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스님이 아니라 승가에 보시해야 하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17. 10:56

 

 

스님이 아니라 승가에 보시해야 하는 이유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 시켜 주는 것은?

 

정부를 마치 국가처럼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정권과 국가를 동일시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국가가 곧 정부이고 동시에 권력자처럼 인식한다. 하지만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정부는 단지 국가를 대리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부가 부정과 부패, 그리고 무능으로 점철 되어 있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매번 선거 때마다 정권교체가 일어난다. 정권은 바뀌지만 국가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 시켜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헌법이다. 국민의 의사를 물어 국민투표로 제정된 헌법을 말한다.

 

헌법은 모든 법보다 우선한다. 모든 법의 상위에 헌법이 있기 때문에 시시비비를가릴 때 위헌요소가 있는지에 대하여 헌법을 판단 근거로 한다. 이렇게 모든 법의 모태가 되고, 모든 법의 상위에 있고, 모든 법 보다 우선하는 것이 헌법이다. 이처럼 헌법에 기반한 것이 국가이기 때문에 반체제활동을 하면 크게 처벌 받는다.

 

헌법과도 같은 빠알리경전

 

종교에도 헌법과 같은 개념이 있다. 그것은 경전이다. 교주의 행적과 말씀을 담은 경전은 마치 헌법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느 종교이든지 경전에 쓰여 있는 말씀이 우선한다. 그래서 시시비비가 생겼을 때 판단근거로서 경전의 문구를 참조하고 있다.

 

불교에도 경전이 있다. 수 많은 불교전통이 있어서 수 많은 경전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부처님의 원음과 가장 가까운 것이 빠알리경전이다. 이는 3차 결집당시 공인된 것으로서 현재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

 

빠알리니까야는 불교의 헌법과도 같다. 헌법이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듯이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교의 정체성을 결정해 주고 있다. 사건이 발생하여 법조문을 열어 보듯이, 불교도들 역시 잘못이 발생하였을 때 이런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빠알리니까야를 열어 본다. 빠알리니까야에 모든 해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맞으면 받아 들이고 다르면 내쳐야

 

한국불교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 매우 많다. 심지어 완전히 거꾸로 해석하여 유통되기도 한다. 이는 마치 헌법과도 같은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에 해당된다. 대표적으로 상락아정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은 무상, , 무아를 설하였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후대에 무상--무아의 가르침을 완전히 뒤집어서 --를 주장하였다. 대승경전의 열반경에서  볼 수 있는  ---정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상락아정은 초기경전에서 수 없이 부정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은 다름 아닌 외도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어느 것이든지 초기경전을 판단 근거로 삼아야 한다. 마치 법조문이 위헌 요소가 있는지 살펴 보듯이 빠알리니까와 대조하여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맞으면 받아 들이고 다르거나 틀리면 내쳐야 할 것이다.

 

스님들이 아니라 상가에 귀의해야

 

불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빠알리니까야라 하였다. 그렇다면 불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닌 불자가 되는 조건을 말한다. 그 첫 번째 조건은 다름 아닌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다.

 

삼보에 귀의함으로서 누구나 불자가 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대하여 의지처로 삼고, 피난처로 삼음으로서 불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삼귀의조차 제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다.

 

한글삼귀의문에서 세 번째 항목인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가르침에 위배된다. 부처님이 분명하게 상가(승가)”를 의지처로 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헌법으로 말하면 헌법위반행위에 해당된다. 헌법을 위반하면 벌을 받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스리는 행위 역시 과보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에 승가가 있을까?

 

한국불교에서 승가가 있을까? 출가한 스님들의 공동체를 승가라 하는데, 삼귀의문에서 조차 언급 되고 있지 않다면 한국불교에 승가가 있기나 한 것일까?

 

한국불교에 사실상 승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재가의 승가가 있을 뿐이다. 비구계를 받는다고 하지만 계율을 거의 지키지 않기 때문에 승가가 성립되지 않는다. 스님들이 모여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살과 자자 등이 없기 때문에 한국불교에는 진정한 승가가 없다. 그래서일까 한글삼귀의문에서 승가라는 말 대신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였는지 모른다.

 

계행이 엉망인 이유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스님들이 다수라면 사실상 승가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수백가지나 되는 구족계는 포살과 자자를 행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마치 독각승처럼 따로 홀로 살며 지내는 스님들에는 의미가 없다.

 

한국불교에서 구족계는 단지 스님이 되었다는 통과의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모여 살지도 않고 포살과 자자도 없다면 굳이 수백가지에 달하는 구족계를 지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스님들의 계행이 엉망인 것 같다. 교계뉴스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뉴스에서도 도박, 폭행 등 출가자로서 도저히 해서도 안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모두가 부처님법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구족계를 받을 때

 

불자들은 부처님법대로 살아야 한다. 그 부처님법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빠알리니까야를 말한다. 빠알리경전에는 모든 것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표현도 부처님법에 위배 되는 것이다.

 

출가자들의 헌법과도 같은 율장에 따르면 삼귀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각각의 지방 각각의 나라에서 출가를 원하고 구족계를 원하는 자들을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줄 수 있다.’라고 허용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그대들은 이와 같이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주어야 한다.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깍게 하고 가사를 입히고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게 하고 수행승의 양발에 머리를 조아리게 한 뒤에 웅크려 앉히고 합장하게 이와 같이 말하라고 해야 한다.

 

고귀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고귀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고귀한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존귀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존귀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존귀한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12 삼귀의와 구족계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부처님당시 이것이 구족계를 주는 장면이다. 외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큰 특징은 머리를 깍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전통은 전세계 어느 불교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머리를 깍는 행위자체가 곧 출가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가사를 입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가사를 말한다. 이런 전통 역시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다음으로 구족계를 주는 수행승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행위이다. 왜 머리를 조아릴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구족계를 주는 수행승이 부처님 역할을 대신 하기 때문이다. 

 

승가공동체에 보시하면

 

구족계를 받을 때에는 삼귀의문을 낭송해야 한다. 그것도 한번이 아닌 세 번씩나 낭송한다. 그래서 두 번째는 두띠얌삐(Dutiyampi)라 하고, 세 번째는 따띠얌삐(Tatiyampi)라 한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율장대품 번역을 보면 두 번이나 세 번이라는 말 대신 존귀한거룩한이라는 말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빠알리삼귀의문을 보면 세 번째 항목에 대하여 상강 사라낭 가차미(Sangham saranam gacchami)”라 한다. 여기서 상가는 출가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런 공동체에 귀의함을 말한다. 왜 공동체에 귀의하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청정한 삶을 사는 성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또 성자가 되기 위하여 포살과 자자를 하며 구족계 등 계행을 지켜 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체가 있음으로 인하여 법의 바퀴가 끊임 없이 굴러 간다.

 

승가공동체에 보시하면 커다란 과보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라따나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Ye puggalā aṭṭhasata pasatthā          예 뿍갈라- 앗타사땅 빠삿타-
Catt
āri etāni yugāni honti,             짯따-리 에따-니 유가-니 혼띠
Te dakkhi
eyyā sugatassa sāvakā         떼 닥키네이야- 수가땃사 사-와까-

Etesu dinnāni mahapphalāni,             에떼수 딘나-니 마합팔라-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길로 가신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 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

참모임안에야 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Ratanasutta-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에 따르면 사쌍팔배(Cattāri etāni yugāni)’의 성자들에게 보시하면 커다란 과보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보시는 주로 먹을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승가에 보시하는 것은 사대필수품이라 하여 먹을 것, 의복, 와좌구 또는 거처, 의약품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 탁발에 의존하던 빅쿠들에게 가장 필요로 된 것이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상가(sagha)는 귀의의 대상

 

게송에서 참모임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상가(sagha)의 번역어이다. 그래서 참모임안에야 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Idampi saghe ratana paīta)”라 하였는데, 이는 상가가 불교도들에게 귀의의 대상이 됨을 말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상가 대신에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하여 스님을 귀의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스님의 재산

 

스님을 귀의의 대상으로 하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불자들은 스님에게 보시하려 할 것이다. 탁발의 전통이 있는 부처님 당시에는 주로 먹을 것을 보시하였지만 요즘은 돈으로 보시하려 할 것이다.

 

스님들이 돈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그 돈으로 음식을 사 먹을 것이다. 돈이 더 많이 모이면 불사를 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이름으로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의 속명으로 등재된 개인사찰이나 재단 등이 많다.

 

송담스님은 왜 조계종을 떠나려 할까?

 

최근 교계뉴스를 보면 송담스님의 탈종이 커다란 이슈로 부각하였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선사인 송담스님은 왜 조계종을 떠나려 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재산을 지켜내기 위한 방편이다.

 

송담스님은 인천용화선원의 재단법인 법보선원 이사장이다. 교계뉴스에 따르면 인천 용화사는 1950년 정금강심 보살이 창건한 용해사를 1955년 전강 선사(1898~1975)가 조실로 추대되면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법보선원 용화사는 1975 1 13일 전강 선사 열반 후 송담 스님이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81년 비구선원인 법보선원 불사, 1998년 용화선원 불교문화원용화어린이집 개원, 2000년 인제 용화선원 개원, 2001년 용화유치원 개원, 2010년 광주 용화선원을 개원했다.(불교닷컴 2014-09-15)”라고 전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천용화선원은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계종의 종헌종법에 따르면 스님들의 재산은 모두 조계종소속이 된다. 어느 스님이 당대에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가람을 만들고 재단을 만들어 그 가치가 엄청나게 크다고 하더라도 조계종 소속이라면 모두 종단의 재산으로 된다. 그러나 탈종을 하게 되면 종단으로 재산이 넘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재산을 지켜 내기 위한 탈종이 빈번히 발생한다. 그래서일까 현재 한국불교의 종단등록 현황을 보면 수백개에 달한다. 1960년대 정화운동에 따라 처음 종단이 생겨난 이래 분종을 거듭하여 지금은 듣도 보도 못한 수백개의 군소종단으로 난립되어 있다. 이들 종단 대부분이 재산을 지켜 내기 위한 것으로 보면 틀림 없다.

 

법응스님은 불교닷컴에서

 

인천용화선원의 송담스님의 탈종선언에 대하여 찬반 양론이 갈린다. 한국을 대표하는 선사에 대한 대우를 못한 것에 대한 질타의 의견도 많다. 반면 비판적 견해도 없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법응스님은 불교닷컴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조계종은 대내외적으로 독신 수행을 표방하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집단이다. 그래서 조계종의 승려가 된 이로서 탈종을 한다면 흔히 독신 수행을 하지 않는 종단으로 소속을 바꾸거나 환속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는 종단이 종지를 부정하는 행위를 일삼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그 정체성이 소멸되었을 경우일 것이다.

 

([기고] 송담 스님의 종과 종단의 과제, 법응스님 2014 09 15)

 

 

 

용화선원

 

 

법응스님은 송담스님의 탈종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탈종하여 새로운 종단을 만든다고 해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종교가 보수적 집단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보수본능

 

우리사회에서 가장 보수적 집단이 종교이다. 그래서 종교는 근본적으로 보수회귀적이다.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자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종교의 보수본능에 해당된다.

 

종교는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다. 한국불교에서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도 역시 보수본능이라 볼 수 있다. 주로 본래의 가르침에서 멀어졌을 때 발생한다.  이렇게 본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반대로 본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 가고자 한다. 마치 일을 하다 잘 안되면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같다.

 

한국불교에서는 종단이 수백개나 된다. 대부분 재산문제 등으로 탈종하여 성립된 것들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한다. 종단을 창립한 사람의 당대에는 교세가 유지될지 모르지만 교주가 죽고나면 소멸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과거의 군소종교의 역사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탈종의 문제점

 

이어서 법응스님은 다음과 같이 탈종의 문제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온갖 유사 종단이 난립하고 있다. 종단의 지도자급 승려들에겐 개인화와 조계종의 파편화를 막아야 하는 내재적 의무가 있다. 출가한 종도가 종단에 재산 등록을 거부하면서 불자들에게 어찌 시주의 복을 말하고 사회에 기부를 권장할 수 있는가? 어느 조직이든 분산, 분열되면 정체성과 동력을 상실하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이 교훈이다. 출가자들에게 부처님의 삶은 세세생생 따르고 익혀야 하는()’이다. 당신께서 탁발과 분소의로 평생을 살아가심으로써 출가자가 사사로이 재산을 가지거나 축적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가르침을 위대한 모범으로 남기셨다. 우리는 이 점을 바탕으로 해서 행동해야 마땅하며, 어려운 때 일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고] 송담 스님의 탈종과 종단의 과제, 법응스님 2014 09 15)

 

 

법응스님은 초심을 강조 하고 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초심을 강조하듯, 마찬가지로 처음 출가 하였을 때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면 문제가 풀릴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자는 것이다.

 

불자들이 보기에 출가자는 청정함과 무소유의 실천자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슬만 먹고 살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 사람처럼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보는 스님들은 욕망의 화신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출가자의 본분에 어긋나는 것이다. 탁발에 의존하여 살았던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스님들에게 소유가 일어나게 되었을까?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는?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게송이 있다. 그것은 로히니경이다.

 

 

로히니

 

 

(로히니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너는 잠이 들 때에도 잠을 깰 때에도

사문들을 말하는구나.

사문의 칭찬을 입에 달고 있구나.

얘야, 너는 출가 수행녀가 되겠구나.(271)

 

너는 사문에게 많은 양의 음식과 음료를 보시한다.

이제 로히니야, 너에게 묻겠는데

어째서 그토록 사문을 좋아하는지 말해보렴.(272)

 

그들은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게으르고

남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고,

갈망으로 가득하고 맛있는 것들을 찾는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그토록 사문을 좋아 하느냐?(273)

 

(로히니가 말하였다)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은 오랫동안 사문에 대하여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계행과, 지혜와, 정진에 대하여 찬탄하겠습니다.(274)

 

그들은 일하기를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훌륭한 일을 하며 욕망과 성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5)

 

그들은 세 가지 악의 뿌리를 남김없이 제거하고

청정한 행을 닦아 모든 악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6)

 

그들은 몸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말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생각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 합니다.(277)

 

그들은 티가 없고 진주조개처럼

안과 밖이 청정하고

깨끗한 특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8)

 

그들은 학식이 많고 가르침을 지니고

거룩하고,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목표와 담마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9)

 

또한 그들은 하나로 집중된 마음으로

마음챙김에 머뭅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0)

 

그들은 먼길을 행각하고, 마음챙김에 머물고

지혜롭고 산란하지 않으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1)

 

어떤 마을이든지 떠날 때는

어떤 것에라도 뒤돌아보지않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2)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3)

 

그들은 동전이나 금과 은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4)

 

그들은 여러 다른 가문에서, 다른 지역에서 왔지만

서로간에 친근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5)

 

“오, 사랑하는 로히니야, 너는 정말로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 집에서 태어났구나.

너는 부처님과 가르침에 신뢰심이 있고

승가에 참으로 깊이 존경하는구나.(286)

 

“아버지, 괴로움이 두렵고 달갑지않으시다면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십시요.

그리고 계행을 지키십시요.

그것이 아버지를 행복으로 이끌 것입니다.(288)

 

“나도 그처럼 훌륭하신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겠다. 그리고 계행을 지키겠다.

그것은 나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다.(289)

 

(로히니경, 테리가타 271~289, 일아스님역)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어린 소녀 로히니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 여러 가지 사문을 좋아 하는 이유를 말하였다. 그 중에 ‘조리된 음식만을 탁발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축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출가의 목적은 무엇인가?

 

출가자는 무소유자라 볼 수 있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다는 것은 모두 버렸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모형제도 버리고 세상도 버리고, 심지어 버려야 겠다는 마음까지 버린 자가 출가한 자이다. 그럼에도 금과 은을 받아 재산을 축적한다면 더 이상 출가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다면 출가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초기경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나타난다.

 

 

그는 오래지 않아 양가의 자제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현세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다. ”

 

 

이정형구는 무엇을 말하는가? 출가의 목적은 다름 아닌 청정한 삶의 실현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소유로 살아 가야 한다. 무소유는 청정한 삶의 가장 근본이기 때문이다. 왜 부처님 제자들이 탁발에 의존하며 살아 가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스님에게 금은을 보시하였을 때

 

무소유로 청정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 출가의 목적이다. 이렇게 청정한 삶을 사는 자들이 모인 공동체가 상가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상가공동체에 귀의한다. 그런데 상가에 귀의하지 않고 스님에게 귀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스님에게 보시하려 할 것이다. 탁발음식은 물론 옷, 심지어 금과 은도 보시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더 이상 무소유의 삶이 아니다. 소유하는 삶이라면 결코 청정한 삶을 실현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따미의 가사보시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가사와 관련되어 부처님과 부처님의 양모이었던 고따미빅쿠니와의 대화가 있다. 경에 따르면 고따미빅쿠니는 부처님에게 손수 지은 가사를 보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존이시여, 이 한 벌의 새 법복은 특별히 세존을 위하여 제가 손수 짜고 손수 기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를 위하여 이것을 영납하시고, 가엾이 여겨 받아주십시오.(M142)”라고 말한다. 고따미는 왜 이렇게 말하였을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Pps.V.66에 따르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나의 아들이 29년 동안, 재가에서 살 때에 과자나 과일조차도 손수 주지 못했다. 이제 그에게 의복과 가사를 선물하리라그러나 손으로 직접 만든 것만이 나를 기쁘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만든 것은 아니지만 매일 유모들과 함께 베틀 짜는 곳으로 가서 , 베틀을 함께 짜고 옷을 만들었다.

 

(맛지마니까야 2516번 각주, 전재성님)

 

 

부처님의 양모이었던 고따미는 손수 가사를 골라 보시하고자 하였다. 이는 부처님에게 직접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이에 부처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Eva vutte bhagavā mahāpajāpati gotami etadavoca: sage gotamī dehi, saghe te dinna aha ceva pūjito bhavissāmi sagho cā'ti.

 

[세존]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그대가 승단에 보시할 때에 곧 나와 승단을 공양하는 것이 됩니다.

 

(Dakkhiāvibhagasutta-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2,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의 양어머니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부처님에게 가사를 보시하려 하자 부처님은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sage gotamī dehi)” 라고 하였다. 개인적인 보시는 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고따미의 보시를 받지 않은 이유

 

부처님은 왜 고따미의 보시를 받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sage gotamī dehi : Pps.V.67에 따르면, 부처님은 보시가 승단에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왜냐하면 보시의 의도가 승단과 자신 모두에게 행해지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합된 보시의 의도가 그녀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부처님은 후대의 세대가 승단의 존경을 표하도록 고무시키기 위해, 그리고 승단에 네 가지 필수품을 보시하게 함으로써 가르침이 오래 가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2517번 각주, 전재성님)

 

 

부처님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것은 가르침이 오래 존속되기 위해서이다. 만일 스님들 개인에게 보시가 이루어진다면 승가의 존재이유가 상실 될 것이다. 승가가 존재 하지 않게 되면 머지 않아 가르침도 소멸되고 말 것이다. 이런 점을 염려 하여 부처님은 이전 양어머니 고따미빅쿠니의 가사보시를 받지 않은 것이다. 대신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sage gotamī dehi)”라고 말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래 전승하려면

 

승가가 있어야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가르침이 널리 전파 될 수 있다. 만일 승가가 없다면 개별적인 스님들만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개별적인 스님들이 죽고 난다음에는 가르침이 전달 된다는 보장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는 스님들 개별에게 해서는 안된다.

 

스님들에게 탁발 등 필수품을 제외하고 금이나 은등을 스님들에게 개별 보시하는 행위는 승가를 파괴 하게 되고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 이상 전승되지 않게 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이처럼 부처님이 출가한 스님들에게 보시를 금하고 대신에 승가에 보시하도록 하였음에도 아직까지 스님들이 자발적으로 승단에 보시하십시요라고 하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가지고 있는 재산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 하여 탈종을 하고 새로운 종단을 만들어 교주행세를 하려 한다.

 

승가가 존속하지 않았을 때

 

삼귀의 문에서 세 번째항은 상강 사라낭 가치미이다. 이는 명백하게 승가공동체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바꾸었을 때 더 이상 승가가 존속히지 않음을 말한다.

 

승가가 존속하지 않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머지 않아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부처님이 왜 스님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승가에 귀의 하고 피난처로 삼으라고 하였는지에 대하여 알 것 같다.

 

 

 

2014-09-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