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윤회는 있지만 삼계는 없다?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21. 15:08

 

윤회는 있지만 삼계는 없다?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성직자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절에 가면 각종기도로 넘쳐 난다. 법회라 이름 하여야 함에도 기도라 하는데 이런 기도는 관음재일 등 매달 정기적으로 열리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입시철 등 특별기도도 있다. 이처럼 성직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신도들의 무지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성직자들의 권위는 올라가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많이 아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신도들이 교리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본다거나 경전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할 때 성직자들은 대략난감할 수 있다. 특히 공부를 하지 않고 아상만 높아 권위를 내세우는 성직자일수록 그렇다.

 

국민들이 무지할수록

 

많이 아는 것을 반기 않는 사람들은 성직자뿐만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기득권층들 역시 국민들이 많이 아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현재의 질서가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는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이 좋을리 없다. 그래서 변혁을 요구하는 국민들에 대하여 불온시하고 도전세력으로 간주한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국민들은 무지할수록 좋다. 또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서 정치는 자신들에게 맡기고 가만 있으라라고 한다. 그러나 국민들이 가만 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은 국가를 대리한 정부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이다.

 

정치엔 개입했지만 대선엔 개입하지 않았다

 

최근 이상한 판결이 나왔다. 지난 대선당시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대하여 정치엔 개입했지만 대선엔 개입하지 않았다라는 판결문이다. 이런 판결을 두고 술을 먹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든가, “남의 집 담을 넘어 물건은 훔쳤지만 도둑질은 아니다등의 패러디가 유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판결이 나왔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현정권의 태동과 관계가 있다. 만일 법원에서 정치에도 개입하고 대선에도 개입하였다라는 판결이 내렸다면 어떻게 될까? 현정부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런 이유로 술은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식의 이상한 판결이 나온 것이다.

 

국가기관에서 선거개입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선거는 하나마나한 선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선거혁명에 따른 정권교체도 이끌어 낼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은 있을 수 없고 있어도 안되는 중대한 국가범죄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촛불을 들었나? 촛불문화제에 참여하고(2013-08-11)’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바 있다.

 

움직이지 마세요”“가만히 있으세요

 

성직자나 권력자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가만히 있으세요라는 식의 말이다. 마치 세월호침몰 당시 안내방송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더 위험합니다.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으세요라는 말과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들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가만히 있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식의 말이다.

 

성직자나 권력자들은 기득권자들로서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보수라는 말에 여러 뜻이 있을 수 있지만, 변화를 싫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현질서가 변화 없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성직나가 권력자이 변화를 반기지 않는 것도 보수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지켜야 하는 법()

 

우리나라 불자들은 열심히 기도한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럴 경우 스님에게 물어 보면 좋다. 그러나 스님도 명쾌하게 답을 하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초기경전을 열어 보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빠알리니까야를 말한다.

 

빠알리니까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헌법이 있어서 헌법조문대로 국가가 운영되듯이,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말씀은 빠알리니까에 가르침으로 존재한다. 그 가르침에 대하여 담마(Dhamma)라 하는데 한자어로 법()이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다름 아닌 법이다. 법으로 국가를 다스리듯이 부처님의 법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성립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자들이 반드시지켜야만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법을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

 

삼계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법에 대하여 좀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법을 무시하기 일쑤이다. 불교도 마찬가이이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이들이다. 그런 말 가운데 삼계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라 한다.

 

삼계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이 말씀 하신 불교의 우주관은 거짓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런 점을 염려해서 일까 회의론자들은 불교의 우주관에 대하여 부처님이 방편으로 말씀 하신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삼계는 실존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의 작용으로만 본다면 불교는 종교로서 성립되지 않는다. 이럴 경우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 해야 할 것이다.

 

타종교에서는 불교가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불교는 단지 철학일 뿐이라 한다. 이는 자신들의 신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불교는 철학일 뿐 종교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나 스님들은 불교에 대하여 철학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공통적으로 내생이나 윤회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가 내생이나 윤회에 대하여 언급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누군가 내생과 윤회가 있는지 증명해 주세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럴 경우 대략난감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학자들은 아예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하지 않은 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그대신 사성제나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불교철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현법열반론(Diṭṭhadhammanibbānavāda)

 

삼계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오로지 현세만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는 지금 여기만 의미만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오로지 지금 여기만 강조하면 현법열반론(Diṭṭhadhammanibbānavāda)’으로 흐르기 쉽다. 현법열반론이라 무엇인가?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의 되어 있다.

 

 

Santi, bhikkhave, eke samaabrāhmaā 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 sato sattassa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 paññapenti pañcahi vatthūhi.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현세열반론자로서 다섯 가지 근거를 통해서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62가지 사견에 속하는 현법열반론은 모두 다섯 가지이다. 현법열반론이라는 말은 ‘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라 하는데, 이는 diṭṭhadhamma+nibbāna+vādā’의 복합어이다. 여기서 현법이라는 말은 diṭṭhadhamma’의 번역로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법을 본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딧따담마는 지금 여기라는 뜻으로 영어로 ‘here and now’로 번역된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경우 현세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의 경우 지금 여기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라 하여 딧따담마에 대하여 지금 여기라 번역하였다.

 

누가 현법열반론자인가?

 

현세는  지금 여기가 더 확장된 개념이다. 지금 여기에서 이 몸과 가지고 살아 있는 상태를 현법 또는 현세로 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딧따담마의 번역어 현법이라는 말은 오로지 현실만 고려할 뿐 이전 생이나 내생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 회의론자들이 윤회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그런데 현법열반론에서 현법과 열반이라는 말이 함께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diṭṭhadhamma+nibbāna’라 한다. 이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바로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열반은 어떤 것일까? 이어지는 부처님 말씀은 다음과 같다.

 

 

Idha, bhikkhave, ekacco samao vā brāhmao vā evavādī hoti evadiṭṭhi – ‘‘ yato kho, bho, aya attā pañcahi kāmaguehi samappito samagībhūto paricāreti, ettāvatā kho, bho, aya attā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 patto hotī ’ ti. Ittheke sato sattassa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 paññapenti.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이러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이 문장은 현법열반론 다섯 가지 중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맛 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감을 갖거나 이성과의 보드라운 잠자리를 갖는 것 역시 현법열반론에 해당된다.

 

현법열반론의 특징은 자아(attā)’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즐거워도 내가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을 찾아 목숨을 건다. 마치 영화에서처럼 죽어도 좋아라며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에 몰두한다.

 

그런데 현번열반론은 사선정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정삼매에서 희열, 행복, 평온을 느끼는 것도 역시 현법열반론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누군가 오로지 현세에서 행복만을 말하며 선정삼매를 즐긴다면 현법열반론자라 볼 수 있다.

 

윤회를 부정하는 교수와 스님들

 

불교닷컴기사에 따르면 최근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업과 윤회를 부정하고 있다고 보도 하였다. 잇따라 출판 되는 책에 따르면 불교의 핵심은 윤회가 아니라 무아-연기라 주장하면서 업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를 말한다. 이에 몇 가지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불교의 고유정신은 무아와 연기이지 윤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불교는 고유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붓다를 신격화하는 등 힌두교화 되어 인도에서 멸망했다” (P교수)

 

2)

계속 변화하는 마음이 새로운 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 윤회 진행상 특징으로 '먼저 몸'과의 삶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그로 인해 전생과 금생이라는 단절된 삶인 것으로 간주될 뿐이지 마음을 중심으로 보면 삶의 과정을 통해 계속 변해가고 있는 것일 뿐” (S스님)

 

3)

부처가 말한 윤회는 삶을 지속하는 동안 과거 현재 미래의 업과 그 과보를 말하는 것이라며내세의 뜻을 포함한 윤회 개념은 <금강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S편집장)

 

(불자들 잇딴 ‘업·윤회’ 부정…왜? 불교닷컴 2014-02-05)

 

 

 

윤회를 부정하는 교수와 스님의 글을 보면 공통적으로 지금 여기와 현세를 강조한다. 그래서 아직 경험 해 보지 않은 내세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바뀌는 것으로 윤회를 설명한다. 이런 방식은 M스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M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이러한 삼천세계는 오직 인간의 한 순간 생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의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 씀씀이에 따라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에서 천상까지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다. 지옥이 지구 땅 속에 있다거나 천상세계가 지구 밖의 우주에 있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삼계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다, M스님, 불교닷컴 2014-09-13)

 

 

 

M스님은 삼계가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라고 하였다. 단지 고대인도에서 전승되어온 삼계설을 채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업보설을 설명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방편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삼계부정은 내세와 윤회의 부정

 

삼계를 부정하는 것은 내세를 부정하는 것이고 곧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업을 부정하는 것이고 곧 인과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하여 윤회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음이 바로 윤회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지극히 편하고 안정되어 있으면 천상으로 보고, 마음이 심란하여 성을 낸 상태라면 지옥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이 윤회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순간윤회만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M스님의 순간윤회론은 S스님의 윤회론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S스님은 계속 변화하는 마음이 새로운 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 윤회 진행상 특징으로 '먼저 몸'과의 삶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전 생을 기억할 수 없어서 전생과 금생이 단절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내생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두 스님의 주장을 보면 철저하게 현세론이다. 그 어디에도 내생이니 윤회이니 하는 말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오히려 내생과 윤회를 이야기하면 마치 경전을 맹신하거나 광신하는 듯이 말한다. 그러면서 오로지 현세만을 이야기 한다. 현세에 윤회와 삼계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틀림 없다!

 

불자들은 무엇에 의지하며 살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삼보이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함으로써 불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자들이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더구나 요즘 처럼 스승이 없는 시대에는 오로지 가르침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는 빠알리니까야이다.

 

빠알리니까야는 매우 방대하다.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법구경, 숫따니빠따 등을모아 놓으면 책장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마치 부처님을 모셔 놓은 듯하다. 불상만 없을 뿐 사실상 불단과도 역할을 한다. 이렇게 소중한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에 낙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대목은 표시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허용하는 것이 노랑색 형광메모리펜이다.

 

이렇게 경전을 열어 볼 때 마다 중요 구절에 노랑칠을 하다 보니 어느 곳을 열어도 노랑칠이 보인다. 특히 중요하다고 보여지는 곳은 덧칠되어 있다. 이렇게 방대한 경전을 접하다 보니 큰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초기경전에 대한 믿음이다.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림 없다는 확신이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가르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가르침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경전을 열어 보면 틀림 없이 거기에 해답이 있다.

 

설령 원하는 답이 아니라고 하여도 부처님의 무상, , 무아의 법문을 접하는 순간 이미 답을 얻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중하여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설령 그것이 회의론자들의 말대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보일지라도 모두 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틀림 없다!

 

단멸론적 무아-연기

 

불교에 대하여 많이 아는 학자들이나 스님들은 경전과 전혀 다른 말을 한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업과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음에도 이를 부정하며 단멸론적 무아-연기를 말할 때 특히 그렇다.

 

오로지 현세의 삶에만 포커스가 맞추면 내세이니 윤회이니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오로지 현세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의 교리서라 볼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 불교의 목적에 대하여 이고득락이라 하였을 것이다.

 

이고득락이라는 말은 현세에서 행복을 뜻한다. 기억이 내생으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현세에만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그래서일까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성철스님의 중도론의 전도사역할을 하는 있는 G스님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스님은업은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죄의식이다. 본질을 이해하는 순간 업은 없어지고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된다업은 실재가 아니라 허구이자 착각의 세계이다. 다른 종교는 원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불교는 업도 없고 죄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자들 잇딴 ‘업·윤회’ 부정…왜? 불교닷컴 2014-02-05)

 

 

조계종원로의원이기도 한 G스님은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고 있다. 업보론이 불교의 근간은 아니지만 세속적으로 정견임에도 불교는 업도 없고 죄도 없는 것이라 하여 부정하고 있다.

 

완전범죄에 성공하였어도

 

누군가 살인을 하였다.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사람을 죽인 것은 살인업에 해당된다. 그래서 붙잡히면 사회법으로 엄벌에 처해진다. 그렇다고 하여 죄업이 모두 사라지는 것일까? 누군가 살인을 하였는데 완전범죄에 성공하였다. 세상사람들 아무도 모르지만 자신만이 알고 있다. 이럴 경우 그가 받는 과보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Idha socati pecca socati,        이다 소짜띠 뻿짜 소짜띠
P
āpakārī ubhayattha socati,      빠빠까리 우바얏타 소짜띠
So socati so vihaññati          
소 소짜띠 소 위한냐띠
Disv
ā kamma kiliṭṭham-attano.     디스와 깜마 낄릿탐 앗따노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 (dhp15)

 

 

여기서 악행(Pāpa)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등 오계를 어기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행위는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이 행위(kamma: action)은 반드시 행위에 적합한 결과를 생산해 내고 만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Idha socati pecca socati)”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는 것은 죽을 때 선행을 하지 못하고 악행을 했다라고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완전범죄를 저질러 세상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할지라도 자신만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 까지 본다면 현세에서 과보를 받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과보를 한 번 더 받는 다고 하였다. 그것은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pecca socati)”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왜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라고 하였을까? 이는 업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저 세상은 내생을 뜻하기 때문에 내생을 볼 수는 없지만 임종순간에 그가 태어날 세계를 알기 때문이다. 마치 청정한 삶을 산 자가 자신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아 아라한 선언을 하듯이, 마찬가지로 중죄를 지은 자 역시 자신이 어느 곳에 태어날지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라고 하였다.

 

죄업을 지으면 두 곳에서 슬퍼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내세와 윤회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원로의원 G스님은 불교는 업도 없고 죄도 없는 것이라 한다.

 

업보는 있지만 지은 놈은 없다고?

 

G스님의 업설은 불자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하다. 분명히 죄를 저질렀음에도 죄를 저지른 자는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거나 정치에 개입하였으나 대선에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말을 연상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말이 나왔을까?

 

종종 접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아함경에 있는 제일공경(第一空經)이다. 제일공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有業報而無作者

업보는 있지마는 지은 놈은 없느니라

 

(제일공경, 아함경 355)

 

 

제일공경에 따르면 업보는 있지만 업보를 지은 자는 없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무아윤회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흔히 하는 질문 중에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는 말이 있다. 이런 질문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다. 그리고 악취나는질문이다. 왜 그런가? 유아윤회를 전제로 무아윤회의 모순을 지적하기 위하여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조건발생에 따라 식이 윤회

 

불교에서 윤회는 어떤 고정불변한 주체가 있어서 한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 가는 전변윤회가 아니다. 조건발생에 따라 식이 윤회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에 대하여 무엇이 윤회하는가? 스타트렉의 공간이동과 불교의 윤회(2014-02-1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왜 식이 윤회하는가? 이는 초기경에서 부처님이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Kassa nu kho nāma tva moghapurisa mayā eva dhamma desita ājānāsi? Nanu mayā moghapurisa anekapariyāyena paiccasamuppanna viññāa vutta aññatra paccayā natthi viññāassa sambhavoti.

 

Atha ca pana tva moghapurisa attanā duggahītena amhe ceva abbhācikkhasi, attānañca khaasi1, khahuñca apuñña pasavasi. Ta hi te moghapurisa bhavissati dīgharatta ahitāya dukkhāyāti.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해석하여 나를 잘못 대변하고, 스스로를 해치고 많은 해악을 쌓는다.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

 

(Mahātahāsa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님역)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의식(paiccasamuppanna viññāa)이 윤회함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조건발생(paiccasamuppanna)이라는 말이다.

 

왜 조건발생이 중요한가?

 

왜 조건발생이 중요한가? 그것은 다름아닌 연기법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성립 된다. 따라서 조건이 성립되지 않으면 결과로 발생되지 않는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없다. 윤회를 주체를 인정하는 순간 유아윤회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아윤회가 되려면 이 윤회해야 한다. 여기서 (:viññāa)’은 마음(:citta)이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이 윤회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마음이 윤회한다고 말하면 윤회의 주체가 인정되어 유아윤회가 되어 버린다. 무아이면서 윤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조건에 따라 발생되어야 한다. 이는 십이연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십이연기는 삼세양중인과를 잘 설명해 준다. 특히 열 두가지 연결 고리에서 식에 대한 부분을 보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Sakhārapaccayā viññāa. Viññāapaccayā nāmarūpa)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조건(paccayā)’이라는 말이 반드시 들어간다.

 

만일 십이연기에서 조건이 빠지면 십이연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라 하였을 때, “의식()을 조건(: paccayā)으로 명색()” 이렇게 인연과(因緣果)’로 설명된다. 이렇게 본다면 식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발생된 식(paiccasamuppanna viññāa)’이 윤회함을 알 수 있다.

 

막행막식하는 이유는?

 

이처럼 부처님은 조건발생하는 식이 윤회함을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한역아함경 제일공경에서는 무작자(無作者)이라 한다. ‘지은 업보는 있지만 지은 자가 없다(有業報而無作者)는 논리이다. 마치 음주운전사고를 낸 자가 음주운전을 하였지만 음주운전한 자는 없어서 무죄를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만일 이와 같은 유업보무작자와 같은 무아윤회의 논리대로 라면 인간은 모든 행위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없이 자행할 것이다. 그래서 막행막식하는지 모른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해야

 

빠알리니까야에서 무작자론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업보는 있지마는 지은 놈은 없느니라와 같은 말을 찾을 수 없다. 그대신 이런 말은 있다.

 

 

Kammasakkā māava,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isaraā. Kamma satte vibhajati yadida hīnappaītatāyāti.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

 

 

부처님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업으로부터 생겨난 존재임을 말한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출세간적 가르침과 세간적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양한다. 사성제와 팔정도와 같은 근본 가르침에서부터, 사념처와 같은 수행의 가르침, 그리고 자애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심지어 가정의 가르침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런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이 팔만사천법문이고 현재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빠알리니까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출세간적 가르침세간적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정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출세간적 정견은 팔정도의 정견을 말한다.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의 근본교리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세간적 정견은 무엇일까? 이는 업자성정견으로 설명된다.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를 말한다. 그래서 업과 업의 과보가 있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정견에는 크게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이 있다.

 

그런데 최근 일부학자들이나 스님들은 오로지 출세간적 정견만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불교의 고유정신은 무아와 연기이지 윤회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출세간적 정견만 인정할 뿐 세간적 정견은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았고 후대에 첨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에는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이 골고루 섞여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반드시 출가자들만의 것이 아님을 말한다. 세간의 불자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업자성정견을 설함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출세간적 정견만을 주장하였을 때

 

오로지 출세간적 정견만을 주장하였을 때 내생과 윤회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더구나 무아-연기라 하여 오로지 살아 있는 현세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만 의미를 두게 된다. 그 결과 윤회하는 것도 순간윤회로 보고 천상과 지옥 역시 지금 여기에서 마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 여기, 현세만을 강조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단멸론으로 귀결되고 만다. 무아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연기 하고 있고 더구나 무아이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역시 무너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적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학문불교가 되었을 때

 

출세간적 정견에 따라 오로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가르침만 중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불교는 철학화 되고 말 것이다. 또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대어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를 모두 걸러낸다면 근본가르침만 남게 되어 과학화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철학화와 과학화는 결국 학문불교로 정착 될 것이다. 불교가 단지 학문화 되었을 때 그 결말은 어떤 것일까? 인도에서 교훈을 알 수 있다.

 

인도불교사(경서원)에 따르면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한 때가 12세기 초라 한다. 이슬람의 침략으로 1203비크라마시라사원이 파괴 되면서 인도대륙에서 불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Vikramaśīla University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한 이유는 여럿 있다. 그 중에서도 불교의 학문화를 들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도에서 불교가 대중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였음을 말한다. 오로지 학문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최후 거점이 비크라마시라사원이었다.

 

윤회는 있지만 삼계는 없다?

 

오로지 출세간적 정견에 따라 사성제, 팔정도 등 근본불교만 강조하고 업과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여 내친다면 대중적 기반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불교에는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세간적 정견이 있음에도 오로지 출세간적 가르침만 신봉하였을 때 학문불교만 남게 될 것이다. 종교로서 불교는 존재하지 않고 불교철학과 같은 학문으로서 불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가 철학화 되고 학문화 되었을 때 더 이상 내세나 윤회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일까 일부 학자들이나 스님들은 삼계를 부정한다. 그러면서 삼천세계는 오직 인간의 한 순간 생각 속에 존재한다는 순간윤회를 말한다. 이는 윤회는 있지만 삼계는 없다라는 말과 같다. 이런 이야기는 정치엔 개입했지만 대선엔 개입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2014-09-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