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왜 매번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인생의 패배자와 승리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9. 13:04

 

왜 매번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인생의 패배자와 승리자

 

 

 

법 없이도 살 사람?

 

착하고 순진한 사람에 대하여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한다. 진짜 그럴까?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도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다. 사람은 겪어 보아야 알 수 있고 당해 보아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사는 것이 뭇삶들의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탐, , 치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경계에 부딪쳐야 드러난다. 아무리 착하고 순진하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도 모든 것이 좋을 때는 탐진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 보면 알 수 있고 재난을 겪어 보면 드러난다.

 

탐진치 삼독 중에 쉽게 드러나는 것이 성냄이다. 싫어 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  화를 낸다면 그는 성냄으로 살아 간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탐욕이다. 이는 밥먹을 때 보면 알 수 있다. 탐욕으로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싫으면 밀쳐 내려 하고 좋으면 거머 쥐려 한다. 그러 다보니 항상 성냄과 탐욕으로 살아 간다. 이렇게 성냄과 탐욕으로 살아 가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 간다.

 

탐진치 삼독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라 한다. 왜 어리석은 자들인가? 매번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성을 내면 파괴적으로 작용하고 욕심을 부리면 재난을 초래함에도 항상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탐진치를 소멸하고자 한다.

 

탐진치를 다른 말로 번뇌라고도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번뇌는 소멸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는 사홍서원에서도 알 수 있다.

 

거창한 서원을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 하였을 때 가장 먼저 배운 노래가 삼귀의와 사홍서원이었다. 종립학교에서 이 노래를 가르쳐 준 것은 전체운동장조회에서 부르기 위함이다. 한달에 한번 있는 운동장 조회를 할 때 식순에 따라 가장 먼저 한글삼귀의문 노래를 부르고 조회가 끝날 때는 사홍서원으로 마무리 하였다. 그래서 삼귀의문과 사홍서원은 매우 익숙하다.

 

사홍서원은 네 가지 서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라는 문구가 있다. 번뇌를 다 끊는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탐진치로 살아 가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자들은 법회가 끝날 때 마다 번뇌를 끊겠다고 거창한 서원을 한다. 하지만 현실로 되돌아 오면 여전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간다.

 

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족선사와 황진이의 에피소드와 관련되어 있다. 십년동안 공부하여 생불로 추앙받던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 간 것을 두고 사람들은 그 때부터 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계에 닥쳐 보아야 알 수 있고 재난이 닥쳐 보아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탐욕과 성냄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언제든지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에는 뿌리가

 

탐욕과 성냄이라는 번뇌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 뿌리가 뽑히기 전에는 늘 잠재해 있다. 그러나 번뇌에는 탐욕과 성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번뇌를 대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탐욕을 다발로 하는 번뇌는 탐욕을 뿌리로 하고, 성냄을 다발로 하는 번뇌는 성냄을 뿌리로 한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해로운 마음부수(akusala-cetasika) 14가지

해로운 반드시들 4

해로운 때때로들 10

탐욕에 관계된 3

성냄에 관계된 4

해태에 관계된 2

의심 1

(14) 어리석음

(, 모하, moha)

(18) 탐욕

(, 로바, lobha)

(21) 성냄

(, 도사, dosa)

(25) 해태

(懈怠, 티나, thina)

(27) 의심

(, 위찌깟차, vicikaccha)

(15) 양심 없음

(無慙, 아히리까,

ahirika)

(19) 사견

(邪見, 딧티, ditthi)

(22) 질투

(, 잇사, issa)

(26) 혼침

(昏沈, 밋다, middha)

 

(16) 수치심 없음

(無愧, 아놋땁빠,

anottappa)

(20) 자만

(, 마나, mana)

 

(23) 인색

((), 맛차리야, macchariya)

 

 

(17) 들뜸

(掉擧, 웃닷짜,

uddhacca)

 

(24) 후회

(惡作, 꾸꿋쨔, kukucca)

 

 

 

 

 

아꾸살라 쩨따시까라 불리우는 해로운 마음부수는 모두 14가지이다. 모두 소멸시켜야 할 마음의 번뇌이다.

 

소멸 시켜야 할 번뇌는 모두14가지

 

그런데 표를 보면 탐욕과 성냄의 경우 다발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탐욕의 다발의 경우 탐욕과 사견과 자만이라는 악의 꽃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으로 표현되는 자만도 탐욕의 범주에 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냄과 관련된 다발을 보면 성냄, 질투, 인색, 후회 이렇게 네 가지의 악의 꽃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질투나 인색, 후회하는 마음도 성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흔히 탐진치 삼독에 대하여 번뇌라 하여 소멸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선한 마음의 분류표를 보면 탐욕과 성냄은 불선한 마음을 대표하는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소멸 시켜야 할 번뇌는 모두14가지에 달하기 때문이다.

 

번뇌의 대표주자 탐욕과 성냄

 

번뇌의 대표주자는 탐욕과 성냄이다. 좋으면 탐심이 생겨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성을 내며 밀쳐 내려 하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이는 느낌대로 살기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 쥐려 하기 때문에 이는 탐욕과 관련이 있고, 괴로움 느낌이 일어나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이는 성냄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느낌대로 살아 간다.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이 있다. 이렇게 세가지 느낌으로 사람들은 살아 간다. 즐거운 느낌은 탐욕과 관련이 있고, 괴로운 느낌은 성냄과 관련이 있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은 어리석음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어리석은 느낌은 중립적이다. 지금 비록 덤덤한 느낌이지만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느낌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다름 아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대로 사는 것과 같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이를 향유하려 하면 탐욕이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이를 밀쳐 내려 하면 성냄이다. 그래서 탐욕은 거머 쥐려 하는 것이고, 반대로 성냄은 밀쳐 내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마음에 두 가지 느낌이 일어날 수 없다. 동시에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탐욕과 성냄이 동시에 발생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왜 그럴까? 우리 마음은 한순간에 한가지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

 

한순간에는 하나의 마음만 일어난다. 이는 철저하게 느낌과 관련이 되어 있다. 대상을 접하였을 때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 날 뿐이지 두 마음, 세 마음이 일어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아이가 웃다가 울다가 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이다. 웃다가 우는 것은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하여 장난감을 준다든가 맛있는 것을 주면 그 순간 마음이 바뀌어 웃게 된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매우 빨리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동요하는 마음(Dhp33)”이라 하였다. 이런 마음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Dhp34)”라 하였다. 이렇게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내버려 두면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부산에 있기도 하고 순식간에 어느 해변가에 있기도 하다.

 

왜 무아인가?

 

마음은 매우 빠르게 변하고 제멋대로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이 내 것이라 볼 수 없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에 대하여 내 것이라 볼 수 없듯이 제 멋대로 변하는 마음을 내것이라 볼 수 있을까? 이는 마음 뿐만이 아니다. 내 몸도 마찬가지이다. 색수상행식 오온이 사실상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에 대하여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이다.

 

불교를 가장 불교답게 특징 짓는 가르침이 무아의 가르침이다. 무아의 가르침의 특징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S22.59)”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지금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대상과 접촉하면 느낌이 일어난다. 그 느낌은 세 가지 중의 하나이다. ,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다. 그런데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탐욕과 관련이 있고, 반면 괴로운느낌이 일어나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성냄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매 순간 탐욕과 성냄으로 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재난을 당하고 파괴적으로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탐욕은 재난으로 귀결되고, 성냄은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탐욕과 성냄의 속성 때문이다.

 

재난을 초래하는 탐욕

 

탐욕은 감각적 욕망과도 관련이 있다. 누구나 추구하는 것이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인데 이와 관련하여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stn424)”라 하였다. 빔비사라왕이 장군의 지위를 주겠다고 말하자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고, 왕이여 나는 출가한 것입니다.(stn423)”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재난으로 귀결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재난은 어떤 것일까?

 

십이연기 정형구에서처럼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함께 생겨난다.(S12.2)”라 하였는데, 이는 결국 죽음과 다시 태어남으로 귀결 된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 결과 탐욕의 삶의 결과는 항상 운명적으로 죽음과 다시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재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에게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고 출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탐욕의 삶을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재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도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은 시간에 매이며 괴로움이 많고 아픔이 많고 재난이 넘치는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1.20)”라 하였다. 그렇다면 탐욕의 삶을 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맛지마니까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작은 경에서는 왕들이 왕들과 싸우고, 귀족이 귀족들과 싸우고, 사제가 사제와 싸우고, 주인이 주인과 싸우고, 어머니가 아들과 싸우고, 아들이 어머니와 싸우고, 아버지가 아들과 싸우고, 아들이 아버지와 싸우고, 형제가 형제와 싸우고, 형제가 자매와 싸우고, 자매가 형제와 싸우고, 동료와 동료가 싸운다.(M14)”라 하였다. 오로지 탐욕의 삶을 살게 되면 부모와 자식간에도 다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하는 것도 부모와 자식이 다투는 것도 어떤 다툼이나 전쟁도 모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원인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조건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속하는 원인에 의해서(M14)”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감각적 쾌락만을 탐하는 마음이 결국 재난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Dhp186)”라 하였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해도 만족이 없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고통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시적으로 행복한 느낌이 들지만 그런 느낌이 지속되지 않아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Dhp186)라 하였다.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고통만 가중 된다는 것이다. 지금 즐거운 느낌이 발생하여 이를 향유하고자 탐욕을 부렸다면 그 귀결은 고통이다. 결국 탐욕의 종착지는 재난으로 귀결된다.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성냄

 

탐욕은 재난으로 귀결되고, 성냄은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하였다. 왜 성냄이 파괴적인가? 그것은 성냄의 속성과도 관계가 있다. 성내면 누구나 싫어 하기 때문이다. 싫어한다는 것은 밀쳐 내는 것을 말한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내고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하여 좋은 감정이 생길 리 없다.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 났기 때문이다.

 

대상과 접촉하면 필연적으로 느낌이 발생한다. 느낌 중에는 괴로운 느낌이 있다. 상대방이 나에게 화를 내었다면 필연적으로 괴로운 느낌이 발생한다. 이는 밀쳐 내려 하는 마음이다. 만일 친구가 나에게 화를 내었다면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여 밀쳐 내려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단절 될지 모른다. 지금 고객이 나에게 화를 내었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기분 나쁘다고 맞받아 쳐야 할까? 그렇게 될 경우 더 이상 그 고객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파괴된 관계는 여간해서 복원 되기 힘들다. 이처럼 화를 내면 나만 손해이다.

 

화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부처님은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만일 부처님이 화를 내었다면 더 이상 부처가 아닐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이미 탐진치 삼독이 소멸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누가 화를 돋구어도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 이는 법구경에서 마음에 번뇌가 없고 마음의 피폭을 여의고 공덕과 악행을 떠난 깨어 있는 님에게 두려움은 없다. (Dhp39)”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마음에 번뇌가 없는 자는 더 이상 번뇌가 찾아 오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natthi jāgarato bhaya : DhpA.I.309에 따르면, 그가 깨어 있는 자라 불리는 이유는 다섯 가지 깨어 있음의 고리 즉,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잠을 자건 깨어있건 번뇌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까닭에 번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네 가지 길을 통해 추방된 것들이 다시 돌아 올 수 없기 때문에 번뇌가 그를 쫒지 못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흐름에 드는 길에 의해서 추방된 번뇌로 돌아 갈 수가 없고, 마찬가지로 한번 돌아는 길, 돌아오지 않는 길, 거룩한 길에 의해서 추방된 번뇌로 돌아 갈수가 없다.

 

(법구경 620번 각주, 전재성님)

 

 

번뇌가 소멸된 자에게는 번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떠난 번뇌가 다시 들어 올 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번뇌를 쫒아다닐 일은 없는 것이다. 이는 번뇌가 완전히 소멸한 자에 해당된다. 아라한이나 부처를 말한다.

 

아라한에게 있어서 번뇌는 이미 추방되었다. 탐진치라는 번뇌가 추방되었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라도 탐욕을 부린다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만일 화를 낸다면 그는 더 이상 깨달은 자라 볼 수 없다. 이처럼 화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가 깨달은 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절대 화 내지 않았다

 

부처님은 그 어떤 경우에서든지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람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말해 준다.

 

 

이미 성년이 되어 출가한 자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쭐라담마빨라 자따까에서는 아직 자리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할 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전단향으로 목욕한

왕국의 계승자 담마빨라

그의 팔이 잘립니다.

왕이시여, 제 숨이 넘어갑니다.(Ja.iii.181)

 

라고 그의 어머니가 탄식하는 와중에도 왕이었던 그의 부친 마하빠따빠는 마치 죽순을 자르듯이 그의 손발을 자르게 했지만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했을 때 ‘지금이 마음을 잘 제어할 때다. , 담마빨라여. 지금 그대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한 아버지, 머리를 자르는 사람, 탄식하는 어머니, 그대 자신, 이 네 사람 모두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굳게 결심한 뒤 조금도 화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청정도론, 9 29, 대림스님역)

 

 

자따까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전생담이다. 부왕이 자신의 사지를 토막내려 하였을 때도 화를 내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을 보면 수 많은 인욕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전생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실라와 자따까에서 실라와 왕이 자신의 왕비에게 간통을 한 나쁜 대신이 적의 왕을 불러들여 3백 유순이나 되는 왕국을 점령할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출동한 대신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공동묘지에 땅을 파고 천명의 대신들과 함께 목까지 묻혔을 때 마음으로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재칼들이 와서 땅을 파헤쳐 주어서 영웅적인 힘을 발휘하여 목숨을 구하여 야차의 신통으로 자기의 궁전에 들어갔을 때 자기의 침상에 적의 왕이 잠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고 서로 맹세를 하여 친구로 여기면서 말했다.

 

“남자는 포부를 가져야 하고

현자는 싫증내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내가 원하던 대로 되었음을 보노라.”(Ja.i-267)

 

(청정도론, 9 27, 대림스님역)

 

 

전생의 부처님은 어떤 경우에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왕비와 간통한 대신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도 화를 내지 않은 것이다.

 

가리왕(歌利王)과 까시(Kasi)

 

청정도론에서 까시왕이 등장한다. 전생담에 따르면 까시(Kasi)사문이여, 당신은 어떤 교리를 설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보살은  나는 인욕을 설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왕은 보살의 사지를 잘랐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그러자 왕이 가시 박힌 매로 채찍질하게 하고 손발을 자를 때에도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청정도론, 9 28)” 라 하였다. 이와 같은 까시왕의 이야기는 금강경에도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몸을 갈기갈기 끊길 때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기 때문이니라.

(금강경 이상적멸분)

 

 

금강경에 등장하는 가리왕(歌利王)은 자따까에 실려 있는 까시(Kasi)왕이다. 이렇게 자따까의 까시왕 이야기는 금강경 보다 더 앞선 것이기 때문에 오리지널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금강경에서 가리왕이 등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인욕바라밀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가리왕에 의해 사지가 절단 당하였을 때도 결코 화를 내지 않았음을 말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을 때도

 

부처님이 보살로서의 삶을 살때에 그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의 사지를 절단하려는 사람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고 자신의 왕비와 간통한 대신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 축생이었을 때도 마찬가지이었다. 원숭이로 삶을 살 때에 절벽으로부터 사람을 구해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원숭이를 돌로 머리를 때려 죽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이때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마치 숲 속의 다른 짐승들처럼

이것도 사람들의 먹거리로다.

배고픈 자가 이 원숭이를 잡아먹은들 어떠리.

만족스럽게 [먹고 남은] 고기는

여행의 준비물로 가져가리라.

긴 여행을 마치도록 식량이 되겠구나.”(Ja.v.71)

 

 

축생이었을 때도 기꺼이 먹이가 되어 준 것이다. 이는 보살로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4아승지와 10만겁 동안 바라밀을 완성하였다. 곳곳에서 적들이 살해 하려할 때도 결코 화를 내지 않은 것이다.

 

인욕과 관련된 경전적 근거

 

부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미 성냄이라는 번뇌가 소멸 되었기 때문에 성냄이라는 번뇌가 들어 와도 쫒아가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번뇌가 소멸된 것은 전생에서부터 닦은 결과에 따른 것이다. 4아승지와 10만겁동안 수 많은 인욕의 결과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청정도론에서는 인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경전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Khantī parama tapo titikkhā,
Nibb
āa parama vadanti Buddhā. (Dhp184)

 

참고 인내하는 것이 최상의 고행이며

열반은 궁극이다. 깨달은 님들은 말한다.”(Dhp184, 전재성님역)

 

“관용이 [그 특징인] 인욕은 최상의 고행이고

열반은 최상이라고 부처님들은 설하신다” (Dhp184, 대림스님역)

 

 

2)

Khantibala balānīka,

 tam-aha brūmi brāhmaa.

 

인욕의 힘을 갖춘 님, 군대의 힘을 갖춘 님,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고 부른다.” (Dhp399, 전재성님역)

 

“인욕의 힘과 [인욕의] 힘의 군대를 가진 자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설한다” (Dhp399, 대림스님역)

 

 

3)

khantyā bhiyyo na vijjati.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네.” (S11.5, 전재성님역)

 

“인욕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S11.5, 대림스님역)

 

 

세 개의 구절을 보면 공통적으로 ‘Khanti’라는 말이 들어 간다. Khanti‘patience’의 뜻이다. 보통 인내, 참을성, 끈기등으로 번역된다. 이에 대하여 한문경전에서는 인욕이라 하였다. 초불연의 대림스님 역시 인욕으로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은 문맥에 따라 인내와 인욕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칸띠가 강조되는 것은 최상의 고행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최상의 고행은?

 

누군가 나를 모욕하고 때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 참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식의 복수를 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을 경우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결과는 파멸이다. 화를 내면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기 때문에 화를 낸다는 것은 곧 파괴적 행동이다. 그래서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이렇게 참고 견디는 것은 매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참고 인내하는 것이 최상의 고행이라 하였을 것이다.

 

참고 인내하는 것은 수행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참고 인내하였을 때 이는 힘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인욕의 힘을 갖춘 자를 군대의 힘을 갖춘자와 같다고 보았다. 이렇게 인욕으로 무장하였을 때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메일을 하나 받았는데

 

메일을 하나 받았다. 메일을 종종 주시는 법우님이다. 법우님은 인욕과 관련하여다음과 같은 메일을 주셨다.

 

 

안녕하세요?

연꽃님

날씨 추운데 잘 지내시고 계신지요

연꽃님의 글 매일 매일 잘 읽고 있습니다~

 

요즈음 저는

부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면서도

막상 현실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다보면

생겨나는 탐욕과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나타나고 반응하는 마음가짐 때문에

괴리감을 겪고 좀 좌절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활의 경계에서

어떻게 마음을 통제하고 가르침대로 행할 것인가 하는 생각...

 

가르침을 접한지 1년도 안되었는데

저에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욕심이고 미련한 생각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계와 분노하고 짜증내고 마음을 다스려보려고 하지만

절대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감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좌절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가운데

꽃님의 글중에서

'전차녀의 모함과 부처님의 승리' 라는 글의 동영상[자야망갈라가타 길상승리게]

라는 것을 보았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전차녀가 부처님에게 손가락질 할 때 너무나도 평온하게 앉아게시던 부처님의 사진(이미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떠오르더라구요

손가락질 받고 있음에도 전혀 분노하지 않고 평온하게

아라한들에게 둘러쌓여 계신 부처님의 모습을

제 컴퓨터나 아이패드에 바탕화면으로 깔아놓고

마음을 경계하려 합니다

(S법우님)

 

 

법우님은 자야망갈라가타에 나오는 찐짜마네위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교도들이 부처님을 모함하고 교단을 분열시키기 위한 거짓임신녀를 말한다. 찐짜마네위까를 음역하여 한문권에서는 전차녀(戰遮女)라 한다.

 

거짓임신녀 이야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 대표적으로 차녀(cinca,여인 찐짜) 모함과 부처님의 승리, 자야망갈라가타에서(2011-03-29)’ “나는 근거 없는 비난을 참아 내리라” 부처님의 아힘사(ahimsa)(2014-02-20)’라는 제목으로 글을 들 수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넷상에서 근거없이 악의적으로 비방을 일삼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처럼 인내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글이다.

 

해당게송을 보면

 

법우님이 인상깊게 여겼던 장면은 거짓임신녀의 손가락질이라 한다. 중상모략을 일삼는 이교도들이 거짓임신녀를 시켜 부처님의 교단을 흔들려고 하였지만 이에 부처님은 인욕하였다. 자야망갈라가타에서 이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vāna-kaṭṭhamudara iva gabbhiniyā   

Ciñcāya duṭṭha-vacana janakāya majjhe 

Santena somavidhinā jitavā munindo           

Ta 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          

 

여인 찐짜가 자신의 배에 통나무 넣고
임신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했을 때,
성자의 제왕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5번 게송, 전재성님역)

 

 

 

 

거짓 임신녀 찐짜는 부처님의 아이를 뱄다고 말하며 부처님을 망신주고 모욕주려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법구경 176번 게송에서 찐짜 마나비까와관련된 이야기(Cincamanavikavatthu)’라는 인연담으로 실려 있다.

 

어떤 내용이길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부처님의 덕성이 널리 퍼졌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커다란 이익과 명성이 생겨났다. 이에 시기하는 이교도들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명성에 흠집을 낼 것인지를 고민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왓티에서 최상의 미모를 가진 유행녀 찐짜 마나위까를 교사하였다. 부처님에게 치욕을 주어 이익과 명성을 없애 버리고자 한 것이다.

 

찐짜는 천조각으로 배를 감싸서 임신한 것처럼 임신복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나는 수행자 고따마의 아이를 뱄다라고 떠들고 다녔다. 더구나 임신 팔구개월이 되었을 때는 광주리까지 넣고 다녔다.

 

어는 날 저녁 부처님이 설법하려 할 때 찐짜가 나타나 쾌락을 즐길 줄은 알지만, 네가 낳는 아이는 돌볼 줄 모르는구나.”라고 대중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었다. 이에 부처님은 설법을 중단하고 자매여, 그대가 말한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대와 나만이 알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인연담에서는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전부이다.

 

자야망갈라가타 게송에서는 부처님의 대응방식이 표현 되어 있다. “성자의 제왕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Santena somavidhinā jitavā munindo)”라는 대목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인욕이다. 어떤 비방이나 비난에도 화를 내지 않은 것이다. 다만 차분하게 자매여, 그대가 말한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대와 나만이 알뿐이다.”라고 말하였을 뿐이다.

 

진실은 밝혀졌다. 인연담에서는 신화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과정을 지켜 보고 있었던 제석천에 의하여 거짓임신녀가 철퇴를 맞은 것이다.

 

잘 읊어진 시에 의한 승리의 경

 

부처님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인욕하였다. 이렇게 인욕하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다. 거짓임신녀의 모함에도 부처님은 성자의 제왕다운 모습으로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대하여 결국 승리한 것이다. 그래서 게송의 후렴구에 “jayamagalāni”가 있어서 승리의 행운을 노래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면 누구나 승리하고 행운이 찾아 옴을 말한다.

 

자야망갈라가타는 승리와 축복(행운)의 노래이다. 그런데 승리하는 방식이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결국 승리하는 것이 된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상윳따니꺄야 잘 읊어진 시에 의한 승리의 경(S11.5)’에 다음과 같이 인욕에 대한 노래가 있다.

 

 

[제석천]

나를 두려워하여 그것을 참는다고

임의로 생각하든 말든

참 사람이 최상의 이익을 성취하려면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네.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어리석은 자의 힘은

힘없는 자의 힘이네.

진리를 수호하는 힘있는 자에게

대적할 사람은 없다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네.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면

자신을 위하고 또 남을 위하고

둘 다의 이익을 위한 것이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S11.5, 전재성님역)

 

 

 

승리자가 되려면

 

여기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 있다. 흔히 이런 사람에 대하여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 한다. 그러나 사람은 겪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또 재난을 당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아무리 착하고 순진하고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도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고 재난을 당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사람을 아는 방법이 있다. 화내는 모습이다. 화 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가 깨달은 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깨달은 자는 결코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으로 대표되는 번뇌가 이미 소멸된 마당에 다시 탐욕과 성냄이라는 번뇌가 찾아 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성냄이다. 다음으로 탐욕이다.

 

탐욕은 밥먹을 때 드러난다. 욕심 많은 자는 대게 밥을 탐욕으로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내고 욕심부리는 자는 천박한 자들이다. 그리고 지혜가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늘 느낌에 휘둘린다. 느낌이 좋으면 거머 쥐려 하여 탐욕이 발생하고, 느낌이 괴로우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성을 낸다. 이렇게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가는 자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탐진치로 살아 가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탐진치로 살아 간다. 그러다 보니 늘 재난에 직면하고 파괴적인 삶을 살아 간다. 마치 주식을 할 때 욕심을 부리면 더 까지고, 도박을 하면 할 수록 빈털터리가 되는 것처럼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더 까지는 것이다. 화를 내면 낼수록 인간관계는 파탄 난다. 화내는 사람을 좋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냄은 인간관계를 파탄 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하여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매번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탐진치로 살아 가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았다.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 역시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 욕심 부리지 않는다. 결국 화내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는 자가 승리자가 된다. 화내고 욕심부리면 재난을 당하고 파괴되어서 결국 죽음에 이르러 재생이 되고 말지만, 번뇌를 소멸시킨 자는 다시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승리자가 된다.

 

 

 

2014-11-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