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난 나그네가 돌아 오듯, 불교입문 십년을 맞이 하여
블로그는 개인공간
이 블로그는 한보통불자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이다. 블로그(blog)라는 신조에 대한 국어사전을 보면 “네티즌이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자유롭게 게시물을 작성하여 올리는 웹 사이트”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블로그는 개인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부르는 명칭이 ‘개인블로그’이다.
개인적인이고 사적인 공간에서 어떤 말이든지 할 수 있다. 마치 일기를 쓰듯이 그날그날 보고 듣고 느낀 감정을 글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블로그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사진은 물론 동영상까지 올려 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는 지난 10년간 블로그의 진화역사를 보아 왔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블로그에서 글을 올린다는 것은 이제 공적인 것과 다름 없다. 인터넷의 속상상 올려진 정보는 공유 되기 때문에 아무리 사적인 이야기라도 공개되면 더 이상 자신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이런 변화가 인터넷이 본격화 된 2000년 이후 새롭게 시작 되었다.
정식으로 불자가 되고자
2005년 블로그를 개설한 이래 9년 되었다. 그 동안 올려진 콘텐츠가 이제 7,000건이 넘었다. 블로그를 만들고 한 두해에는 열심히 남의 글을 퍼 날랐다. 주로 불교관련 이야기들로서 약 4,500건 가량 된다. 이렇게 열심히 올린 것은 2004년 불교와 정식으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2004년 3월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함으로서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일종의 ‘정서적 불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전에는 한번도 절에 간적이 없었다. 그리고 스님을 만난적도 없었다. 그러나 항상 마음으로는 ‘불자’이었다. 그래서 각종 지원서의 종교란에는 늘 ‘불교’라고 자신 있게 적었다. 그러나 책을 통하여 접한 불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배워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관악산 모 사찰 종무소에 물어 보니 “이곳은 기도도량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몇 년 흘렀다.
마침내 불교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불교교양대학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가 등록을 하고 다니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즉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 시간에 열리는 불교강좌시간인 것이다.
직장인으로서 어렵게 시간을 내게 된 것은 불교에 대하여 알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기대감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래서 한 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등록한 것이다. 그때가 2004년 3월 이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만 10년전이다.
법당에 들어가자 놀라운 광경을
그런데 법당에 들어가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너른 법당에 사람들이 거의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약 ‘육칠백명’ 가량 되었다. 고작 몇 십명 앉아 있겠거니 하고 문을 열었으나 수 백명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아, 이런 곳도 있었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좌우 길이가 약 삼사십미터 되는 법당안에는 지역별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강남, 강북, 수도권 등 지역단위로 자리가 배정된 것이다. 한번도 불교에서 이런 광경을 보지 못하였다. 산중에나 가야 절을 볼 수 있고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다 보니 불교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수백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이다.
방관적자세에서 적극적자세로
수도권 팻말이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늦게 도착하였으므로 맨 뒤에 앉았다. 그러다 보니 강좌를 진행하는 스님이 아득하게 멀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입교후 세 번째 강좌부터 참석하였다. 처음 들어 갔을 때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그러나 옆을 쳐다보니 모두 준비한 교재를 보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원장스님의 강좌를 열심히 노트하는 사람도 보였다. 그러나 스스로 찾아 온 불교교양대학에 대하여 정보가 전무하였기 때문에 그저 뒤에 앉아서 ‘방관적’ 자세로 지켜 보았다.
그런데 강좌를 듣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달변에 마치 사람을 웃겼다 울렸다 하듯이 마치 원맨쇼 하는 것처럼 원장스님이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법문이 끝났을 때 만족스러웠고 “들을 만 하다” 라고 결론 내었다.
그 이후 적극적 자세로 전환 하였다. 책을 구입하고 노트를 하는 등 처음 방관적 자세에서 변화가 온 것이다. 수백명의 청중을 휘어 잡는 원장스님의 역량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본다. 이렇게 처음 접한 불교에서 흥미를 가지게 되자 이후 불교서적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하루 온 종일 불교와 관련 된 것으로 꽉 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료저장창고로서의 블로그
그런데 2000년 이후 인터넷이 본격화 되면서 인터넷에도 불교관련 정보로 넘쳐 났다. 이런 자료를 한 곳에 모을 공간이 필요 했다. 그때 ‘블로그’라는 새로운 개념의 막 등장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2004년 당시 블로그가 2004년 히트상품으로 선정될 정도로 주목을 받은 것이다.
포털에서 제공되는 블로그서비스를 이용하여 2005년 처음으로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것이 블로그를 하게 된 동기이다. 이때 블로그는 일종의 ‘자료 저장 창고’로서의 역할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모은 자료를 모아 둘 공간이 필요 했던 것이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축적하다 보나 4500건 가까이 되었다.
900명이 입교하여 400여명이 졸업
불교와 정식으로 인연을 맺은지 만 10년이 되었다. 2004년 3월에 입교하여 4개월 교육과정으로 졸업한 법우님들이 있다. 입교할 당시에는 등록인원이 ‘9백여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6월 졸업할 당시 ‘400여명’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도중에 반이 빠져 나가 반토막이 난 것이다.
불교와 한번 불교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절에서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역별로 법회모임을 만들어 묶어 두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해 송년회 할 당시에 모인 기별 인원은 약 150명 가량 되었다. 커다란 부페를 빌어서 행사를 치른 것이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참석인원은 줄었다. 그럼에도 각종 명목의 법회와 일년에 서너 차례 있는 순례 법회, 연등축제 등을 통하여 자주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마련 되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나오는 사람은 나오고 도중에 그만 둔 사람도 생겨 났다. 그래서 십년이 지난 지금 현재 기별 법회 모임 회원으로 남아 있는 인원은 35명이다. 400여명이 졸업하여 10%에 못미치는 인원이 끝까지 인연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꼭 십년 전 이자리에 있었는데
올해 첫 정기법회 모임이 절에서 열렸다. 작은 법당에서 모인 인원은 20여명이다. 35명 중에 삼분의 이 가량이 참석한 것이다. 법당에 도착하자 만감이 교차하였다. 꼭 십년 전 이자리에 있었는데 장소는 변함 없으나 십년전 사람들의 열기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교교양대학은 열리고 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니 십년전 이맘 때 쯤과 비교하였을 때 십분의 일가량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원장스님은 열정적으로 마이크를 쥐고 있는 것을 볼 때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총무법우님의 헌신이 없었다면
2004년 봄 학기에 인연을 맺은 법우님들 모임은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일년에 네 차례 정기적인 법회모임과 순례 등 각종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분은 총무법우님이다.
십년전부터 법회모임을 이끌고 있는 총무법우님은 모든 일에 ‘헌신적’이다. 아마도 총무법우님의 이런 헌신이 없었다면 오래 전에 모임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총무법우님은 현재 국가기관 병원에 있는 병원법당에서 법사로서 봉사 중에 있다. 아픈사람들을 위하여 병실을 돌아 다니며 위로 해 주는가 하면 병원법당 스님과 함께 사십구제 등을 지내 주고 있다.
여법하게 열린 불자들만의 법회
이렇게 모든 일에 헌신 하고 있는 총무법우님은 사실상 스님이나 다름 없다. 직접 목탁을 들고 법회를 진행하는 등 머리만 깍지 않았을 뿐 스님이 하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총무법우님 주관으로 올해 첫 기별 정기법회가 작은 법당에서 열렸다.
비록 재가불자들만의 법회 모임이지만 법회는 여법하게 치루어진다. 삼귀의부터 시작하여 사홍서원과 산회가에 이르기 까지 지난 십년 동안 늘 그렇게 해 온 것이다. 그런데 삼귀의를 할 때 노래소리를 들으면 처음 불교와 접하였을 때 모습이 떠 오른다. 공식적으로 불교를 접한 것은 2004년이지만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시절은 70년대 중반이기 때문이다.
한글삼귀의문 노래를 들을 때 마다
불교와의 인연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조계종 종립중학교로 배정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종로5가 부근에 있었던 동국대 부속중학교이다. 이 때 처음으로 배운 노래가 ‘한글삼귀의’이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로 되어 있는 한글삼귀의문에다 특유의 곡을 붙여서 만든 노래이다. 그래서 한달에 한 번 있는 운동장 전체 조회시간에 한글삼귀의문 노래를 불렀다. 조회가 끝나면 ‘사홍서원’ 노래로 마무리 하였다.
이후 종종 TV에서 봉축법요식에서 한글삼귀의문 노래를 들었다. 중학교 시절 부르던 노래의 음조가 똑 같아서 매우 마치 친척을 만났듯 익숙하였다. 비록 중학교 이후 불교와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종종 듣는 삼귀의문 노래의 영향이어서인지 정서적으로는 불자이었다. 그런데 이번 법회 모임에서 법우님들이 “거룩한 부~처님께~”시작되는 삼귀의문을 합창 하였을 때 또 다시 익숙한 ‘데자부’를 느꼈다. 아마도 한글삼귀의문 음조가 불자들에게 “우리는 불자다”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가져다 주는 것 같다.
중학교에서 접한 불교
중학교에서 접한 불교는 기복불교와 거리가 멀었다. 부처님의 일생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이니 지장보살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불교학교라서 그런지 불교선생님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교법사’라 부른다.
중학교 일학년 당시 교법사 선생님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지금은 동국대 불교학과에 재직중에 있는 ‘조용길 교수님’이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당시 중학교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교법사 선생님이었다.
교법사 선생님을 통하여 불교를 처음 접하였다. 부처님의 일생부터 배우는 불교시간에 선생님은 불교경전의 일화를 소개 하면서 재미있게 이끌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부처님 오신날과 어머니 날을 기념하여 교내 백일장이 열렸다. 그 때 상을 받았다. 글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상으로 받은 것은 작은 화첩으로 된 ‘부모은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당시부터 글쓰는 재주는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다닐 때 일기를 꼬박꼬박 썼는데 이런 일기쓴 것이 오늘날 블로그에 매일 글을 올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집 떠난 나그네가 다시 돌아오듯
중학교 다닐 때 본인의 의지와 관계 없이 우연하게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아무 저항 없이 받아 들였다. 그래서 불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부처님의 일대기 역시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30년 동안 불교와 인연이 없었다. 그러다가 2004년 불교와 다시 인연을 맺었다. 마치 집 떠난 나그네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다시 돌아 와서 본 불교는 ‘대승불교’이었다. 우리나라 불교환경이 그렇듯이 대승불교를 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특징으로 하는 불교를 접한 것이다.
두 번 접한 불교선생님
그런데 불교교양대학에서는 일주일 두 번 강의 중에 한번은 외부 초빙강사가 맡았다. 동국대 교수라 하였다. 그러나 넓은 법당의 맨 뒤에 항상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강사는 저 멀리 있었다. 그래서 마이크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불교TV사이트에서 눈에 익은 교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생활속의 아함경’을 강의 하는 동국대 교수님이었다. 너무 익숙한 모습이어서 누굴까 생각하다 얼굴의 이미지와 이름이 매칭 되면서 “아, 그분이구나”라고 순간적으로 떠 올랐다. 중학교 시절 불교선생님이라 부르던 교법사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나중에 안시실이지만 이 교수님이 2004년 불교교대학에서 강의 하던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용길 교수님이다. 그러나 2004년 당시 맨 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가물가물하여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교수님이 중학교 시절 바로 그 교법사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불교교양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후에 알 았다. 중학교 시절 그토록 존경하던 선생님이 불교교양대학의 강의를 하였는데 그때 당시 못 알아 본 것이다.
처음 초기경전을 접하였을 때
불교교양대학에서 조용길 교수님은 초기불교를 담당하였다. 교재는 ‘아함성전’이다. 교수님이 편찬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교재를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 되었다.
그렇다고 교재를 중심으로 진도가 나간 것은 아니다. 주로 이야기 위주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약 4개월에 걸쳐 16번 가량 있는 강의에서 두꺼운 아함성전을 모두 소화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다만 이런 경전이 있다라는 정도로 아는 것으로 족한듯이 보였다.
그럼에도 이왕 산 책이기에 열어 보았다. 그러나 재미가 없었다. 이제까지 재미만 추구하며 산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함경에 있는 내용은 무미건조하고 따분하기 그지 없는 내용들로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리하게 계속 되는 반복구문을 보면 더욱 더 재미 없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여러 차례 읽기를 시도 하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그래서 아함경은 재미없고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 떠들어 보지도 않았다.
다시 아함성전을 열어보니
십년이 지난 오늘 다시 아함성전을 열어 보았다. 이미 초기불교를 접하고 빠알리니까아를 읽고, 또 글을 쓰는 입장에서 이제 초기불교경전은 익숙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따뿐하고 재미 없었던 아함성전을 다시 열어 본 것이다.
단권으로 된 책을 보니 상윳따니까야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61.이식과 훈습’이라는 제목의 경이 있다. 이에 대하여 ‘감흥어-깨달음의 노래’를 보면 ‘남전 상응부22.79’와 ‘한역잡아함경2.14’라 되어 있다. 이 경에 대하여 성전협의 상윳따니까야를 찾아 보니 ‘희생되는 것에 대한 경 (Khajjanīya sutta, S22.79)’으로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아함성전은 일본에서 빠알리니까야를 일본어로 번역한 ‘남전대장경’과 ‘한역아함경’을 참고하여 편찬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아함성전의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남전 5부니카야(nikaya)와 북전 4아함(Agama)의 주옥 같은 진리의 말씀들을 재구성하여 이번에 발간하게 된 아함성전은 21세기에 직면한 인간과 사회와 자연 생태계를 황폐화 분열 내지는 파괴 교란 시키는 각종 종말론적 문제를 해결하고 정서, 윤리, 도덕적 사유와 실천을 되살리는데 필요힌 사상적 근거를 제시해 줄 것이다.
(아함성전 머리말, 조용길 교수)
머리말에 따르면 아함성전이 니까야와 아함경을 저본으로 하여 편찬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방대한 상윳따니까야에서 꼭 필요하다고 보는 핵심이되는 경을 모아 단권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주옥 같은 진리의 말씀’이라 하였다.
대략난감한 초기경전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하는 초심자에게 있어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르는 것 같다. 읽어 보아도 눈에 들어 오지 않고 지루한 반복구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受를….想을…. 行을….識도 늘리지 않고 줄이지 않는 것이다.”라는 형식의 구절을 접하였을 때 요즘 말로 ‘대략난감’한 것이다. 장황스런 말의 폭탄에 질려 버리고 만 것이다.
처음 입문하는 사람에게 오온이나 십이연기 등 근본법문을 가르쳤을 때 받아 들이기 힘든 것이다. 또 초기불교를 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도 역시 근본 가르님은 재미가 없고 지루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교수님은 진도를 나가지 않고 그 대신 재미 있는 불교 이야기로 대신 하였다.
친척 보듯이 반가운 법우님들과의 인연
불교와 처음 인연을 맺은지 40년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와 정식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딱 10년 되었다. 그런데 10년 동안 맺은 인연이 또 있다. 법우님들과의 인연이다. 함께 공부하고 순례다니고 보니 십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만나면 친척 보듯이 반가운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다. 십년전 50대의 법우님들은 60대가 되었고, 60대는 70대가 되었다. 또 십년전 40대의 법우들은 50대가 되었고, 30대는 40대가 되었다.
십년전 20대 아가씨가 있었다. 두 해 전 순례법회 갈 때 오랜만에 얼굴을 보였다. 가족과 함께 온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큰 아이가 이제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하였다. 십년이라는 세월이 강산만 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서 어느덧 학교에 갈 시간만큼 긴 세월이 된 것이다.
이렇게 처음 인연을 맺어서 함께 가다 보니 한가지 단점이 하나 있다. 막내는 늘 막내인 것이다. 십년전 30대로서 막내 역할을 한 법우님이 지금도 짐을 실어 나르고 나누어 주는 등 여전히 막내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년지기 법우님들은 친척과도 같다. 경조사가 있을 때 늘 함께 하는 것이다. 즐거운일은 자녀들이 결혼하는 것이고, 슬픈일은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이다. 이렇게 경조사를 함께 하는 십년지기 법우님은 친척과도 같다. 그래서 친구 만나는 것 보다 더 반가운 것이다.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는 자는
오랜 세월 비탄에 젖는다.
어리석은 자와 같이 살면
적과 함께 하듯 괴롭다.
현명한 자와 같이 살면
친족과 함께 하듯 즐겁다. (dhp207)
201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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