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한국테라와다불교도 한국불교를 따라가나? 스님들을 승보로 보았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16. 10:05

 

 

한국테라와다불교도 한국불교를 따라가나? 스님들을 승보로 보았을 때

 

 

 

발끈 하였을 때

 

장문의 메일을 받았다. 올린 글에 대한 댓글을 금지시켜 놓았으므로 메일로만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일을 준 분은 이전에 종종 댓글을 주었기 때문에 필명은 익숙하다. 그런데 이번 메일을 보니 평소와 다르게 불만이 가득하다. 올린 글에 대한 반론형식으로서 발끈하여메일을 보낸 것 같다.

 

사람이 발끈 할 때가 있다. ‘발끈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소한 일에 왈칵 성을 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 발끈하다고 하였을 때 문제 같지 않은 문제로 성을 내는 것과 같다. 또 발끈한 경우는 권위의 손상을 입었을 때이다.

 

메일의 주된 내용은 자신이 다니는 절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이다. 이전에 올린 글 인간으로부터 해코지 당하지 않으려면, 수호경 아따나띠야의 경(D32)에서 한국테라와다불교 B선원의 삼귀의문을 문제 삼은 것에 대한 반론이다.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표현에 대하여

 

이전의 글에서 B선원의 “상강 사라낭 가차미(Sangham saranam gacchami)”에 대하여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구절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주장에 발끈 하였는지 H님의 메일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거룩한 스님들은 수다원이상의 성자스님들을 말하며,

스님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스님들(춮가수행자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그릇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B선원,  H)

 

 

H님에 따르면 상강 사라낭 가차미에 대하여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스님들은 수다원 이상의 성자를 뜻하기 때문에, 삼귀의문에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표현은 적절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반론을 펼친 법우님은 충고의 글도 남겼다. 함부로 이름을 거론 하며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공덕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글은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바람일 뿐입니다. 공덕을 짓는다고 생각하면서 고생만 하고 있는 글이 되기 때문입니다.”라며 충고하고 있다.

 

B선원의 빠알리삼귀의문을 보면

 

B선원의 홈페이지에는 테라와다불교 삼귀의문이 올려져 있다. 빠알리어와 한글번역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스님 : 야마항 와다미 땅와데타 (Yamaham vadami, tam vadetha)
내 말을 따라 하십시요.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쌈 붓다싸 (3)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붓당 사라낭 가차미

(Buddham saranam gacchami)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망 사라낭 가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강 사라낭 가차미

(Sangham saranam gacchami)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두띠얌삐 붓당 사라낭 가차미 (Dutiyampi buddham saranam gacchami)
두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두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Dutiyampi dhammam saranam gacchami)
두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두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Dutiyampi sangham saranam gacchami)
두 번째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따띠얌삐 붓당 사라낭 가차미 (Tatiyampi buddham saranam gacchami)
세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따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Tatiyampi dhammam saranam gacchami)
세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따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Tatiyampi sangham saranam gacchami)
세 번째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스님 : 티사라나-가마낭 니틴당 (Tisarana-gamanam nitthitam)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귀의하겠습니까

 

수행자 : 아마 반테 (Ama bhante)
네 그렇습니다, 스님.

 

(한국테라와다불교 B선원 예불문)

 

 

 

Bo-Tree

 

 

예불문을 보면 빅쿠와 신도들과의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다. 다만 한국실정에 맞추어 빅쿠를 스님으로 호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세번 한다는 빠알리어 삼귀의문을 보면 상강 사라낭 가차미에 대하여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마치 한국불교의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연상하게 한다.

 

상가를 스님들로 바꾸었을 때 문제점 네 가지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구절은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 가장 최근에 올린 글이 한글 삼귀의문(三歸依文) 문제점 가지(2013-04-30)’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에서 상가를 스님들로 바꾸었을 때 문제점을 네 가지로 지적하였다. 그 네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승가의 존속이유가 없어진다

둘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자자와 포살이 있을 수 없다

셋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에게 보시하게 된다

넷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표현을 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승보는 스님들이 아니라 스님들의 공동체인 상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자들은 스님들에게 귀의 하는 것이 아니라 승가공동체인 상가에 귀의 해야 한다.

 

혹시 한국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메일을 주신 법우님에게 한국테라와다불교 B선원의 삼귀의문에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가 어떤 경전에 근거하는지에 대하여 역으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경전적 근거를 밝히지 못한다.

 

B선원에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여 빅쿠를 승보로 보는 현상에 대하여 이해 할 수 없다. 승보는 상가가 분명함에도 개인의 의미가 강한 스님을 승보로 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혹시 한국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일까?

 

세계적인 불교사이트에서도

 

Sangham saranam gacchami’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다. 세계적인 불교사이트인 붓다네트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Buddham saranam gacchami
I go to the Buddha for refuge

 

Dhammam saranam gacchami
I go to the Dhamma for refuge

 

Sangham saranam gacchami
I go to the Sangha for refuge.

 

(Buddhha, Dhamma, Sangha, 붓다네트)

 

 

붓다네트에 따르면 Sangham saranam gacchami”에 대하여 분명하게 상가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I go to the Sangha for refuge”라 되어 있는데, 이는 나는 상가를 피난처로 하겠습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귀의문에서 Sangha’는 스님들(거룩한 스님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빅쿠들의 공동체를 뜻하는 상가임이 틀림 없다. 그런 공동체의 특징은 단지 빅쿠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포살자자를 행하며 청정한 삶을 꾸려 가는 수행자들의 공동체임을 말한다.

 

상가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보면

 

상가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간략하게 ‘[m.] a multitude(다수); an assemblage(모임); the Buddhist clergy(불교도 성직자)’라 소개 되어 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Saṅgha

,[fr. sa+h; lit. “comprising.” The quâsi pop. etym. at VvA.233 is “diṭṭhi-sīla-sāmaññena saghāabhāvena sagha”]

 

1. multitude, assemblage Miln.403 (kāka°); J.I,52 (sakua°); Sn.589 (ñāti°); 680 (deva°); D.III,23 (miga°); Vv 55 (accharā°=samūha VvA.37). bhikkhu° an assembly of Buddhist priests A.I,56, etc.; D.I,1, etc.; S.I,236; Sum I.230, 280; Vin.I,16; II,147; bhikkhunī° an assembly of nuns S.V,360; Vin.I,140; sāvaka° an assembly of disciples A.I,208; D.II,93; S.I,220; PvA.195, etc.; samaa° an assembly of ascetics Sn.550. –

 

2. the Order, the priesthood, the clergy, the Buddhist church A.I,68, 123, etc.; D.I,2, etc.; III,102, 126, 193, 246; S.IV,270 sq.; Sn.227, etc.; J.II,147, etc.; Dhs.1004; It.11, 12, 88; Vin.I,102, 326; II,164, etc. ‹-›

 

3. a larger assemblage, a community A.II,55=Sv.400; M.I,231 (cp. gaa). -- on the formula Buddha, Dhamma, Sngha see dhamma C 2.

 

(Sagha, 빠알리사전 PCED194)

 

 

상가는 문자적으로 구성하는 것(comprising)”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VvA.233에 따르면 “diṭṭhi-sīla-sāmaññena saghāabhāvena sagha”뜻이라 한다.

 

사전에 따르면 상가에 대하여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1)a multitude(다수), an assemblage(모임)

2)the Order(질서), the priesthood(성직), the clergy(성직자들), the Buddhist church(불교도 사원)

3)a larger assemblage(큰 모임), a community(공동체)

 

 

이렇게 세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항을 보면 단지 수행자들의 모임을 상가라하고 있다. 두 번째 항을 보면 교단을 갖춘 성직자로서의 모임을 상가로 보고 있다. 세 번째 항을 보면 큰 모임을 말하는데 이는 공동체로서의 상가를 말한다.

 

어떻게 청정한 삶이 실현 되는가?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을 승보로 보고 있다. 그래서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법회에서 한글삼귀의문이 낭송된다. 이렇게 승보가 스님들로 한정된다면 한국불교에서 승가는 있기나 한 것일까?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은 있지만 승가는 보이지 않는다. 스님들이 대부분 토굴이나 개인 사찰 등에서 개인적 생활을 하고 있을 뿐 공동체생활을 하는 경우는 드믈기 때문이다.

 

승가의 특징은 공동체생활이다. 빅쿠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청정한 삶을 실현 할 것인가? 그것은 계율을 지킴으로서 가능하다. 수백개에 달하는 구족계를 지키며 공동체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청정한 삶의 실현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아닌 포살과 자자로서 실현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보름에 한번 열리는 포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Eka samaya bhagavā sāvatthiya viharati pubbārāme migāramātupāsāde mahatā bhikkhusaghena saddhi pañcamattehi bhikkhusatehi sabbeheva arahantehi.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ā tadahuposathe paṇṇarase pavāraāya bhikkhusagharivuto ajjhokāse nisinno hoti.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뿝바라마에 있는 미가라마뚜 강당에 모두가 거룩한 님들인 오백 명의 많은 수행승 무리와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보름날인 포살일에 참회의 모임을 위하여 바깥에서 수행승의 무리에 둘러싸여 앉아 계셨다.

 

(Pavāraasutta-참회의 모임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8.7, 전재성님역)

 

 

포살은 우뽀사타(:uposatha)’의 번역어이다. 각주에 따르면, 고대인도의 역법에 따르면, 인도의 일 년은 삼계절 -겨울, 여름, 우기-로 나뉘며, 각계절은 4개월씩 계속된다. 4개월은 8개의 보름기간으로 나뉘고 세 번째와 일곱 번째는 14일로 구성되고 나머지는 15일로 구성된다. 보름달이거나 신월이거나 반달의 날이 특별히 길조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불교에서는 이런날에 포살을 행한다. 이처럼 보름날과 신월에는 수행승들이 계본(戒本)을 외우고 일반 신도들은 설법을 듣거나 수행을 하기 위해 승원을 방문한다.

 

포살은 어떻게 시행 되었을까?

 

어느 조직이든지 법도를 필요로 한다. 특히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부적으로 규정이 강화된다. 부처님의 교단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교세가 커질수록 갖가지 규정을 만들었다. 이런 규정은 필요에 따라 그 때 그 때 제정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외부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포살은 어떤 연유로 시작되었을까? 율장대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 때 마가다 국의 왕 쎄니야 빔비싸라는 홀로 떨어져 명상을 하다가 이와 같이 마음속에 생각이 일어났다.

 

[빔비싸라]

지금 이교도인 유행자들은 보름기간 중에 제14, 15일 그리고 제8일에 함께 모여 가르침을 설한다.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 왔다가 이교도의 유행자들에게 호감을 얻고 믿음을 얻는다. 그래서 이교도의 유행자들은 신도를 얻는다. 존자들도 보름기간 중에 제14, 15일 그리고 제8일에 함께 모이면 어떨까?’

 

(율장대품, 2장 포살의 다발, 포살의 인연, 전재성님역)

 

 

불교에서 포살을 하게 된 동기가 마가다국왕의 권유로 시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포살을 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저 함께 모이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비난이 일었다. 14, 15일 그리고 제8일에 함께 모이긴 모였지만 경에 따르면 벙어리 돼지처럼 말없이 있기만 한단 말인가?”라고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에 부처님은 설법을 허용하였다.

 

이후 부처님께서 나는 수행승들을 위하여 학습계율을 시설하였는데, 그들을 위하여 의무계율로서 송출하는 것을 허용하여, 그것이 그들의 포살갈마가 되게 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으로 인연이 되어 포살의 전통이 시작 된 것이다.

 

일년에 한번은 공개참회를 하고

 

빅쿠들이 계본을 외운다는 것은 다름아닌 비구계 등 계율을 송창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보름에 한번씩 모여서 참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더구나 일년에 한번은 공개적으로 참회의 시간을 갖는데 이를 자자(自恣: pavāraā)’라 한다.

 

자자의 경우 초기경에 잘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부처님도 자자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초기경에서 부처님이 자 수행승들이여, 지금 그대들은 마음 편히 말하라. 그대들이 볼 때 내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있는가? (S8.7)라고 묻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허물이 있을 때 이를 누군가 지적하면 이를 뉘우치고 참회 하는 것이다. 이런 포살과 자자는 공동체생활을 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왜 스님들의 계행이 엉망인지

 

포살과 자자를 하는 근본적인 목적인 무엇일까? 그것은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자신을 경책하여야 한다. 그래서 비구계 등 학습계율(빠띠목카)을 보름마다 낭송해야 한다. 학습계율과 관련하여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에서는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부처님의 제자는 의무계율(빠띠목카)을 수호하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식카빠다니)을 받아 배워야 한다(D2)”고 하였다. 여기서 학습계율이란  의무계율을 포함하여 사소한 계율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계율을 말한다.

 

학습계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여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빅쿠들이 개별적으로 산다면 계율이 지켜질까? 불행하게도 한국불교에서는 대부분 스님들이 개별적으로 살고 있다. 대부분 나홀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보름에 한번씩 학습계율을 낭송해야 하는 포살과 안거가 끝날 때 공개참회와 같은 자자가 보이지 않는다. 비구계를 받지만 나홀로 살기 때문에 무용지물이 된다. 왜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계행이 엉망인지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독각승처럼 나홀로 사는 한국불교에서

 

한국불교의 삼귀의문에는 스님들이 승보로 되어 있다. 그래서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가 아니라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가 된다. 이렇게 개별적인 스님들이 승보가 된다는 것은 사실상 한국불교에는 승가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스님들이 모여서 공동체생활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살과 자자는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모여 산다고 하여 출가공동체인 승가로 볼 수 있을까? 설령 스님들이 모여 산다고 해도 포살과 자자가 없다면 이를 승가공동체로 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승가공동체는 스님들이 모여 살며 보름마다 포살을 행하고 안거가 끝날 때 마다 공개참회를 하는 자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승가공동체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독각승처럼 나홀로 사는 한국불교에서 사실상 승가는 없다고 볼 수 있다.

 

한국테라와다불교도 한국불교를 따라가나?

 

모여 살지도 않고 포살과 자자도 없다면 승가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럴 경우 승가가 승보로 될 수 없을 것이다. 왜 한국불교의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는 말 대신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바뀌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되리라 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도 한국불교를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빠알리삼귀의문 상강 사라낭 가차미에 대하여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출가한 빅쿠만이 상가의 일원일까?

 

불자들에게 귀의의 대상은 부처님(Buddha0과 가르침(Dhamma)과 상가(Sagha)이다. 여기서 상가는 거룩한 상가를 말한다. 성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출가한 빅쿠만이 상가의 일원으로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부처님의 제자라 볼 수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의 제자들은 빅쿠와 빅쿠니 뿐만 아니라 우빠사까(청신사)와 우빠시까(청신녀)도 있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부처님의 80명의 제자들의 이름(A1.196~A1.275)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수닷따 아나타삔디까 (Sudatta anāthapiṇḍika)’를 비롯하여 9명의 청신사가 있고, 수자따(sujātā)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의 청신녀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출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성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재가수행자와 열반의 보편성(2013-03-0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흰옷을 입은 재가자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재가자도 성자가 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와 존자 고따마의 수행승 제자와 존자 고따마의 수행녀 제자 이외에, 존자 고따마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살며,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결박을 끊고, 홀연히 태어나, 거기서 열반에 들어,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재가의 남자신도가 있습니까?

 

[세존]

 “밧차여, 나의 제자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살며,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결박을 끊고, 홀연히 태어나, 거기서 열반에 들어,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재가의 남자신도가 백 명이 아니고, 이백 명이 아니고, 삼백 명이 아니고, 사백 명이 아니고, 오백 명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마하왓차곳따경-Mahāvacchagotta sutta-밧차곳따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73,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흰옷을 입은 재가자 중에 아나함의 경지까지 이른 자가 수도 없이 많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출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청정한 삶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역시 출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청정한 삶의 보편성

 

청정한 삶은 반드시 출가하여야만 실현 되는 것은 아니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도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밧차곳따의 큰 경(M73)에서 왓차곳따가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존자 고따마여, 이러한 것들을 존자 고따마께서도 성취했고 수행승들도 성취했고, 수행녀들도 성취했고,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의 남자신도도 성취했고, 존자 고따마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는 재가의 남자신도도 성취했고,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의 여자신도도 성취했으므로 이러한 청정한 삶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마하왓차곳따경-Mahāvacchagotta sutta-밧차곳따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73, 전재성님역)

 

 

흰옷입은 재가자가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청정한 삶의 실천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청정한 삶의 보편성을 말한다. 비록 재가자가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는 삶을 살아도 오계나 팔계를 지키며 가르침을 실천하였다면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여자라 해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의 여자신도 청정한 삶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승속의 구별이 없고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상가의 개념도 바뀌어야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성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흰옷 입은 성자가 수도 없이 많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상가의 개념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삼귀의문에서 승보의 개념은 상가를 뜻한다.  그런 상가는 사쌍팔배의 성자의 공동체를 뜻한다. 그래서 신도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되고 복전이 된다. 이런 상가에 불자들은 귀의 하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다. 그런 상가의 개념으로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사방상가현전상가이다.

 

사방상가는 무엇인가? 이는 사부대중을 모두 상가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삼세에 걸쳐 확대되고 공간적으로는 우주적으로 확대되는 보편적 상가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자와 재가자로 이루어져 있는 불교공동체는 사방상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상가라 하면 ‘현전상가’를 말한다. 출가자의 출가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는 상가로서 ‘지역상가공동체’를 말한다.

 

상가에 대하여 오로지 출가자들의 공동체라고만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재가자들의 지원이 없으면 상가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가자는 생활의 물자를 얻기위해 노동할 수 없음으로, 우바새와 우바이로부터 생활필수품인 의식주를 위한 생필품와 의약품을 공급받아야 한다. 그래야 현전상가가 유지된다.

 

이렇게 재가자의 지원을 받은 현전승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지하고 널리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출가와 재가의 상가가 성립 된다. 이것이 삼세에 걸쳐 확대되고 공간적으로는 우주적으로 확대되는 보편적 상가인 사방상가개념이다.

 

부처님의 법이 널리 퍼져 나가려면

 

이처럼 승가는 사방상가와 현전상가로 설명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상가라 하여 모두 출가자의 전유물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출가와 재가의 관계속에서만 상가가 성립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삼귀의문에서 출재가를 막론하고 귀의의 대상은 상가가 된다.

 

그런데 귀의의 대상을 스님이나 스님들로 한정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상가가 존속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법이 널리 퍼져 나가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불교의 한글삼귀의문에서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는 잘 못된 것이다. 더구나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 조차 상강 사라낭 가차미에 대하여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하였는데 이 것 역시 잘못 된 것이다.

 

승보를 스님들로 한정한 것은 명백히 잘못 된 것이다. 이는 스스로 승가가 존속하지 않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삼귀의문에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코메디 같은 발상이고 세계적인 조롱거리라 볼 수 있다.

 

 

2014-09-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