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왜 산천초목산하대지를 훼손하는가? 무정물도 비폭력과 자애의 대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1. 14:37

 

 

왜 산천초목산하대지를 훼손하는가? 무정물도 비폭력과 자애의 대상

 

 

 

최근 의미 있는 조사가 발표되었다. ‘불교사회연구소 3년마다 조사하여 발표한자료에 따르면 불자들의 신행 등 불교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발표 되었다. 발표 내용을 보면 한국의 불교는 그다지 자랑할 만 것이 못 된다.

 

불교문화재는 불교재산일까?

 

이번 발표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 불교문화재에 대하여 보통사람들이 갖는 인식에 대한 것이다.

 

 

전통사찰이 보유한 문화재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묻는 질문에 우리나라 국민 51.8%국민 전체의 문화재라고 응답했다. ‘불교계 고유 문화자산이라는 응답은 14.5%에 그쳤다.

 

(불교사회 여론조사…‘사찰 문화재관람료 징수’ 33.5% 찬성, 불교닷컴 2014-09-29)

 

 

불자들은 우리나라 문화재의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불교문화재에 대하여 불교재산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반국민들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국민들의 절반에 해당되는 51.5%는 국민 전체의 문화재라고 응답해 충격을 주고 있다. 반면 불교계 고유 문화자산이라는 응답은 고작 14.5%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앞으로 불교계가 문화재관리를 잘 못하면 국가관리로 바뀔 수 있음을 말한다. 절의 땅이라 하여 철조망을 치고 문을 만들어 문화재관람료라는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는 행위 역시 국민의 인식이 바뀌면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불교닷컴만 보도한 내용

 

교계신문사이트에서는 이번 불교사회연구소의 조사를 보도 하였다. 그러나 내용을 빠짐 없이 보도한 것은 아니다. 민감한 이슈는 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닷컴만은 보도 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응답자의 56.5%는 현 정권의 국정운영 능력에 대해 불만족이라고 했다. ‘잘하고 있다 9.1%뿐이었다. 종교별로는 종교없음(60.1%)의 불만이 가장 컸다. 이어 개신교(56%) 불교(52.9%) 가톨릭(50%) 순이었다.

 

(불교사회 여론조사…‘사찰 문화재관람료 징수’ 33.5% 찬성, 불교닷컴 2014-09-29)

 

 

오로지 불교닷컴에서만 보도 된 내용은 매우 민감한 이슈이다. 그것은 현정부의 신뢰도와 관련이 있다. 보도에 따르면 현정권의 국정운영능력에 대하여 잘하고 있다는 고작 9.1%이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반면 못하고 있다는 무려 56.5%로서 6배에 달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을까?

 

인터넷게시판에서는 불교사회연구소의 여론조사가 발표 되자 발칵 뒤집혔다. 그것은 기존 여론 조사의 내용과 엄청나게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매주 발표 되다 시피 하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정권의 국정운용능력은 50%가 넘었다. 그런데 고작 9.1%라 한다. 이런 조사 결과에 대하여 인터넷게시판의 어느 네티즌은 가장 정확한 여론조사 결과다라 하며 시중의 여론 조사방식에 거품이 끼여 있다고 하였다.

 

불자들은 10%정도만이 경전을

 

불교사회연구소의 조사를 보면 여로 모로 이웃종교와 비교하여 부족하다. 특히 불교만의 독특한 장점이라 볼 수 있는 명상마저 타종교에 비하여 훨씬 뒤져 있다. 경전도 마찬가지이다.

 

경전과 관련 하여 불자들은 역시 타종교인에 비하여 크게 밀린다. 불자들은 10명 가운데 1명 만이 평소 경전을 자주 읽는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개신교는 37.8%, 가톨릭의 경우 29.3%가 평소 경전을 자주 읽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불자들은 10%정도만이 경전을 자주 읽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나머지 90%는 경전을 거의 읽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도는 열심히 하는 편이라 한다. 조사 대상의 25.3%가 열심히 기도한다고 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종교에 비하면 역시 훨씬 뒤져 있다.

 

금강경만 경전인가?

 

불자들이 경전을 접한다고 하였을 때 대승경전일 것이다. 한국이 대승불교의 전통이기 때문에 불자들이 경전을 접한다고 하였을 때 그 경전은 아마도 천수경이나 금강경일 것이다.

 

초기불교가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불자들이 빠알리니까야와 같은 초기불교경전을 접하는 경우는 드믈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일까? 전재성박사의 정각원토요법회에 따르면 빠알리니까야가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년에 고작 수백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니까야를 아는 불자들은 드믈것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어느 노비구니 스님은 니까야가 뭐꼬?”라고 말 했을 정도라 한다.

 

불자들이 읽는 경전은 고작 천수경과 금강경 정도에 그친다. 이는 어느 절에 가도 법당에 비치 되어 있는 경전이 주로 천수경과 금강경만 보이기 때문이다. 또 불교TV사이트에서 스님들의 경전강좌를 보면 거의 대부분 금강경이다. 간혹 법화경이나 화엄경이 있지만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있어서 독송용 경전이라고 하면 금강경을 일컫는다.

 

경전에는 금강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오로지 금강경 위주이다. 그래서 불교교양대학에서는 금강경이 경전공부의 필수로 되어 있다. 십년전 불교교양대학을 통하여 불교에 입문하였을 당시에도 경전공부의 대상으로서 금강경을 배웠다.

 

금강경은 내용이 난해 하다. 한자로 되어 있는 원문과 이를 풀이해 놓은 우리말 번역을 읽어 보아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설명을 들어야 한다. 그런 금강경은 매우 얄팍한 경전이다. 불과 5249자에 지나지 않는 한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내용은 매우 심오하다. 여기서 심오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내용이 정말 심오한 경우도 있지만 연결이 잘 안 되는 듯 하여 심오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금강경을 모두 다 외웠다. 5249자를 모두 다 외우는데 한달 보름 걸렸다.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니까야를 보았다. 방대한 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소설읽듯이 읽어 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필요한 부분만 찾아 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본다. 그런데 니까야를 보면서 느낀 것은 금강경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니까야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올렸다. 그 중에 금강경 사구게, 니까야에도 있었네!(2011-09-18)’빠알리니까야로 금강경(金剛經)(2013-05-03)’이라는 제목의 글을 들 수 있다.

 

니까야의 여러 이야기를 간추려서 대승보살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편찬 된 것이 금강경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금강경은 부처님의 원음이라 볼 수 없다. 후대 누군가 필요에 따라 니까야의 구절을 차용하여 대승보살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편집해 놓은 해설서라 볼 수 있다.

 

초기경전은 틀림 없는 부처님 말씀

 

대승불교에서 시작하여 초기불교로 옮겨 왔다. 십년전 대승에서 시작 하였지만 현재는 초기불교경전 위주로 글을 쓰고 있다. 그것은 초기경전이 부처님의 원음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빠알리니까야가 그렇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를 마치 부처님처럼 모시고 있다. 비록 불단은 없지만 빠알리니까야가 불단과 불상 역할을 하고 있다.

 

매일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산다. 단지 글을 쓰기 위하여 그때 그때 열어 본다. 그날 그날의 느낌에 따라 글쓰기의 주제가 결정됨에 따라 그날의 느낌에 맞는 가르침을 열어 본다. 그러다 보니 이곳 저곳에 노랑 형광메모리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접하는 것은 삶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초기불교를 접하면 접할수록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틀림 없는 부처님말씀이라는 확신이다. 이렇게 확신이 드는 것은 초기경전의 일관성 때문이다. 어느 경전을 열어 보나 결론은 언제나 같기 때문이다. 다만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방편을 설하였으나 이는 받아 들이는 사람들의 근기에 따른 것이다.

 

? 팔만사천법문이 장광설이라고?

 

모든 사람의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듯이 받아 들이는 근기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팔만사천법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S11:3)”라고 요약된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에 대하여 장광설이라 말하는 이가 있다.

 

최근 불교닷컴에 K교수의 칼럼이 실렸다. 학자들은 스님들과 함께 불교계를 이끌어 가는 오피니언리더들이기 때문에 그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런데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에 대하여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가 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리할까? 게다가 84,000경 장광설(長廣舌)까지 있는데, 뭘 찾아다니는 것일까? (불교닷컴 2014-09-29)”라 하였다.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장광설이라 한 것이다.

 

장광설(長廣舌)’이란 무엇인가? 사전에 따르면 쓸데없이 번잡하고 길게 늘어놓는 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 되어 있다. K교수 말대로라면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대부분 쓸데 없는 말이란 뜻인가? K교수의 장광설 운운은 매우 경솔한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불자로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말이다. 가뜩이나 타종교에 비하여 경전을 보는 불자들이 현저 하게 낮다고 조사 되었는데, 장광설 운운한다면 더욱 더 경전을 멀리 하게 될지 모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가르침, 자애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런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이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다. 이런 법문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접하면 접할수록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 가르침을 적용해 보았을 때 틀림 없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르침에 신뢰가 생기면 경전을 있는 그대로 들이게 된다. 설령 경전에서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신비한 이야기가 나와도 그러려니하며 중립적 입장에서 받아 들이게 된다. 그럼에도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외에는 장광설이라 하여 내친다면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하여 모독하는 것이라 본다.

 

? 부처님이 임종하였다고?

 

부처님에 대한 모독이 하나 더 있다. K교수는 기고문에서 부처님은 임종에 즈음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무엇을 주먹에 쥐고 감추어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내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하라. (불교닷컴 2014-09-29)”라 하였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D16)를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K교수는 임종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부처님의 마지막 순간에 대하여 마치 일반사람이 죽는 것처럼 임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임종이라는 의미는 목숨이 끊어져 죽음에 이름이라고 국어 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죽음은 단지 목숨이 끊어져 죽은 것에 지나지 않다는 말인가?

 

K교수가 부처님의 마지막 순간에 대하여 임종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몰라서 그런 표현을 썼다고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알면서도 그런 표현을 썼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을 때 열반을 성취하라고 한다. 이를 유여열반이라 한다. 죽은 다음에는 완전한 열반(parinibbāna)’이라 하여 무여열반이라 한다. 이런 사실은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K교수는 왜 굳이 일반인들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임종이라는 말을 썼을까? 그것이 몹시 궁금하다.

 

만일 K교수가 빠리닙바나의 뜻을 몰라서 임종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면 스스로 무식을 폭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일 K교수가 빠리닙바나의 뜻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임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면 불교인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무엇 때문에 초기경전을 읽는가? 가장 큰 이유는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경전을 열어 본다. 그럴 때 마다 신기하게도 해법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고민하던 모든 것들이 모두 경전에 이미 해법이 나와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들이 모르고 살고 있었을 뿐 해답은 오래 전부터 경전에 있었다. 그런 경전이 수 천년 전승되어 오면서 지금 여기에서 접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은 문제의 연속이다. 삶의 과정에서 수 없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제는 시간이 지나가면 저절로 해결된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 누군가는 신을 찾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답답한 마음에 점을 보러 갈 것이다. 불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절에 가서 기도를 할 수도 있고 스님에게 상담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초기경전을 보아야 한다. 인류의 스승이자 스승중의 스승인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보면 해법이 제시 되어 있다. 초기경전에 모든 해법이 들어 있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답이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해법도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 아무 경전이나 열어 보아도 된다. 어느 곳을 열어 보든지 불과 몇 분도 안되어서 놀라운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를 인식론이라 하는지 모른다.

 

초기경전을 접하면 극적인 사고가 변화가 일어난다. 마치 죽느냐 사느냐로 고민하던 사람이 친구나 선배, 스승의 말 한마디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듯이, 풀리지 않는 문제도 경전만 열어 보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식의 변화이다.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뒤집어 엎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다. 이처럼 극적인 변화와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 내는 것이 경전읽기이다.

 

빠알리원문과 함께

 

매일 경전과 함께 살아 간다. 그러면서 경전을 근거로 하여 매일 삶의 흔적을 남긴다. 이때 가급적 빠알리원문을 참고한다.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원전을 참고 하면 그 의미가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빠알리어를 아는 것도 아니다. 빠알리어 문법을 아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전을 찾아 보며 의미를 파악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누군가는 주제넘는 짓이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오직 쓸뿐!”이다.

 

글을 쓰긴 쓰되 빠알리원문을 참조 하다 보면 잘못된 번역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또 애매모호하게 처리된 문구도 발견하게 된다. 또 과도한 의역도 보게 된다. 그런 한 예가 있다. 전재성박사의 자애의 경에서이다.

 

살아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

 

전재성박사가 번역한 자애의 경(Sn1.8)’에서 살아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Ye keci pāa bhūtatthi tasā vā thāvarā vā anavasesā)”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말이 동물이나 식물이거나라는 말이다. 이는 빠알리어 tasā thāvarā에 대하여 동물과 식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번역자의 번역은 다르다. 모두 약하거나 강하거나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빠알리원문을 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지칭 할 때 “pāesu tasathāvare”라는 정형구가 사용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이라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불살생계의 대상은 식물에게까지 확대 된다. 그러나 식물은 정신작용이 없다. 그래서 무정물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무정물은 중생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윤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movable, trembling’의 뜻을 가진 ‘tasa’에 대하여 동물로 번역하고, immovable; long-lasting’의 뜻을 가진 ‘thāvarā에 대하여 식물로 번역한 것은 지나친 것일까?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tasa’에 대하여 weak의 의미로서 약함의 뜻으로 번역하고, ‘thāvarā에 대하여 strong의 뜻으로 강함으로 번역 하였다. 이러다 보니 동물이 약한 것으로, 식물이 강한 것으로 비교 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Tasathāvara에 대하여  전재성박사가 동물과 식물로 번역한 것은 의역이다. 그렇다고 하여 틀린 번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빠알리어의 의미를 잘 살린 의역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타번역자의 번역은 빠알리어 원뜻과 동떨어진 직역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번역이 맞을까?

 

메일을 하나 받았는데

 

전재성박사의 번역에 따르면 식물도 불살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타번역자의 번역에 따르면 식물은 불살생의 대상에서 제외 된다. 하지만 빠알리원문을 읽어 보면 부처님의 불살생과 비폭력과 자애의 대상은 반드시 동물 등 유정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류(生類)를 뜻하는 빠나(pāa)를 사용하여 “pāesu(생명이 있는) tasathāvare(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라는 정형구가 사용된다. 이런 취지로 글을 올린 것이 식물도 불살생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식물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2014-09-30)’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올린 글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식물도 불살생의 대상이 되었을 때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이는 광범위하게 적용하였을 때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하였을 때 당연히 식물도 불살생의 대상, 비폭력의 대상, 자애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였을 때 대단히 무리가 있어 보인다. 정신작용이 없이 무정물에 불과한 식물에 대하여 불살생, 비폭력, 자애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말이 성립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일까 어느 법우님이 메일을 보내 왔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평소에 산책하듯 포스팅을 봅니다.

경전을 대할 때는 아무래도 경외심이 있어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쉽게 열지 못하지만

블로그는 그렇지 않아서 편한 마음가짐으로 들르게 됩니다.

댓글기능이 사라진 점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피드백이 안된다는 점 때문에

이렇게 생면부지하지만 도움이 될까 하고 메일을 보냅니다.

 

제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처에선 사미가 되기전에 계율에 관해 공부를 하게 됩니다.

해서는 안 될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식물에 관한 계율이 있습니다.

신도가 있는 앞에선 식물을 베거나 꺽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식물을 살아있는 것으로써 보기 때문에 그러한 계율이 생겼다고 합니다.

 

식물이나 계란등은 살아있지만 업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식물을 죽이거나 베도 이것이 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대상이 물질의 4대요소와 맛 색깔 냄새등의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

윤회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살아있는 대상으로써 업을 불러 일으킨다고 가정한다면

세존께서 그 말을 안하셨을 리 없습니다.

또 부처님께서 계율을 만드셨을 때도 씨앗종류나 과일등의 온전한 식물 자체를 거부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연꽃님 말씀대로 하면 살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카르마에 의해서 비구가 만약 살생이나 계율을 어겼다면 선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얻었다면 그 비구는 비구의 지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좌부에서는 계율을 어기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고 포살이나 자자, 동료 비구에게 참회 등등을 통해

계청정을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이러한데 식물이 살아있으므로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니 조금 더 알아보시고

수행처에서 뛰어난 비구들께 여쭈어 보시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비구들께서는 직접 위빠사나를 통해 이것이 업을 불러일으키는 지 스스로 아시니까요.

 

(M법우님)

 

 

법우님은 산책하듯이 글을 본다고 하였다. 가볍게 부담없이 본다는 뜻으로 받아 들인다. 이렇게 관심을 보여 주신 법우님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글이 길어지다 보니

 

요즘 올린 글들은 대체로 긴 글이다. 쓰다 보면 A4로 열 장이 기본이다. 그래서 처음 접하였거나 오래 전에 접한 사람들은 길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읽어 가다가 끝이 보이지 않으면 마구 아래로 스크롤한다고 한다. 특히 스마트폰으로 볼 때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아는 사람들은 글 길이를 줄이라고 충고한다.

 

글은 논리이다. 그리고 글은 메시지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는 마치 게송처럼 매우 짤막하게 요점만 전달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에서는 글이 길어질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갖가지 근거를 대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이 길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급적 10페이지 이내로 끝내려 노력한다. 인내할 수 있는 한계가 10페이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왜 산천초목산하대지를 훼손하는가?

 

글은 그 사람의 얼굴과 같다고 한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넷상에서는 오로지 올려진 글로서 밖에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에, 올려진 글이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글을 올려 주신 법우님의 글을 읽어 보면 깊이가 느껴진다.

 

법우님의 글에 따르면 식물에게도 불살생을 적용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 충고 하고 있다. 그래서 수행처에 가서 뛰어난 비구들께 여쭈어 보시는 것이 현명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지적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올린 글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혔다. ‘Tasathāvara’에 대하여 동물과 식물로 번역하였을 때 문제가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다른 번역자들은 약하거나 강한 것이라 하여 모두 피해 갔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불살생과 비폭력, 그리고 자애의 대상은 반드시 유정물에 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Tasathāvara’앞에 붙는 수식어 pāa‘life; breath; a living being, 生物, 有情, 生類, 生命의 뜻이라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살생과 비폭력, 그리고 자애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확대한다면 산과 바위와 같은 무정물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신작용의 여부에 따라 유정물과 무정물로 나뉜다. 무정물에는 초목과 같은 식물에부터 바위나 산과 같은 움직이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이 식물로 번역한 빠알리어 thāvara는 산천초목으로 확대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Thāvara의 뜻이 빠알리어 사전 PCED194에 따르면 ‘immovable; long-lasting’라고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movable, trembling’의 뜻을 가진 ‘tasa’는 유정물로, 그리고 ‘immovable; long-lasting’의 뜻을 가진 Thāvara는 무정물로 볼 수 있다.

 

산천초목산하대지는 무정물이다. 무정물의 특징은 정신작용이 없고 움직이지 않고 오래 지속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Thāvara는 ‘immovable; long-lasting’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무정물이 정신작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여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일까?

 

무정물도 비폭력과 자애의 대상

 

요즘 운전하다 보면 거침이 없다. 특히 수도권을 벗어나면 도로에 차량 구경하기가 힘들다. 이유는 도로를 잘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를 가든 마치 고속도로와 같은 국도가 곧게 뻗어 있어서 사통팔달이다. 이렇게 거미줄 처럼 되어 있는 도로에 차량을 보기가 힘들다. 도로를 너무 많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도로가 많을까? 도로에 차량 구경하기가 힘듦에도 도로가 많은 이유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건설사들 좋은 일만 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새로 만든 도로를 보면 곧게 뻗어 있다. 그래서 막히면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는다. 그러다 보니 국토가 온통 콘크리트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자연을 훼손해 가며 국토를 마구 파헤쳐도 되는 것일까?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아 사통팔달의 도로를 만들었을 때 이용하는 사람들은 매우 편하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탈이 난다. 사대강사업을 한다고 하여 강바닥을 마구 파헤치고 보를 만들었을 때 물이 썩어 들어 간다. 원자력발전소를 만든다고 하여 바닷물을 마구 끌어 쓰고 핵폐기물을 땅에 묻었을 때 환경을 오염시킨다. 말이 없고 움직이지 않는 무정물이라 하여 자연과 환경을 마구 훼손하였을 때 어떻게 될까? 반드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2014-10-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