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얀마로 달려 가는가? 흥천사 주지 성오스님의 경이로운 세계
이리 저리 흔들리며
이리 저리 흔들리며 사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바람 부는 대로 방향을 바꾸는 팔랑개비와 같다. 깃대 위에 깃발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바뀌는 것과 같다. 이처럼 사람들은 흐름이나 바람에 휩쓸려 살아 간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즉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A8.6)”를 말한다. 이를 여덟 가지 바람이라는 의미로 ‘팔풍(八風)’이라고도 한다.
누구나 살아 가면서 이득과 불이익을 겪는다. 항상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 손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명예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불명예가 발생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으면 또 누군가는 비난을 할지 모른다. 이렇게 행복과 불행, 즉 즐거움과 괴로움이 번갈아 일어나는 곳이 세상사는 곳이다.
초기경전을 보다 보면 부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세간에서 부딪치며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팔풍 역시 하나도 어긋남이 없다.
그 어떤 바람에도
팔풍에서 자유로운 자들은 누구일까? 아마 저 높은 바위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자들일 것이다. 나뭇가지는 바람이 불면 사시나무 떨 듯 흔들리고 더구나 태풍이 몰아친다면 뿌리 채 뽑혀 나갈지 모른다. 그러나 저 높은 바위산은 그 어떤 바람에도 견디어 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두개의 게송이 있다.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dhp7)
아름다움에 탐닉하지 않고
감관을 잘 수호하여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믿음을 지니고 힘써 정진하면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리. (dhp8)
나무와 바위산이 대비 되고 있다. 강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꺽어 버릴 수도 있지만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것이다. 눈이나 귀 등 감각기관을 수호하지 못하였을 때 나무가 바람에 꺽이듯이 쓰러지고 말것이라 한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 굴복 당하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서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Taṃ ve pasahati Māro)”라 하였다.
다섯 종류의 악마가 있는데
감각적 욕망에 쉽게 굴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감각대상을 보았을 때 갈애가 일어남에 따라 집착하게 되는데 이는 번뇌에 사로잡히게 됨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번뇌는 마라(악마)와도 같은 것이라 본다.
초기경전에서 악마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분류하면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렇게 다섯 가지로 된다.
다섯 가지 마라 중에서 두 번째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가 있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악마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번뇌는 나를 해치는 악마와 같은 것이다.
팔풍에서 자유로운 자는 번뇌에서도 자유로운 자이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산과도 같다. 그래서 어떤 비난이나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번뇌에서 자유로운 자, 번뇌 다한 자에 대하여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비람에 움직이지 않듯 ,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 (Dhp81)”라 하였다.
번뇌에서 자유로운 자는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다. 바위산처럼 견고하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번뇌가 남아 있다면 동요할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을 왜 하는 것일까?
왜 수습(修習)인가?
사람들이 힘들게 수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면서 수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번뇌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습관’들이는 것이라 본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습관들인다는 것은 다름 아닌 계행을 지키는 것이다. 재가자라면 오계를 준수하는 것이고 출가자라면 구족계를 준수하는 것이라 본다. 이렇게 계행을 준수하는 것이 수행의 출발일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습관들이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본다면 수행이라는 말 대신 ‘수습(修習)’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다.
회사에 입사하면 수습기간이 있다. 일종의 익히는 기간이다. 일정기간 교육을 받고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습기간을 거친 다음에 정식 사원이 된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계행으로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정혜 이렇게 삼학이라 하는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계를 청정히 하는 것이다.
청정에 이르는 길
청정도론에서도 청정에 이르는 길 일곱 가지 가운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계의 청정(sīla visuddhi)’ 이라 되어 있다.
계청정이 이루어져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 갈 수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1)계의 청정(sīla visuddhi),
(2)마음의 청정 (citta visuddhi),
(3)견해의 청정(diṭṭhi visuddhi),
(4)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kaṅkhāvitaraṇa visuddhi),
(5)길과 길 아님을 알고 보는 청정(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6)바른 길을 알고 보는 청정(patipadā-ñāṇadassa visuddhi),
(7)지혜와 봄의 청정(ñāṇadassa visuddhi)
이렇게 일곱 가지 청정이 순서대로 되어 있다.
청정도론은 청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모두 일곱 가지 단계로 나누고 단계별로 상응하는 지혜를 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지혜는 모두 열 여섯 가지이다. 이처럼 단계적으로 체계적으로 지혜를 개발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칠청정을 실현하고 열여섯 단계의 지혜를 개발하면 누구나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승이 없으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미얀마로 가는지 모른다.
왜 미얀마로 달려 가는가?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미얀마를 가보고자 한다. 수행의 나라라 불리우는 미얀마에는 세계적인 수행처가 도처에 있기 때문에 수행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수행자들이 몰려 오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 미얀마로 떠나는 사람들이 일년에 수 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출가와 재가를 막론 하고 미얀마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환경이 좋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한 모든 사람에게는 모두 무료로 의식주가 제공되고 더구나 수행방법까지 지도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그것은 진리추구와 부처님의 은혜 이렇게 두 가지라 말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굶지 않는다고 하였다. 누가 도와 주어도 도와 주기 떄문이다. 저 깊은 산중 동굴에 도를 닦고 있는 수행승이 있다고 하면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지게에 쌀을 싣고 올라 오는 이가 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을 공양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직업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재가자들이 먹을 것 등을 보시 한다. 수행자에게 공양을 하면 커다란 공덕짓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라따나경(Sn2.1)’에서도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Etesu dinnāni mahapphalāni, stn227)”라 하였다. 사쌍팔배의 성인에게 공양하면 큰 공덕을 쌓는다는 것이다.
학생들도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 속한다. 학생들 역시 대부분 직업을 갖지 않는다. 오로지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학업에 전념하는 학생들은 부모의 도움을 받는다. 만일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 장기간 머물러도 학비를 보내 준다. 만일 학부모가 능력이 안되면 어떻게 될까? 주변에서 도와 줄 것이다. 친지나 친구 또는 장학기관에서 학비를 대 줄 것이다. 후원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렇게 공부하는 학생에게 학비를 지원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 때문이고, 또 하나는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특히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클 것이다.
우리 말에 젊은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어리고 보잘것 없다 하여 얕보았다가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젊은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학업이 끝나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학문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누가 도와 주어도 도와 준다.
종교인들은 평생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 간다. 직업을 가지고 있지 때문에 누군가도움을 주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종교이건 신도들이 종교인을 공경하며 돕는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인들은 결코 굶지 않는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을 존중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이 굶을 까봐 전전긍긍하는 것 같아 보인다.
스님들이 노후걱정을 한다는데
최근 교계뉴스에 따르면 어느 스님은 스님의 복지에 대한 견해를 발표 하였다. 활동하기에 불편한 노스님의 부양에 대하여 종단에서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제시한 것이 주지를 임명할 때 노스님을 부양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자고 제안 하였다. 평생 무소유로 살아 온 스님들이 거처가 없어서 떠 도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도 노후를 걱정한다. 그래서 어른 스님이건 젊은 스님이건 노후대책으로서 개인토굴이나 개인사찰을 갖고자 한다고 한다. 율장에서는 금하는 것을 서슴없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님들이 미래에 대하여 불안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노후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고 노후대책을 세우는 시대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가 먹고 사는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는 스님들 잘못이 크다. 스님들이 신뢰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반승반속의 사람
종종 스님들의 범계행위가 보도 된다. 대표적으로 승려도박을 들 수 있다. 이런소식이 들려 올 때 마다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도 외면할 것이다. 그래서 반승반속으로 살아 가는 스님들은 사실상 세속인이나 다름 없다.
재가자는 스님에게 공양한다. 그러나 재가자가 재가자에게 공양하지는 않는다. 반승반속으로 살아 가는 자들은 사실상 재가자나 다름 없기 때문에 재가자가 공양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공양하지만 진리추구를 포기한 자에게는 공양하지 않는다.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노후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진리추구에 매진 하면 된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누가 도와 주어도 도와 준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 만일 스님들이 굶어 죽었다는 말이 나온다면 한국에서 더 이상 불교는 존재 하지 않을 것이다.
수행자의 천국 미얀마
미얀마는 수행의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라 한다. 해마다 수천명의 출가와 재가의 수행자들이 미얀마로 향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외국으로 유학 가듯이 미얀마로 떠나는 것은 한국에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얀마에 가면 모든 것이 무료라 한다. 계를 받아 수행처에 들어 가면 모든 의식주가 해결 된다고 한다.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수행자에게 무료로 의식주가 제공되는 것은 청정하기 때문이다. 청정한 수행자를 존중하는 전통이 살아 있기 때문에 수행자가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여 별도로 노후대책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얀마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노후걱정을 해서는 안된다. 청정한 수행자에게 공양을 하면 커다란 공덕을 쌓는 것이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미얀마가 경제적으로 후진국일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선진국이나 다름 없다. 특히 불교전통에서 그렇다. 그런 미얀마에서 의식주 걱정 없이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라 볼 수 있다.
수행에만 전념하면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곳이 미얀마라 한다. 그래서 전세계 각지에서 수 많은 수행자가 몰려 든다고 한다. 이렇게 의식주 걱정 없이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하여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곳 또한 미얀마라 한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수행자들이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이라 볼 수 있을까? 미얀마와 미얀마불자들이라 볼 수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부처님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가르침이 전승이 되었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의식주 등의 혜택을 받는 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의 혜택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진리를 추구하는 빅쿠들이 평생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덕이다. 부처님의 덕으로 앞으로도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부처님의 덕에 감사해야 한다.
흥천사 주지 성오스님은
부처님의 덕에 감사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보았다. 흥천사 주지 성오스님이 불교tv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스님은 미얀마 수행처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였다고 한다. 그 새로운 세계는 다름아닌 깨달음의 세계라 한다. 그런데 그 세계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 속에서 경험한 것이 새로운 세계라 하였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는 날 오후에 나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위빠사나라는 것은 딴데서 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과 마음 속에서, 느낌속에서 우리가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던 깨달음의 세계랄까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열려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서 그 순간의 느낌, 그 순간의 감정, 어떤 마음의 변화가 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와 같은 경우는 깨달음의 세계를 그 때는 안갔지만 마음에 변화가 왔습니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이 지금 이순간에 세상에서 가장 내가 깨어 있는 존재로서 경이스러운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로서는 이러한 경이스러운 그런 호흡을 봄으로서 세상을 새롭게 바라 볼 수 있는 삶을 주신 어머니께 부모님께 너무나 감사의 복받침이 일어났습니다.
세 번째로서는 이렇게 훌륭한 가르침을 깨우쳐 주신 이렇게 훌륭한 법을 존속하게 해 주신 부처님의 은혜가 얼마나 광대무변한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아서 우리에게 전해 준 훌륭한 선지식들 그 스승들이 얼마나 나에게 정말로 고마운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제73회 호흡의 비밀, 명상 - 성오스님 1부, 세상을 보는 눈 天眼通(천안통), 불교TV, 2014-10-14)
성오스님에 따르면 경이로운 체험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서 깨달음과 같은 것이라 한다. 그렇다고 해야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경이로움을 체험하면서 감사의 대상을 말하였다. 첫번째로 자신을 낳아 준 부모에게 감사하였고, 두번째로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에게 감사 하였고,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전승해 온 승가에 감사하였다고 한다. 이는 다름아닌 불법승 삼보에 감사한 것이다.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서 불자가 된다. 그러나 삼보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성오스님처럼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되면 삼보의 고마움을 비로서 알게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 부모의 은혜가 될 것이다. 만일 부모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쁜 짓인지 알면서도
돌고 도는 곳이 세상이다. 사람도 역시 돌고 돈다. 그래서 매번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왜 실수를 자꾸 반복하는 것일까? 짝 이라는 TV프로가 있었다. ‘돌싱’특집이 있었는데 이혼을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번 이혼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 왜 또 다시 결혼하려 하는 것일까? 재혼하면 다시는 실패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도둑질 하는 사람은 계속 도둑질 한다. 도둑질이 나쁜 것을 잘 알면서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마시는 것과 같다. 모두 습관 때문이다.
전자발찌를 찬 사람이 또 다시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는다. 성폭행범으로 징역을 살고 나와 재범방지를 위하여 전자발찌를 차게 되었는데 무용지물이다. 전자발찌를 끊어 버리고 또 다시 성폭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렇게 형무소를 들락날락 하며 하던 짓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습관 때문이다.
한번 습관이 형성되면 여간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수행은 습관들이는 것부터 시작 되기 때문에 수습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습관이 잘 들여 나야 다음단계로 나아 갈 수 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로 번뇌를 부수는 것이다.
부처님 덕으로 살아가는 불자들
번뇌가 부수어진 자는 다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다시 번뇌가 일어난다면 진정한 해탈이라 볼 수 없다. 일시적으로 억압되었을 뿐이다. 이는 ‘고디까의 경(S4.23)’에서 빅쿠 고디까가 자결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번뇌 다한 자에게는 번뇌가 찾아 오지 않는다. ‘네 가지 길(四向)’을 통해 추방된 것들이 다시 돌아 올 수 없기 때문에 번뇌가 그를 쫒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번뇌가 소멸된 수행자에게 번뇌가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보아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를 바위산에 비유한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바위산이 흔들리지 않듯이 어떤 감각적 대상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번뇌에 흔들리지 않는 성자는 존중할 만 하다.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 가기때문이다. 그런 수행자에게 사람들은 공양한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 그런 수행승들의 모임을 상가라 한다.
상가가 존속하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의 바퀴는 끊임 없이 굴러 갈 것이다. 상가에서 사쌍팔배의 성자들이 계속 나오는 한 가르침의 바퀴는 끊임 없이 굴러 간다. 이렇게 굴러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 주는 것이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더 이상 모태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들을 존중한다. 그러나 가장 존경해야 할 대상은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출현으로 인하여 인간은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윤회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부처님을 존중한다.
이 땅의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의 큰 덕을 입고 살아 가고 있다. 이렇게 가르침이 전승되어 경전 한 구절에서 마음의 위안을 갖는 것도 부처님의 덕이고, 가르침을 실천하여 새로운 세계를 경험 하였다면 역시 부처님의 덕이라 볼 수 있다. 빅쿠가 되면 의식주 걱정하지 않는 것도 부처님 덕이다. 재가자들이 미얀마 수행처에서 무료로 수행할 수 있는 것도 부처님의 덕이다. 이렇게 불자들은 부처님 덕으로 살아간다.
201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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