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라고? 학자와 스님의 글을 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12. 11:57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라고?  학자와 스님의 글을 보면

 

 

가르침에서 해법을 찾고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바쁘다. 아침 일찍 일터에 나와 일을 처리 할 때 거의 초분을 다툰다. 주로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 보며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다지 움직임은 없지만 컴퓨터와 전화로 일처리를 하다 보면 거의 초치기할 때가 많다. 이렇게 초분을 다투어 가면서 빼놓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쓰기이다.

 

글쓰기가 생활화 된지는 오래 되었다.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있고 하루에 두 편 쓰는 날도 있다. 한번 글을 쓸 때 평균 세 시간 내지 다섯 시간 걸리기 때문에 하루 일과 중 거의 반은 글쓰기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가르침에서 해법을 찾고자 함이다. 그리고 쓴 글을 공유하고자 함이다. 이렇게 본다면 글쓰기는 하나의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고 이웃에 대한 봉사 중의 하나라 볼 수 있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남의 글도 유심히 살펴 본다. 특히 교계신문사이트에 실린 글을 주로 본다. 그 중에서도 스님이나 학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모두 다 훌륭한 글은 아니다. 때로 부처님 가르침과 반하는 내용도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글도 보인다.

 

불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글

 

최근 불교닷컴에 포항공대 강병균교수의 글이 실렸다. 강병균교수는 불교닷컴에 시리즈로 글을 올리고 있는데 장문의 글이 특징이다. 이렇게 장문이 된 것은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강교수의 글을 보면 대부분의 글이 극히 주관적인 견해에 기반하고 있다. 더구나 불자들이 도저히 수용불가능한 내용도 보인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종교경전에서 모든 답을 찾으려하는 것은 지성과 영혼을 생매장시키거나 팔아먹는 행위이다. 종교경전을 우상화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베다교를 포함한 어느 경전에서도 답을 찾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법화경이나 팔리경전 등 특정 경전에서 모든 답을 찾으려하는 것은 광신이다.

 

(몽매주의, 강병균교수, 2014-09-05)

 

 

수학을 전공하는 강병균 교수에 따르면 경전에서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은 광신이라 한다. 이는 종교경전을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는 취지의 글로 이해 된다. 그럼에도 마치 경전을 부정하는 듯한 글을 보면 불자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매일 글을 쓰면서 경전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부처님이 설하신 팔만사천법문을 모아 놓은 빠알리니까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심란할 때 경전을 열어 본다. 상윳따니까야 7, 단권으로 된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 11권으로 된 앙굿따라니까야, 그리고 법구경과 숫따니빠따 등 지금까지 모아 놓은 경전이 책장에 가득하다.

 

 

 

 

그동안 모은 경전을 보면 구입금액으로 따졌을 때 백만원 가량 된다. 이렇게 경전을 모아 놓으니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따로 불단을 모시지 않지만 부처님의 원음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부처님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다.

 

책장에서 아무 경전이나 하나 뽑아서 읽어 보면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심란하였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에는 답이 있다. 그래서 마음이 심란할 때, 우울 할 때, 무언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경전을 열어 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거기에는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답은 대게 무상, , 무아의 가르침이다.

 

왜 삼보에 의지하는가?

 

부처님과 가르침과 거룩한 상가를 믿는 불자라면 삼보에 의지한다. 아니 의지라기 보다 피난처로 삼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이렇게 의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믿음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은 맹신이 아니라 합리적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이런 합리적 믿음에 대하여 삿다(saddha, )’라 한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한마디로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만일 믿을 수 없다면 믿지 못할 것이다. 유일신교에서 천지창조를 말하지만 불자들이 보기에는 믿을 수 없다. 그래서 길거리 전도사들이 아무리 예천불지를 부르짓지만 믿지 못하는 것은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설령 누군가 믿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할 경우 믿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믿지 않는다. 한번 아닌 것은 아니듯이 한 번 마음속에서 일어난 의심이 있는 한 믿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을 만한 것이 있다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합리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설령 초기경전에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내용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방편인줄 알기 때문에 의심 없이 받아 들인다. 그럼에도 팔리경전 등 특정 경전에서 모든 답을 찾으려하는 것은 광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키질하고 나면

 

수학을 전공하는 과학자 강병균교수에 따르면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현상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화엄경 등의 종교경전은 키로 까불러 미신은 날려 보내고 위대한 사상만 취할 일이다.”라 하였다. 글에서는 화엄경의 예를 들었지만 이는 사실상 빠알리경전도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초기경전은 초월적이고 신비한 내용이 많다. 특히 상윳따니까야 1권을 보면 하늘사람(devata), 하늘아들(devaputa), 악마(mara), 하느님(brahma) 등 무수한 초월적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 하느님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 (S6:1)” 과 같은 구절이 있는데, 이처럼 신비한 현상이 한둘이 아니다.

 

이와 같은 초월적 존재와 신비한 현상은 강병균교수의 주장대로라면 키질하여 날려 보내야 할 것들이다. 그렇게 키질하여 날려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강병균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등 근본가르침을 제외하고는 어디까지가 부처님의 친설(親說)인지 알 길이 없다.

 

(몽매주의, 강병균교수, 불교닷컴 2014-09-05)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하느님, 악마 등 초월적존재와 신비한 현상에 대하여 키질하여 날려 버리고 나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만 남을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외 다른 내용은 모두 허구라 보는 것이다. 만일 이런 견해를 가졌다면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초전법륜경역시 후대에 편집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초전법륜경을 다 외웠을 때

 

초전법륜경을 모두 다 외웠다. 빠알리어로 된 것을 외웠다.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을 외우고(2013-07-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빠알리초전법륜경을 외우는데 한달 보름가량 걸렸다. 늘 그렇듯이 되새김방식벽돌쌓기방식으로 외웠다. 이런 방식은 방대한 분량의 경을 외우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렇게 초전법륜경을 모두 다 외웠을 때 매우 강한 성취감을 느꼈다. 도저히 외워지지 않을 것 같은 빠알리문장을 우격다짐, 막무가내식으로 외워 마침내 마지막 구절을 다 외웠을 때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았다.

 

초전법륜경 후반부를 보면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고 해서 초전법륜경이라 한다. 빠알리어로는 담마짝깝빠왓따나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 S56.11)’라 한다.

 

초전법륜경에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성제 위주로 경이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성제는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네 가지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인 팔정도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을 요약한 경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초전법륜경에서 초월적 존재와 신비한 현상이 등장한다. 꼰단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진리의 눈(법안)’이 열리자 이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구절을 말한다.

 

초전법륜경 후반부를 보면 땅의 신이 등장하고 가장 높은 하느님(brhma)가 등장한다. 더구나 초전의 순간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라고 기록되어 있다. 땅이 흔들리고 빛이 나타난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 하느님이 등장하고 땅이 진동하는 현상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할까? 강병균교수 같은 회의론자들은 아마 후대에 편집되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그 어떤 증거도 내놓지 못한다.

 

회의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초전법륜경에서 후반부는 삭제 되어야 할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부분만 인정하고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는 초월적 존재와 신비한 현상은 키질로 불어 날려 버려야 할 것이다.

 

회의론자들의 경솔함

 

초전법륜경을 외우면서 감동하였다. 특히 길게 설명 되어 있는 사성제부분을 외우면서 감격하였다. 부처님이 설하신 근본가르침을 그것도 부처님 당시 언어로 외운다는 것이 감격이었다. 그런데 초전법륜경 후반부 역시 감동적이었다. 꼰단냐가 법의 눈이 열리는 순간을 묘사한 대목을 말한다. 비록 회의론자들이 키질로 날려 버려야 한다는 초월적 존재와 신비한 현상을 외우면서도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회의론자들의 주장대로 초전법륜경이 사성제와 팔정도만 남겨 놓고 모두 삭제 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매우 무미건조해질 것이다.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신비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여 경에서의 가르침이 훼손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본가르침이 더욱 더 부각 된다. 그럼에도 초월적 존재와 신비한 현상에 대하여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자신의 감각적 인지로 판단하려 키질로 날려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경솔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는 회의론자들의 경솔함이다.

 

초기경전은 문학작품일까?

 

오로지 근본가르침만이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주로 단멸론자들이다. 단멸론자들에 따르면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만 펼치셨지 내세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말한다. 이는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말이다. 부처님은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였을까?

 

초기경전에는 내세와 윤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만일 회의론자들의 주장대로 부처님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가르침만 설하였다면 내세와 윤회이야기는 모두 허구가 되어 버린다. 후대에 누군가 소설을 쓴 것이 된다.

 

소설은 문학작품에 속한다. 초기경전에 내세와 윤회, 초월적 존재와 신비한 현상 등이 들어 가 있다면 회의론자들이 보기에 문학작품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교와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불교와 가르침을 부정한다는 것은 삼보를 믿지 못하는 것이 된다.

 

삼보에 의재해야 불교인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가르침에 과학적으로 검증 되지 않은 내용이 있어서 믿지 못하겠다면 이는 삼보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내세에 대한 부정은 윤회에 대한 부정

 

불교의 근본가르침만이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주장하는 강병균교수의 또 다른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의 범죄를 억제하는 것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현세의 법률 관습 문화 양심(良心 착한 마음 good heart)이다. 세상의 전쟁을 억제하는 것은 힘의 우열과 손익계산과 보복의 위험이다. 내세는 죽은 다음에 올 일이요 신의 응징은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니, 둘 다 더디고 기약없는 일이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행복을 증진하는가? 강병균교수, 불교닷컴 2014-06-16)

 

 

수학을 전공하고 있는 과학자 강병균교수의 글을 보면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내세에 대하여 내세는 죽은 다음에 올 일이라 하는가 하면 더디고 기약 없는 일이라 하였다.

 

내세에 대한 부정은 다름 아닌 윤회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유물론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내세와 윤회는 있을까? 부처님의 논파할 없는 가르침(2014-06-2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유물론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

 

유물론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자로서 부처님 당시 아지따 께사깜발리가 있다. 그는 보시에는 공덕도 없다라 하여 인과론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저절로 생긴 것도 없다.(D2)”라 하여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였다.

 

요즘 일부 스님들이나 학자들은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만이 친설이라 한다. 나머지는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강병균교수는 윤회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구글 검색에서 강병균 과 윤회를 키워드로 하여 검색해 보았다. 그러자 불교평론에 기고한 강병균교수의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6도 윤회는 지구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지구 위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

 

(살생, 강병균교수, 불교평론 2009-06-10)

 

 

강병균교수가 불교평론에 기고한 컬럼에서 결론에 해당되는 말이다. 글에서 강교수는 윤회가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결론에 따르면 “6도 윤회는 지구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지구 위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라 함으로써 사실상 윤회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강교수는 글에서 동물의 예를 들어 가며 동물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사유할 능력이 없는 중생에게 불교적 진리는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이처럼 동물이 인간이 먹는 살코기용으로 사육되는 현상에 대하여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다른 유정중생들의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라 하였다. 같은 공간에 사는 인간간으로서 동물에 대한 자비심을 표현한 글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세와 윤회를 용인하는 듯한 말은 볼 수 없다.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라고?

 

강병균교수의 글을 분석해 보면 현세에 바탕을 둔 유물론자로 보인다. 이전 글에서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다라 주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런 말까지 하고 있다.

 

 

부처님 말씀(불경에서 그렇다고 주장하는)이라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과() 부합하고 위배되지 않으므로 옳은 것이다. 부처님 말씀일지라도 그릇된 것은 그릇된 것이다.

 

(사량분별과 연기법, 강병균교수, 불교닷컴 2014-08-11)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불자로서 도저히 받아 들이기 힘들다. 더구나 과학과 연계하여 불경을 해석하는 것이 그렇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면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논리라면 내세나 윤회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초월적 존재와 신비한 현상도 있을 수 없다. 과학적으로 증명 되기 이전에는 진리로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부처님의 가르침 마저 부정한다. 그래서부처님 말씀일지라도 그릇된 것은 그릇된 것이다.”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님이나 학자들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신뢰를 보낸다. 보통불자가 말하면 주제넘은 짓이라 한다. 학자가 진화론이야말로 연기법의 진수이다라고 말하면 그런 줄 아는 것이 보통불자들이다.

 

진화론이 연기법의 진수라고?

 

강병균 교수는 부처님의 연기법에 대하여 진화론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동물을 등장시켜 동물의 입장에서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환원하여 분석하여 설명하는 식이다. 바로 이런 설명방식이 유물론에 근거 하는 것이다.

 

유물론에 근거하여 과학적 검증방식으로 경전을 대하였을 때 초월적존재나 신비한 현상은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내세와 윤회 역시 용인 되지 않는다. 다만 현세에서 삶의 방식만이 관심사가 될 뿐이다.

 

이렇게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로 경전을 재단하게 되면 남는 것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현세를 바탕으로 하여 과학적 환원주의에 바탕을 두었을 때 진화론이야말로 연기법의 진수이다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삼계와 육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데

 

그런데 학자들 뿐만 아니라 초기불교를 연구하였다는 스님들 역시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듯한 글을 볼 수 있다. 마성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초기불교를 공부한다는 사람 중에는, 아직도 불교의 세계관이 이 우주를 설명하는 유일한 잣대인 것으로 잘못 알거나, 그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는 이 우주에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일 뿐이다.

 

(불교의 세계관 비판, 마성스님, 2014-05-19)

 

 

마성스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관 즉, 삼계육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와 색계와 무색계의 천상이 실재 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그러한 세계는 이 우주에 실재(實在)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제시 하지 않는다. 다만 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라 한다.

 

한심한 자가 되는 경우

 

마성스님의 견해대로 삼계와 육도가 실재 하지 않는 것이라면 부처님이 거짓말을 하였거나 후대에 경전이 편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무수하게 지옥과 천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고 색계와 무색계에 대해서도 수 없이 언급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부정한다면 초기경전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만일 스님의 말대로 삼계육도를 믿는 자가 있다면 한심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심한 자는 어리석은 자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마성스님에 따르면 삼계육도는 중생을 교화 하기 위한 방편이라 한다. 그래서 그러한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거나 죽어서 그런 곳에 태어나겠다고 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말은 불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왜 믿음이 중요한가?

 

마성스님의 현법열반론은 수행으로 살아 가는 스님들이나 불교학을 공부하는 학자들 소위 상근기수행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불교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일반사람들이나 불교에 갖 입문한 사람들에게 내세와 윤회는 없다는 취지의 글은 혼란만 줄 뿐이다.

 

불자들은 삼계와 육도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안다.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수미산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잘 안다. 하지만 이와 같 불교적 세계관이 실재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것은 합리에 바탕을 둔 이성적 믿음 즉, 삿다(saddha)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가 내가 처한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 없음을 확인하면 믿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한번 믿음이 생겨나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는다. 이는 유일신교에서 천지창조나 길거리 전도사들이 부르짓는 예천불지와 성격이 다른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생겨나면 초기경전에 나오는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현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기경전에 수 없이 언급되어 있는 지옥 등 육도와 삼계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내세와 윤회에 대한 이야기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다. 이렇게 의심할 바 없이 받아 들이는 것은 합리에 바탕을 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믿음은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는 바탕이 된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내세와 윤회,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에 대하여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한다면 매우 경솔한 처라 아니 할 수 없다.

 

과거칠불이야기

 

마성스님의 글에 과거칠불이야기가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흙속의 연꽃은 91겁 혹은 수십억 겁 전에 비바시불 혹은 시기불이 출현하여 직접 법을 설한 것으로 믿고 있다. 니까야에 쓰여 있으니까 진짜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것을 글자 그대로 믿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과거칠불(過去七佛)설의 성립 배경, 마성스님, 2014-05-19)

 

 

이 글은 검색 중에 발견 된 것이다. 그런데 글을 보면 진흙속의 연꽃이라고 필명이 언급되어 있다. 과거칠불이 역사적으로 실재한 것처럼 믿는 것에 대하여 매우 어리석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것을 글자 그대로 믿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라 하였다. 마치 미치광이 취급 하는 듯 하다.

 

그러려니하고 중립적 입장으로

 

앞서 언급된 것처럼 불자들의 믿음은 철저하게 합리와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이 내가 처한 현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확고한 믿음이 생겨 났을 때 수미산이야기, 삼계와 육도, 그리고 과거칠불 이야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고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준다. 따라서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러려니하고 중립적 입장이 된다.

 

못마땅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일까?

 

그럼에도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하여 못마땅해 하는 것 같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인터넷 상에는 온갖 쓰레기 정보들이 범람하고 있다. 불교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곡되고 있다. 불교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깜냥대로 횡설수설함으로써 초심자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중시킨다. 잘못된 주장으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심하게 훼손되는 것이 안타까워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소개해 드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불교의 세계관 비판, 마성스님, 2014-05-19)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쓰레기같은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에 대하여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이라는 사이버세상이 현실세상의 축소판과도 같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넘나들며 사는 현대인에게 인터넷공간은 사실상 생활의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익명으로 올려진 글을 보면 무책임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긍정적인 면 보다 인간의 온갖 욕망을 자극하는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인터넷사용에 승속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인터넷에 쓰레기글로 넘쳐 나지만 그 중에는 진주도 있을 수 있다. 마치 진흙탕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듯이 부처님의 말씀을 접하면 위로가 된다. 특히 스님들이나 학자 등 이 땅의 불교지도자들이 제 몫을 하지 않는 시대에 부처님의 원음을 접한다는 것은 청량제를 접하는 것과 같다. 그런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 초기경전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쓴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글을 쓰다 보면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들과 불교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이다. 그래서일까 자기 깜냥대로 횡설수설한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잘못된 주장으로 불법을 훼손한다고 말한다. 아마 보통불자가 글 쓰는 행위에 대하여 못마땅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가르침을 의심한다면

 

불자들은 갈증을 느낀다. 사람 사는 곳 어디를 보아도 교회십자가만 보일 뿐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을 보기 힘들다. 사이버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때 수행을 많이 한 스님들이나 불교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이 나서야 한다.

 

그러나 스님들이나 학자들 보기는 쉽지 않다. 설령 올린 글을 보더라도 가르침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글 중에는 내세와 윤회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글이 다수이다. 그래서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회의론자가 된다.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대단히 현세적이다. 죽음 이후에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 온 사람이 없어서일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만이 친설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현상들에 믿지 못하고 중생교화를 방편이라거나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단정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불자가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초기경에 따르면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이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심을 내었을 때 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르침을 의심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2014-09-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