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괴로움이 뼈에 사무쳐야, 가장 이해하기 힘든 오취온고(五取蘊苦)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19. 10:20

 

 

괴로움이 뼈에 사무쳐야, 가장 이해하기 힘든 오취온고(五取蘊苦)

 

 

 

단풍시즌에

 

중추이지만 점차 가을이 깊어 간다. 거리의 가로수에는 점차 울긋불긋 물들어 가고 있다. 11월 중순이면 모두 지고 말 운명이지만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설악산 백담사 인근 마을에 살았다는 법우님에 따르면 단풍이 들 때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한번 추위가 닥쳤을 때라 한다. 서리가 내린다거나 기온이 영하 가까운 날씨로 떨어졌을 때 그 때부터 단풍지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요즘이 단풍철이다. 지금 설악산단풍이 절정이라 하니 지금부터 단풍시즌이 시작 되는 셈이다.

 

지난 주말 기분도 전환하고 다리에 힘도 기를 겸 삼성산에 올라 갔다. 관악산 줄기에 있는 삼성산 등반코스가 여러 곳이 있지만 관악역 입구의 삼성초등학교에서 시작 되는 코스가 있다.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서 곧바로 등산로로 진입할 수 있다. 흔히 전망대라 불리우는 곳을 지나 분기점에 이르렀는데 북쪽으로 가면 삼막사가 나오고 남쪽으로 가면 염불사가 나온다. 삼막사와 염불사는 안양권을 대표하는 절로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염불사

 

염불사로 향하였다. 염불사로 당도하니 늦은 오후라 그런지 약간은 어두운 듯 하다. 그러나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더구나 주변에는 이제 단풍이 시작 되어 울긋불긋 하다.

 

 

 

 

 

 

 

염불사는 종종 찾는 곳이다. 사는 곳과 가까이 있어서 삼막사, 청계사와 더불어 즐겨 찾는 절이다. 그런 염불사는 석벽에 새겨진 글씨처럼 참 좋은 절이다. 그것은 주변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절벽아래 불단의 변화를 보면

 

염불사를 처음 찾은 것은 2007년도의 일이다. 그 때 당시 소감문을 축대와 절벽 위에 세워진 도량, 안양시 삼성산 염불암(念佛庵)(2007-08-0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변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절벽아래의 불단이다.

 

염불사는 바위와 절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특히 대웅전 오르쪽에 절벽이 아름답다. 그런데 2007년과 달리 절벽아래 불단에는 새롭게 관세음보살상이 조성되어 있다. 이런 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07 8월 염불사

 

 

 

 

2014 10월 염불사

 

 

 

2007년 당시에는 지장보살상만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 새롭게 관세음보살상이 조성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이미 2007년 당시 사진을 보면 예견할 수 있다. 관세음보살살상이 들어설 자리에 설립을 예고하는 그림판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때 지금 염불사 절벽불단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관세음보살 등 세 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이런 것도 일종의 무상일 것이다. 이전에 없던 것이 새롭게 생겨 나는 것도 무상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끈 달아 오른 담쟁이덩굴

 

 

염불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 절벽바위이다. 그런데 10월 보는 염불사 절벽 바위에 불이 붙었다. 담쟁이덩굴이 빨갛게 후끈 달아 오른 듯이 보인다. 이곳 염불사에서는 이제 단풍이 절정이다.

 

 

 

 

 

 

 

 

 

 

 

 

 

 

 

 

 

 

 

 

 

 

 

 

 

 

철지난 화초는 폭격을 맞은 듯

 

 

가을은 무상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가을단풍이 멋 있다고는 하지만 철지난 화초는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에 새싹이 나서 꽃을 피워 냈을 때는 관심을 보이지만 서리가 내리는 듯 기온이 급강한 요즘에 보는 화초는 보기에 처참하다. 관청 화단에서 보는 작약의 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14-05-16

 

 

 

 

 

2014-10-18

 

 

 

오월에 핀 작약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개월이 지난 후 작약꽃은 온데 간데 없고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초토화 된 모습이다. 이렇게 계절의 변화로 무상을 느낀다.

 

자아기반의 인생무상

 

없던 것이 새로 생겨 나는 것도 무상이고,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도 무상이다. 모두 변화에 기인한다. 이런 변화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상하다고 한다. 그런 무상은 계절에 따른 자연무상만 있는 것일까?

 

사람이 늙어 가는 것도 무상이다. 젊은 시절과 비교하여 몰라 보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무상함을 느낀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거나 있는 것이 상실 되었을 때 역시 무상함을 느낀다. 이런 무상함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인생무상이라 한다.

 

자연무상과 인생무상에서 공통점이 있다. 일반사람들이 느끼는 무상은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무상함을 느껴도 내가 무상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기뻐도 내가 기쁘고 슬퍼도 내가 슬프듯이 변화에 따른 무상함 역시 내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범부가 느끼는 자연무상, 인생무상이다.

 

범부가 무상함을 느끼지만 왜 깨달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일까?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무상하다고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무상하다고 느끼지만 왜 아라한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자아에 있을 것이다.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일반사람이건 깨달은 자이건 무상함을 느끼는 것은 같다. 그러나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범부가 느끼는 무상함과 각자가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초전법륜경에는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고성제)가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 ariyasacca: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vyādhipi dukkho maraampi dukkha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 na labhati tampi dukkha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경이 초전법륜경이다. 이는 부처님의 최초설법으로서 사실상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의 뼈대와 같다. 코끼리의 발자국에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들어 가듯이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요약되어 있다. 이와 같은 초전법륜경의 위치는 대승에서 반야심경의 위치와도 같다.

 

초기불교의 정수 초전법륜경

 

반야심경을 대승경전의 정수라 하듯이 초전법륜경은 초기불교의 정수와 같다. 어떤 이는 반야심경을 제대로 알고 독송하면 감격에 벅차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초전법륜경을 제대로 이해하면 감격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초전법륜경을 모두 외운 바 있다.

 

반야심경을 한문으로 외워야 맛이 나듯이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어로 외우고 나니 더욱 더 감격하였다. 그런 초전법륜경에는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가 언급되어 있다. 특히 사성제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오취온고(五取蘊苦)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가장 먼저 파악 해야 하듯이 괴로움을 해격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즉 고성제이다.

 

고성제에서는 여러 가지 괴로움이 나열 되어 있다. 그 중에 가장 근본적인 괴로음이 생노병사이다. 그 다음으로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를 한자어로 애별리고(哀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라 한다. 또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였을 때 역시 괴로움을 느낀다. 이를 구부득고(求不得苦)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라 하였다. 이를 오음성고(五陰盛苦) 라 한다. 이렇게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다. 이 중에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이 오음성고이다.

 

오음성고에 대하여 오취온고(五取蘊苦)라고한다. 오취온이라는 말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우리 몸과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취온고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반사람들이 가장 괴로움을 느낄 때

 

일반사람들이 가장 괴로움을 느낄 때가 어느 경우일까? 아마 육체적 고통에 따른 괴로움을 것이다. 이는 괴로움 그 자체를 말한다. 다치거나 병이 들었을 때 겪는 병고를 말한다. 이런 병고 외에 사랑하는 것과 헤어질 때도 역시 괴로움을 겪는다. 이는 정신적 고통에 해당된다. 그런데 병고 등 육체적 고통을 제외한 대부분 고통은 사실상 정신적 고통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도 정신적 고통에 해당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을 때 역시 괴로움에 해당된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는 반드시 사람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니다. 사고나 질병이 생기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의 범주에 들어 가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역시 반드시 돈이나 재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저 바라만 보며 한숨을 지을 때 역시 구부득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부분 괴로움은 정신적 것에 속한다. 그런데 오취온고라니 이를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오취온고(五取蘊苦)는 무엇인가?

 

초기불교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오취온이다. 이를 pañcupādānakkhandhā라 하는데, 이 용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한 집착이라고 길게 번역하였다. 이는 pañcupādānakkhandhā‘pañca()+upādāna()+khandhā()’으로 분해 되어 설명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취온이라 한다. 그런데 이런 오취온이 괴로움이라 한다. 그래서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오취온고또는 오음성고라 한다.

 

범부들이 오취온고를 이해 하기 어렵다. 오취온고를 이해하려면 부처님의 근본교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범부들이 겪는 괴로움은 생노병사의 사고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이렇게 일곱 가지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범부들이 겪는 일곱 가지 괴로움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철저하게 자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 즉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하는 자아에 기반을 두는 괴로움을 말한다. 그래서 괴로워도 내가 괴로운 것이고, 즐거워도 내가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일반사람, 범부들은 결코 오취온고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 괴로움이 있는 줄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오취온고는 누가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아라한이 느끼는 괴로움이다. 이는 바위도 고통을 느낄까?  일체개고와 아라한의 깨달음(2012-09-080’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

 

오취온고는 아라한의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을 이해 해야 한다. 이는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으로 설명된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초기경전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1)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

2)고통 그 자체로 인한 괴로움

3) 범부가 느끼는 괴로움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S56.11)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1)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결국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

2) 변화에 따른 괴로움

3)흐름에 든 자가 느끼는 괴로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S56.11)

행고성(行苦性)

sakhāra-dukkhatā

1)본질적으로 오온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

2) 조건지어진 모든 것의 괴로움

3) 아라한이 느끼는 괴로움

1)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

 

2)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S22.59)

 

 

 

 

괴로움의 성질에 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통 그 자체를 뜻하는 고고성은 일반사람, 즉 범부들이 느끼는 괴로움을 말한다. 변화에 따른 괴로움으로 보는 괴고성은 흐름에 든 자, 예를 들어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무상을 통찰하여 수다원이 된 꼰단냐를 들 수 있다. 행고성은 아라한 만이 알 수 있는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는 형성되어진 모든 것에 대한 괴로움이다. 이를 잘못 이해면 책상도 괴로움을 느낀다라고 오해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아를 통찰한 아라한 만이 제대로 알 수 있는 괴로움이라 한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는데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점진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부터 무아를 설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무상을 설하고 나중에 무아를 설하였다. 이는 찬나의 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찬나는 부처님의 마부이었다. 부처님이 유성출가할 때 출가를 도왔던 부처님의 마부이었다. 이후 부처님 앞에 출가 하였는데 자만심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나의 부처님, 나의 가르침”이라 하면서 무례하고 악의적이어서 청정한 수행승들에게 욕지거리를 해대고 그들과 충돌한 수행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하여 “열반이 그의 눈앞에”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보면(2014-07-22)’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바 있다.

 

부처님의 마부출신이었던 찬나는 부처님이 열반하자 따돌림을 받았다. 출가한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까지 흐름에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런 찬나는 범부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범부찬나에게 장로들이 가르침을 준 것은 다음과 같다.

 

 

[장로들]

"벗이여, 찬나여,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하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감수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물은 무상하다."

 

(Channa sutta -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0, 전재성님역)

 

 

장로빅쿠들이 범부 찬나에게 가르침을 준 것은 무상에 대한 것이다. 처음부터 일체개고나 제법무아의 가르침을 주지 않은 것이다.

 

책상도 고통을 느낀다고?

 

이렇게 제행무상의 가르침 부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범부에게 있어서 오해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범부에게 처음부터 삼법인의 가르침을 편다면 범부는 책상도 괴로움을 느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abbe sa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ti : Srp.II.318에서 붓다고싸는 ‘모든 수행승들이 그를 가르치면서 왜 무상의 특징과 무아의 특징만을 말하고 괴로움의 특징은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묻고는 ‘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되면 이와 같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도 괴롭고 경지[果位]도 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상윳따3365번 각주, 전재성님)

 

 

무상의 진리도 모르는 범부에게 일체개고를 알려 주었을 때 ‘모든 것이 괴롭다’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도 괴롭다고 하였을 때 책상도 물질이기 때문에 ‘책상도 괴로움을 느낀다’라고 오해할 것이다. 심지어는 도를 얻는 것도 괴롭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범부에게는 무상과 무아의 특징만 말하고 괴로움의 특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라한은 어떤 괴로움을 느낄까?

 

찬나의 경에서와 같이 깨달음의 단계가 있다. 가장 먼저 무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상과 무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무상을 퉁찰하게 되면 예류자가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죽 그 방향으로 나아 가면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수행이 완성된다. 이를 아라한의 단계라 한다.

 

아라한이 되면 삼법인을 통찰하게 된다. 그래서 책상도 괴로움을 느낀다거나 도를 닦는 것도 괴로움이다라는 오해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청정한 삶을 살아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은 어떤 괴로움을 느끼게 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라한이라고 하면 완전한 해탈을 이룬 사람입니다. 저는 거룩한 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아라한은 어떻게 해서 도달하느냐. 일체를 괴롭다고 볼 때만 도달합니다.

 

괴로움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둑카둑카라 하는데, 괴롭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입니다. 한역으로 고고라 합니다.

 

그 다음에 괴고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위빠리나마둑카라 하는데,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가을에 낙엽이 지면 왠지 쓸쓸 하고 , 겨울에 추위가 닥치는 등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동물적인 차원에서는 아파서 느끼는 괴로움 밖에 못 느낍니다.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은 조금 단계가 높은 괴로움입니다. 사람만이 느끼는 것 입니다.

 

그 다음에 조금 더 높은 단계에서 느끼는 괴로움을 행고라 합니다. 상카라둑카라 하는데 일체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전부가 조건 지어졌습니다. 이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기도 바람도 물도 지수화풍 전부가 조건이 충족이 되면 생겨 났다가 사라집니다. 태풍도 우주도 생겨 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일체가 괴롭다고 하는 것은 우주 전체가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느꼈을 때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을 때 만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전재성박사, 정각원 토요법회 2012년 3월 24,

 

 

전재성박사의 법문에 따르면 고고성은 ‘동물적 차원’에서 느끼는 괴로움이고, 괴고성은 ‘사람들이 느끼는 괴로움’이라 한다. 그런데 행고성을 느끼는 것은 아라한이라 한다. 아라한이 되어야 행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괴로움이 뼈에 사무쳐야

 

일체개고라 하였을 때 우주전체가 괴로운 것인데, 이는 괴로움을 철저히 뼈에 사무치도록 느낀 아라한 이외에는 느낄 수 없는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왜 찬나에게 일체개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되리라고  본다.

 

 

 

2014-10-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