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발,…”하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 수리산 능선길 소나무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요즘 잘 통용되지 않는다.교통이 발달한 시대에 천리길은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 등 여러 가지 탈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옛날이나 오늘이나 이런 말을 떠 올리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토요일 오후 근처 산에 올랐다. 사는 지역에 있는 ‘수리산’이다. 가까이 있기에 걸어서 갔다. 단풍철에 유명한 산을 등반하기로 한다면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이렇게 근처에 있는 산에 오르면 여러 모로 절감이 된다.
고지가 저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
등산할 때는 한걸음씩 올라 가야 한다. 오로지 한걸음 한걸음 자신의 힘으로 올라 가는 것이 등산이다. 이렇게 한걸음 한걸음 올라 갈 때 마다 다리에 힘이 들어 가고 숨이 차다. 도중에서 올라 가는 것을 포기 하고 내려 오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갈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오로지 정상만을 바라 보며 올라가면 무척 힘이 들다.
‘고지가 저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등산에서는 그런 말은 힘만 들게 만든다. 저 멀리에 있는 고지만을 생각하며 걸음을 떼었을 마음의 부담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차라리 정상을 생각하지 않고 가는 것이 더 낫다.
정상을 바라보며 빨리 가려 한다면 금방 지쳐 버린다. 그러나 가파른 등반로에서 발에 집중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여럿이서 갈 때는 앞사람의 발에 집중을 하면 편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발, 발,…”하며 올라가면 힘들지 않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앞사람의 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앞사람의 엉덩이만 보고 간다’고 우스개소리로 말한다.
홀로 간다면 자신의 발에 집중하고, 여럿이서 간다면 앞사람의 발에 집중하면 마음의 부담이 적다. 왜 그럴까? 자신의 발이든 남의 발이든 남의 엉덩이든 지금 현재에 집중하면 가파른 길이 그다지 부담이 없다. 그러나 저 멀리 고지를 바라보며 “고지가 저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라고 마음의 다짐을 한다면 등산이 무척 힘들어진다. 인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저는 기필코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 있다. 그것은 ‘인생길’이다. 그래서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 그 길은 부모 등 타인이 대신 가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홀로 가야 한다. 그런데 등산을 하다 보면 마치 인생길을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등반은 인생길의 축소판과도 같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지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인생길에서 목표가 있는 자도 있고 없는 자도 있다.
인생길을 가는데 있어서 대부분 특별한 목표가 없다. 그래서일까 언제가 본 tv방송에서 어느 고교생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저는 기필코 아버지가 되겠습니다”라 하였다.
아버지가 되는 것도 목표일 것이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라 본다면 커다란 목표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수동적이고 소박한 목표이다. 그저 세상의 흐름대로 따라 가는 것이다.
더 큰 목표를 가지는 자들도 있다. 중학교 다닐 때 어떤 친구는 장래에 검사가 되겠다고 하였다. 검사가 무슨 직업인지 모를 때 검사가 되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아마 친구의 집안에 검사출신이 있었거나 아니면 검사의 지위에 대하여 알았기 때문이라 보인다. 그 친구가 검사가 되었는지 안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학교시절에 남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목표를 세웠다면 아마 검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허황된 꿈
꿈이 있으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능력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과도하게 높게 잡는 경우 이루어지기 힘들다. 대통령이나 재벌 등 아주 특별한 케이스를 목표로 삼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 꿈을 ‘허황된 꿈’이라 한다.
허황된 꿈을 꾸는 자들이 있다. 자신의 능력과 무관하게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재산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능력과 무관하게 높은 지위를 가졌을 때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능력이 안되는 자가 높은 지위에 앉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커다란 불행을 야기하고 말 것이다. 자신의 파멸은 물론 주변에 까지 커다란 해악을 끼치게 된다.
왜 곳간이 비는가
능력이 안되는 자가 허황된 꿈을 꾸면 파멸에 이른다. 이런 케이스가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 ‘파멸의 경(Sn1.6)’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Itthisoṇḍiṃ vikiraṇiṃ
purīsaṃ vāpi tādisaṃ,
Issarīyasmīṃ ṭhāpeti
taṃ parābhavato mukhaṃ.
[세존]
“술에 취하고 재물을 낭비하는
여자나 그와 같은 남자에게,
실권을 맡긴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tn112)
술에 취하고 재물을 낭비하는 자에게 곳간을 맡길 수 없다. 사치를 하고 낭비벽이 있고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에게 창고를 맡겨 놓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 놓는 것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아 곳간이 텅텅비게 될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가정에서의 일만이 아니다. 돈을 다루는 직업에 있는 자들의 부정행위가 이를 증명한다. 능력과 자질, 도덕성이 부족한 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을 때 파멸로 귀결 되고 말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권력을 꿈 꾸는 자
능력과 자질, 도덕성이 결여된 자가 권력을 탐하였을 때 어떻게 될까? 그것도 최고권력자가 되고자 하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Appabhogo mahātaṇho
khattiye jāyato kule,
Sodha rajjaṃ patthayati
taṃ parābhavato mukhaṃ.
[세존]
“왕족의 가문에 태어나더라도,
권세는 작은데 욕망만 커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tn114)
왕족으로 태어나면 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연유로 누군가 왕이 되면 왕권강화를 위해서 잠재적인 경쟁자는 모두 제거된다. 이렇게 본다면 능력이 되지 않음에도 왕권을 넘본자는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파멸의 문으로 들어 가는 것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능력이 안되는 자가 높은 지위를 탐하여 그 자리에 올라 갔을 때 이는 재앙이다. 능력이 안되고 자질이 부족한 자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증명된다.
“허황된 생각말고…”
허황된 꿈을 꾸는 자는 파멸에 이른다. 자신의 능력과 자질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에도 달성하기 힘든 목표를 가진다면 자신의 파멸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준다. 그래서일까 지혜로운 노인이 젊은이에게 해 주는 말이 “허황된 꿈을 꾸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라는 말이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노인들은 경험으로서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미래를 위하여 많은 돈을 벌고자 한다. 그래서 한 때 너도 나도 주식에올인 하였다. 그러나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을 보기 힘들다. 거의 대부분 원금을 잃어 버리고 심지어 빚까지 진 경우가 허다하다.
일확천금을 노리다 패가망신한 경우는 카지노, 경마 등 사행성 게임도 해당된다. 부동산 투기 역시 그런 범주에 속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로소득을 바라는 것이다. 돈 놓고 돈먹기 식이고, 작은 돈으로 큰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허황된 꿈이다.
분명한 사실은 허황된 꿈을 꾸는 자들 대부분 파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노인은 이런 사실을 알기에 새배 받을 때 덕담으로서 “허황된 생각말고…”라고 말한다.
청소년의 꿈에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나 검사가 되는 것은 허황된 꿈이 아니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과 자질, 그리고 도덕성이 결여된 자가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최고권력자가 되려는 것은 허황된 꿈이다.
허황된 꿈을 꾸면 마음만 앞서 간다. 마치 세상사에 오염될 대로 오염된 자가 저 높은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청소년이 아버지가 되겠다는 꿈, 검사가 되겟다는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 꿈을 향하여 뚜벅뚜벅 나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세상은
인생길은 등산에 비유할 수 있다. 누구나 올라 갈 수 있는 저 높은 산을 올라 가는 것이다. 그러나 오를 때 힘이 든다. 탈 것을 타고 올라 가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두 다리로 올라 가야 한다. 그런데 저 산의 정상만 바라만 보고 올라 간다면 쉽게 지쳐 버린다. 그럴 경우 발에 집중하면 쉽다. 또 힘들면 쉬었다가면 된다. 그렇게 오르고 오르다 보면 어느덧 정상이 가까워 진다.
수리산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올라 갔다. 발에 집중하며 참회의 마음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일부로 고행을 자처 하는 것도 일종의 참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홀로 등반의 경우 자신과의 대화를 하면서 이제까지 지은 잘못에 대하여 참회의 마음으로 올라간다. 일종의 ‘참회의 등반’이라 볼 수 있다.
오르다 보니 어느덧 꼭대기가 보인다. 관모봉이다. 수리산에 여러 개의 봉우리가 있지만 그 중에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관모봉이다. 해발426미터로서 오로지 오르막만 있는 산이다. 약 한시간 가량 발에 집중하며 올라올라 가니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서 바라본 세상은 온통 백색의 거대한 아파트단지들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층아파트단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서 장관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렇게 해도 되는지에 대한 우려가 든다. 너무나 거대한 인공구조물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작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들의 탐욕이 빚어낸 거대한 욕망의 구조물처럼 보인다.
능선길을 타다가 발견한 경이로움
수리산 관모봉은 정상이 아니다. 단지 산아래에서 보았을 때 정상처럼 보인다. 정상은 능선길을 타고 더 가야 한다. 해발 489미터의 태을봉이 최고봉이다. 최고봉에서 또 능선길을 타면 군사보호시설지역에 이른다. 그곳에 갈 수는 없지만 능선길을 타기로 하였다.
능선길을 타다 보니 여러 개의 명칭이 있다. 병풍바위능선, 칼바위능선, 밧줄바위능선 등 이름만 들어도 매우 험준함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매우 험준하였다.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능선을 타면서 발견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위에 단단하게 뿌리를 박고 있는 소나무이다. 흙이 거의 보이지 않는 바위 사이에 소나무가 우뚝 서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더구나 소나무의 자태를 보자 더욱 더 시선을 끌어 당긴다.
능선길에 보는 소나무는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마 누군가 동양화를 그린다면 이 소나무가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또 누군가 전문적인 사진작가라면 이런 장면을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좀 더 가까이서 보니
이번에는 소나무를 좀 더 가까이서 보았다. 마치 실타래처럼 가지가 엉켜 있는 모습이다.
가지가 엉켜 있는 소나무는 목재로서 그다지 쓸모가 없다. 그러나 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인다. 그것도 바위에 단단히 뿌리 박고 있어서 더욱 더 눈길을 끈다. 이처럼 바위에 뿌리박고 있어서 더욱 더 견고해 보인다.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
이날 등반에서 바위에 뿌리박고 있는 소나무를 여럿 보았다. 바위 위에 우뚝 서있는 소나무를 보니 경이롭다. 마치 기적처럼 보인다. 바위와 소나무뿌리가 엉켜서 바위인지 뿌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마치 바위와 소나무가 하나가 된 듯 하다.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에서 강한 생명력을 본다. 산 아래의 세상은 무상하게 변해 가지만 바위에 단단하게 뿌리 내린 소나무는 오래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척박한 조건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렸을까?
세 가지 밭이 있는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세 가지 밭이 있다. 상품의 밭, 중품의 밭, 하품의 밭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농사짓는 촌장에게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 농사짓는 촌장에게 세 개의 밭이 있는데 한밭은 상품이고 한밭은 중품이고 한밭은 모래밭이고 염분이 있는 악질토양을 지닌 하품입니다. 촌장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촌장이여, 농부가 씨앗을 뿌리려 할 때에 어디에 먼저 뿌릴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촌장은 당연히 상품밭에 씨앗을 뿌릴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나서 염분이 있는 중품의 밭에 뿌리고, 마지막으로 모래밭에 씨앗을 뿌릴 것이라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세 종류의 밭에 대하여 수행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촌장이여, 그 상품의 밭은 다름아니라 나의 수행승, 수행녀들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합니다. 나는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촌장이여, 그들은 나를 섬으로 하고 나를 동굴로 하고 나를 피난처로 하고 나를 귀의처로 하기 때문입니다.
촌장이여, 그 중품의 밭은 다름아니라 나의 청신남, 청신녀들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합니다. 나는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촌장이여, 그들은 나를 섬으로 하고 나를 동굴로 하고 나를 피난처로 하고 나를 귀의처로 하기 때문입니다.
촌장이여, 그 하품의 밭은 다름아니라 이교도의 수행자, 성직자, 유행자들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합니다. 나는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촌장이여, 그들이 단 한구절이라도 이해하면 그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밭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42.7, 전재성님역)
세 종류의 밭에 대한 비유를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빅쿠나 빅쿠니들에게는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서 확실히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상품으로 밭으로 비유하였고, 재가의 청신사와 청신녀들에게는 씨앗을 뿌리면 어느 정도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밭으로서 염분이 섞여 있는 중품의 밭으로 비유하였고, 그리고 외도들에게는 씨앗을 뿌려도 싹이 나올까말까한 모래로 이루어져 있는 하품의 밭으로 비유하였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이들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한다고 하였다.
차별 없이 촉촉히 대지를 적시는 비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 출가자나 재자가, 심지어 이교도들에게도 차별 없이 가르침을 설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차별 없는 가르침은 비로 비유된다. 비가 내리면 대지를 촉촉히 적신다. 상품의 밭이든 중품이나 하품의 밭이든 차별 없이 적신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Vuṭṭhi alasaṃ analasañca
mātā puttaṃva posati,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
ye pāṇā paṭhaviṃsitāti.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비가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니,
비의 존재가 참으로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네.”
(Pajjotasutta-불빛의 경, 상윳따니까야 S1:80, 전재성님역)
어머니의 마음은 다 똑같다. 어느 자식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사랑을 베푼다.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이라도 귀하게 태어난 아이가 있고 천하게 태어난 아이가 있지만 골고루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치 대지에 비를 골고루 뿌리는 것과 같다. 가르침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잘난 자나 못난 자, 귀한 자나 천한 자 모두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수 없다. 그래서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청정한 삶의 실현이 반드시 출가한 제자에 한정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가 내리면 골고루 적시듯이 재가신도나 심지어 이교도 역시 청정한 삶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차별 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누구든지 가르침을 실천하면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벗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능선의 바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소나무는 척박한 조건에서 살아 남았다. 씨앗이 풍요로운 토양이 아닌 바위틈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 것이다. 이처럼 기적을 만들어 내어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고 있다.
조건이 좋지 않음에도 기적을 일군 것은 씨앗과 땅과 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식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땅과 씨앗과 비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세존]
“아난다여,
그래서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에게는
하층의 세계에 의식이 확립된다.
이와 같이 해서 재생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A3.76, 존재의 경,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아난다의 물음에 부처님이 답하신 것이다.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존재, 존재’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존재가 됩니까?”라고 묻는 것에 대한 답송이다.
게송에서는 하층의 세계라 하였다. 이는 욕계를 말한다. 경에서는 하층을 욕계로, 중층을 색계로, 상층을 무색계로 비유하고 있다. 이는 존재가 태어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존재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업, 의식, 갈애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밭, 종자, 수분 이렇게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그래서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라 한 것이다.
주석을 보면
업은 밭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업은 행위를 말한다. 이런 행위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 뿐만 아니라 착하고 건전한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행위에 따라 악처에 나기기도 하고 선처에 나기도 한다. 그래서 업에 대하여 밭으로 비유한 것이다.
의식에 대하여 종자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종자는 씨앗을 말한다. 씨앗이 있어야 발아한다. 그런 씨앗은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업과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 의식이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라는 정형구에서 알 수 있다. 행위에 따른 업의 형성력으로 의식이 생겨나지만 연기공식에 따르면 동시발생적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업의 형성과 의식의 조건과 더불어 존재를 있게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갈애이다. 이때 갈애는 새로운 태어남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라 설명된다.
사막에서 피는 꽃
존재의 조건은 업과 의식과 갈애이다. 이는 밭과 종자와 수분으로 비유된다. 그래서 씨앗이 안착할 수 있는 땅이 있고 적절한 수분이 있으면 식물이 자라게 된다. 그러나 다 같은 땅이 아니다. 어떤 땅은 모래로만 이루어진 땅도 있기 때문이다. 사막을 말한다.
사막에서도 식물이 자란다. 이는 지난해 실크로드여행에서 확인 한 것이다. 사막에서 식물 보기가 힘들지만 기적처럼 생존하는 식물을 볼 수 있다. 사막에서만 자란다는 ‘낙타가시풀’이다.
낙타가시풀은 낙타들이 먹는다고 하여 낙타풀 또는 낙타가시풀이라 한다. 풀에 가시가 있어서 낙타가시풀이라 한다. 낙타가시풀을 보면 경이롭기 그지 없다. 척박한 땅에 씨앗이 떨어져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더구나 꽃을 피워낸다.
수리산 능선길에서 본 경이로움
수리산 능선길에서도 경이로움을 보았다. 도저히 식물이 살 것 같지 않은 바위에 소나무씨앗이 떨어져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 것이다. 비는 차별 없이 내린다고 하지만 척박한 땅에 떨어지는 비는 금새 새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수분을 취하여 수 백년간 자리를 지켜 왔다. 그 결과 오늘날 경이로움을 갖게 만들었다.
“발, 발,…”하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만일 꿈이 없다면 목적없이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인생의 목적이 없을 때 어떤 삶일까? 단지 즐기는 삶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즐기는 삶의 대표적인 것이 먹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재미로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은 사실상 동물의 삶이나 다름 없다.
요즘 TV에서 먹거리 프로가 대유행이다.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살게 되었을 때 이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의 삶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늘 강조 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은 바로 현세에서 즐겁고 기쁘게 지낸다. 모든 번뇌의 소멸에 근본이 되는 것도 그것에서 시작한다. 세 가지 원리란 무엇인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 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S35:239)”라고 말씀 하셨다. 이처럼 음식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이 소멸에 이르는 근본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먹기 위하여 사는 자들은 결코 궁극적 경지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한다.
먹기 위해서 사는 자들은 사실상 꿈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오감을 즐기면서 살게 되면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죽으면 썩을 몸인데 원없이 즐기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꿈이 있는 자들은 꿈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뚜벅뚜벅 걸어간다. 비록 홀로 가는 길이고 거칠고 험하고 힘든 길이지만 정상을 향해 간다. 그러나 “고지가 여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라는 생각으로 가지 않는다. 발에 집중하여 “발, 발,…”하며 가다 보면 어느 새 정상이 가까워 지듯이 허황된 꿈을 꾸지 않는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등반이야말로 인생길을 가는 것과 다름 없다.
2014-10-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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