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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 없는 결혼식을 보고, 혼례식에서 축복경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6. 14:22

 

 

주례 없는 결혼식을 보고, 혼례식에서 축복경을

 

 

 

 

요즘 다짐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서이든지 경조사에는 참석한다는 나름대로 방침이다. 그 동안 친소관계에 따라 참석여부를 결정하였으나 문자나 전화가 오면 적극적 참석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경조사가 인륜지대사이기 때문이다.

 

요즘 문자가 날라 오면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되기 쉽다. 그것은 경사 아니면 조사이다. 자녀의 결혼식 아니면 부모의 상에 대한 것이다. 아무래도 인연이 있는 사람들 위주로 문자를 발송하겠지만 그 중에는 먼 관계도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찾아 가서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인상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플 때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사람이 사는 도리일 것이다.

 

법우님의 딸이 결혼하였는데

 

알고 지내는 법우님의 딸이 결혼하였다. 결혼식을 알리는 문자를 받고 먼 길을 달려 갔다. 지하철과 택시를 이용한 대중교통 수단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먼 길을 가다 보면 그 날 하루는 거의 지나 간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쪼개 가며 참석한 것은 인간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해서이다.

 

법우님은 불교교양대학 동기생으로서 정기적인 법회와 순례법회에서 종종 뵈었을 뿐 터 놓고 이야기 하는 사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십년 간의 세월이 있어서인지 얼굴은 매우 낯 익다. 아마 자주 보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식을 하는 이유는?

 

누구이든지 얼굴이 익숙해 지면 정답다. 아무리 못 생긴 사람도 자주 보면 예쁜 구석이 있듯이 자주 보면 익숙해져서 장점도 보이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배우자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데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배우자를 먼데서 찾으려 하는 것 보다 주변에서 찾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배우자를 만난다는 것은 커다란 인연이다. 먼 곳에서 만났건 가까운 데서 보았건 서로 함께 하기로 하였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커다란 사건이다. 그것도 일생에 단 한번 밖에 없는 대사건이다. 물론 두 번 세 번 치루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 일생에 한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큰 사건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잘 살겠다는 선언이라 볼 수 있다. 만일 공개하지 않고 그냥 산다면 어떻게 될까? 만나고 헤어짐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이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결혼식은 성대하게 열린다. 그것도 인연 있는 모든 사람을 초청해 놓고 약속을 하는 것이다.

 

결혼식장에 서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또한 함부로 헤어지지 않겟다약속을 한다. 그런 약속에 대한 말씀을 해주는 사람이 주례자이다.

 

주례 없는 결혼식

 

결혼식장에 가면 주례자를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분을 주례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번 결혼식에서는 주례가 없었다. 그 대신 신랑과 신부가 미리 준비해 온 선언문을 낭독 하였다. 내용은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겠다는 다짐이다. 이렇게 주례 없이 신랑과 신부가 선언문 낭독으로 결혼식을 치루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반드시 주례가 있어야 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주례사를 보면 대부분 판에 박은 듯한 말이다. 어느 혼례식장에서 들어도 비슷비슷한 말이다. 그래서 마치 붕어빵기계에서 붕어빵을 찍어 내듯이 천편일률적인 말이다. 그런데 이번 혼례식을 보니 파격적이다. 스스로 작성한 선언문을 인연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낭독한 선언문으로 주례사를 대신 한 것이다.

 

스님의 주례사

 

주례사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그렇다면 불교의 주례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마 불자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스님의 주례사일 것이다.

 

스님이 주례를 해도 되는 것일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에 있는 스님이 꽃다운 청춘 앞에서 주례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스님의 주례사라는 유명한 글이 있다. 그런데 주례사의 작자가 두 명으로 검색이 된다. 성철스님과 법륜스님이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건대 법륜스님의 주례사가 맞을 듯 하다.

 

법륜스님의 주례사는 매우 유명하다. 그것은 결혼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스님이 즉문즉설에서 늘 강조하던 내용이다. 예를 들어 부부는 애기 세 살때까지만 애를 우선적으로 하고..” 등과 같은 이야기이다.

 

법륜스님의 주례법문

 

인터넷정토회 자료에 따르면 장문의 주례사를 볼 수 있다. ‘법륜스님의 주례법문이라는 내용이다. 신랑신부 앞에 서서 직접 주례를 한 것이 아니라 법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 글이다.

 

법륜스님의 주례법문을 보면 부부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단 아내와 남편을 우선시 할 것,
두 번째 부모를 우선시 할 것.
세 번째 자식을 우선시 할 것,
이렇게 우선 순위를 두어야 집안이 편안해집니다.

 

(법륜스님의 주례법문)

 

 

주례법문을 보면 우선순위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 있다. 일순위가 부부이고, 그 다음이 부모이고, 그 다음이 자식이라 한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강조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스님이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이 비록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수 많은 사람들로 부터 들어서 간접적으로 알고 있다. 비록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 없다고 여겨진다면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였다. 부처님이 생노병사 등 여덟 가지 괴로움에 대하여 말씀 하였는데, 이런 팔고가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 없음을 확인한다면 비로서 진리로서 받아 들인다. 마찬가지로 법륜스님이 비록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아 보지는 않았지만 수 많은 사람들로 부터 고민을 들어서 알고 있을 때, 결혼을 해보지 않은 스님이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간접적 경험이 직접적 경험으로 치환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사성제의 법문이 자신의 현실의 삶과 대조 하여 틀림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saddha)’이 생겨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여자, 남자 몰라요” “남자, 여자 몰라요

 

이번 결혼식에서 신랑신부가 스스로 낭독한 선언문은 보통 이야기 되고 있는 일반적 이야기이다. 그러나 반드시 선언문처럼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다름을 알기 이전에는 낭만적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서로 다름을 아는 것이 급한 일이라 본다.

 

TV프로 중에 여자, 남자 몰라요” “남자, 여자 몰라요라는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다. 남녀생활탐구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서로 모르는 것이 남자와 여자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여자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반면 여자는 남자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서로 모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겨 난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적 지혜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여자는 남자와 어떻게 다를까?

 

여인에게만 주어지는 특수한 첫 번째 고통

 

초기경전을 보면 지혜로 가득하다. 그런 지혜 중에는 세간적 삶에 대한 것도 많다. 그런 지혜 중에 여인에 대한 것도 있다. ‘여인상윳따(S37)’에서 수행승들이여, 남자들과는 달리 여인에게는 여인이 겪어야 하는 여인에게만 주어지는 특수한 다섯 가지 고통이 있다.(S37.3)”라고 하였다. 다섯 가지 고통이란 무엇일까? 먼저 첫 번째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여인들은 나이가 어릴 때에 시집가서 친족과 떨어져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남자들과는 달리 여인이 겪어야 하는 여인에게만 주어지는 특수한 첫 번째 고통이다.”

 

(특수한 고통의 경, 상윳따니까야 S37.3, 전재성님역)

 

 

여인에게만 있는 첫 번째 고통은 어려서 시집가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나이 어려서 시집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TV를 보면 다문화가정이라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시집온 외국인 여인들을 보면 대게 요즈음으로 따졌을 때 어린 나이에 해당된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저 먼 타국에서 한국으로 시집 왔을 때 친정가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잘 들어 맞는다.

 

여인에게만 있는 다섯 가지 고통

 

여인에게만 있는 다섯 가지 고통에 대하여 경을 근거로 하여 표로 만들어 보았다.

 

 

No 여인에게만 있는 다섯 가지 고통(S37.3) 키워드 비고
1 세상에 여인들은 나이가 어릴 때에 시집가서 친족과 떨어져 지낸다.” 친족과 떨어져 지냄  
2 세상에 여인들은 월경을 한다.” 월경 신체
3 세상에 여인들은 임신을 한다.” 임신 신체
4 세상에 여인들은 분만을 한다.” 분만 신체
5 세상에 여인들은 남자에게 봉사를 한다.” 남자에게 봉사  

 

 

다섯 가지 항목을 보면 월경, 임신, 분만은 여성에게만 볼 수 있다. 이렇게 세 가지 항목에 대하여 여인들에게만 있는 고통이라 하였다. 더구나 친족과 떨어져 지내고 남자에게 봉사하는 것도 고통이라 하였다. 이런 고통이 현시대와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만일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면 결혼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 가지 여인의 힘

 

결혼을 하게 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인에게는 불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인이 힘을 받을 때가 있다. 비록 친족과 떨어져 지내고, 출산 하는 고통 등이 있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 힘을 받는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여인의 힘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1) 용모의 힘, 2) 재산의 힘, 3) 친족의 힘, 4) 자식의 힘, 5) 덕성의 힘이다.”

 

(부분의 경, 상윳따니까야 S37.32, 전재성님역)

 

 

용모가 아름다운 것이 여인의 힘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재산이 있어도 힘이 있는 것이고 권세 있는 친족이 있어도 힘이다. 자식이 있어도 힘이다. 그러나 어느 힘도 덕성의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

 

어느 힘도 덕성의 힘에는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용모의 힘을 갖추지 못했고, 재산의 힘도 갖추지 못했고, 친족의 힘도 갖추지 못했고, 자식의 힘도 갖추지 못했으나 덕성의 힘을 갖춘 여인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녀를 가정에 머물게 하지 쫒아 내지 못한다.”

 

(부분의 경, 상윳따니까야 S37.32, 전재성님역)

 

 

다섯 가지 여인의 힘 중에 으뜸이 덕성의 힘임을 말한다. 이와 같은 덕성을 가진 여인은 어떤 아내 스타일일까?

 

어느 스타일의 아내가 이상적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 일곱 종류의 아내이야기가 있다. 이에 대하여 친구 같은 아내인가? 왕족의 (Khattiyasutta, S1.14)(2013-10-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일곱종류의 아내는 초기경전에 살인자와 같은 아내, 도둑과 같은 아내, 지배자와 같은 아내, 어머니와 같은 아내, 누이와 같은 아내, 친구와 같은 아내, 하인과 같은 아내(A7.63)”라고 설명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곱 종류 아내 중에 어느 스타일이 가장 이상적일까? 그것은 친구와 같은 아내 스타일 것이다. 친구와 같은 아내는 다음과 같다.

 

 

[세존]

친구가 멀리서 오면 친구를 보고 기뻐하듯

여기 아내가 남편을 보고 기뻐한다.

고귀한 계행을 지닌 그녀는 남편에 충실하다.

이와 같은 아내가 있다면,

그녀는 친구와 같은 아내라고 불리네.

 

(일곱가지 아내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3, 전재성님역)

 

 

친구와 같은 아내에 대한 묘사의 하이라이트가 있다. 그것은  친구가 멀리서 오면 친구를 보고 기뻐하듯 여기 아내가 남편을 보고 기뻐한다.”라는 구절이다. 친구나 친척을 만나면 기뻐 하듯이 남편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내가 친구 같은 아내라 한다. 이와 같은 친구와 같은 아내, 친구와 같은 남편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스님들이 주례를 서는 것은 어색해

 

우리나라에서 결혼식은 정형화 되어 있다. 일부에서 변화를 시도 하기는 하지만 예식장에서 시간 단위로 벌어지고 있는 결혼식은 하나의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 반드시 등장하는 사람이 주례이다.

 

주례(主禮)결혼식을 주재하여 진행한다는 뜻이다. 그런 주례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주례를 부탁할 정도라면 이미 성공한 사람이라 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런 주례에는 성직자도 없지 않을 수 없다. 교회나 성당에서는 성직자들이 주례를 주관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주례를 서는 것은 어색해 보인다. 그렇다면 테라와다 불교의 종주국이라 자부하는 스리랑카에서 혼례는 어떻게 치룰까? 이에 대하여 불교혼례식의 전형을 보는듯, 스리랑카 포루와(Poruwa) 세레모니(2011-07-1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주례가 없는 스리랑카 전통혼례식

 

스리랑카 전통혼례식에서는 주례가 따로 없다. 다만 혼례를 도와 주는 진행자가 있을 뿐이다. 교회나 성당에서처럼 목사나 신부가 결혼식을 주도 하듯이 사원의 빅쿠가 혼례를 주도 하며 주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포루와라고 불리우는 단상 위로 신랑과 신부 두 사람만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 의식을 주관하는 사람에 의하여 식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혼례를 주관하는 주례는 단지 혼례식의 도우미에 지나지 않는다.

 

 

 

 

 

스리랑카 전통혼례식의 혼례도우미(의식을 주관하는 자)

 

 

결혼식에서 주례가 있어서 주례사를 낭독하고 주례를 주관한다는 것은 서구적인 혼례방식이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혼례에서도 주례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혼례를 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 도우미는 볼 수 있다. 스리랑카 전통혼례 역시 혼례도우미는 있지만 주례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주례 없이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잘 못된 것이 아니다. 단지 식을 진행하기 위한 진행요원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왜 행복이 아니라 축복인가?

 

이번 법우님 딸의 혼례식에서도 주례는 없었다. 그래서 판에 박은 듯한 주례사도 없었다. 다만 신랑과 신부가 준비해 온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그쳤다. 선언문이 주례사를 대신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 다짐을 하는 선언문을 낭독 하였을 때 하객들은 박수로서 축하해 주었다.

 

결혼식장이나 입학식장에서 축하한다라는 말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축하는 행복 보다 더 좋은 말이다. 이 축하라는 말은 축복과 같은 말이다. 축복에 대한 경이 있다. 숫따니빠따 망갈라경(Sn2.4)이 그것이다. 경의 마지막 게송에는 축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표현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Etādisāni katvāna                에따디사니 까뜨와나

sabbattha maparājitā,            삽밧타 마빠라지따
Sabbattha sotthi
gacchanti      삽밧타 솟팅 갓찬띠

ta tesa magalamuttamanti.    땅 떼상 망갈라뭇따만띠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69)

 

(Magalasutta- 위대한 축복의 경, 숫따니파타Sn 2.4, 전재성님역)

 

 

망갈라경 마지막 게송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게송에서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Sabbattha sotthi gacchanti)”라는 말이 축복의 의미를 잘 표현 하고 있다. 여기서 번영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sotthi’의 번역어이다. Sotthi‘well-being; safety; blessing’의 뜻을 가지고 있다. 平安, , 幸福, 吉祥. 安宁安全祝福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Sotthi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안전과 번영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안전과 번영은 어떻게 해야 실현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행복과 영을 위하여, 위대한 축복의 (2014-05-0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경에서는 수십가지 항목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분수에 맞게 산다든가 절제하는 삶, 부모를 봉양하는 삶,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게으르지 않는 삶 등이 모두 미래의 안전과 번영을 약속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망갈라경에 대하여 축복의 경이라 한다.

 

축하, 축원, 축도 하는 이유

 

누구나 행복을 이야기한다. 어느 종교이든지 행복을 이야기 하지 않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행복을 초월한다. 그것은 축복으로 나타난다. 가르침을 따르면 행복은 물론 미래의 번영도 기약될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축복이라는 말은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번영에 대한 것이다.

 

혼례식에서 하객들은 축하합니다” “축하해라고 말한다. 졸업식이나 입학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모임에서도 축사를 하고 축하를 한다. 종교행사에서도 종교인들이 축원하고 축도해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금 여기에서 행복에 만족해 하지 않음을 말한다. 단지 느낌에 불과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이 더 오래 도록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에 적합한 말이 축복이다.

 

망갈라경은 행복경이 아니라 축복경

 

축복이라는 말은 미래의 번영에 있다. 그래서 망갈라경 마지막 게송에서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sabbattha maparājitā Sabbattha sotthi gacchanti, stn269))”라 하였다. 바로 이 구절이 이경의 제목을 축복경이라 칭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일부 번역자들은 행복경이라 번역하고 있다.

 

망갈라경에 대하여 행복경이라고 번역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행복과 축복은 어떻게 다른가? 행복경이 아니라 길상경 또는 축복경이라 해야(2013-04-22)’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바 있다. 이처럼 경의 제목 망갈라(magala)라는 말 자체가 축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게송에서도 번영(sotthi)이라는 말이 있어서, 망갈라경은 당연히 축복경이라는 제목이 되어야 하나 행복경이라 이름 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축복이라는 말은 행복이라는 말을 포용한다. 행복이라는 말이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느낌에 지나지 않지만 축복이라는 말은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은 물론 미래의 번영까지 포함하여 포괄적이다. 이에 대하여 불교는 축복의 종교(2014-08-07)’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위대한 축복의 (2014-05-0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래서 망갈라경은 행복경이 아니라 축복경인 것이다.

 

왜 위대한 축복인가? 

 

축복경에는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번영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축복경은 테라와다 불교의 예불문이다. 동시에 테라와다 불자들이 늘 수지독송하는 수호경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번영을 약속하는 축복경은 혼례식용으로도 사용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법륜스님의 주례법문등 훌륭한 주례사가 있지만 축복경만한 것이 없다. 그런 축복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축복의 경

 

 

Eva me suta:

eka samaya bhagavā sāvatthiya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Atha kho aññatarā devatā abhikkantāya rattiyā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 jetavana obhāsetvā yena bhagavā tenupasakami, upasakamitvā bhagavanta abhivādetvā ekamanta aṭṭhāsi, ekamanta hitā kho sā devatā bhagavanta gāthāya ajjhabhāsi.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자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 때 마침 어떤 하늘나라 사람이 한 밤중을 지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따바나를 두루 비추며

세상에 존경받는 님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다가와서 그 하늘사람은 세존께 시로써 이와 같이 말했다.

 

1.

Bahu devā manussā ca             바후 데와 마눗사 짜

magalāni acintayu,            망갈라니 아찐따융
Ākakhamānā sotthāna           아깐카마나 솟타낭

brūhi magala muttama.         부루히 망갈라 뭇따망

 [하늘사람]

“많은 하늘나라 사람과 사람들,

최상의 축복을 소망하면서 행복에 관해 생각하오니,

최상의 축복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소서.

 

 

2.

Asevanā ca bālāna               아세와나 짜 발라낭

paṇḍitānañca sevanā,             빤디따난짜 세와나
P
ūjā ca pūjanīyāna              뿌자 짜 뿌자니야낭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세존]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에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3.

Patirūpadesavāso ca              빠띠루빠데사와소 짜

pubbe ca katapuññatā,            뿝베 짜 까따뿐냐따
Attasamm
āpaidhi ca                     앗따삼마빠니디 짜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분수에 맞는 곳에서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아서,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4.

Bāhusaccañca  sippañca           바후삿짠짜 십빤짜

vinayo ca susikkhito,            위나요 짜 수식키토
Subh
āsitā ca yā vācā             수바시따 짜 야 와짜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많이 배우고 익히며 절제하고

훈련하며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5.

Mātāpitū upaṭṭhāna              마따삐뚜 우빳타낭

puttadārassa sagaho,            뿟따다랏사 산가호
An
ākulā ca kammantā                     아나꿀라 짜 깜만따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6.

Dānañca dhammacariyā ca          다난짜 담마짜리야 짜

ñātakānañca sagaho,             냐따까난짜 산가호
Anavajj
āni kammāni               아나왓자니 깜마니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나누어 주고 정의롭게 살고,

친지를 보호하며,

비난 받지 않는 행동을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7.

Ārati virati pāpā                아라띠 위라띠 빠빠

majjapānā ca saññamo,            맛자빠나 짜 산냐모
Appam
ādo ca dhammesu             압빠마도 짜 담메수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악함을 싫어하여 멀리하고,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8.

 Gāravo ca nivāto ca             가라워 짜 니와또 짜

santuṭṭhi ca kataññutā,           산뚯티 짜 까딴뉴따
K
ālena dhammasavaa            깔레나 담마사와낭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9.

Khantī ca sovacassatā            칸띠 짜 소와짯사따

samaānañca dassana,           사마나난짜 닷사낭
K
ālena dhammasākacchā            깔레나 담마사깟차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10.

Tapo ca brahmacariyañca          따뽀 짜 브라흐마짜리얀짜

ariyasaccānadassana,            아리야삿짜나닷사낭
Nibb
ānasacchikiriyā ca           닙바나삿치끼리야 짜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11.

Phuṭṭhassa lokadhammehi           풋탓사 로까담메히

citta yassa na kampati,         찟땅 얏사 나 깜빠띠
Asoka
viraja khema          아소깡 위라장 케망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슬픔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12.

 Etādisāni katvāna               에따디사니 까뜨와나

sabbattha maparājitā,            삽밧타 마빠라지따
Sabbattha sotthi
gacchanti      삽밧타 솟팅 갓찬띠

ta tesa magalamuttamanti.    땅 떼상 망갈라뭇따만띠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Magalasutta-위대한 축복의 경, 숫타니파타Sn 2.4, 전재성님역)

 

 

 

 

파격적인 결혼식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다. 십년전 처음 불교에 입문하였을 때 본 광경은 불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백팔배 할 때 지극정성으로 하는데 머리맡에는 수첩이 있었다. 수첩을 펼치면 사진이 나온다. 사진속의 주인공은 수능시험을 앞둔 자녀이다.

 

자녀의 사진을 앞에 두고 지극한 마음으로 백팔배를 올리는 것이 불자들이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놀랐다. 여려 사연으로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하였겠지만 상당수가 자녀들의 수능시험을 앞두고 입교 하였기 때문이다. 십년이 지난 지금 그 자녀들이 이제 결혼할 때가 된 것이다.

 

이번 법우님 딸의 결혼식은 파격의 연속이다. 결혼식장이 흔히 볼 수 있는 웨딩홀이 아니다. 대기업 강당을 이용하였다. 그것도 단 한차례 밖에 없다. 피로연은 구내식당이다. 그런데 가장 파격적인 장면은 주례가 보이지 않는 결혼식 장면이다. 이제까지 주례가 없는 결혼식은 한번도 상상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주례가 없는 대신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을 주도 하였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일반적인 결혼식 장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주례이다. 주례가 중앙에 서서 식을 주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도 하다 보니 주례사도 훈계조 위주가 되기 쉽다. 명망가나 유명인, 또는 덕망 높은 어른의 주례이기 때문에 결혼식이 주례자 위주로 되기 쉽다. 주례자 위주의 결혼식은 교회나 성당에서도 볼 수 있다. 중앙에 서서 식을 집행하는 목사나 신부가 마치 결혼식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현상이 발생한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당연히 신랑과 신부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웨딩홀이나 교회 등에서 보는 결혼식은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 주례자가 마치 주인공처럼 보이고, 이날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마치 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혼례식장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주인공이었다. 스스로 작성한 선언문을 각자 낭독하고 모인 하객 앞에서 지킬 것을 맹세 하였기 때문이다.

 

혼례식에서 축복경을

 

혼례식의 주인공은 주례도 아니고 신랑과 신부의 부모도 아니다. 이날의 주인공은 새출발을 하는 신랑과 신부이다. 이런 자리에 참가 한 사람은 축하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다. 이 때 축하는 다름 아닌 축복이다.

 

축복이라는 말은 행복 보다 더 좋은 말이다. 행복이 지금 여기에서 좋은 것으로 한정 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면 축복은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 뿐만 아니라 미래의 번영까지 기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례식장에서는 축하합니다또는 축하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행복 보다는 축복이다.

 

모두들 행복을 이야기 하지만 불교에서는 축복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불교는 행복의 종교라기 보다 축복의 종교이다. 축복의 종교로서 대표적인 경전이 축복경이다. 어떤 행사나 어떤 모임에서든지 축복경을 독송하면 현재의 행복은 물론 미래의 번영까지 약속할 것이다. 특히 불교인들이 혼례를 올릴 때 축복경을 낭송한다면 더할 나위 좋을 것이다.

 

 

 

2014-10-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