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담바라가 피었다는데, 초기경전에서 본 무화과(Udumbara)
뭐?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글을 쓰다 보면 종종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올린 글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어 기사화 되었을 때이다. 최근 불교닷컴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기사에서는 동국대에서 우담바라가 핀 사실을 보도 하였다. 동국대총장이 정각원 종에 피어 있는 30여송이의 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 지면서 학교에서는 매우 상서로운 징조로 본다고 하였다. 더구나 학교내의 절 정각원을 맡고 있는 스님 역시 행운의 꽃이라 하며 반겼다고 한다.
▲ 동국대가 정각원 '동국의 종'에 핀 우담바라라며 배포한 우담바라 (사진=동국대)
동양불교권에서 우담바라는 삼천년에 한번 핀다는 전설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꽃이 피면 상서로운징조나 구원의 뜻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부처나 전륜상왕이 출현할 때 꽃이 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설의 꽃이라 불리유는 우담바라는 ‘풀잠자리알’로 알려진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런 취지로 여러 차례 글을 올린 바 있다. 대표적으로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다” 우담바라 핀 청계사에서(2012-04-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약 십여년전 의왕시 청계사에서 우담바라가 피었다하여 매스컴에 크게 보도 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풀잠자리이었다는 내용이다.
“인터넷 파워블로거 ‘진흙속의 연꽃’은”
올린 글에서 청계사의 ‘우담바라마케팅’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대국민사기라는 말이 있듯이 불자들에게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하여 혹세무민 하는 것에 대하여 ‘대불자사기극’으로 본다. 더구나 우담바라마케팅을 주도한 이가 현재 상습도박승 혐의를 받고 있는 J스님이 주지로 있었을 때라는 사실이다. 도박과 우담바라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우담바라로 인하여 마케팅이 성공하였다면 이는 도박에서 돈을 딴 것이나 같은 것으로 본다. 이런 취지로 글을 작성하였는데 불교닷컴 기자가 그런 내용을 참고 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인터넷 파워블로거 ‘진흙속의 연꽃’은 지난 2004년 청계사 우담바라 친견법회 등을 예로 들며 일부가 믿고 있는 우담바라가 풀잠자리알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풀잠자리알’ 같은데…동국대는 ‘우담바라’래, 불교닷컴 2014-10-27)
기사에서는 필명과 함께 이전에 올린 글의 내용을 소개 하였다. 한마디로 우담바라라고 불리우는 것은 우담바라꽃이 아니라 풀잠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의 기사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동국대에서는 총장에서부터 정각원 주지스님에 이르기 까지 모두 진짜 우담바라가 핀 것으로 믿고 있다고 전한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우담바라가 풀잠자리알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종립대학인 동국대에서 그것도 총장과 주지스님이 우담바라꽃이 피었다 하여 상서러운 징조라 말하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세상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연합뉴스처럼 뉴스를 배포하는 ‘뉴시스’ 에서도 이런 사실이 이미 기사화 되었다. 그래서 기사에 따르면 “학교 관계자와 학생들은 전설의 꽃 우담바라(優曇婆羅)라며 크게 반기고 있다.(뉴시스 2014-10-27)”라고 밝히고 있다. 알만한 사람들은 사실을 다 알고 있음에도 한국불교의 리더들은 아직 실체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중국어판 위키백과에서
우담바라는 과연 전설의 꽃일까? 진짜 삼천년에 한번 피는 그 꽃이 맞을까? 검색하여 보면 수 도 없이 우담바라 꽃이 피었다고 하는데 맞는 것일까? 우담바라에 대하여 백과사전에서도 전설의 꽃으로 소개 되어 있다. 국내의 어느 백과사전에서도 풀잠자리알이라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한자어 ‘優曇婆羅’를 키워드로 검색하니 중국어로 된 위키백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聚果榕(学名:Ficus racemosa),又名優曇華(梵文:उडुम्बर,udumbara)、優曇本羅、優曇本花、優曇波羅、優曇婆羅、烏曇跋羅、鄔曇缽羅、優曇缽、優曇缽華、優曇、文仙果、马朗果(贵州)等,是桑科榕屬植物,分布于印度、越南、斯里兰卡、巴布亚新几内亚、尼泊尔、巴基斯坦、澳大利亚、印度尼西亚、泰国以及中国大陆的贵州、广西、云南等地,生长于海拔130米至2,500米的地区,是一種出現於佛教經典中的植物。[1]
(聚果榕, 중국어 위키백과)
한문으로 된 중국어판 위키백과 개요에서는 풀잠자리알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민간전문이라는 항목에 草蛉라 하여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백과사전 보다는 진일보한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 백과사전에는 그 어디에도 풀잠자리알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문으로 된 위키백과에서 풀잠자리알이 부화한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草蛉卵有細長的莖,形似花朵(풀잠자리알)
풀잠자리알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마치 한송이 꽃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이런 유충이 어떻게 하여 우담바라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법화경에 실려 있는 우담바라 관련 게송
중국어판 위키백과에서는 개요와 함께 종교문헌상에 나타난 우담바라를 소개하고 있다. 주로 대승경전이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이 법화경이다. 법화경 《法華經方便品》、《同化城喻品》、《同妙莊嚴王品》에 우담바라 관련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 보았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런 미묘한 법은
부처님 여래께서
때가 되어야 말씀하시는 것이니,
마치 우담바라꽃이
때가 되어야 피는 것과 같으니라.
(법화경 방편품, 운허스님역)
2.
우담바라꽃 피듯이
오래고 먼 세월에
출현하는 부처님을
오늘에야 만났으니
(법화경 여래수량품, 운허스님역)
3.
오랜 겁에 한 번 피는 우담바라보다
부처님 만나기는 그 더욱 어려우면
여러 가지 많은 환난 해탈키도 어렵나니
원컨대 저희들의 출가 허락하소서.
(법화경 묘장엄왕품, 운허스님역)
우담바라꽃을 보기 어려움을 부처님 보기 어려움으로 묘사하고 있다. 세 번째 묘장엄왕품에 실린 게송을 보면 오랜 겁에 한번 핀다고 하였다. 이는 삼천년에 한번 핀다는 것 보다 더 아득한 세월이다. 게송에 따르면 우담바라보기가 매우 희유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부처가 출현하는것도 희유한 일이다. 그래서 부처가 출현하여 부처님법 만나는 것을 우담바라 보듯이 하라는 가르침이다.
일본어판 백과사전을 보니
이번에는 일본어판 백과사전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うどんげ【優曇華】
〔「優曇」は梵語 udumbara の音訳「優曇波羅」の略〕
①
クワ科の常緑高木。イチジクの近縁種。インド・セイロン島などに分布。花は壺状の花托の内面に生じ,果実は食用。花が外部から見えないところから,仏教では三千年に一度花が咲くといわれ,花の咲く時は金輪王(こんりんおう)が出現するとも,また,如来が世に現れるとも伝えられる。
②
バショウの花の異名。
③
クサカゲロウの卵。楕円形の粒で,緑色,のち白色に変わる。糸状の細い柄の先に垂れ,草木・器物・天井などに群がってつき,花のように見える。吉兆とも凶兆ともいわれる。うどんげの花。 [季] 夏。 《 -にかざす仏の灯をかりぬ /富安風生 》
④
〔三千年に一度咲くとされていることから〕 きわめてまれなことに出あうことのたとえ。 「たまたま逢ふこそ-なれ/狂言・花子」
일본에서는 우담바라를 ‘우돈게(うどんげ)’라 한다. 우담화(優曇華)에 대한 일본식발음이다. 우담바라에 대하여 모두 네 가지로 설명해 놓았다. 첫번째 항목을 보면 우담바라식물에 대한 내용이다. 상록수로서 인도와 실론 등에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지 않는 꽃은 없다
꽃과 관련하여 호리병모양의 꽃꼭지의 맨끝에 꽃이 붙은 모양이라 한다. 꽃이 피긴 하지만 내부에서 피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았을 때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담바라꽃은 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꽃이 열매 안에서 피기 때문에 피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이 상식이다. 따라서 꽃이 없이 맺는 열매는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우담바라도 꽃이 피는 것이다. 다만 숨겨져 있어서 안보일 뿐이다. 이런 특징이 있어서일까 갖가지 전설과 신화가 생겨났다.
우담바라는 풀잠자리알이라고
일본어판위키백과에서 주목할 사항은 세 번째 항이다. 첫번째 항에서 우담바라에 대한 식물학적 소개와 함께 전설의 꽃이라 설명하면서 동시에 세번째 항을 보면 풀잠자리알(クサカゲロウの卵)을 우담바라로 칭한다고 분명히 설명해 놓고 있다. 이런 점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나라 백과사전 그 어디에도 우담바라가 풀잠자리알을 뜻한다는 것을 아직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풀잠자리알은 타원형의 작은 입자에서 시작된다. 알이 녹색, 백색으로 변하면서 실모양의 가느다란 자루병모양이 되어 매달리게 되는데, 초목이나 기물, 천정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뭉쳐서 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어판 사전에서는 풀잠리리알도 우담바라라고 분명하게 명기 하여 놓고 있다.
1951년의 우담바라소동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우담바라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 풀잠자리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일본야후에서는 우리나라에서처럼 우담바라가 피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없다. ‘うどんげの花(우담바라꽃)’이라 하여 풀잠자리알에서 부화한 곤충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만 아주 오래 전에 우담바라소동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1951년에 우담바라꽃이 피었다는 신문기사를 소개 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60여년전에 오늘날 한국에서 보는 우담바라 소동이 있었는데 내용은 똑같다.
60여년전 일본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이에 대하여 “三千年に一度咲くという"うどんげの花"が江東区の誰それの自転車のスポークに十三本も咲いた”라고 설명 되어 있다. 삼천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가 자전거에 13송이 피었다는 내용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우담바라소동을 보는 듯 하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여전히
현재 일본에서는 풀잠자리알을 우담바라라고 보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2014년 10월 24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국의 대학에서 3천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다라꽃이 피었다는 기사를 소개 하고 있다. 한국의 중원대학의 석상에 우담바라가 피었다는 것이다. 모두 100개가 피었는데 이를 보기위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 하였다. 검색하여 보니 국내언론에서도 보도된 내용이다. 뉴시스에 따르면 “20일 충북 괴산군 괴산읍 중원대학교 교육문화종교관의 복호나한 호랑이볼 부분에 우담바라가 피어 있다.”라고 보도 하였다.
일본에서 우담바라는 철지난 이야기와 같다. 이미 오래 전에 겪은 것이기 때문에 우담바라가 피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에서는 여전히 우담바라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풀잠자리알에 불과한 것을 우담바라라 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문판백과 사전을 검색하니
이번에는 영문판백과 사전을 검색하였다. Udumbara를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In Buddhism, udumbara (Pali, Sanskrit; Devanagari: उडुम्बर) and uḍumbara (Sanskrit) refer to the tree, flower and fruit of the Ficus racemosa (syn. Ficus glomerata).[1][2][3] In Buddhist literature, this tree or its fruit may carry the connotation of rarity, parasitism or Vedic mysticism.
The udumbara is also used to refer to the blue lotus (Nila udumbara) flower.
(Udumbara (Buddhism), 위키백과)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식물로서 우담바라를 소개하고 있다. 학명은 Ficus racemosa라 한다. 불교와 관련된 문헌에서는 우담바라의 희유함과 기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세 가지 상징이 있는데
우담바라는 초기불교경전에 종종 등장한다. 우담바라는 일반적으로 꽃이 보이지 않는 나무, 기생하는 성질이 있는 나무로 알려져 있어서 상징성이 있다. 초기경전에서 언급된 우담바라는 크게 세 가지 상징이 있다. 첫번째는 ‘보이지 않는 꽃(Unseen flowers)’으로서 우담바라이고, 두번째는 목졸라 죽인다는 의미로‘교살로서의 무화과(Strangling figs)’로서의 우담바라이고, 세번째는 ‘베다 호신부(Vedic amulet)’로서의 우담바라이다.
보이지 않는 꽃(Unseen flowers)으로서 상징
첫째, 보이지 않는 꽃(Unseen flowers)이다. 꽃이 열매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꽃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무화과라 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많은 전설과 신화를 낳았다. 눈으로 꽃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천년에 한번 핀다는 전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희귀성을 말한다.
보기 힘든 희유한 꽃의 이미지로서 우담바라는 테라와다와 마하야나에서 볼 수 있다. 테라와다의 경우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뱀의 경(Uraga Sutta, Sn1.1, stn5)이 대표적이다. 마하야나의 경우 연화경(Lotus Sutra)이다.
숫따니빠따 ‘뱀의 경(Uraga Sutta, Sn1.1, stn5)’에서
숫따니빠따 ‘뱀의 경’에 우담바라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Yo nājjhagamā bhavesu sāraṃ
vicīnaṃ pupphamīva udumbaresu,
So bhikkhu jahāti orapāraṃ
urago jiṇṇamiva tacaṃ purāṇaṃ.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의 경, 숫따니빠따 Sn1.1, stn5,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무화과 나무라 한 것은 udumbara를 말한다. 꽃이 열매 안에서 피기 때문에 꽃이 피지 않고 열매가 맺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무화과(無花果)’라 한다.
게송에서는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vicīnaṃ pupphamīva udumbaresu)”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화과 나무에서는 꽃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무화과에서 꽃을 찾으려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 때에 세존께서 싸밧띠에 계셨는데, 마침 그때에 어떤 한 바라문이 자신의 딸의 결혼을 앞에 두고 ‘어떤 천민도 지금까지 사용한 적이 없는 꽃으로 딸을 장식하여 시집을 보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싸밧띠 시의 안팎에서 그러한 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품이 못된 바라문 자제들을 모아놓고는 그러한 꽃이 있는 장소를 물었다. 그들은 바라문에게 ‘무화과의 꽃은 지금까지 이 세상의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꽃이니 그 꽃으로 장식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바라문은 다음날 아침 식후에 아찌라바띠 강변의 무화과 숲으로 가서 꽃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낮이 지나 다음 강변으로 가보았다.
꽃을 찾다가 지친 바라문은 거기서 명상수행을 하는 수행승을 만났는데 그는 바라문에게 ‘무화과의 꽃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허황된 말이니 자신을 피곤하게 하지 말라’고 알려준다. 세존께서는 수행승의 의도를 알아채고 사념과 자만에 빠진 자를 위해 빛을 놓아 이 시들을 읊었다.
(뱀의 경, stn5 인연담, 전재성님)
인연담에 따르면 무화과의 꽃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어쩌다 한번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꽃이 열매 밖으로 나왔을 경우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희유한 일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은 바라문에게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라고 충고한다.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게송에서는 무화과의 비유를 들면서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다(nājjhagamā bhavesu sāraṃ)”라 하였다. 여기서 실체라고 한 것은 ‘sāra’의 번역어이다. Sāra는 ‘essence(본질, 정수, 진수)’의 뜻이다. 주석에 따르면 ‘항상하는 존재’ 또는 ‘자아의 존재’라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항상하는 존재, 자아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오온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S22.59)”라는 가르침이 있듯이 항상하는 존재 또는 자아를 가진 존재는 없다. 그래서 무아라 한다. 그럼에도 존재에서 항상함을 찾고 자아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임을 말한다.
존재에서 자아를 찾는 것이 나를 찾는 수행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앉아 있어 보지만 결코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화과에서 꽃을 찾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존재에서 실체를 발견할 수 없음을 말한다. 조건지워진 무상한 존재에게 고정불변한 실체, 고정한 불변한 자아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교살의 상징으로서 무화과
두번째, 교살로서의 무화과(Strangling figs)이다. 우담바라 나무는 목졸라 죽이는 나무로서도 알려져 있다. 무화과나무는 주인나무에 기생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무화과를 먹은 동물에 의하여 주인나무의 가지 위에 떨어진 씨가 자라게 되는데 그 가지에서 자란 무화과가 성장함에 따라 주인나무의 뿌리에서부터 가지까지 모두 싸버린다. 마침내 주인나무는 말라 죽게 되고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를 교살하는 무화과(Strangling figs)라 한다.
주인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기생나무
기생하여 주인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것이 무화과이다. 이에 대한 비유의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마하루카경(S46.39)이 그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anti1 bhikkhave, mahārukkhā anubījā mahākāyā rukkhānaṃ ajjhāruhā, yehi rukkhā ajjhārūḷhā obhaggavibhaggā vipatitā se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씨앗은 아주 작지만 몸집이 커다란 나무들이 모든 나무들을 덥치면 모든 나무들은 덥쳐져서 파손되어 무너져버린다.”
(Mahārukkhasutta -큰 나무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39, 전재성님역)
the glomerous fig tree(Udumbara)
경에서 덥친다 하였는데 이는 ‘ajjhārūḷhā’를 말한다. 뜻은 ‘risen up; climbed over’로서 타고 오른다는 의미이다. 기생식물이 숙주를 공격하여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케이스가 나무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말한다.
기생나무의 종류는
이렇게 기생하여 주인나무를 무너 뜨리는 것으로서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종류를 들고 있다.
assattho nigrodho pilakkho udumbaro kacchako kapitthano. Ime kho bhikkhave, mahārukkhā anubījā mahākāyā rukkhānaṃ ajjhāruhā, yehi rukkhā ajjhārūḷhā obhaggavibhaggā vipatitā senti.
“예를 들어 앗싸타 나무, 니그로다 나무, 필락카 나무, 우둠바라 나무, 갓차까 나무, 까삣타나 나무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여, 씨앗은 아주 작지만 몸집이 커다란 나무들이 모든 나무들을 덥치면 모든 나무들은 덥쳐져서 파손되어 무너져버린다.”
(Mahārukkhasutta -큰 나무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39, 전재성님역)
the glomerous fig tree(Udumbara)
기생나무의 종류가 모두 여섯 종류이다. 앗싸타 나무(assattha), 니그로다 나무(nigrodha), 필락카 나무(pilakkha), 우둠바라 나무(udumbara), 갓차까 나무(kacchaka), 까삣타나 나무(kapitthana) 이렇게 여섯 종이다. 이들 나무 모두에 대하여 무화과라 한다. 공통적으로 꽃이 보이지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말한다. 이런 나무중에 ‘우둠바라나무(udumbara)’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무화과 나무를 비유한 이유는
이들 여섯 종의 나무는 모두 무화과이다. 무화과가 꽃이 보이지 않는 특징도 있지만 이처럼 기생하여 다른 나무를 무너뜨리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왜 기생하여 성장하는 무화과나무를 언급하였을까?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어떤 훌륭한 가문의 아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더라도, 그는 바로 그러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나 그 보다 사악한 것에 의해서 파손되어 무너져 버린다.”
(Mahārukkhasutta -큰 나무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3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수행자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무너지는 수행승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고 있다. 무화과나무가 기생하여 주인나무를 목졸라 죽이는 것처럼 출가한 수행자가 욕망을 이겨 내지 못하였을 때 무너져 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베다 호신부 상징으로서 무화과
셋째, 베다 호신부(Vedic amulet)로서의 무화과이다. 베다문헌에 따르면 무화과나무는 호신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무화과 나무로 각종 호신부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이 상윳따니까야 ‘삼바훌라경(S4.21)’에서도 보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그 때 악마 빠삐만이 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어 큰 상투를 틀고, 영양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늙어서 서까래처럼 된 등을 구부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우담바라 나무로 된 지팡이를 들고, 수행승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1, 전재성님역)
경에서 ‘우담바라 나무로 된 지팡이’가 등장한다. 주석에 따르면 이 무화과 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욕심이 적은 고행자를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베다시대에 제식에 사용되는 각종 물건이나 제주, 제사의 국자, 부적 등이 무화과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빠알리문헌에 등장하는 우담바라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무화과 나무에 대한 세 가지 심볼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 세 가지 상징은 초기경전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무화과는 희유한 꽃으로서의 상징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생식물로서의 상징도 있고, 또 베다의 부적으로서의 상징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빠알리문헌에 등장하는 우담바라가 있다. 세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의 나무로서의 무화과
첫째, 깨달음의 나무로서의 무화과이다. 이는 과거불의 깨달음의 나무에 대한 것이다.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 경(D14)’에서 볼 수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Koṇāgamano bhikkhave,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udumbarassa mūle abhisambuddho.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신 꼬나가마나는 우둠바라 나무 아래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았다.
(Mahāpadānasutta -비유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4, 전재성님역)
과거칠불 중에 ‘꼬나가마나붓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꽃은 없지만 과일이 풍성하게 열리는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무화과 나무는 부처가 출현할 때 깨달음의 나무로서도 표현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평등주의로 언급된 무화과
둘째, 평등주의로 언급된 무화과이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태생의 구분없이 평등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깨달음 역시 계급과 관계 없이 평등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여로 가지 땔감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무화과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깐나깟탈라의 경(M90)’ 에 실려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Ettha kho pana nesāhaṃ mahārāja, na kiñci nānākaraṇaṃ vadāmi, yadidaṃ vimuttiyā vimuttiṃ. Seyyathāpi mahārāja, puriso sukkhaṃ sākakaṭṭhaṃ ādāya aggiṃ abhinibbatteyya, tejo pātukareyya. Atha aparo puriso sukkhaṃ sālakaṭṭhaṃ ādāya, aggiṃ abhinibbatteyya, tejo pātukareyya. Atha aparo puriso sukkhaṃ ambakaṭṭhaṃ ādāya aggiṃ abhinibbatteyya. Tejo pātukareyya. Atha aparo puriso sukkhaṃ udumbarakaṭṭhaṃ ādāya aggiṃ abhinibbatteyya tejo pātukareyya. Taṃ kiṃ maññasi mahārāja, siyā nu kho tesaṃ aggīnaṃ nānādāruto abhinibbattānaṃ kiñci nānākaraṇaṃ, acciyā vā acciṃ vaṇṇena vā vaṇṇaṃ, ābhāya vā ābhanti?
“대왕이여, 한사람의 해탈이 다른 사람의 해탈과 아무런 차별이 없듯이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바싹 마른 풀과 땔감을 구하여 불을 지핀다면, 불이 곧바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이 바싹 마른 쌀라나무를 구하여 불을 지핀다면, 불이 곧바로 나타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바싹 마른 망고나무를 구하여 불을 지핀다면, 불이 곧바로 나타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바싹 마른 무화과나무를 구하여 불을 지핀다면, 불이 곧바로 나타납니다.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 상이한 땔감에서 생겨난 불꽃들은 그 화염과 화염, 광채와 광채, 광명과 광명에서 차별이 있습니까?
(Kaṇṇakatthala sutta-깐나깟탈라의 경, 맛지마니까야 M90, 전재성님역)
경에서 해탈하는 것에 아무런 차별이 없음을 말한다. 태생이 바라문이라 하여 차별이 있고, 태생이 노예라 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아라한이 되어 부처님의 경험하였던 그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땔감의 비유를 들었다. 어떤 땔감나무를 써도 불의 화염과 광채와 광명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살라나무(sāla), 망고나무(amba), 무화과나무(udumbara)
땔감나무비유와 관련하여 세 가지 나무가 등장한다. 살라나무(sāla)와 망고나무(amba)와 무화과나무(udumbara)이다. 세 나무를 땔감으로 활용하였을 때 불꽃의 모양이나 광채나 밝기가 모두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 가지 나무를 예로 들었을까? 이에 대한 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추측할 수 있다.
무화과나무(udumbara, the glamorous fig tree)
살라나무의 꽃은 매우 화려하여 ‘열매보다 꽃’이라 볼 수 있다. 망고나무는 꽃과 열매가 있어서 실속이 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만 있는 것처럼 보여서 ‘꽃보다 열매’라 볼 수 있다. 이렇게 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 종류의 나무를 비유로 든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땔감을 사용해도
부처님은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서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라 하였다. 어떤 땔감을 써도 불의 특징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고급 전단향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나 야크똥으로 만든 땔감을 사용하나 불의 광채, 화염, 광명은 모두 똑 같다는 말이다. 이는 태생을 묻지말라는 것과 같다. 어느 계급에서도 깨달은 자가 나올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깐나깟탈라의 경(M90)’에서 “대왕이여, 정진에 의해서 격발되고 정근에 의해서 지핀 불꽃도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해탈이 다른 사람의 해탈과 아무런 차별이 없듯이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M90)”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꽃이 화려한 살라나무나 꽃이 없는 무화과나 땔감으로 사용하였을 때 불의 화염, 광채, 광명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이는 계급이나 태생에 관계 없이 깨달음의 내용이 같다는 것이다.
셋째, 실체없음의 원형으로서 무화과이다. 이는 숫따니빠따 뱀의 경(Sn1.1) 다섯 번째(stn5)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앞서 언급되어 있다.
“무화과를 먹는 자처럼”
영문판 위키백과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무화과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보았다. Udumbara를 키워드로 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 검색한 결과 앙굿따라니까야에도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세존]
“디가자누여, 세상에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수입은 적은데, 사치스런 생활을 도모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두고 무화과를 먹는 자처럼 이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재산을 허비한다고 말합니다.”
(비야가빳자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54, 전재성님역)
꼴리야국의 디가자누와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이는 재가자의 가르침이다. 디가자누가 세속인으로 살지만 현세와 미래의 이익이 되는 가르침을 설해 달라고 요청하자 부처님이 네 가지의 가르침을 설한다. 그 중에 하나가 올바른 생활의 갖춤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화과의 비유를 들고 있다.
경에서 재산을 허비하는 자에 대하여 “무화과를 먹는 자처럼”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무화과 나무를 흔들 때 한 번 치면 많은 무화과들이 떨어진다. 그가 무화과를 먹는 것보다 많은 무화과를 버린다.(Mrp.IV.138)”라고 설명되어 있다. 수입이 적음에도 사치와 낭비로 사는 자는 곤궁하게 살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실체 없는 우담바라를 찾는 한국불교
한국불교에서 지성의 전당이나 다름 없는 동국대에서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한다. 종에 피어 있는 꽃을 보고서 대학을 이끌어 가는 총장과 정각원을 책임지는 스님이 상서로운 징조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풀잠자리알에 불과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밝혀진 사실이다. 그래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지성의 요람에서 오피니언 리더들이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담바라는 무화과로서 전설의 꽃도 아니고 삼천년에 한번 피는 꽃도 아니다. 인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무이다. 또 초기경전에서도 우둠바라(udumbara)라는 명칭으로 도처에서 등장한다. 특히 숫따니빠따에서는 우둠바라에 대하여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는 가르침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다.(Yo nājjhagamā bhavesu sāraṃ vicīnaṃ pupphamīva udumbaresu, stn5)”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담바라꽃은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꽃이 열매에 숨겨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열매 밖으로 나올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특성이 결국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었다. 그래서 삼천년에 한번 우담바라가 피면 전륜성왕이 출현한다는 등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담바라신화는 대승경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실체없음에 대한 설명으로서 우담바라가 등장한다. 이는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은 실체도 없는 우담바라를 찾고 있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보니 풀잠자리알에 불과한 것을 우담바라라 한다. 심지어 십여년전 어느 절에서는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하여 전국에서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 커다란 불사를 하였다. 이른바 ‘우담바라마케팅’이다. 그런데 우담바라마케팅을 주도한 스님이 상습도박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담바라꽃은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말하는 것은 혹세무민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담바라꽃이 피었다 하여 절의 수입을 올리기 위한 마케팅으로 활용한다면 ‘대불자사기극’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가장 고층경전이라는 숫따니빠따에서는 후대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견한 것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경계의 시가 남겨진 것처럼 보인다.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stn5)
2014-10-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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