응원을 볼 수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길거리응원이 펼쳐졌다. 인터넷뉴스기사에 따르면 광화문과 영동대로에 새벽부터 붉은악마들이 길거리 응원을 하였다고 전한다. 사진을 보면 붉은 옷을 입고 수 많은 사람들이 새벽에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2014 6 18일 러시아전

▲ 이근호 골! 열광하는 붉은악마 

18일 오전 브라질월드컵 러시아전에서 후반전 교체투입된 이근호 선수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자 광화문광장에서 거리응원을 하던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 오마이뉴스)

 

 

 

신바람이 집단화 되었을 때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이후 길거리응원이 일반화 되었다. 빨간티셔츠를 입고 단체로 응원하는 모습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세계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신바람문화로 설명하기도 한다.

 

우리민족에게는 신바람문화가 있다. 그래서 신바람이 나면 놀라울 만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더구나 집단화 되었을 때 더 큰 일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보여 준 바 있다. 이처럼 집단적으로 신바람이 고양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바람은 신이 나서 어깨가 우쭐거릴 정도의 즐거운 기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이 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는 흥이이 일어나 기분이 몹시 좋아진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신바람이라는 것은 신기가 들렸다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신바람은 무속과도 관련이 있는 말이다.

 

한국인들의 집단무의식속에는 무속적인 신바람이 꿈틀 거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 집단무의식이 표출 된 것이 2002년 월드컵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집단신바람은 2006년 독일월드컵과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도 표출되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르헨티나전(안양종합운동장)

 

 

 

보통사람의 관전태도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의 첫경기가 아침 7시에 중계 되었다. 출근시간에 중계 되었음에도 광화문과 영동대로에는 붉은악마응원단의 응원 열기로 가득하였다. 낮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새벽부터 사람들이 모여 들어 새벽응원을 한 것이다.

 

한번 신바람이 나면 밤낮이 따로 없다. 심지어 새벽에도 응원을 한다. 이번 러시아전이 대표적 케이스이다. 또한 대부분 국민들은 이 때 만큼만은  TV 에 시선을 고정한다. 출근길이지만 각자 지니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경기를 보는데 열중한다. 이런 현상은 전국적으로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없다.

 

이처럼 전국민의 시선을 사로 잡은 월드컵에서 골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 박수와환호소리로 알 수 있다.  반면 실점을 하면 깊은 탄식과 함께 낙담한다. 이처럼 한골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관전태도이다.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

 

월드컵 경기에서 한골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 이런 현상은 경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뭇삶들에게 있어서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여덟 가지로 설명한다. 이 세상에는 여덟 가지 원리가 있어서 그 원리안에서 살아 간다는 것이다. 그 여덟 가지 원리란 어떤 것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Aṭṭhime bhikkhave, loka dhammā loka anuparivattanti, loko ca aṭṭhalokadhamme anuparivattati. Katame aṭṭha:

Lābho ca alābho ca ayaso ca yaso ca nindā ca pasasā ca sukha ca dukkha ca, ime kho bhikkhave aṭṭhalokadhammā loka anuparivattanti, loko ca ime aṭṭhalokadhamme anuparivattat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재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개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Dutiyalokadhamma sutta-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부처님 말씀 하신 여덟 가지 원리는 1) 이득(lābha) 2) 불익(alābha), 3) 명예(yasa) 4) 불명예(ayasa), 5) 칭찬(pasasā) 6) 비난(nindā), 7) 행복(sukha) 8) 불행(dukkha)를 말한다. 4쌍으로 이루어진 여덟 가지 원리이다. 이처럼 쌍으로 이루어진 여덟 가지 원리가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라 한다.

 

바람 부는 대로 사는 팔풍(八風)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여덟 가지 원리에 대하여 팔풍(八風)’이라고도 한다. 왜 팔풍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세상의 원리에 휘둘리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바람 부는 대로 날리는 깃발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득과 불익 등 여덟 가지 원리에 지배받는 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배우지 못한 자들이라 하였다. 여기서 배우지 못한 자들이란 가르침을 접하지 못한 자들을 말한다.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여덟 가지 원리에 휘둘린다면 배우지 못한 자가 된다. 하지만 팔풍에 휘둘리지 않는 자들도 있다. 잘 배운 자들이다. 비록 무식하여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운자들은 팔풍에 결코 휘둘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팔풍은 배우지 못한 자나 배운 자 모두에게 불어 닥친다. 그러나 대응하는 방법은 다르다. 그렇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이득이 생겨나면, 그는 그는 ‘이러한 이득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

 

(Dutiyalokadhamma sutta-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팔풍중에 이득(lābha)’에 대한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자라 하여도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에 갈피를 잡지 못한다면 배우지 못한 범부라 볼 수 있다. 마치 축구 경기에서 한골에 따라 일희일비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누군가 칭찬해 주면 우쭐하고 비난하면 낙담하는 것이다.

 

못 배운 자와 잘 배운 자의 차이는?

 

하지만 잘 배운 제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흔들리지 않는가? 그것은 팔풍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칭찬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알아차림을 말한다.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 마치 바위산과 같이 흔들림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비람에 움직이지 않듯 ,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 (Dhp81)”라 하였다.

 

잘 배운 부처님의 제자 또는 현명한 자는 바위산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칭찬과비난 뿐만 아니라 행복과 불행을 대하는 태도 역시 못 배운 자들과 다르다. 행복에 대하여 단지 행복한 느낌으로 아는 것이다. 행복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일어난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라지고 말 행복한 느낌으로 본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굳이 행복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 대로 이러한 행복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A8.6)”라고 알면 그 뿐이다.

 

이런 원리를 적용하면 지금 불행하다고 하여 영원히 불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괴로운 마음 그자체는 일어날 만하여 일어 났기 때문에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안다면 불행하다고 하여 크게 낙담할 필요가 없다.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길거리 응원에서 한골을 넣으면 하늘이 무너질 듯 ~”하며 환호한다. 반면 한골을 먹으면 땅이 꺼질 듯 ~”하며 탄식소리가 들린다.  바로 이런 것이 팔풍에서 행복과 불행에 해당 될 것이다.

 

환호와 탄식은 못 배운 자들에게 볼 수 있다. 가르침을 잘 배운 자들은 결코 작은 이득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등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1.

Lābho alābho ayaso yaso ca
Nind
ā pasasā ca sukhañca3 dukkha,
Ete anicc
ā manujesu dhammā
Asassat
ā viparīnāmadhammā.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이러한 인간의 원리들은

항상하지 않고 변화하고야 마는 것이네.

 

 

2.

Ete ca ñatvā satimā sumedho
Avekkhati vipar
īnāmadhamme
I
ṭṭhassa dhammā na mathenti citta
Ani
ṭṭhato no paighātameti.

 

이러한 것들을 알고 새김있고 현명한 님은

변화하고야 마는 것들을 관찰한다.

원하는 것이라도 그의 마음을 교란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은 것도 혐오를 일으키지 못하네.

 

 

3.

Tassānurodhā athavā virodhā
Vidh
ūpitā atthagatā na santi,
Pada
ñca ñatvā viraja asoka
Sammappaj
ānāti bhavassapāragūti.

 

그것에 대하여 매혹이나 혐오는

파괴되고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으니

경지를 알고 티끌의 여윔과 슬픔의 여윔을 올바로 알아

님은 존재의 피안에 이르네.”

 

(Dutiyalokadhamma sutta-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왜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나?

 

첫 번째 게송을 보면 팔풍이라는 것은 변하고 마는 것이라 하였다. 두 번째 게송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아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이는 팔풍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보라는 것과 같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마치 타인처럼 보라는 것이다. 설령 나에게 즐겁거나 괴로운 일이 일어 났을 때도 마치 남 보듯이 지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지켜 보았을 때 파괴되고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는 것(Vidhūpitā atthagatā na santi)”이라 하였다. 이는 위빠사나수행에서 보면 사라진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지금 괴로움이 닥쳤을 때 그것이 괴로움인줄 알면 괴로움은 즉각 사라짐을 말한다. 이는 통증도 마찬가지이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 그 통증을 보면 통증이 사라짐을 말한다. 그래서 관찰수행을 하면 병도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현상은 보는 순간 사라진다. 귀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귀신들렸다고 하는데

 

흔히 귀신들렸다고 하였을 때 이는 귀신에게 휘들려 산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귀신은 어떤 것일까? 귀신은 실제 하는 것일까?

 

어떤 이가 귀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어떤 이가 귀신이 있다고 믿으면 있고, 귀신이 없다고 믿으면 없는 것이겠지요라고 답하였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은 실제로 있는 것일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귀신에 대하여 실재 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마음이 만들어낸 것으로 본다. 그래서 마음장난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만들어 낸 귀신은 처음에는 정지화상으로 보이지만, 그 영상에 휘둘리면 차츰 동영상으로 변한다고 한다. 마치 화가가 귀신그림을 그려놓고 자신이 그려 놓은 귀신그림에 철저하게 종속되는 것과 같다.

 

귀신을 퇴치하려면

 

귀신들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표상에 종속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귀신은 알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마라상윳따(S4)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있다.

 

 

Atha kho māro pāpimā

jānāti ma bhagavā,

jānāti ma sugatoti dukkhī dummano

tatthevantaradhāyīti.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은 나에 대해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

 

(고행의 경, 상윳따니까야 S4.1, 전재성님역)

 

 

수 십개에 달하는 마라상윳따(악마의 모음)에 따르면 경의 말미에 위 구절과 같은 정형구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마라(악마)는 알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악마에 휘둘리지만 일단 악마의 정체를 알아 버리기만 하면 그 즉시 사라짐을 말한다. 마치 깜깜한 방에서 불을 켜는 순간과도 같다. 그래서 경에서는 마라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jānāti ma)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악마의 정체에 대하여 알아 버렸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정체가 들통나면 악마는 더 이상 설자리를 잃는다. 그래서 정형구에서는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tatthevantaradhāyīti)”라 한 것이다.

 

이처럼 악마는 알면 사라진다. 악마인줄 알면 더 이상 악마가 발붙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악마에 대하여 초기불교에서는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렇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마찬가지로 귀신도 알면 사라질 것이다. 귀신이 귀신인줄 모르기 때문에 귀신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세 번째 게송에서는 피안에 대하여 노래 하고 있다. 조건에 따라 형성된 현상이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면 더 이상 팔풍에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는 다른 말로 괴로움이 소멸된 것이다. 괴로움이 없는 세계가 바로 피안이라 볼 수 있다. 그 피안은 일반적으로 열반으로 묘사 되고 있다.

 

역동성인가 집단광기인가?

 

또다시 월드컵시즌이 시작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열려서일까 우리나라에서는 새벽에 시청이 가능하다. 특히 한국과 러시아전의 경우 출근길에 해당 되는 아침7시에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광화문광장과 영동대로에서는 수 만명이 참가 하는 길거리응원이 있었다. 더구나 경기가 시작 되기 몇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는데 이는 새벽을 길거리에서 맞은 것이나 다름 없다.

 

새벽같이 모여 집단응원하는 경우는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좋게 보면 한민족에게 내재 되어 있는 역동성이 발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 나쁘게 본다면 집단광기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극과 극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마치 좋은 사람이 있으면 좋아 겠어!”라 하고, 싫은 사람이 있으면 미워 죽겠어!”라 하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팔풍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바람 부는 대로 휘둘리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집단길거리 응원이라는 것이 결코 바람직스런 것은 아니다. 특히 불교적 관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불교적 관점이라 함은 출세간적 관점을 말한다. 따라서 불자라면 저 바위산처럼 어떤 칭찬이나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듯이 한골 넣었다고 하여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호 하거나, 한골 먹었다고 하여 땅이 꺼질 것처럼 낙담하지 않는다. 다만 바위처럼 지켜 볼 뿐이다. 그래서 골을 넣으면 , 골을 넣었구나라고 알아차리고, 또 골을 먹으면 , 골을 먹었구나라고 역시 알아차리면 그 뿐이다.

 

 

 

2014-06-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