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왜 가난한 자가 천상에 태어나는가?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았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6. 11:25

왜 가난한 자가 천상에 태어나는가?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았을 때

 

 

 

백살을 살아도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그리고 오래 살기를 바란다. 이는 세속적인 바램이다.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은 다름 아닌 오욕락이다. 그래서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모두 돈벌기선수가 되어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 간다.

 

오욕락이 만족 되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래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지위와 재산을 오래 향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기대수명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100년을 넘지 않는다. 설령 100년 넘게 살지라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마치 영화 그린마일에서처럼 주인공이 초능력을 얻어 백수십살을 살지만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났을 때처럼 오래 산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인간과 천상의 차이점 하나

 

인간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재벌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렇게 돈이 많은 자들은 이런 호사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백년을 넘기기 힘들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재벌회장이라도 늙음과 병,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제는 수명이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 그런 수명도 보장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천상은 다르다. 천상은 확실하게 수명이 보장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천상에는 모두 수명이 있다. 인간 바로 위에 있는 욕계욕계천상부터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기까지 수명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세상도표에 따르면 수명으로 순위가 정해져 있다. 도표를 보면 비상비비상처천의 중생은 84천겁을 사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세상도표의 정점에 있다.

 

천상의 수명은?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곳이 천상이다. 동시에 복도 보장 되어 있다. 그래서 복과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곳이 천상이다. 이런 천상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는 천상에 대하여 어떻게 묘사 되어 있을까? 인간 바로 위에 있는 욕계천상 중에 사대왕천(cātu-māha-rajikā)이 있다. 이 사대왕천의 수명은 어떻게 될까?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인간의 오십 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하루 밤낮이고, 그러한 서른 밤이 한달이고, 그러한 열두 달이 일년이고, 그러한 일년의 오백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수명이다.

 

(여덟 고리의 포살에 대한 상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42,전재성님역)

 

 

인간수명을 오십년으로 본다면, 이 오십년이 사대왕천의 하루에 해당된다. 만일 인간이 백세를 산다면 이틀에 해당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오십년이 하루인데 이들은 500천상년을 산다. 이를 인간나이로 환산해 보면 무려 9백만년이다.

 

왕권과 비교해 보면

 

인간 바로 위에 있는 천상인 사대왕천에 사는 중생들은 무려 9백만년을 산다. 100세도 살기 힘든 인간과 비교하면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돈 많은 재벌이라도 천상에서 누리는 영화와 비교하면 역시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가 여덞 가지 고리를 갖춘 포살을 준수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 사이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인간의 왕권은 천상의 행복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덟 고리의 포살에 대한 상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42,전재성님역)

 

 

부처님에 따르면 여덟 가지 포살을 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여덟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떠난다.

2) 주지 않는 것을 빼았는 것을 떠난다.

3) 청정하지 못한 삶을 버린다.

4) 거짓말을 버린다.

5)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버린다.

6) 하루 한끼 식사를 하고 때 아닌 때 식사하는 것을 삼간다.

7) , 노래, 음악, 연극을 관람 하는 것과 꽃다발, 향료, 크림으로 치장하고 장식하는 것을 삼간다.

8) 높고 큰 침대를 삼간다.

 

 

이상 여덟 가지 포살을 준수하면 그 공덕이 매우 클 것이라 하였다. 그 공덕은 어느 정도일까? 경에 따르면 십육대국의 왕권을 누리는 것 보다 더 크다고 하였다. 그래서 왕권을 누리는 공덕이 여덟 가지 포살을 준수함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공덕 보다 십육분의 일보다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인간의 왕권은 천상의 행복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늘날로 말하면 재벌들이 누리고 부귀영화는 천상과 비교하면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덟 가지 포살준수를 하였을 때

 

인간바로 위의 천상이 이럴진대 다른 천상은 복과 수명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천상에 태어난 존재는 영원토록 천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내려와야 한다. 그래서일까 세상도표를 보면 수명이 정해져 있다.

 

욕계의 타화자재천(paranimmita-vasa-vatti)의 경우 16,000천상년으로서 인간으로 따지면 ‘92억년을 산다.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천상의 경우 단위이다. 이렇게 복과 수명이 보장 된 것은 인간으로 있을 때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여덟 가지 포살준수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포살준수에 대한 공덕을 찬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세존]

생명을 죽이지 말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취기 있는 것을 마시지 말고

순결하지 못한 것을 삼가고 성적 교섭을 금하라.

그리고 밤에 때 아닌 때에 식사하지 말라.

 

화환과 향수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고

낮은 침대, 바닥에 누워야 하리.

이것이 포살일에 지켜야 하는 계행이네.

괴로움을 종식시킨 부처님이 설하신 것.

 

그 빛나는 지역의 모든 재보

진주와 보석과 황금과 청금석과

쇠뿔모양의 황금과 광산의 황금과

황색의 황금과 황금티끌이 있어도

 

여덟 가지 덕목을 갖춘 포살을 지키는 것에 비하면

이들은 십육분의 일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리.

마치 달이 허공에 비추면

별들의 무리들이 빛을 잃어버리듯.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계행을 지키며 여덟 가지 덕목을 갖춘 님은

지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

비난받지 않고 하늘나라에 이르네. (A8.42,전재성님역)

 

 

아무리 공덕을 많이 지어 천상에 태어나도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하였다면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복과 수명이 보장된 천상에서 복과 수명이 다하면 내려와야 한다.

 

천상에서 복과 수명이 다하면

 

어디로 내려 가는가?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Brahmakāyikāna bhikkhave devāna kappo āyuppamāa. Tattha puthujjano yāvatāyukā hatvā yāvataka tesa devāna āyuppamāa ta sabba khepetvā nirayampi gacchati. Tiracchānayonimpi gacchati. Pettivisayampi gacchati.

 

수행승들이여,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의 수명의 한계는 일겁이다. 일반사람들은 거기서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머물다가 그 수명이 다하면, 지옥에도 가고 축생에도 가고 아귀의 영역으로도 간다.

 

(자애의 경1, 앙굿따라니까야 A4.125,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어떤 사람(puggalā)’이 한량 없는 자애를 닦았을 때 죽은 뒤에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brahmakāyikāna devāna sahavyata)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곳의 수명은 일겁(kappa)’이라 한다. 이는 세상도표에 따르면 색계초선천에 해당된다. 이를 범중천(brahma-pārisajjā)’이라 한다.

 

범중천은 욕계천상 바로 위에 있다. 세상도표에 따르면 범중천 이상, 즉 색계와 무색계천상을 아울러 범천계(brahmaloka)’라 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범중천에 사는 존재의 말로는 매우 비참하다.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지옥, 축생, 아귀와 같은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범천에서 빛나던 존재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

 

범중천은 겁화가 일어났을 때 파괴의 대상이 된다. 세상의 존재들의 탐욕 등이 극에 달하였을 때 겁화가 일어나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데 그 기간을 일겁으로 본다. 자애를 닦아 그 공덕으로 태어난 범중천에 사는 존재(puggalā)들은 일겁동안 살지만, 우주의 성주괴공이 일곱마다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므로 우주의 성주괴공의 시간만큼이나 오랫동안 산다. 그것도 복과 수명대로 산다.

 

어떤 존재이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아 예류자가 되지 않았다면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천상의 존재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복과 수명이 다하면 윤회 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범중천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 수명이 다하면, 지옥에도 가고 축생에도 가고 아귀의 영역으로도 간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미얀마 속담에 범천에서 빛나던 존재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속담이 나왔을 것이다.

 

선처에서 악처로 가는 경우

 

천상에서 빛나던 존재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인간도 아닌 매우 비참한 곳으로 떨어진다. 그곳은 지옥(niraya), 축생(tiracchāna), 아귀(petta)의 세계라 한다. 그렇다면 천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존재가 악처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까?

 

그것은 공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주어진 공덕에 대한 과보를 향유할 뿐 새로운 공덕을 쌓지 않아 선업에 대한 공덕이 다한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이전 생에 지은 악행 뿐이다. 이 악행에 대한 과보가 무르익어 지옥, 축생, 아귀의 세계로 떨어진 것이다. 이는 선처에서 악처로 가는 케이스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예를 들면, 욕계 선처 가운데서 악업을 지은 자가 임종의 자리에 누울 때 “[과거에 자기가 지은 악업이] 그 때 덮친다.(M.ii.164)”라고 시작하는 말씀 때문에 그가 쌓았던 그대로 악업 혹은 악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을 통하여 나타난다. [악업과 악업의 표상을] 대상으로 속행의 과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등록의 마음으로 끝이 난다. 그 속행의 과정의 다음에 잠재의식의 대상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아 죽음의 마음이 일어난다. 죽음의 마음이 그치면 나타난 업이나 업의 표상을 대상으로 악처에 포함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그 재생 연결식은 끊어지지 않은 번뇌의 힘에 떠밀린 것이다. 이것이 과거의 대상을 가진 죽음의 마음 다음에 과거의 대상을 가진 재생연결이다.

 

(청정도론, 17 136,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서는 경을 근거로 들어 “[과거에 자기가 지은 악업이] 그 때 덮친다.(M.ii.164)”라 하였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에 경서는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 하였다. 이는 과거에 지은 악행이 때가 되어 과보로 무르익은 것이다.

 

천상에서 선업공덕을 향유하며 더 이상 선업공덕을 쌓지 않았을 때 남아 있는 것은 과거에 지은 악행만 있기 때문에 그 악행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 지옥 등과 같은 악처에 태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 가난한 자가 천상에 태어나는가?

 

반면 악처에서 선처로 가는 경우도 있다. 지옥, 축생, 아귀의 세계에서 고통을 겪은 존재가 그 업이 다하였을 때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으로 살면서 가난, 질병 등으로 매우 고통스런 삶을 살았을 경우에 해당된다. 악행을 하지 않고 선행을 하며 살았지만 한평생 부귀영화 한번 누려 보지 못하고 고단한 생을 보냈다면 죽어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Duggatiya hitassa pana upacitānavajjakammassa vuttanayeneva ta anavajjakamma vā kammanimitta vā manodvāre āpāthamāgacchatīti kahapakkhe sukkapakkha hapetvā sabba purimanayeneva veditabba. Aya atītārammaāya duggaticutiyā anantarā atītapaccuppannārammaāya sugatipaisandhiyā pavattanākāro.

 

(청정도론, 빠알리원문)

 

 

has stored up blameless kamma all should be understood in the same way,

substituting the bright for the dark side thus: His good kamma, [according as it has been stored up], or its sign, comes into focus in the mind door [and continuing] in the way already stated. This is how rebirth-linking occurs in a happy destiny with past and present objects next to death consciousness in an unhappy destiny with a past object.

 

(영역청정도론, 빅쿠냐나몰리역)

 

 

악처에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은 자에게 앞서 설한 방법대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이나 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어두운 측면을 밝은 측면으로 바꾸어서 모든 것을 앞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과거의 대상을 가진 악처의 죽음의 마음 다음에 과거와 현재의 대상을 가진 선처의 재생연결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청정도론, 17 139, 대림스님역)

 

 

여기서 악처라 한 것은 지옥, 축생, 아귀 뿐만 아니라 범위를 넓혀서 인간세상에서 서럽게 산 사람들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주변에서 힘겹게 사는 이들이 많다. 가난하고 못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하여 악행을 하지 않는다.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착한 사람들이다. 오히려 부자들 보다 더 이웃을 돕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능력껏 도와 주며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삶 그 자체는 고단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이 죽어서 어디에서 태어날까? 천상 등 선처에서 태어나기 쉽다. 왜 그럴까? 이는 청정도론에 따르면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은 자라고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upacitānavajjakammassa’이다. 이 말은 ‘upacitā (collected)+ānavajja(無罪的)+kamma(action)’뜻이다. 죄를 짖지 않는(ānavajja) (kamma)을 쌓은(upacitā)자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난하지만 착하게 산 사람들은 천상에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그럴까? 가난과 고통 등으로 인하여 과거의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악업에 대한 과보가 다 하였다면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선업 밖에 없다. 그 선업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천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폐지수집 노인

 

 

반면 한평생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가 있다. 불법, 탈법, 불로소득으로 이룩한 부를 향유만 할 뿐 도덕적 삶을 살지 않은 자들은 지옥, 축생 등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악업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 날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였을 때

 

선업공덕을 지어서 천상에 태어난 자나 악업에 대한 과보로 악처로 떨어진 자나 삼계를 윤회할 수밖에 없다. 이는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무명으로 인하여 현재 여기 있게 되었고, 지금 갈애로 인하여 미래의 태어남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한다.

 

이렇게 시작도 알 수 없고 끝 도 알 수 없는 윤회하는 중생을 부처님은 안타까워 하였다. 이는 우다나에서 세존께서는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면서 탐욕이 생겨나고 성냄에서 생겨나고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무수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무수한 고뇌로 불타는 뭇삶들을 보았다.(Ud32)”라고 언급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감흥어를 읊으셨다.

 

 

[세존]

고통 속에 태어나 접촉에 시달리니

이 세상은 질병을 자기라고 부른다.

아무리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그것과 다른 것이다.

 

세상은 존재에 집착하여

다른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존재에 패배당하여

존재라고 즐거워한다.

 

존재를 즐기는 것은 두려운 것이고

두려워하면, 그것이 괴로움이다.

존재를 버리기 위해

사는 것이 청정한 삶이다.

누구든지 어떤 수행자이든 성직자이든

존재를 통해서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면,

이들 모두는 존재로부터 완전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누구든지 어떤 수행자이든 성직자이든

비존재를 통해서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여읨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이들 모두는 존재로부터 완전한 여읨을

이루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집착의 대상을 조건으로

이 괴로움이 생겨난다.

모든 집착을 부수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 세상을 널리 보라.

무명에 패배하여 존재가 되어

존재에 즐거워하고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곳에서든 어떠한 경우이든

어떠한 존재이든

그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면,

존재의 갈애는 버려지고

비존재에도 환희하지 않는다.

일체의 갈애가 부수어진 곳에

남김없는 사라짐, 소멸, 열반이 있다.

 

수행승이 열반에 들면,

집착을 여의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악마는 정복되고 전투는 승리하고

여여한 님은 모든 존재를 뛰어 넘는다. (Ud32, 전재성님역)

 

 

 

2014-09-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