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내가 느낀 교훈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거야!”남산의 사랑의 자물통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10. 12:29

 

 

내가 느낀 교훈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거야!”남산의 사랑의 자물통

 

 

 

남산으로 올라 가는 길

 

동국대에서 남산으로 올라 가는 통로가 있다. 길을 따라 약 30분 가량 걸어 가면 꼭대기에 이른다. 그러나 올라 가는 도중에 무수한 계단을 밟아야 한다.

 

 

 

 

천만명이 사는 도심에 남산과 같은 대공원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남산에 들어 가면 마치 심산유곡에 들어 온 것처럼 세상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런 남산을 아주 오랜 만에 와 보았다.

 

남산 꼭대기에 도착하니

 

남산 꼭대기 입구에 도착하니 전에 보지 못하던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수 많은 중국인관광객들이다. 관광버스 대부분이 중국인탑승관광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올라 가는 길에 한국말 보다 중국말이 더 많이 들린다. 우리 속담에 물반 고기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곳 남산공원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 같다. 중국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때 마침 공연이 열리고 있었는데

 

남산 꼭대기에는 너른 광장이 있다. 마침 공연이 열리고 있다. 팔각정 아래 계단과 광장 주변에 사람들로 가득하다. 또 광장 주변에는 외국인을 위한 한복체험도 보인다. 한국관광객들이 중국에 가면 현지 체험하는 것과 똑 같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무술시범

 

광장에는 무술시범을 보여 주고 있다. 무술시합을 보면 박력이 넘친다.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광경이다. 마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액션에 박수가 요란하다.

 

 

 

 

진검배기시연

 

이어서 진검배기가 있었다. 실제로 진검을 사용하여 나무토막등을 베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안내방송에 따르면 가장 먼저 중국어가 나온다. 아마 중국관광객이 대부분이어서일 것이다. 이어서 영어로 안내멘트가 나온다.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도 상당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인 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남산 공원에서 진검배기시연은 좋은 눈요기 거리이다.

 

 

 

 

북쪽 전망대에서 본 서울

 

남산의 높이는 해발 262미터이다. 더구나 서울의 심장부에 있다 보니 사방으로 툭 터져 있어서 전망이 좋다. 구경을 제대로 하려면 타워로 올라 가야 하지만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전망을 감상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전망대가 있다.

 

북쪽 전망대에서 본 서울의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이다. 북한산이라는 국립공원이 병풍처럼 쳐져 있고 그 아래에 펼쳐져 있는 하얀 빌딩숲을 보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서울

 

전세계적으로 서울 만큼 아름다운 도시가 없을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큰 도시들은 평지에 있기 때문에 산을 볼 수 가 없다. 그러나 서울의 경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국립공원이 배후에 있다. 이런 이유로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개발이 끝난 서울

 

남산에서는 사방으로 서울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특징은 공사중인 빌딩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빌딩과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지만 새로운 공사는 보기가 힘들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개발이 거의 끝났음을 말한다. 이는 중국과 대조 된다.

 

 

 

 

 

 

 

 

 

 

 

 

중국여행을 하다보면 대부분 공사중이다. 마치 도시전체가 공사장 같은 분위기이다. 높은 빌딩을 짓기 위하여 타워크레인이 솟아 있고 끊임 없이 자재를 실어 나르는 트럭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광경은 이미 완성된 듯이 보인다.

 

 

 

 

 

 

 

 

 

 

 

 

 

 

 

 

 

 

 

 

 

 

 

 

 

 

 

 

 

 

변함 없는 삼각산

 

초등학교 시절 남산에 오른 적이 있다. 그 때 당시에도 팔각정 바로 옆 전망대에서 서울을 보았다. 지금처럼 사방이 개발되기 이전이다. 그래서 북쪽 전망대에서 본 것이다. 그 때 당시 본 서울도 장관이었다. 특히 저 멀리 북악산과 북악산 너머의 북한산이 인상적이었다.

 

북한산은 인수봉과 백운대, 노적봉 이렇게 세 봉우리를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삼각산이라 한다. 전망대에서도 삼각산의 웅장한 자태를 볼 수 있다. 옛모습 그대로이다.

 

 

 

 

세상에 저렇게 집이 많은데 왜 내 집은 없을까?”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북한산의 뾰족한 봉우리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산 아래의 주변의 모습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고층빌딩과 아파트를 특징으로 하는 백색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길이 끝나는 곳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있다. “저 많은 아파트 중에서 왜 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을까?”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말은 그때 당시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농촌에서 더 이상 살수가 없어서 남부여대하고 야간열차로 서울로 온 도시빈민들이다. 도시빈민이 어느 날 남산꼭대기에서 산아래 펼쳐져 있는 무수한 집들을 보고서 세상에 저렇게 집이 많은데 왜 내 집은 없을까?”라고 독백하듯이 말하는 장면이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그것도 극적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가득찬 빌딩과 아파트를 보았을 때 마치 한강의 기적이 실현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집타령을 하는 한숨소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대부분 중국인들의 자물통

 

남산에서 예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 있다. 그것은 타워 주변에 있는 자물통들이다. 세 벽면에 자물통으로 가득하다. 주로 중국에서 볼 수 있는데 남산에서도 이런 광경을 보고 놀랐다. 더욱 더 놀란 것은 자물통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중국인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자물통에 새겨져 있는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인 관광객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 오는지 알 수 있다.

 

 

 

 

 

 

 

 

 

 

 

 

 

왜 자물통을 다는가?

 

자물통을 매달아 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언약일 것이다. 연인들이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하고 약속하기 위해서 서로의 자물통에 열쇠를 채운 것이다. 이런 자물통 사랑에 대한 시를 하나 발견 하였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무릉원 자물통 사랑

 

문에 걸려 있어야 할 자물통이
구름이 사는 고독한 절벽
난간 줄에 걸려 있다.
주소도 이름도 없는 빈 벽
지켜 주어야 할 그 무엇도 없는데
오직 사랑을 위한 자존 하나로
적막을 먹고 산다.
사랑은 만나는 것보다
헤어짐이 더 어렵다고
가슴을 꼭 저민 채
시리도록 차가운 체온으로
장가계 무릉원 산정을 지킨다.
수많은 연인들이 매달아 놓은 자물통들
짙푸른 낭떠러지 산 계곡에
던지고 간 영혼의 열쇠가
녹슬지도 깨어지지도 않는
천상의 세레나데 옥타브를 오르내린다.

(김윤자)

 

 

 

 

문에 걸려 있어야 할 자물통이 사랑의 자물통으로 변한 것에 대한 시이다. 사랑을 만나는 것도 어렵다. 이렇게 어렵게 이룬 사랑에 대하여 쉽게 헤어지지 말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 사랑의 자물통일 것이다. 그래서 유명관광지마다 연인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예외 없이 사랑의 자물통을 본다.

 

 

 

 

 

 

 

 

 

 

녹이 슨 자물통

 

사랑을 할 때에는 천년만년 가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유행가의 가사처럼 변심하고 만다. 자물통에 열쇠로 채우듯이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 하였지만 마치 헌신짝 버리듯이 차버리고 떠나 버린다. 왜 그는 또는 그녀는 변심하였을까? 그것은 그 때 당시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때의 그 또는 그녀는 지금의 그 또는 그녀가 아니다. 왜 그럴까?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화 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실 가기 전의 마음과 다녀온 후의 마음이 다르다고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래 된 자물통을 보면 녹이 슬어 있다.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 하나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다. 흔히 자연무상 인생무상이라 하였을 때 자기의 마음은 변치 않고 주변이 변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약속을 맹세하였던 상대방도 변치 않는 마음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주변이 무상함고 동시에 나의 몸과 마음도 무상하게 변해 간다. 모든 것이 동시에 무상하게 변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렇게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하여 불교용어로 무아(無我, 아낫따)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abbe dhammā anattā ti, “삽베 담마 아낫따” 띠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빳사띠                  

Atha nibbindati dukkhe           아타 닙빈다띠 둑케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법구경, Dhp279, 전재성님역)

 

 

내가 느낀 교훈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거야!”

 

어느 영화 대사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느낀 교훈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거야!”라는 말이다. 여기서 아무도 라면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왜 그럴까? 자신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자신의 모습 그대로 가만 있지 않고 끊임 없이 바뀌기 때문이다.

 

마음은 얼마나 빨리 바뀌는 것일까? 그것은 이해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도 믿지 못하는데 남의 마음을 어떻게 믿을까? 그래서 무아일 것이다.

 

광화문광장으로

 

세상에서 나의 안전을 남에게 맡길 수 없다. 내가 남의 안전을 책임 질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나의 안전을 책임지게 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상대방은 나의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남의 안전을 맡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문과 함께 광화문으로 향하였다.

 

 

 

2014-08-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