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붓다의 가르침을 왜 따르려 하는가?” 본문 보다 가치 있는 댓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13. 12:47

 

 

붓다의 가르침을 왜 따르려 하는가?” 본문 보다 가치 있는 댓글

 

 

 

매일 글을 쓰는 것을 낙으로 살아 간다. 그러다 보니 수 많은 글을 남기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생각을 언어로 표현 한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구업에 해당된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칭찬도 많지만 비난도 많다. 가장 큰 비난은 주제넘게 글을 쓴 다는 것이다. 알면은 얼마나 안다고 스님도 아닌 것이 학자도 아닌 것이 글을 쓴다고 비난한다. 심지어 인도나 스리랑카 한 번 가보지도 않은 자가 마치 현지에서 보고 들은 것처럼 쓴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 오직 쓸 뿐 이다.

 

올린 글을 삼년 째 보고 있는 법우님

 

이렇게 매일 글쓰기를 하다 보니 글을 꾸준히 읽어 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종종 메일에 글을 남겨 주시는 법우님들로부터 알 수 있다. 최근 어느 법우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주셨다.

 

 

연꽃님

매일 매일 좋은 내용과 가르침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60대 초반의 꽃을 전공하고 지금까지 꽃관련된 일만 해왔습니다.

이제는 꽃을 보면 웬만하면 학명을 외울정도로지만, 처음보는 식물이라하더라도 대충 재배방법에 대해 어림할수 있습니다.

화훼가 가업이니까 적어도 40-50년 된 경험상 그런것도 있지만 식물생리와 생태를 공부한 덕분이겠지요.

변변찮은 농사일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 불교에 관심이 있던중 연꽃님의 글을 3년째 계속 보고있습니다.

정말 많은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공감하면서 보았지만 이제는 진짜 가르침이 뭔지 막연하지만 정리가 조금씩 되어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에게 오는 마춤메일중에 아래와같은 내용이 있어서 연꽃님의 관심이 있으실것 같아 아래에 붙였습니다.

모르긴해도 부처님의 가르침 내용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을것 같아서요.

출퇴근길에는 휴대폰으로, 사무실이나 집에서는 컴퓨터로 거의 매일 보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배울수 있도록 정진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K법우님)

 

 

글을 남겨 주신 법우님의 글을 보니 왠지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든다. 나이도 더 많고 경험도 더 많은 분이 얼굴도 밝히지 않는 블로거를 칭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올린 글을 삼년 째 보고 있다고 하니 그 동안 작성된 글이 혹시 잘못된 것은 없는지 마음에 걸린다.

 

하루 숙제를 다한 기분

 

불교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접한다. 그러나 요즘은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이기 때문에 넷상에서 주로 접한다. 하지만 넷상에는 온갖 정보가 난립하여 어느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인지 햇갈릴 때가 있다. 넷상에 퍼져 있는 단멸론이 대표적이다.

 

가르침은 주로 경전을 통하여 접한다. 우리말로 번역된 빠알리니까야가 출간 되었으므로 생생한 원음을 접할 때 부처님이 마치 가까이 있는 듯 하다. 이렇게 원전을 통하여 가르침을 접하다 보니 글의 길이가 점점 길어진다. 요즘은 폰트 사이즈 12로 하여 A4 열 장 채우는 것은 기본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이들은 너무 길다고 말하며 조금 읽다가 중간쯤 가면 마구 스크롤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글의 길이를 줄여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글의 길이가 길어지는 것은 자료를인용하기 때문이다. 경전의 문구를 인용하고 인용된 문구에 대한 주석을 참조 하고 또 개인적인 견해를 달다 보면 금새 페이지가 늘어난다. 여기에다 관련된 경을 참조 하면 열 페이지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렇게 아침 일찍 부리나케 사무실로 나와 A4 열페이지를 채우다 보면 점심시간이다. 글을 올리고 나면 오늘 하루 숙제를 다한 기분이다. 하루를 일생으로 본다면 글을 올리는 행위가 해야 할 일을 다 한듯 뿌듯하기만 하다. 이런 생활을 수 년째 매일 반복하고 있다.

 

교계 칼럼에서

 

글을 쓸 때 주로 경전을 참고 하지만 때로 교계신문 사이트를 참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 유명인사의 칼럼이 있다. 최근에는 강병균교수의 칼럼을 읽고 여러 편의 글을 올린 바 있다.

 

불겨닷컴에 연재 되고 있는 강병균교수의 칼럼 환공망상과 기이한 세상시리지는 여러모로 논란을 야기 하고 있다. 한 수학자의 눈으로 바라 본 불교적 세계관이 논란거리이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진화론적 시각으로 본 연기관일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과학적 시각으로 불교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가장 경계해야 할 단멸론적 견해를 접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최근 강교수가 올린 에 대한 칼럼에는 수 많은 댓글이 달렸다.

 

본문 보다 더 가치 있는 댓글

 

컬럼에 달린 댓글을 보면 본문 보다 더 배울 것이 있는 내용도 많다. 댓글이 대부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지만 일부 댓글을 보면 내공의 힘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댓글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필명지식과 지혜님이 작성한 글이다. 본문 보다 더 가치 있는 댓글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이를 옮겨 보았다.

 

 

붓다의 가르침을 왜 따르려 하는가?

 

불교, 붓다의 가르침을 왜 따르려 하는가? 왜 명상을 하는가?.
먼저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일 것이다. 행복에도 점점 더 차원 높은 행복이 있을 것이다.


마음이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청정, 마음의 최고도의 청정은 완벽한 지혜와 함께 숨을 쉬게 되어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7청정의 단계이다. 계청정, 심청정,견청정.......지견청정의 7단계,  완벽한 청정과 완벽한 지혜에 이르는 방법을 붓다는 아무것도 손에 숨겨두지 않고, 손가락을 펼쳐 그것을 직시해주었다.

세간적 진리와 출세간적 진리

 

세상에는 진리가 수없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진리는 단 하나일 뿐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들 한테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하면 대답을 못한다. 다 개념적인것 관념적인것에 대한 공부 연구일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화두타파에 의해서는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없다. 최고도의 화두수행자가 깨달아봐야, 어느 정도 지복감과 주객일여의 상태의 체험정도 일 것이다. 관념적인 수행이기에 제대로 된 사유지의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수행도 나름대로 다 좋은 것이다. 선도이든 도교이든 요가이든 기독교든회교도이든, 다 나름대로의 도, 진리에 이르는 길에 이르는 것인데, 완전하고 완벽한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기에 잘못 수행하면 뇌의 잘못된 집중력에 의한 환각현상의 체험으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든지, 신의존재를 봤다든지, 주객일여의 상태라든지,오매일여를 체험했다든지, 하는 심각하고 위험한 착각을 만들어 낸다.

 

집착을 털어내버려야 하는 것이 수행일텐데, 오히려 수행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의 조장으로, 집착을 더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 집착이 잘못된 견해를 키우고 자신이 깨달았다고 하는 허구적이고 관념상태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경허의 막행막식, 성철의 아비라 주문, 성철의 나는 사탄을 경배합니다라는 말등. 깨달은 자이기에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다고 해서 대 자유의 경지를 마음 것 펼치고 있는 언행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관념적인 수행의 폐해이다. 이 사람들의 언행이 자신에게 특히 수행자인 자신들에게 심각한 업으로 될것이라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용맹정진을 빙자한 에고의 강화, 무시이래로 키워왔던 오염원인, 집착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조차도 모르게 하는 것이 간교한 무명의 술책이고, 관념적인 수행의 폐해이다.

진리는 두가지 종류라고 한다. 현상세계의 보편적 진리인 3특상, 무상 고 무아.

현상세계를 초월한 진리인 열반. 무상=무아=고 이기에 현상의 진리는 하나이다.세간의 진리 하나와 출세간의 진리인 열반 하나를 합하면 둘이다. 그러한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 세존이신 붓다이다.

선수행자들의 막행막식

 

단지 머리만 깍고 가사만 걸치면 수행자, 비구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세존의 가르침인 담마, 불법은 함부로 훼손해서도 안되고 첨가하거나 위조하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붓다와 담마 상가인 삼보에 의해서 그 진리가 보존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번뇌가 보리심이라서 경허가 막행막식을 햇다는, ‘나는 사탄을 경배합니다라는 성철의 과거 신념법어들, 수없이 위조된 유사 사이비 대승경전들 엉터리 유사 깨달음의 선어록, 완벽한 지혜는 해탈을 이루게 된다.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 3해탈을 이루게 된다. 거기에 바탕은 청정이다.

세간의 보편적인 법칙인 무상,, 무아를 설했는데도..대승은 고()를 싹빼고 대신에 열반적정을 집어넣었다. 유마거사가 사리불존자등을 비웃는 소리를 해대고, 많은 대승경전에서 아라한들을 비웃는 짓을 자연스럽게 한다. 스케일은 거창한데 알맹이는 없는 대승경전들은 도저히 깨달음의 근처에도 못 간, 기본적인 마음의 청정, 즉 계청정도 이루지 못한 자들이 여러 가지 철학과 아트만 개념과 붓다의 가르침의 일부분을 교묘히 개작해서 만든 짜깁기 판타지소설이다.

 

사탄을 경배한다고?.마음의 청정을 가리는게 번뇌이다. 번뇌안에 들어가 있으면 번뇌안에서 보리심이 나온다고?. 이것은 관념과 개념적인 황당무게한 희론일뿐이다.

번뇌는 건강한 신체 안에 있는 똥이다. 배가 아프면 똥을 싸야한다. 똥을 싼만큼 신체는 가벼워진다. 이것은 마음의 청정의 점진적인 발전과도 관계된다. 번뇌가 사라지면 사라진 만큼 마음은 깨끗해진다. 똥을 배 안에 두고,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배 안의 똥을 통해서 신체를 건강하게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허황된 이야기이고 관념적 사고의 폐해이다.

 

사탄을 경배한다고? 중생이라서? 붓다가 성도하실때 3개의 마라를 경배한다고 했나? 다 물러가라고 했다. 갈애를 극복한 위없는 자에게는 한방울의 집착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깨달아서, 마음이 깨끗한데 성철은 자기 맘에 안들고 잘못하면 그렇게 욕하고 성질부리고 고함치고 그랬나?? 계청정은 쉽게 이야기 하면 자기의 성격을 관리하는 것이다. 계청정의 기본도 안된 자가 깨달았다고 이런 소리 해되는 게, 대승을 표방한 소위선승이란 자들의 작태이고 행태이다.

 

왜 초기불교인가?


왜 그럴까?. 심각히 숙고해봐야 한다. ??? 결국 붓다의 본래의 가르침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를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깨달았다고 남을 속이고, 설사 멍청한 자신을 속일지라도 자신의 업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화두참선은 관념적인 수행이다. 일부 회통을 주장하는 자들이 화두를 대념처경의 심념처 수행의 일종이라는 편법적이고 자위적인 해석을 내놓지만 그것은 관념적인 수행일 뿐이다.

 

관념적인 수행은 아상만 더 키우고 분별만 더 키우고 에고를 강화시키는 집착심을 필연적으로 키우게 되어있다. 이래서 막행막식인 착각도인이 나오는 것이다.최상승선이라고 하는 분별심을 여과 없이 내놓는 진제종정과 초기불교의 수행자와의 대담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태평양속에서 헤엄을 쳐야 하는데, 개울에서 물장구 치면서 수영 다 배웠네 하는 격이구나하는 것을 느꼇다. 수행자의 시간이 월등히 짧은 초기불교수행승이 확실히 더 예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세존께서는 다 말씀하셨다..지금은 그것이 알려져 있는 호기의 인연을 만난 행운의 시간에 숙세의 연연으로 세존의 본래의 가르침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윤회와 업, 세간의 삼특상의 진리, 출세간의 열반의 진리, 삼 해탈, 해탈하는 방법인 지와 관수행, 여기에 지와 관수행하는 목차들까지,40여개의 사마타 업처,위빠사나의 지혜, 8정도, 사성제,37보리분법, 오온, 심지어 어려운 아비담마상카타까지 한국어로 번역본이 나오는 시대이다.

 

관념적인 수행도 나름대로의 수행의 이익이 있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잘못하면 집착을 더 키워 에고의 강화를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대중부가 분리해나올때 소소한 것, 밥먹는것, 꿀 모을수 있는 것, 이런 소소한 계율에 대한 논쟁이었다. 지금 시대에 생각하면 웃긴 이야기고 하찮은 이야기지만 열반을 목표로 하는 수행승의 입장에서는 상좌부들의 엄격한 적용이 더 올바르고 더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불법에 대한 훼손, 경전에 대한 엄격한 적용 계율에 대한 엄격한 적용이 결과적으로는 오랜 시간 초기불교를 지켜올 수 있었던 내구적인 힘의 원천일 것이다.

 

상좌부의 견해는 간단하다.원래의 붓다의 가르침을 지켜라. 불법의 어떠한 점도 훼손, 조작, 개입을 용인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소위 힘있는 나라들, 중국, 한국, 일본, 소위 과거에 강대국들에 대승이 전래되어왔다. 티벳 몽고쪽으로 금강승이란 밀교가 전해지고, 소위 힘없는 나라,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버마 등 소위 말하는 소승불교가 전래되어왔다.

 

원래의 가르침을 못지키니 기독교의침투에 소위 강대국, 대승을 받아들인 나라들은 처참하게 불법의 위세가 거의 깨졌지만, 티벳의 금강승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수행체계가 있기에 자신만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제외하고, 못사는 나라들인 남방의 나라들은 태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유럽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 유럽의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법의 힘이 약해지지 않았다. 불법의 원래 가르침에 충실하고 그것을 보존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켜진것이고, 오히려 유럽쪽의 영국등 기독교도들이 초기불교에 관심을 갖고 우리보다 먼저 붓다의 원음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개판오분전의 한국불교

 

조계종이 표방한 선불교는 참선이 최상승선이라는 말만 하지, 계속 하는 짓은 개판 오분전이지 않는가?.관념적인 화두수행은 요기들의 나는 누구인가?’와 비슷한 것이다. 궁극의 경지에는 나갈 수가 없다. 마음상태의 최고의 청정을 닦는 상태인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 올라도, 아는 자와 관찰자가 여전히 존재하기에 진공묘유니, 주객일여니하는 성스러운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사성제의 멸성제조차도 지식으로도 머리로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기의 최고의 수행자가 비상비비상처까지 경험할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뭔가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크리슈나무르티를 봤느니, 신의 체험을 했다느니, 주관과 객관이 일체가 되었다느니 하는 것이다.

 

선불교는 불교란 말을 붙였지만, 솔직히 불교가 아니다. 원불교가 불교가 아니듯이, 불교, 붓다의 가르침의 종교가 아닌 것이다. 요가수행자보다도 더 못하다.그들은 지수행을 통해 마음을 닦았기에 희안한 망발과 행동은 안한다.

 

조사들의 가르침, 존재계내에서, 현상계내에서, 그래서 세새생생 보살도를 닦는 윤회를 한다고 한다. 자기업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수 있다고 여기나 보다.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인 담마를 세존인 붓다도 자기 의지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단지 그 업을 우리보다 더 확실히 알고 보는, 지와 견을 가졌을 뿐인데, 세세생생윤회하면서 보살의공덕을 쌓는다고 한다.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비불교적인 요소이다. 그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잘못된 견해만 더 가득하게 되니, 성철의 아비타주문, 사탄을 경배하니 어서오소서라는 소리나 해대고, 정말 무식한 소리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소위 마음의 주요한 심소중의 하나가 의도, 의사, 제따나이다. 그런의도가 무의식속에서 있으니 그런 소리가 나온것이다. 기본적인 공부도 안된 것이다. 이게 관념수행의 최고의 폐해다.

 

자기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니,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술처먹고 오입하고 대표적인 것이 경허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말년에 승복은 반납햇으니 악을 행하면 악의 잔재가 남는다.

 

그것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마음에 그늘이 자국이 남는다. 깨달은자가 그런 짓을 했다면, 그런 짓을 할 의도자체가 없기에 할 수도 없겠지만, 자기자신의 마음의 자국 그늘은 자기의 마음을 어둡게 흐리게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조금이라도 못느끼는 자라면 그런 자가 일반적인 단어로 싸이코패스인것이다. 선과악의 분별자체가 없이 오히려 악에 더 희열을 느끼는자가 싸이코패스인것이다.


붓다는 도에 이르는 방법 자세한 목차 대상까지도 다 말해주었다. 대승경전 잠시 볼 때보다 오히려 니까야를 읽어보면서, 붓다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이분은 인간적이면서도 참으로 자애로운신 분, 상세히 말해주시는 분, 정말이지 지혜와 자비가 함께 하는 신과 인간들의 스승인 천인사이시구나자연스러운 흠모의감정이 넘쳐서 솟구치는 희열에 잠시 이상한 지경까지 갔다 왔었다.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붓다의 설볍에 설법을 듣는 수많은 자들이 수다원이 되었네 하는 말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솟구치는 희열감이 넘쳐 됨으로, 행복이 삼매의 주요한 원인이고 조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붓다를 방편이라고 마른 똥나무라고 한 조주는 심각한 언업을 한 것이다. 조주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오히려 이런 언행을 하는 자가 수행자인가? 하는 염증이 생긴다. 이게 선불교의 폐해다.

 

회통을 주장하지만


붓다는 친절히 자세하게 쓸데없는 말들, 고와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도움이 안되는 희론과 개념망상을 불러일으킬수 있는것은 제외하고 다 말씀하셧다..고마움과 존경심이 넘쳐서 어찌할수 없을 정도를 느낄 만큼 그렇게 자세히 이야기 해주었는데, 개울가에 물장구치면서 태평양에서 수영을 할 수 있네?’ 하는 딴짓들을 하는 것인가? 유아론적인 모든 희론 개념 망상들이 다 그러한 것들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수행식으로 대승 선 금강승 이런 식으로 갈리는 것이다.

 

기본과 심지를 지키면 각 지역적 시대적 상황에서의 발전적 변화로 이해해줄 수 있는데, 솔직히 불법에서 더 이상의 발달, 발전은 없다. 대승이 초기불교의 발전적 계승이라는 헛소리를 한 이론 대승학자는 심각하게 붓다와 붓다의 고결한 제자들인 아라한들을 능멸하고 모독한 것이다. 그런 글들을 보고 인간이 얼마나 관념과 희론의 대가들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각자 업이지 했지만.


무아를 훼손, 무아를 비아로 타협하는것에 있다. 이것의 심각성은 비불교, 즉 기독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불교도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초기불교 공부한 중들이 비스무리한 대승과 회통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결합은 되도 화학적인 결합은 이루어질수가 없다고 여긴다. 이해심은 가져주데 거기에 섞이지는 않는다라는 견해를 가져야 한다. 어설픈 회통은 비빔밥을 만드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것이 삼특상의 무아를 훼손 타협 조작 붓다식이 아닌 자기식의 이해와 변형에 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반야심경, 아비타 주문, 뜻도 의미도 모를 말들을 주절되면서 착각의 환상체험을 하면 거기에 자신의 신념을 세운다. 그게 그들의 업이다. 교회가서 신을 찾지 왜 절에서 관세음보살이란 신을 찾나? 보살도 내세우면서.

 

중들은 먼저 계율로 돌아가야


조계종 돌아가는 꼬라지를 봐라. 돈봉투네 뭐네 술처먹네 사람잡네 선거나오네 진아를 찾네. 문제가 한 두개가 아니지 않은가?. 가장 원초적인 것은 무아의 독존적이 가르침에 유아의 구름으로 무아의 광명의 빛을 가리는 것이다. 유아이면 결코 해탈할 수 없다. 세새생생 보살도한다고 하다가 지옥가서 보살도 행하게 된다.  

 

무아의 체험은 성자들만이 하기에 힘들지만, 무아를 지식으로도 머리로도 심정적으로 심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체험적으로도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한다. 무사이래로 쌓아온 자신의 자아의식이 사라지겠는가? 그러니 진아, 참나 불성 여래장..이상한 것을 찾으면서 실체가 아니네 하는 변명을 하는 것이다. 그런 실체를 상정하려는 새새생생 이어온 무의식의 경향성으로 의식하에서 그런 말을 쓰는 것이다.


중들은 먼저 계율로 돌아가야 한다..그리고 사판승다 없애야 한다. 오직 교학과 수행, 거기서 나오는 현실에서 이 자비의 이타행, 조계종에 대한 모든 물질적인 관리는 유엔기구에서 해야 한다.^^

 

유엔에서 조계종 자금과 사찰등을 직접관리하면 콩고물 떡고물 먹을라고 자기가 한 말 뒤집어놓고 재출마한 얼굴 희멀겋게 좋은 식성 좋은 것 같은 아자씨 힘들게 출마 안하고 자기편쪽으로 끌어들이는 돈봉투 공작정치비슷한 짓 안할것이다.
공양금으로 천만원을 주었네 뭐네 그러면서 무슨 후학들을 가르친다고 교육을 책임진다고 교육을 가르칠래면 먼저 거짓말하고 재선된 총무원장한테 용퇴하라고 해야한다. 그리고 나서 위를 맑게 한 다음에, 아래 후학들을 가르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번 해먹고 나서, 두번 해먹을라고 돈봉투준것아닌가? 일에 재미를 느낀다나? 이게 중들이 할 소리인가? 쓸데없는 일에 분주하지 말고 오직 수행하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셧다. 자질 소양 인격, 도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도 결격사유라 여긴다. 먹을게 있으니 또 하는 거지. 자가 것 퍼주면서 하라고 하면 하겠나? 이 모든 것들은 계율엄수를 기본적으로 안 한것이다.

먹는 것 하루에 1 1식 시켜야 한다. 배고파서 오입질 술처먹는 짓 도박질 못한다. 돈과같은 것 소유못하게 해야 한다. 도박질 할, 룸싸롱갈, 오입질 할 돈 없어서 하고 싶어도 못한다. 책을 써서 돈을 벌어도 개인소유의 돈이 아니라, 승가 공동의 돈으로 집어넣어 관리는 유엔기구에서 집행하게 하고 관리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명예와 돈벌라고 쓸데없이 책같은 것 쓰지 않고 수행만 하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요 두가지만 바로 실행시키면, 조계종단의 잡음 불법 난동 다 사라지게 되어있다..너도 나도 다 사퇴하고, 수행에 뜻 없으면 너도 나도 승복 반납하고. 결국 먹는것과 돈소유하는것, 입과 지갑만 철저히 통제하면 만사 형통이다.. 자연스럽게 수행의 흐름쪽으로 기운이 흘러간다. 그러면서 청정한 상가가 된다.

 

사부대중이 완성되면


청정한 상가에 대한 존경심으로 신심있는 우바이 우바새들을 갖춘 4부대중이 완성된다. 사부대중이 완성되면 타종교의 침투 이런 것 걱정안하게 된다. ‘아는 이, 이해하는 이는 이것이 최고의 궁극의 진리의 길이구나를 자연스럽게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한 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불법은 빛나고 세상은 깨끗해지고 깨달음을 얻는 자들은 늘어난다.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결과적으로 세상도 이롭고 세상을 떠난 열반에도 이롭다. 현실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지식과 지혜님무여열반과 단멸론에 대한 댓글, 컴 2014-11-10)

 

 

 

 

이 글은 불교닷컴에 연재 되고 있는 강병균교수의 칼럼 무여열반괴 단멸론에 대한 지식과 지혜님의 댓글이다. 긴 길이의 글에서 편의상 문단을 나누고 소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왜 따르려 하는가?’라고 제목을 붙여 보았다.

 

 

 

2014-11-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