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이 사라진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세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5. 19:28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이 사라진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세상 

 

 

배움의 목적은 읽어버린 양심에 있다

 

KBS특집프로에서 소년교도소이야기를 시리즈로 보여 주고 있다. 17세에서 23세까지의 연령대가 김천에 있는 소년교도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에 대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범죄를 저지르고 살아 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누구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환경에서 그들만이 범죄자는 아닐 것이다. 예비범죄자들이 대기 하고 있는 한 소년교도소의 문은 항상 열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에서 인상 깊게 본 것이 있다. 그것은 복도에 쓰여 있는 문구이다. 이를 스마트폰으로 메모 해 놓았는데 배움의 목적은 읽어버린 양심에 있다라는 문구이다. 키워드는 양심이다.

 

양심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양심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최근 방송과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이슈는 윤일병사건과 여고생피살사건이다. 차마 글로 표현 하기도 민망한 끔찍한 사건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된 요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양심과 수치심이 결여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범죄는 근본적으로 양심과 수치심을 모르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김천소년교도소에서 양심의 회복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초기경전에서도 양심과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온다. 상윳따니까야 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Dhātusova bhikkhave, sattā sasandanti samenti: assaddhā assaddh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Ahirikā ahirik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Anottāpino anottāpīhi saddhi sasandanti samenti. Appassutā appassut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Kusītā kusīt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Muṭṭhassatino muṭṭhassatīhi saddhi sasandanti samenti. Duppaññā duppaññ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믿음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창피함을 모르는 자는 창피함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배움이 없는 자는 배움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게으른 자는 게으른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새김이 없는 자는 새김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지혜롭지 못한 자는 지혜롭지 못한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Assaddhasutta-믿음이 없는 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17,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양심을 말하고, 창피함은 수치심을 말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Ahirikā ahirikehi saddhi sasandanti samenti)”라고 하였다. 창피함을 모르는 자는 창피함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Anottāpino anottāpīhi saddhi sasandanti samenti)”라 하였다. 이와 같은 부처님 말씀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예로부터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하여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수호하는 두 가지 원리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을 모르는 자들이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금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고 행한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은 것이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동물세계에서는 볼 수 있다.

 

동물들은 발정기가 되면 짝짓기를 한다. 그런데 동물들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초기경전에는 양심과 수치심이 없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시어경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염소, , , 돼지, , 승냥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하므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시설하는 것이다.”

 

(밝은 원리의 경, 여시어경 42(2-2-5), 전재성님역)

 

 

 

conscience

 

 

부처님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이다. 만일 이 두 가지 원리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마 도덕과 윤리가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라든가 숙모, 이모, 선생의 부인과 같은 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런 자들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Rosako kadariyo ca

pāpiccho vaccharī saho,
Ahiriko anott
āpī

ta jaññā vasalo iti.

 

남을 화내게 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이고,

인색하고, 거짓을 일삼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stn133)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에 대하여 천한 자(vasala)’라 하였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날 때부터 천한 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주변 환경에 따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요즘 세상은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양심과 수치심을 모르는 자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인터넷의 경우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아서 어른 아이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오염 될 수 있다. 특히 감수성이 민감한 청소년들이 오염 되었을 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주변환경의 요인에 따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인 것이 아니오, 태어나면서 바라문인 것도 아닙니다.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에 의해서 바라문도 되는 것입니다.(stn136)”라 하였다.  

 

범죄자는 태어 날 때 부터 범죄자가 아니었다. 범죄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보다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는 사회분위기와 사회환경에 강한 영항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근친상간등 난삽한 남녀관계가 발생하는 요인은?

 

갈수록 인면수심의 범죄가 늘어 나는 것은 사회가 타락하였다는 증거이다. 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면 국민들도 따라 갈 것이다. 그래서 나라 전체가 양심과 수치심이 마비 되었을 때 내부적으로 붕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두 가지 법이 인간사회를 수호하는 법이다. 그 법이 없다면 사회에서 인간규범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부끄러워함이나 창피함이 없다면 부모, 형제, 자매, 사촌 등의 사이에 본래 있을 수 없는 근친상간이나 난잡한 남녀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은 인간 사회의 규범을 수호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특히 청정한 대자연에 쓰레기나 폐수를 버리는 것에 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창피스러워했다면 오늘날 같은 환경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나까무라 하지메의 불교어대사전(佛敎語大辭典 499)에 따르면, 이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부끄러움은 마음속으로 죄를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고백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또는 부끄러움은 스스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창피함은 타인을 가르쳐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관찰을 통해 죄를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타인의 관찰에 대하여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타인의 덕을 흠모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스스로의 죄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밖에 부끄러움은 사람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하늘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Ahiriko anottāpī 412번 각주, 전재성님)

 

 

숫따니빠따 천한 자의 경(Sn1.6)에 실려 있는 각주이다. 각주에 따르면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은 인간사회를 수호 하는 법이라 하였다. 이는 여시어경에서도 두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을 것이고라 하였다. 부끄러워함이나 창피함이 없다면 근친상간등 난삽한 남녀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심과 수치심 선언을 해야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이 무너지듯이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고 창피함을 모른다면 짐승들의 세계나 다름 없을 것이다. 그런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으로 변질 될 것이다.

 

세월호참사가 발생한지 100일이 넘었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들이 없다. 병영에서는 성고문으로 인하여 귀한 집 아들이 죽었다. 꽃다운 여고생은 성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는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이라는 기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청문회에서 다운계약서작성, 위장전입, 논문표절 등 온갖 비리가 드러나 낙마한 지도층인사들이 많다. 모두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이 결여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성고문, 성폭력 등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오피니언리더들은 자발적으로 양심과 수치심 선언을 해야 할 것이다.

 

 

 

[세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결코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밝음의 근원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남과 죽음에 들어선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언제나 올바로 안다면,

그들은 청정한 삶을 성장시켜

적멸에 들어 다시 태어남을 부순다.” (여시어경 43)

 

 

 

2014-08-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