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 “미리미리 그렇게 했어야지요?”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17. 10:29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 미리미리 그렇게 했어야지요?”

 

 

 

일이 뭐길래 돈이 뭐길래

 

요즘 문자를 받으면 덜컥 하는 마음이 있다. 부고메세지를 받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는 연속으로 받기도 한다.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어서 일 것이다.

 

부고메세지를 받고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미안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늦게 참석하여 마음의 가책을 받는 경우도 있다. 어제가 그랬다.

 

친구모친상메세지를 받았으나 늦게 도착하였다. 하던 일을 마저 끝내려는 욕심 때문에 늦게 간 것이다. 그 이전에 왜 도착하지 않느냐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달려 갔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은 일이 뭐길래 돈이 뭐길래 인륜지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라고 자책하였다.

 

도착하자 기다려준 친구들이 있었다. 몇 시간 전부터 와 있었다고 하였다. 더구나 먼저 자리를 뜬 사람들도 많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매우 짧게 앉아 있는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판단착오로 말미암아 성의 없는 사람이 된 듯 하였다. 또 뼈 있는 농담을 받았을 때 완전히 실없는 사람이 된 듯 하였다. 이렇게 생각되자 후회와 미안한 감정이 일어나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행위즉착(行爲卽錯)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이 있다. 입만 벙긋 하면 어긋난다는 말이다. 선종에서 사용 되는 말로서 진리의 세계는 입을 열면 곧 참모습과는 어긋난다는 뜻이다. 말로서 글로서 진리의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설명하면 할수록 팔만사천리나 멀어지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진실은 말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입만 열면 어긋나듯이 행동만 하면 실수인 것 같다. 대부분 후회의 감정이 일어 날 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든가 그렇게 할껄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영어로는 “should have p.p”형태로 나타난다.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해서 속상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should have p.p”는 행위즉착(行爲卽錯)이 될 것이다.

 

행위즉착이라는 말은 만들어 본 것이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말이다. 행위할 때 마다 실수한다라는 뜻은 실수를 유발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더구나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어긋나는 것이라면 모든 행위는 상대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행위가 절대적이 아니라 보는 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상대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위 하는 것 자체가 업을 유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인 행위가 결국 미래의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깜마, 행위인가 업인가?

 

매일매일 행위를 한다. 행위를 한다는 것은 결국 업을 짓는다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행위와 업을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행위와 업은 동어이다.

 

빠알리어 깜마(kamma)는 영어로 제일의 뜻이 ‘action’이다. 이 액션이라는 말이 행위를 뜻한다. 그런데 한자문화권에서는 깜마에 대하여 으로 번역한다. 그래서 업을 짓는다고 할 때 매우 무겁게 받아 들인다. 그러나 행위를 한다라고 하면 가볍게 여길 것이다.

 

이처럼 업과 행위는 뉘앙스가 다르다. 같은 빠알리어에 대하여 번역자가 어떤 용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에 있어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깜마와 관련하여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So eva pabbajito samāno pātimokkhasavarasavuto viharati ācāragocarasampanno aumattesu vajjesu bhayadassāvī. Samādāya sikkhati sikkhāpadesu kāyakammavacīkammena samannāgato kusalena. Parisuddhājīvo sīlasampanno indriyesu guttadvāro bhojane mattaññū satisampajaññesu samannāgato sattuṭṭho.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해서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지켜서 행동범주를 완성하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 착하고 건전한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를 갖추고, 청정한 삶을 추구하고 계행을 구족하고 감관의 문을 수호하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어 만족하게 지냅니다.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 D2, 전재성님역)

 

 

 

 

 

 

사만냐팔라경(사문과경)에서 계행의 다발을 설명 하기 바로 전에 하신 부처님 말씀이다. 이 문구는 정형화 되어 있어 동일 문장이 여러 경에서 볼 수 있다.

 

경에서 핵심구절은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본다(aumattesu vajjesu bhayadassāvī)”일 것이다. 사소한 잘못은 결국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게 된다. 이처럼 업을 짓지 않아야 윤회의 불씨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라 하였다. 그리고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등의 설명이 따르고 있다.

 

경에서 보듯이 사소한 잘못은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 (kāyakammavacīkammena)”가 직접적인 요인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사소한 잘못은 일종의 실수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바늘 가는데 실이 따라 가듯이, 행위가 있는 곳에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며

 

이처럼 잘못은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 행위가 바로 깜마(kamma)인 것이다. 그런데 깜마에 대하여 업으로 번역하면 뉘앙스가 달라진다. 초불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면서 머무릅니다. 바른 행실과 행동의 영역을 갖추고,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며, 학습계목들을 받아지녀 공부짓습니다. 유익한 몸의 업과 말의 업을 잘 갖추고, 생계를 청정히 하고, 계를 구족하고,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고,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고,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합니다.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 D2, 각묵스님역)

 

 

번역을 보면 경직된듯한 느낌이다. 이는 과도한 한자용어 사용과 대괄호치기에 따른 주석적 번역의 영향이라 본다. 또 좀처럼 쓰이지 않는 공부짓다와 같은 말이 사용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경직되어 보인다.

 

번역에서도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며라 하였다. ‘작은 허물과 대비 되는 말이 사소한 잘못이다. 이는 aumattesu vajjesu에 대한 번역이다.

aumattesuaumatta형으로서 ‘of very small size; tiny’의 뜻이다. Vajjesuvajja형으로서 fault 또는 ‘which should be avoided’의 뜻이다. 따라서 aumattesu vajjesu하지 말았어야 할 아주 작은 것의 뜻이 된다. 그래서 사소한 잘못이나 작은 허물로 번역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누구나 실수를 한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라는 말이 있듯이 실수는 늘 달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실수한다고 심하게 책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가 보아도 잘못하였고 더구나 상대방이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든가 그렇게 할걸이라고 생각하였다면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그렇게 했어야 했다(should have p.p)”식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 받아 들이기 힘들 것이다. 상대방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물에 대하여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듯이 행위에 대하여 주관이 개입한다면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런 실수가 나오지 않도록 예측해서 미리미리 대비하여 행위를 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상대방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일종의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런 화풀이에 반응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사소한 말 싸움이 큰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 분을 참지 못하면 살인도 날 수 있을 것이다.

 

인정하는 말, 자극하는 말

 

영어구문 ‘should have p.p’는 내가 하면 그렇게 할걸이 되어 후회의 감정이 일어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렇게 말하면 “~했어야 했는데가 되어 자극하게 된다.

 

사람은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가 일어나지 않게 예측하여 행동할 수 없다. 그럼에도 털끝 하나라도 실수 하게 되었을 때 ‘should have p.p’를 남발한다면 이는 매우 이기주의적 발상이라 볼 수 있다.

 

상대방은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기 바라면서 정작 자신이 실수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완벽주의자가 상대방의 잘못에 대하여 했어야 했다라며 강하게 질책하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누군가 지적하면 아마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should have p.p’를 남발하며 예측하여 미리미리 그렇게 했어야지요?”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가급적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리석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와 상대하면 함께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개구즉착이라는 말이 있듯이 산다는 것은 실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도 실수는 다반사이다. 다만 실수를 최소화 하기 위하여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뿐이다.

 

거듭되는 실수를 하면 대가를 치룬다. 어떤 경우는 감당하기 대가를 치루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나면 실수는 줄어든다. 두눈을 부릅뜨고 실수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 확인작업 없이 진행하였을 때 실수가 나면 고스란히 금전적 손해로 귀결된다. 그럴 경우 왜 더 살펴 보지 못하였을까?”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온종일 그런 생각에 매여 있다 보면 심하게 자책하게 된다. 바로 그런 마음이 집착일 것이다.

 

실수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도 떨어질 때가 있듯이 아무리 주의해도 실수를 피해 갈 수 없다. 이때 실수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실수를 계속 염두에 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실수를 털어 버리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후회로 나타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후회((kukkucca)’는 아꾸살라이다. 아꾸살라(akusala)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로 분류 된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 계속 마음에 담고 후회 한다면 악업을 유발하는 것이 된다.

 

반면 실수한 것에 대하여 실수한 줄 안다면 어떻게 될까? 실수하였을 때 실수했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 한다면 꾸살라가 된다. 꾸살라(kusala)는 아비담마에 따르면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해당된다.

 

따라서 선업을 지으려면 실수를 하였어도 실수했네하며 털어내야 한다. 그 털어 내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정답이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은 불선업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근심하는것 역시 불선업을 짓는 것이다. 마음이 항상 과거의 후회나 회환에 가득 차 있다면 괴로운 것이다. 또 마음이 미리 걱정하고 있다면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 이렇게 항상 마음이 과거에 가 있으면 과거에 사는 사람이고,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미래에 사는 것이다. 그런 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보기에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 말씀에 정답이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 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 (M131,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초기불교에 대하여 아는 불자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수행과 관련하여 종종 인용되기도 한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미리미리 그렇게 했어야지요?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은 어느 누가 들어도 공감할 것이다. 불자이든 불자가 아니든 이런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게송에서는 항상 현재에 살라고 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늘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지금 실수 하였다면 단지 , 내가 실수했구나라고 알면 그 뿐이다. 그런데 실수에 대하여 왜 내가 그랬을까?”라든가,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라고 자책한다면 이는 자신에 대한 학대이다. 더구나 상대방이 그렇게 했어야 했다라고 말하면서 예측하여 행위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비난 한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귀신이 아닌 이상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여 행동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 미리 예측하여 행동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 질책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 그런가?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질문자체가 잘못 되었다면 답변할 가치가 없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예측자가 되어 행동하기를 바라면서 “should have p.p( 했어야 했는데)”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답변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 미리미리 그렇게 했어야지요?”라고 말한다면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대꾸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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