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야만의 시대와 가난한 노동자의 승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28. 16:25

 

야만의 시대와 가난한 노동자의 승리

 

 

유민아빠가 단식을 중단 하였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장기간 단식으로 인하여 몸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무척 염려 하였으나 단식을 중단하였다고 하니 안도한다. 이렇게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의 건강에 염려해 보기는 처음이다. 그것은 한 존재의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 글 가난하고 힘없는 유민아빠는 살아야 한다(2014-08-20)’에서 단식을 중단하고 살아남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단식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목숨을 건 단식 이야기는 많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비 샌즈이다. 1981년 북아일랜드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교도소에서 단식중 사망한 사람이다. 분리주의자 바비 샌즈가 단식투쟁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폭력적인 항의 방법으로서 여론 환기에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

 

바비 샌즈는 66일 동안 단식하다 사망하였다. 그렇다면 사망에 이를 정도의 단식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프레시안의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단식의 첫 며칠은 체내의 글루코스(포도당 등)에서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몸에 큰 변화가 없다. 며칠 후면 체지방 분해가 시작되면서 케톤체가 혈액 중에 증가하는 케톤증(ketosis)이 일어난다. 여기까지는 건강한 사람의 경우 쉽게 회복할 수 있는 일시적인 문제다. 그런데 약 20일이 지나면 근육과 장기의 세포를 파괴해 에너지를 얻는 '기아 상태'로 들어선다. 이 단계의 신체 손상은 회복하기 어렵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생명의 위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별한 체질이 아닌 보통사람은 50일에서 70일 사이에 목숨을 잃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가트 싱의 116일 외에는 100일을 넘는 단식이 확인된 예가 없다.

 

(누가 김영오 씨를 단식으로 몰고 갔는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대처의 '불통'까지 벤치마킹 하나?, 프레시안 2014-08-22)

 

 

단식을 하게 되었을 때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것이다. 단식한지 20일이 지나면 장기와 근육세포가 파괴된다고 한다. 더 이상 영양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신의 몸을 영양소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식이 장기화 될수록 장기가 파손되고 몸이 파괴 되어 가는 것이다.

 

단식하여 50일 이상이 되면 목숨을 잃는 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50일 이전에 단식을 중단하게 된 것은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단식을 하게 되면 사망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단식을 중단하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 본다.

 

철의 여인과 바비 샌즈

 

바비 샌즈는 66일동안 2차 단식하다 사망하였다. 이렇게 오랜 기간 단식하였음에도 영국정부는 불통으로 일관 하였다. 당시 마가렛 대처수상이었는데 이런 불통 이미지 때문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철의 여인 대처수상은 단식자에게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어떤 요구 조건도 들어 주지도 않고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단식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든 말든 원칙만을 지킬 뿐 이었다.

 

대처수상도 결국 사망하였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늙어서 죽은 것이다. 그래서 당시 단식투쟁을 하던 바비 샌즈도 죽었고, 대처도 죽었다. 1981년 단식사건이 일어난 이후 33년이 지난 현재 마가렛 대처도 없고 바비 샌즈도 없다. 그러나 평가만은 남아 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발달한 요즘 야영국에서 일어났던 가혹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

 

생방송중에 부끄러워해야 할 줄 아시오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단식을 중단한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YTN에서 단식중단에 대한 뉴스를 현지와 연결하여 보여 주었다. 유가족 대변인이 설명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일부를 보여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유가족 대변인이 생방송중에 한 말이 있다. 단식 중단으로 인하여 여당에서 벌써부터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방송 도중에 부끄러워해야 할 줄 아시오라고 말하였다. 왜 이런 단식사건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하여 부끄러워야 함에도 오히려 당리당략적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유민아빠 김영오씨는 7 15일부터 46일 동안 단식을 하였다. 이처럼 초인적인 단식을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일까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팔과 다리가 가늘어졌다. 이렇게 목숨을 건 단식을 하였음에도 일부 네티즌들은 본 뜻을 왜곡하거나 비난을 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살아 간다. 오감으로 느끼는 곳이 현실세계이다. 그러나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라 사이버세계에서도 살아 간다. 그래서 현실공간과 사이버공간을 무수히 넘나든다. 이렇게 본다면 사이버세계는 사실상 현실세계나 다름 없다. 그러다 보니 현실세계에서의 인간들의 모습이 사이버세계에서도 표출 된다. 아니 현실세계에서 보다 더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인터넷댓글이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인간의 양면성을 보게 된다. 현실세계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일지라도 익명을 전재로 한 인터넷세계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먹은 자를 욕하고 맞은 자를 때리고, 유민아빠 부녀는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2014-08-25)’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거울신경세포라는 말로 설명한 바 있다.

 

거울신경세포는 영장류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거울처럼 반영한다고 해서 거울신경세포라 하는데, 쉽게 말해서 공감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래서 타인이 불행에 처해 있거나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마치 자신의 불행이나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는 역지사지의 마음이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불행이나 고통에 대하여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도 포함 된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들이다. 단식을 하여 뼈만 앙상하게 남았을 때 이유야 어찌 되었건 마음속에서 동정심이 일아나는 것이 정상임에도 전혀 감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웃의 불행과 고통에 대하여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가장 이해 하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마치 개구리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아이들 같은 사람들이다.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개구리에게 돌을 던졌을 때 장난일지 모르지만, 개구리입장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사이버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서로 대면하는 일 없이 오로지 글로서만 소통하는 사이버공간에서 마치 개구리에게 돌팔매질 하는 듯한 네티즌이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이다. 당장 뉴스기사나 게시판의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뇌 구조는 정상적인 뇌구조와 다른 것일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모두 똑같다고 한다. 거울신경세포라는 것이 사람이 태어날 때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성댓글을 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성이 마비 되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부끄러움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거시기 하다가 발각 되었는데 내용이 거시기합니다

 

전제주지검장의 음란행위가 커다란 사회적 이슈로 떠 오르고 있다.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내용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종편채널에서 앵커는 거시기 하다가 발각 되었는데 내용이 거시기합니다라고 약간은 우스개 소리로 말하였다. 음란행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기가 곤란하여 거시기라 한 것이다.

 

전제주지검장의 음란행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으로 알 뿐이다. 그런데 음란행위가 한 두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차례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음 하였을 때는 어떠하였을까? 아마 많이 망설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행위인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처음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점차 대담해진다. 그러다 자주 반복되면 일상화가 된다. 처음과는 달리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못 된 짓도 자주 하다 보면 발각 되기 마련이다. 그럴 경우 본인은 심한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수치심은 본인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속한 조직원들도 동시에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사회를 수호하는 두 가지 법()

 

전제주지검장의 음란행위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다. 이 말은 양심과 수치심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다. 부끄러움에 대한 한자어 표현이 양심이고, 창피함에 대한 한자어 표현이 수치심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약간 다르다. 부끄러움은 자기자신을 속이는 것에 대한 것이고, 창피함은 겉으로 드러나 세상에 알려져 망신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끄러움을 양심으로, 창피함을 수치심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글을 쓴 바 있다. ‘부끄러움(양심) 창피함(수치심) 사라진 인면수심(人面獸心) 세상(2014-08-05)’라는 제목의 글이다. 글에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한 다음과 내용이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 : 이 두 가지 법이 인간사회를 수호하는 법이다. 그 법이 없다면 사회에서 인간규범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부끄러워함이나 창피함이 없다면 부모, 형제, 자매, 사촌 등의 사이에 본래 있을 수 없는 근친상간이나 난잡한 남녀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은 인간 사회의 규범을 수호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특히 청정한 대자연에 쓰레기나 폐수를 버리는 것에 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창피스러워했다면 오늘날 같은 환경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나까무라 하지메의 불교어대사전(佛敎語大辭典 499)에 따르면, 이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부끄러움은 마음속으로 죄를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고백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또는 부끄러움은 스스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창피함은 타인을 가르쳐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관찰을 통해 죄를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타인의 관찰에 대하여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타인의 덕을 흠모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스스로의 죄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밖에 부끄러움은 사람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하늘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숫따니빠따, Ahiriko anottāpī 412번 각주, 전재성님)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인간사회를 수호하는 법이라 하였다.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사라진 사회라면 근친상간등 짐승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 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의 차이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사라진 세상은 더 이상 인간세상이 아니다.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의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윤리적 가치관이 무너지고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을 서슴없이 자행할 것이다. 그런 부끄러움과 창피함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근거로 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No

부끄러움(양심)

창피함(수치심)

1

마음속으로 죄를 부끄러워 하는 것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고백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

2

스스로 죄를 짓지 않는 것

타인을 가르쳐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

3

자신의 관찰을 통해 죄를 부끄러워 하는 것

타인의 관찰에 대하여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4

타인의 덕을 흠모하는 것

스스로의 죄를 두려워 하는 것

5

사람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

하늘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

6

자기자신을 속이는 것

외부로 허물이 드러나는 것

 

 

표에서 1번항부터 5번항까지는 주석을 근거로 한 것이다. 6번항은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래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자기자신을 속임에 대한 것이라 하였고, 창피함은 자기자신을 속임으로 인하여 그 허물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폭행을 일삼는 자가 있는데

 

폭행을 일삼는 자가 있다. 특히 자신보다 약한 아동이나 장애인, 미성년자를 폭행하고 학대하는 자를 말한다. 이런 경우 역시 처음 시작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에 폭행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상화 되었을 때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양심이 마비 된 것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하였다. 그런 폭행, 폭력, 성폭행 등이 외부로 알려졌을 때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가해자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때문에 창피함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양심이 마비된자의 행위는 외부로 허물이 드러나게 되어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그런 행위를 방조한 사람들 역시 창피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악담을 하는 자

 

인터넷에서 기사나 게시판의 글에 댓글을 일삼는 자가 있다. 익명을 전제로 한 인터넷공간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마음껏 언어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몰래 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누가 보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한마디로 양심을 속이는 행위이다. 그러나 도가 지나치면 제제를 받게 되어 있다. 상대방이 명예훼손혐으로 고발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법정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세상에 알려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언젠가 보도된 뉴스에 따르면 악성댓글로 고발된 사람 중에는 대학교수도 있고 나이가 지긋한 중년들도 많았다고 하였다. 나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로 보아 도저히 그런 행위를 하였으리라고는 상상도 가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양심을 속인 것이다. 처음에는 가책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자주 하다 보니 양심에 마비가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런 행위가 범죄행위인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한 것이다. 그러다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망신을 당한다. 망신은 그가 속해 있는 가족이나 단체에도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양심은 자기자신을 속임에 대한 것이고, 수치심은 양심마비로 인한 행위가 외부로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유부남유부녀의 불륜

 

이처럼 양심이 마비되고 수치심이 드러난 케이스는 매우 많다. 유부남유부녀가 몰래 만나 불륜을 일삼는 것도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끄러워 하였을지 모르지만 밀회가 거듭될수록 점차 대담 해져서 아무거리낌 없게 된다. 양심이 마비 된 것이다. 한마디로 부끄러움을 모르게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불륜이 발각되면 세상사람들이 알게 된다. 그리고 손가락질 하게 된다. 그제서야 불륜남불륜녀는 창피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그런 창피함은 본인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차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떳떳한 자들이 있다. 그 어떤 비난이나 비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마도 윤동주의 다음과 같은 시에서 알 수 있다.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를 바랬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란 다름 아닌 양심을 말한다. 자기자신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않는 자들을 말한다. 그것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살생, 붙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움주 등 오계를 지키는 것이다. 오계를 더 확장하면 다음과 같은 십선업이 된다.

 

 

1)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는 이

2) 주지 않은 것을 빼았는 것을 삼가는 이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이

4) 거짓말을 삼가는 이는 거짓말을 삼가는 이

5) 이간질을 삼가는 이는 이간질을 삼가는 이

6) 욕지거리를 삼가는 이는 욕지거리를 삼가는 이

7) 꾸며대는 말을 삼가는 이는 꾸며대는 말을 삼가는 이

8) 탐욕이 없는 이

9) 화내는 마음이 없는 이

10) 올바른 견해를 지닌 이

 

 

이렇게 십선업을 지키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어느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의 통쾌한 승리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단식을 중단하였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무엇보다 단식하다 죽을 까봐 겁이 났다.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에서 유민아빠가 항상 하는 말이 특별법이 관철될 때 까지 광화문에서 죽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특별법은 제정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단식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족들의 만류 때문이라 한다.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혈육과 노모가 죽기를 원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단식을 중단하였는데 참으로 다행이다.

 

 

진:

 

 

그렇다면 유민아빠는 단식중단으로 패배 하였을까? 결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유민아빠의 승리로 본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승리이다. 또 양심이 마비되고 수치심이 실종된 이 나라의 기득권자들에 대하여 한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의  승리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승리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한 노동자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힘이 센 대통령과 맞짱떴다. 그것도 비폭력 투쟁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목숨을 건 단식으로 승부한 것이다. 계속 맞짱 뜬다면 한 사람은 시체가 되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었다. 그것도 스스로 멈추었다.

 

최고권력자가 단식중지를 호소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병문안을 온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단식으로 사람이 죽어 감에도 거들떠 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점이 안타까웠을까 국민들은 유민아빠를 살리기 위하여 동조단식에 들어 갔다.

 

정치인을 비롯하여 성직자, 문화인 그리고 일반인들 까지 수 만명의 국민들이 동조단식을 하였다. 한사람의 꺼져 가는 생명을 살리고자 한 것이다. 마침내 유민 아빠는 단식을 중지 하였다. 그리고 유민아빠는 동조단식자들에게 단식을 중지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통령이 나서서 할 일을 유민 아빠가 한 것이다.

 

유민아빠는 살았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사실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대통령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기득권자들에 대한 어느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의 통쾌한 승리이다.

 

 

 

2014-08-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