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제비는 왜 다시 오지 않을까? 이년만의 귀향(歸鄕)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16. 15:14

 

제비는 왜 다시 오지 않을까? 이년만의 귀향(歸鄕)

 

 

 

 

터벅터벅 걸어가는

 

 

귀향이라 하였을 때 때로 낭만적으로 들린다. 귀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오다임을 알 수 있듯이 갖가지 사연이 가지고 고향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도시에서 살다 적응하지 못하여 살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낙향의 의미도 있고, 도시의 삶이 싫증나서 태어나 자란 곳을 그리워 하여 되돌아 가서 사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귀향이 반드시 살기 위하는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랜 만에 고향을 찾는 것 역시 귀향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종 영화에서 귀향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영화 람보를 보면 첫 장면이 귀향하는 모습이다. 특수부대에서 근무하다 제대하여 고향을 찾아 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보는 이에 따라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마치 가다가다 갈데가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 가는 듯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황량하기 그지 없는 불모의 지역에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방 하나 덜렁 어깨에 매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한가롭게 걷기로

 

2년 만에 다시 고향을 찾았다. 조부와 백부의 제사를 합동으로 치루기로 함에 따라 매년 이맘 때쯤 사촌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래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촌들이 이날 하루만큼은 모여 제사를 모시고 얼굴을 보는 날이다.

 

KTX를 타니 마치 공간이동 하는 것 같다. 마치 비행기를 타는 것처럼 쾌적한 공간에서 단지 편안하게 앉아 있었을 뿐 인데 목적지 까지 순식간에 데려다 준 것 이다. 시외버스를 타고 30분간 달려 간 곳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시골마을에서 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 타는 곳에서 고향마을 까지는 거의 4키로 가량 된다. 옛날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4키로를 걸어 이곳까지 걸어 와야 했다. 4키로라면 어른 걸음으로 약 한시간 가량 걸린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더 많이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마을에서 버스 타는 곳 까지 십리길은 매우 먼 길이었다.

 

버스 타는 곳에는 택시가 있다. 이른바 시골택시라 하여 산재해 있는 마을 어느 곳이든지 데려다 준다. 그러나 택시를 타지 않았다. 걸어가기로 하였다. 초분을 다투는 스피드시대에 한가롭게 걷기로 작정한 것이다.

 

 

 

 

 

길은 매우 평탄하다. 그리고 모두 포장되어 있다. 옛날에는 신작로길이라 하여 먼지가 풀풀나거나 비가 오면 질퍽거렸다. 요즘은 모두 포장 되어 있어서 사뿐히 걷는다. 걷는 길에 주변 풍광은 온통 초록이다. 초여름의 유월이어서일까 햇살은 따갑다. 그러나 습도가 낮기 때문에 상쾌 하다.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한가롭게 걸었다.

 

 

 

 

 

전에 보지 못하던 동상

 

길을 걷는 도중에 전에 보지 못하던 동상을 보았다. 그것은 삼일만세운동을 상징하는 기념동상이다. 어렸을 적에 보지 못하였고 그 이후에도 보지 못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치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처럼 눈길을 끈다.

 

 

 

 

 

이 동상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설명문을 보니 1989년으로 되어 있다. 1919 4 8일 장날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무려 70년 후에 만든 것이다. 이처럼 어렸을 적에는 보지 못하였던 기념탑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기념탑 뒤에는 설명문에 따르면 서전결의에 참여한 열사 24명의 이름이 기록 되어 있다.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헌병의 총칼에 죽거나 붙잡혀 고문으로 죽은 이들을 말한다. 이처럼 세월이 지났어도 후손이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것은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이한 지형

 

유월의 따가운 햇살과 상큼한 공기와 함께 걷는 길에 발걸음을 가볍다. 굽이굽이 돌고 야트막한 언덕을 지나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어는 것 고향마을에 가 있을 것이다.

 

 

 

 

이쪽 지형은 좀 특이하다. 대체적으로 평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펑탄하지 않다. 야트막한 구릉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커다란 분지처럼 생긴 지형에 마치 물결치듯이 완만한 구릉이 연속해 있다. 그래서 구릉과 구릉 사이에는 논농사를 짓고 구릉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도로가 야트막한 구릉 위에 나 있다.

 

 

 

 

 

폐교된 학교에 공장이

 

길을 지나면서 유심히 본 것이 있다. 그것은 학교이다. 아홉살 때 까지 다니던 초등학교이다. 분교라 하여 본교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이다. 들녁 가운데 학교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단층으로 된 건물이 보인다. 그러나 이 분교는 오래 전에 폐교 되었다. 학생이 없어서 문을 닫은 것이다.

 

 

 

 

 

폐교가 된 초등학교 분교에는 한때 학생이 꽤 많았다. 그래서 등교하게 되면 사방의 마을에서 학생들이 모였고 한 학년에 최소한 두 반 이상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록 분교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처럼 아이들로 북적인 것은 아마 베이붐의 영향이라 보여진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부터 1964 10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에 대하여 베이비부머라 하는데 그 때 당시 베이비부머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시기 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많았을 것이다.

 

학교는 폐교 되었지만 흔적은 남아 있다. 단층짜리 백색의 교사가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장에는 공장이 들어섰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일 것이다.

 

 

 

 

소들의 처절한 울음소리

 

길을 걸으면서 산천이 변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였다. 그러나 작은 변화도 보인다. 그것은 축사이다. 이곳에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곳곳에 한우를 키우는 공장식축사가 많이 보인다.

 

 

 

 

이 지역은 논농사 이외 특별히 할 것이 없다. 관광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시가가까워서 산업단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농사밖에 할 수 없는 지역이다. 그런 이유로 개발이 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공장식축사가 들어섬에 따라 분위기가 바뀌어졌다. 새소리 바람소리 대신 축사에서 소들이 움메하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소들의 움메소리를 들으면 정겹다기 보다 마치 울부짓는 듯하다. 개사육장에서 개들이 미쳐 날뛰며 울부짓듯이, 인간들에게 살코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육되는 소들의 처절한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공포의 붉은보

 

개발되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다. 요즘처럼 변화무쌍한 시대에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마당에 아직도 산천이 변함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히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길을 걸은지 40여분이 지났다. 마침내 동네 입구 코너길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반드시 확인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옛날 보았던 붉은보이다. 하지만 붉은보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자리에는 콘크리트옹벽이 만들어져 있다.

 

 

 

 

 

붉은보라는 말은 이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다. 단차가 진 지형에 붉은빛깔의 흙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붉은보라 하였을 것이다. 마치 빙하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끝면에서 얼음이 쪼개져 내리듯이, 단차진 지형에서 흙더미가 조금씩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래 이 지역을 지날 때마 무서워 하였다. 특히 도시에 사는 중부 사촌들이 더 그랬다. 그래서 시골 이야기를 하면 붉은보 이야기를 빼 놓지 않았다. 그런 붉은보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붉은보가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마치 추억이 하나 사라진 듯하다. 그대로 내려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콘크리트옹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오히려 흉측해 보인다.

 

사촌형님에 따르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붉은보가 마침내 모두 무너졌을 때 세상이 크게 변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콘크리트옹벽을 만든 것일까 아무튼 좋은 추억거리가 사라진 것이 몹시 아쉽다.

 

납골당 만들기 바람이 불었나

 

마을입구에 점차 다가간다. 또 예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납골당이다. 십여년부터 납골당 만들기 바람이 불었다고 하는데 그 산물이라 본다. 노인들만 사는 시골에서 매장할 곳이 마땅치 않자 생각해 내는 것이 납골당을 만든 것이라 본다.

 

 

 

 

초원을 연상케 하는

 

고향입구에 거의 다다랗다. 완만한 구릉위에 길이 형성되어 있고 구릉과 구릉사이에 논과 밭이 있는 형태이이다. 그러나 세월이 변해서일까 너른 잔디밭도 보인다. 마치 유럽의 초원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이는 잔디를 심어 사업화 하였기 때문이다. 밭에 밭농사를 짓는 것 보다 잔디를 깔아 이를 파는 것이다. 그래서 완만한 구릉을 특징으로 하는 지형이 마치 서구식으로 변한 것 같다. 이런 추세로 조금만 지나면 전혀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나무숲 아래에

 

드디어 마을 입구이다. 20호가량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대나무숲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호수는 변함이 없다. 다만 거의 대부분 노인들만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장수하는 노인들이 산다.

 

 

 

 

마을 뒷동산

 

고향에 오면 가장 유심히 쳐다 보는 곳이 있다. 그것은 마을 뒷동산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 마을사람들은 뒷잔등이라 부른다. 아마 이 지역의 유력자의 이었던 사람의 묘 같다. 그래서 일년에 한 차례 묘역에서 제사를 지내면 제사음식을 얻어 먹은 기억이 난다. 이런 뒷잔등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었다. 달리 놀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놀았다.

 

 

 

 

 

 

 

개발의 무풍지대

 

뒷잔등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아마 유력자의 묘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수로 보인다. 이 소나무들은 언제 심어졌을까? 분명한 사실은 어렸을 적 보았던 소나무가 꽤 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장 연장자인 사촌에게 물어 보니 해방 당시에도 있었다고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70년 가량 되었다고 보여진다.

 

 

70년 된 소나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개발의 시대에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마는데 이곳 개발무풍지대에서는 아직도 옛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에 대하여 안도한다. 이곳은 아직도 개발의 무풍지대이기 때문이다.

 

 

 

 

좌우 이념 대립으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어렸을 적 보았던 그대로의 모습이다. 유월이라 모내기가 끝나 논에는 물이 찰랑찰랑한다. 논 저멀리에는 높은 산이 아스라히 보인다. 북쪽 방향에 있는 산은 높지는 않지만 산이 깊다고 하였다. 한국전쟁당시 빨찌산의 활동무대라 하였다. 그래서 이곳은 낮에는 경찰이 통제하고 밤에는 밤손님으로 불리우는 빨찌산통제지역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좌우 이념 대립으로 인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슬픈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자는 그대로 남아

 

눈을 동쪽으로 돌려 보니 가장 비옥하다는 논이 보인다. 야트막한 구릉지대를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거의 평야나 다름 없다. 정자가 보이는데 이곳 정자 역시 추억의 장소이다. 농부들이 일하다 잠시 쉬는 장소이기도 하고 낮잠을 장소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 자리에 정자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청색의 공장식축사 건물이 분위기를 깨뜨린다.

 

 

 

 

온통 숲으로 둘러 쌓인 마을

 

마을은 온통 숲으로 둘러 쌓여 있다. 마을 뒤에는 커다란 대나무숲 군락이 있어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숲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큰집(백부댁)의 입구에는 하늘 높이 감나무 등 각가지 나무들이 마음껏 자라고 있다.

 

 

 

 

전형적인 삼칸집

 

대문도 없는 코너를 돌아서니 옛집이 보였다. 이곳에서 사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은 텅비어 아무도 살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는 꽤나 북적이던 곳이다.  집을 보면 전형적인 삼칸집이다. 안방과 작은 방과 광과 부엌으로 이루여져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초가지붕이었으나 언제가 부토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뼈대는 변함이 없다.

 

 

 

 

이 집은 해방후 육이오 이전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렇게 본다면 거의 칠십년 가깝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무와 흙으로 지어졌지만

 

칠십년전에 지어진 집은 모두 나무와 흙으로 지어졌다. 그럼에도 칠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가 이삼십년도 되지 않아 헐리고 다시 재건축 되는 시대와 비교된다. 마치 금방이라도 허물어 질 듯 보이지만 기초가 단단해서인지 그 때 당시 잘 지어서인지 여전히 잘 사용되고 있다. 더구나 집의 골격을 보면 목재와 목재로 연결 된 부위는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 목재와 목재를 짜 맞추어 지은 것이다.

 

 

 

 

 

 

 

 

 

 

목재로만 지은 집도 화재가 나지 않으면 천년이 간다. 이는 사찰의 문화재를 보면 알 수 있다. 수백년 된 법당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관리하기 나름임을 알 수 있다.

 

집은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시 한번 안도한다. 개발의 시대 부수고 허물고 다시 짓지만 이처럼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추억도 유지하는 것 같다.

 

 

 

 

인간과 공존한 흔적

 

삼칸에는 작은 마루가 있다. 어렸을 적에는 꽤 넓어 보였지만 다 커서 본 마루가 너무 좁은 것에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마루 천정에는 인간과 공존한 흔적이 보인다. 언제인지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천정 꼭대기에는 벌집이 보인다.

 

 

 

 

목재와 흙으로 이루어진 모서리에 생겨난 벌집은 매우 오래 되어 보인다. 지금은 더 이상 벌을 볼 수 없지만 사람이 살았을 때는 벌도 함께 살았을 것이다.

 

제비는 왜 다시 오지 않을까?

 

또 하나 볼 수 있는 것이 제비집이다. 마루 처마에 만들어진 것이다. 흙과 짚을 짓이겨 매우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에 대하여 나이 드신 사촌에게 물어 보니 매우 오래 된 것이라 한다. 2001년 이후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전에 형성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제비는 왜 다시 오지 않는 것일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는 제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제비의 천적인 때문이라 한다. 사람이 살면 뱀이 살기 힘들다고 한다. 따라서 제비는 반드시 사람이 사는 집에다 둥지를 만들어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운다고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제비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잔가지치기 작업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년에 한차례 후손들이 와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주로 사촌들이 지낸다. 모두 나이가 많은 사촌들이다. 사촌모임에서 가장 막내이기 때문이다. 백부의 경우 7남매를 두었는데 남자가 네 명이다. 올해의 경우 그래서 네 명 모두 모여서 오랜만에 다시 뵙게 되었다.

 

사촌중에서도 가장 적극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백부의 막내아들로서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가깝게 지낸다. 그러나 첫째와 둘째 사촌은 나이 차이가 너무 나소 마치 어른을 대하듯 어렵기만 하다.

 

오랜만에 사촌들과 일을 하였다. 집 뒤에 있는 잔나무 가지를 치는 작업이다. 톱을 들고 지붕을 덮고 있는 나뭇가지를 베어 내는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보호 하기 위해서는 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베어 주는 것 좋다고 한다. 이렇게 일을 하고 나니 훨씬 더 가까워 진 것 같다.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더구나 어쩌다 한번 만나기 때문에 남과 다름 없으나 이렇게 협업을 하면서 급속하게 가까워진 것은 일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본다.

 

석류꽃이 활짝 피고

 

집의 뒤에는 마치 후원처럼 온갖 나무로 가득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석류꽃이다. 지금이 석류철이어서일까 후원에는 석류꽃이 활짝 피었다.

 

 

 

 

 

 

 

 

 

 

석류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이 석류는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게 된 것일까? 바로 위 사촌에게 물어 보니 자신이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석류나무는 40년 가량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붕을 덮을 정도로 크게 자랐다.

 

 

 

 

 

 

 

 

 

 

 

 

 

 

 

 

 

 

 

후원이라 하였는데

 

집 뒤는 작은 정원과도 같다. 그렇다고 하여 크고 잘 가꾸어진 정원이 아니다. 단지 집 뒤 터에 여러가지 나무들이 자라고 있기 때문에 후원이라고 이름 붙여본 것이다.

 

 

 

 

약재로서 뼈에 좋다는 골담초

 

후원에는 몇 가지 특이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바로 위 사촌이 알려 주어서 스마트폰에 있는 메모에 기록하여 놓았다. 먼저 골단초이다.

 

 

 

 

사촌에 따르면 골단초는 약재로서 뼈에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검색결과 골단초라는 말은 없고 골담초가 있다. 중국원산으로서 콩과에 딸린 갈잎떨기나무라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관상용으로소 재배하고 뿌리는 한약재로 쓰인다고 하였다.

 

음식을 만들 때 양념으로 사용되는 양회

 

이렇게 후원에 약초를 심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촌이 한의사의 꿈을 안고 청소년 시기에 심어 놓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농촌살림에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럼에도 한약에 대한 지식이 많아서 갖가지 상식을 많이 알고 있다.

 

후원에는 진기한 식물들이 많다. 그 중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넓은 잎사귀모양을 한 다년생 풀처럼 보인다. 이에 대하여 물어 보자 양회라 한다. 뿌리가 마치 토란처럼 열매가 있어서 음식을 만들 때 양념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양회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양회에 대하여 그 어떤 검색결과도 뜨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산물일까? 아니면 발음이 잘못 되어 검색되지 않는 것일까? 양회가 인공조미료가 없던 시절 맛을 내기 위한 양념재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화장품이 없던 시절에 동백기름은

 

후원에는 동백나무도 있다. 이 동백나무 역시 석류나무와 같은 시기에 심어진 것이라 한다. 사촌형이 한의사의 꿈을 품고 청소년기에 심은 것인데 역시 40년 가량 된 것이다.

  

 

 

 

 

 

 

동백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가 이미 지났다. 그러나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작은 열매가 맺어져 있다.

 

 

 

 

 

동백나무열매는 동백기름을 만들 때 사용된다고 하였다. 특히 동백기름은 머리에 바르면 끈적거리지 않고 고운 빛깔을 내게 하기 때문에 화장품이 없던 시절에 여인들이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비밀스럽게 자라는 나무

 

이처럼 후원에는 석류, 동백, 골담초, 양회, 물나무, 죽순, 죽나무 등 매우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서 마치 자연학습장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후원은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다. 작은 농촌 마을에 그것도 폐가의 후원에 마치 숨어서 자라듯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원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식물이 있다. 그것은 호랑가시나무이다.

 

호랑가시나무에 대해서는 이년전 방문하였을 때 이미 글로서 올린 바 있다. ‘인생의 2 살아가는 사람(2012-07-09)’라는 제목의 글이다. 그 글에서 호랑가시나무가 천연기념물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바 있다.

 

호랑가시나무는 한약재로서 사용된다. 그리고 민간요법으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작고하신 백부께서 호랑가시나무를 다려서 먹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호랑가시나무가 이곳에 있게 되었을까? 산에서 파온 것일까? 예상과는 다르게 저절로 자란 것이라 한다. 백부께서 사용하고 남은 호랑가시나무를 후원에 버렸는데 저절로 싹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이처럼 후원은 비옥한 곳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호랑가시나무는 감탕나무과에 속하는 늘푸른넓은잎나무이다. 한국과 중국 등에 분포하며, 묘아자나무, 호랑이발톱나무라고도 한다. 열매와 잎을 한방에서 약재로 쓰이는데 천연기념물 제122호라 한다.

 

호랑가시나무가 천연기념물이어서일까 모두 아끼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폐가의 후원에서 비밀스럽게 자라는 듯 하여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폐가를 돌아 다니며 희귀한 나무나 식물 등을 채취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지 않고 오로지 일년에 한두차례만 사람이 찾는 이 곳 집 후원에는 호랑가시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그러나 호랑가시나무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다만 눈에 안띄게 잘 자라 주기를 바랄 뿐이다.

 

 

 

 

 

 

 

 

 

 

달짝지근한 오디

 

마당 앞에는 허름한 건물이 있다. 이를 헛간이라 한다. 불을 때고 남은 재를 쌓아 두는 곳이다. 헛간옆애는 작은 방이 하나 있고 그 바로 뒤에는 측간이라 불렸던 화장실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쓰러지기 일보직전 처럼 보인다. 더구나 커다란 나무가 헛간을 뒤덮고 있다. 이 나무는 뽕나무이다. 뽕나무는 빈집에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서 저절로 커다랗게 자란 것이다.

 

 

 

 

그런데 요즘 오디철이어서일까 뽕나무에는 오디가 가득 열려 있다. 어렸을 때 달리 군것질 할 것이 없었는데 뽕나무에서 열리는 오디는 자연이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까맟게 잘 익은 오디를 따서 입에 넣었다. 달짝지근한 것이 옛맛 그대로이다.

 

 

 

 

 

 

 

 

 

 

 

대나무에서 강렬한 생명력을

 

빠른 속도로 잘 자라는 것이 대나무이다. 그런 대나무는 두 종류가 있다. 일반대나무가 있고 시누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나무의 경우 자라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죽순이 나오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자라는 듯 하기 때문이다. 땅을 뚫고 솟아 오른 죽순과 어린 대나무에서 강렬한 생명력을 느낀다.

 

 

 

 

 

 

 

 

 

 

 

작은 시골집이지만 이것 저것 관찰하면 참으로 볼 것이 많다. 자세히 보면 놀랍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찬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그래서 이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땅의 신에게 바치는 상

 

제사시간이 되었다. 사촌들끼리 모인 제사이지만 형제들이 많은 백부댁 위주이다. 조부의 제사도 되지만 동시에 백부의 제사이기 때문에 백부의 사촌들은 모두 모였다. 백부의 칠남매 중 암으로 사망한 한 분을 빼 놓고 여섯명이 모인 것이다. 그래서 조촐하게 제사상을 마련 하였다.

 

 

 

 

위 사진은 신위를 붙이기 이전 것이다. 특히 좌측에 있는 조그마한 상이 눈길을 끌었다. 이를 성주상이라 한다. 제사를 지낼 때 한쪽 켠에 작은 상을 별도로 마련 하는 상이다. 그렇다면 성주상은 어떤 개념일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누나에 따르면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을 모시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아마 터줏대감 개념일 것이다. 어느 때인가 이곳에 들어온 조상이 있었는데 대대로 이 땅을 근거지로 하여 살아 왔다. 그래서 조상이 들어 오기 이전부터 있었던 존재에 대하여 상을 차린 것이 성주상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성주상은 땅의 신에게 바치는 상이라 볼 수 있다.

 

성주상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민속신앙사전에 따르면 성주상은 집을 수호하는 신령이 성조신(成造神)이라고도 불리기 때문에 이 상차림을 조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성주신을 집안의 대들보를 지켜주는 집안 신령집안 신령으로서 조상해당되는 신령으로 인식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성주상은 일종의 땅의 신 또는 조상신에게 바치는 상이라 볼 수 있다.

 

땅위의 신들은

 

땅의 신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에도 보인다. 상윳따니까야 초전법륜경(S56.11)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땅의 신 이야기가 나온다.

 

 

Pavattite ca pana bhagavatā dhammacakke bhummā devā saddamanussāvesu: "eta bhagavatā bārāasiya isipatane migadāye anuttara dhammacakka pavattita appativattiya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세존께서 이와 같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실 때에  땅위의 신들은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경에서 땅위의 신들붐마데와(bhummā deva)’라 하였다.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처음으로 진리를 설할 때 가장 먼저 꼰단냐가 알아 들었다. 그래서 경에서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고 묘사되어 있다. 바로 이 순간이 초전(初轉)’의 순간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틀림 없음을 확인 된 것과 같다.

 

초전은 우주적 사건이다. 이런 사실을 가장 먼저 안 것은 최초의 설법지인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땅의 신들이었다. 땅의 신들이 초전의 순간을 외치자 이를 사대왕천이 듣고, 사대왕천은 바로 위 천상으로 전달하여 마치 릴레이 하듯이 순식간에 가장 높은 천상인 하느님의 세계(brahmalokā, 梵天)’까지 전달 되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에서도 땅의 신의 존재를 인정한 듯 하다.

 

요즘과 달리 옛날에는 땅을 기반으로 하여 살았다. 땅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삶을 영위한 것이다. 이처럼 땅을 기반으로 하여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땅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 조상 뿐만 아니라 조상 이전에도 이 땅에 있었던 존재에 대한 예를 표한 것이 성주상이라 보여진다.

 

무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제사를 지내고 나서 사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제사상에 올려진 것들을 먹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 반드시 조상숭배하는 의미 뿐만 아니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화합을 다지는 의미도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식사 중에 뜻밖에도 불자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나이 차이가 많아 늘 어렵게만 느껴졌던 백부의 둘째 형님이 불교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전에는 교회를 다녔는데 지금은 불교에 심취하여 있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기복위주의 불교가 아니라 초기불교에 가까웠다. 특히 무아를 이야기 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명의 기독교인

 

백부형제 중에는 기독교인이 둘 있다. 특히 나이가 가장 많은 첫번째 형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집안의 장손이 기독교인이다 보니 제사에 참여 하지 않는다. 이날도 마루에만 앉아 있을 뿐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 두번째 기독교인은 백부의 칠남매 중에 막내이다. 더구나 현직 목사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성목사이다. 집안에서 처음으로 목사가 탄생되었고 더구나 여성목사가 탄생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인생의 2막을 살아가는 사람(2012-07-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동갑내기 여성목사

 

여성목사는 동갑내기이다. 아홉살 이전의 추억이 있어서 만나면 반갑다. 비록 종교가 다르고 정신세계가 다를지라도 DNA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강한 유대감을 갖게 한다.

 

2년 만에 만난 목사에게 궁금하였던 것을 물어 보았다. 이제 목회 한지 3년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바쁘다고 하였다. 매일 설교하고 설교 준비하기 때문에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더구나 자신의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기도위주로 하였다. 주로 안수기도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사회에서 문제되고 있는 기도원의 안수기도 같지는 않다. 어려서부터 함께 생활 하였고 지금까지 살아 온 것에 대하여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인으로서 관심이 많아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특히 안수기도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안수기도라는 것이 목사나 신부 등이 기도를 받는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 특별한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자 자신은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고 하였다. 아마 특별한 체험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안수기도 하는 사람은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 한다. 주로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이 대상이라 한다. 그래서 안수기도를 해 주고 나면 대부분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이년만에 다시 찾아 간 고향이다. 마치 길 떠난 나그네가 고향집으로 찾아 가듯이 거의 한시간 동안 4키로에 달하는 길을 홀로 걸어서 갔다. 걸어 가면서 이것 저것 볼 때 마다 옛날 기억이 떠 올려졌다.

 

산천은 변한 것이 없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스카이라인이 바뀌지만 이곳 만큼은 개발의 무풍지대인 것 같다. 다만 공장식축사가 들어서서 분위기가 바뀌긴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옛모습 그대로이다. 이처럼 개발되지 않고 옛모습 그대로의 모습에 안도한다.

 

옛집도 그대로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 나무들은 멋대로 자라고 꽃은 피고 진다. 이처럼 무상하게 변해도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에 역시 안도한다. 이처럼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옛추억이다. 옛날 이야기를 하면 비록 동갑내기 사촌이 목사가 되었어도 더 이상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2014-06-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