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나도 몰라? 부처님 가르침과 동떨어진 시중의 명상센터
명상도 산업화 되었나?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은 좋은 홍보대상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시장통, 정거장 등에서 볼 수 있는 현상 중의 하나가 있다. 그런 것중에 ‘명상’이 있다.
요즘 시내버스는 위성을 이용하여 버스 이동시간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환승이 가능하여 불과 몇 분 밖에 기다리지 않는다. 그 짧은 기간에 사람들은 광고판으로 눈을 돌린다. 그런데 눈에 띠는 광고가 보인다. ‘짜증, 우울엔 명상, 호흡’이라는 문구이다. 명상으로 유명한 D명상센터에서 붙인 것이다.
D명상센터의 문구를 보면 ‘국내명상 1위 기업’이라 되어 있다. 명상도 사업화 또는 산업화 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더구나 기업이라는 말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와 다름 없음을 느낀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버스정거장 또 한 켠에 역시 명상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스터에는 ‘내마음 나도 몰라?’라는 문구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아래를 읽어 보니 ‘마음의 원리, 확실한 해답’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무언가 궁금증을 유발하는 문구이다. 이런 문구를 보았을 때 무엇 하는 곳인지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일까 더 작은 글씨로 ‘화, 짜증, 불면, 불안한 내 마음의 상태를 체크해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역시 알듯 말 듯 궁금증을 잔뜩 유발하는 말이다. 더구나 불안한 마음을 체크해 준다고 하니 마음을 끌기에 충분하다.
포스터를 보면 매우 세련 되어 보인다. 그리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고도로 정제된 문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개강좌 일시와 장소까지 표현해 놓았다. 누구든지 ‘와서 보라’고 한다. 더구나 무료라 한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요새는 검색의 시대이다. 포스터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키워드 검색을 해 보니 홈페이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홈페이지 소개문에 따르면 ‘진실한 나와 마주하다’라고 큰 문구가 먼저 발견된다. 이로 보았을 때 ‘참나’와 유사한 것이라 보여진다. 또 ‘영원히 변치 않는 큰마음 그것은 자연의 마음이고 우주의 마음입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OO수련회의 문구를 보면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을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우주의 마음이라 하니 마치 고대인도에서 바라문교의 ‘범아일여’를 떠 올리게 한다. 모든 개체에 고정불변한 아뜨만이 있어서 세상의 근원인 브라만과 합일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브라만교를 말한다. 그래서 마치 작은 나(마음)이 있어서 큰 나(마음)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합일을 강조하는 명상
이처럼 합일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홈페이지에 보인다. 일부문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을 비워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면 세상과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나 또는 너라는 개체의식과 이기심은 사라지고 전체의식이 되어 남을 위해 살아가게 됨으로써 내가 처한 모든 갈등과 부딪침이 사라집니다.
(OO수련회 홈페이지)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한국불교에서 선종을 떠 올리게 한다. 선종에서 강조하는 것은 ‘본래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사들이 늘 하는 말이 본마음, 참나이다. 그래서 나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한다. 또 본래부처임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 ‘수행’이라 한다.
OO수련회 홈페이지를 보니 마음수련 또는 명상이라는 것은 고대인도의 브라만교, 요즘의 힌두교와 유사하다. 또 한국의 선불교와도 유사하다. 이는 사마타명상으로 인하여 합일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홈페이지에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왜 살고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삶인가’라는 말도 보이는데, 바로 이런 말이 합일을 강조하는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즉 궁극적 실재 또는 존재의 근원과 하나가 되는 것이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것이다.
공통적으로 짜증을 키워드로 하여
두 개의 명상센터에 대한 포스터를 보았다. 한 곳은 오래 전부터 이름이 알려진 곳이지만 또 한 것은 새로 생겨난 곳이라 보여진다. 모두 마음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두 마음센터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단어가 있다. 그것은 ‘짜증’이다.
짜증이란 마음에 들지 않아 북받치는 역정이나 싫증을 내는 짓을 말한다. 한마디로 싫은 감정에 대한 표출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짜증은 화로 발전 되어서 인간관계를 망치게 된다. 그래서일까 두 명상센터의 광고 문구를 보면 짜증, 우울, 화, 불면, 불안 등을 강조한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라는 노래가사가 있듯이 두 명상센터에서는 공통적으로 짜증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명상센터에 나가면 마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사라질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일단 와보라고 하여 공개강좌형식으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무종교인을 대상으로 하여
두 명상센터의 광고포스터를 보면 무종교인을 겨냥한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 종교인구는 약 55%에 달한다. 전인구의 거의 절반이 종교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로 불교, 개신교, 천주교 이렇게 삼대 종교인구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종교를 갖지 않은 인구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45%가 무종교인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인대 무종교인의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명상센터의 광고에 그다지 큰 흥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종교내에서도 얼마든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종교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명상센터의 광고문구는 솔깃하게 만든다. 더구나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문구로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한번 참가 하여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 나게 만든다.
D명상센터에서의 수련경험
명상전문이라는 D명상센터에서 수련경험이 있다. 십년전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기 이전에 몇 개월 다닌 적이 있었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언가 인생에 대한 해법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서 이었다. 그것은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끊임 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쉽게 풀리는 문제도 있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도 발생한다. 이럴 때 종교에 의존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신을 찾는다. 아니 신을 찾는다기 보다 ‘신에게 떠 넘겨 버린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신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를 떠 넘긴다고 해서 근본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으로 안정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해결 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런 것 저런 것 다 해 보게 된다.
십년전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불교에서 해법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시에 불교는 없었다. 모두 산중에만 있을 뿐 사람사는 곳에 불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가는 널려 있었다. 그렇다고 십자가 있는 곳에서 해법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고교시절 겪었기 때문이다.
미션스쿨 삼년 다니면서 볼 것, 못 볼 것 다 보았다. 따라서 교회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직장이 바뀌었다. 일이년이 멀다 하고 직장이 바뀌다 보니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풀리지 않는 문제는 늘 안고 살아야 했다.
직장이 바뀔 때 막간이 있었다. 막간을 이용하여 단식원에 들어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D명상센터에서 운영하던 단식원이었다. 일주일간 효소단식을 하며 각종 체조와 간단한 명상수련을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있다는 것 정도로 맛만 보았을 뿐이다.
명상 보다 운동을
십년전 새로운 직장이 있는 가까운 곳에 D명상센터 분원이 있었다. 효소단식 인연도 있고 해서 거리낌 없이 등록하였다. 일과가 끝나고 저녁 시간에 수련하였는데 수련비가 만만치 않았다. 3개월 치를 한꺼번에 내야 했다.
3개월치를 내고 나니 아까워서라도 다녀야 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운동을 하는 것에 그치는 정도이었다.
D명상센터에서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 가면 더 높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 년간 다녀야 한다. 단계가 올라 가면 올라갈수록 특별수련이라 하여 무언가 있는 듯 하였다. 그런 단계까지 올라 가기 위해서는 평생다녀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평생회원도 있었다.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하면 평생회원이 되어 많은 혜택을 주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초기단계의 경우 기대하였던 명상수련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열심히 운동만 하였다.
D명상센터의 경우 명상 보다도 운동이었다. 마치 헬쓰장에서 운동하듯이, 또는 애어로빅하듯이, 명상센터에서는 기체조라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운동으로 시작해서 운동으로 끝난 듯 하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108배 이었다.
십년 전 108배를 처음 하였다. 절에서 시작 한 것이 아니라 명상센터에서 시작 한 것이다. 그런데 108배가 운동개념이라는 것이다. 명상센터에서 절하는 방식은 불교와 다르다.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이 두손을 하늘 높이 치켜 드는 것이다. 마마치 무당이 절 하는 모습 같아 보인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두 손을 합장한 채 가슴 앞에 둔다. 이런 방식이 가장 차이가 났다.
그렇다면 108배의 대상은 무엇일까? 불교의 경우 당연히 불법승 삼보가 될 것이다. 그러나 D명상센터의 경우 ‘천부경’이다. 천부경에 실려 있는 문구와 다른 문구를 합하여 108문자가 되는데, 이 문자를 외며 108배를 하는 방식을 말한다.
D명상센터에서 기체조와 108배를 하고 나면 기분이 가쁜 하였다. 몸을 움직여서 땀을 흘리고 났을 때 몹시 상쾌 하였다. 더구나 다 끝나고 나서 차 한잔 가질 시간에 나누는 담소도 좋았다. 이렇게 본다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활력소를 주는 장소임에 틀림 없다. 다만 비용이 좀 들어 간다는 것이 단점이다.
D명상센터에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단지 운동만 있었을 뿐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법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높은 단계에 올라가면 무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초기단계에서는 운동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불교적 해법을 찾기 위해서
D명상센터는 3개월 다녔다. 운동하는 것은 좋았지만 문제해결에는 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해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였다.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만 십년전의 일이다.
불교대학에 입교한 것은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 불교적 해법을 찾기 위해서이다. 명상 등 수련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 교리적으로 알고 싶었다. 불교대학에서는 그런 의문점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이다.
불교와의 인연
사실 불교에 대한 인연은 깊다. 이미 중학교시절에 불교를 접하였기 때문이다. 조계종 종립학교에 배정 받은 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그 때 당시 종로5가 연지동에 위치하였던 ‘동대부중’을 말한다.
동대부중에서 불교를 처음 접하였을 때 아무 의문 없이 아무 저항 없이 받아 들였다. 이전에 교회를 다닌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절에 다닌 적도 없었지만 처음 접하는 불교는 자연스러웠다.
종립학교에서는 부처님의 일생부터 가르친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불교시간 교재가 부처님의 일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부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첫 경험은 오래 기억에 남듯이, 처음 접한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동안 기억에 남았다.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이었지만 무언가 특별한 삶이라 생각 되었다.
스님이 되고 싶었는데
이후 고승열전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 교재를 보았다. 원효, 의상 등 우리나라 유명스님들에 대한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교재를 보고서 스님이 되고 싶었다.
스님이 되고 싶었던 것은 출가해서 사는 삶이 가장 이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세속의 삶이 시시하게 보였다. 변성기 이전에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마음이 순수 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중학교 시절 부처님의 일생을 보고 또 유명스님들의 일대기를 보았을 때 종교적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게 여겼다. 만일 그 때 그 마음이 계속 되었더라면 출가 하여 스님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마음은 단지 그때 마음일 뿐이었다.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불교교양대학에서는 기도 위주의 신행생활이 이루어졌다. 이는 입교생의 상당수가 이미 절에 다니고 있는 불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교리적으로 더 알기 위하여 등록한 사람들이 많았다. 원찰이 있는 상태에서 교리공부를 하기 위하여 교양대학에 입교한 것이다.
그러나 초보자라 많았다. 불교와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나중에 대화를 나누어 보니 천주교를 믿다 불자가 된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어느 법우님은 20여년간 성당에 다니다 불교에 입문하였다고 하였다. 또 어떤 법우님은 교회 다니다 불교대학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어떤 법우님은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 안되어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도 마치 물건 고르듯이 마음에 안들면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법우님은 사기를 당하여 마음을 추수리기 위하여 불교에 입문하였다고 하였다. 또 어떤 법우님은 IMF로 인하여 길바닥에 나 앉게 되었을 때 역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하여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당수는 자녀의 수능을 앞두고 입교한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새로 입교한 법우들 대부분은 이전에 어떤 식으로든지 불교와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정식불자가 된 것이다.
더 빨리 불교를 알았더라면
불교교양대학에서도 부처님의 일생부터 배웠다. 중학교 당시 배웠던 부처님의 일생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기본중의 기본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일생을 모르고서 불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교양대학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책을 보았다. 본격적으로 불교에 대한 공부가 시작 된 것이다. 주로 대승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더 빨리 불교를 알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라는 아쉬움이다. 그러나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였다. 비록 늦게 나마 접한 불교이지만 불교는 삶을 지배하고 있다.
대승불교만 있는 줄 알았으나
불교에는 대승불교만 있는 줄 알았다. 한국불교가 대승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관음재일이 되면 “관세음보살, 관세을보살…”하며 정근하였고, 지장재일이 되면 역시 “지장보살, 지방보살…”하며 열심히 정근하였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 되지 않는다. 근원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연스런 과정일 뿐이다. 대승불교에서 만족하지 못하였을 때 부처님이 어떤 말을 하였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근본 가르침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기도만 있는 듯 하였다. 그래서 항상 듣는 말이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이다.
사마타 수행으로는 한계가
여기 문제가 있다. 쉬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이때 기도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기도가 일종의 사마타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해결될 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때 뿐이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사마타명상수행만 의존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알랄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선정수행을 하였다. 부처님 당시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두 분의 스승에게 배웠는데, 알랄라 깔라마의 무소유처정과 웃따까 라마뿟따의 비상비비상처정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두 스승의 가르침에 대하여 실망하였다. 이는 경에서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M26)”라는 표현 되어 있다. 사마타 수행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고 홀로 깨우치기로 하였다.
부처님은 스승 없이 깨달았다. 이를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이라 하여 ‘무상정등각’이라 한다. 그렇다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그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이 초기경전에 그대로 실려 있다. 바로 이런 가르침을 알고자 초기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서
한국의 불자들은 자신이 불자라 하지만 정작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른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불자들 뿐만 아니라 스님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불교 TV사이트에서 ‘일아스님’은 부처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고 하였다. 한국의 승가대학에서조차 부처님이 누구인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누구인지,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어떤 말씀을 하였는지 잘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불자이면서 부처님 그 분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접하면 부처님 그분을 알 수 있다.
초기불교의 맛을 알고
부처님 그분을 알기 위하여 명상원에 다녔다. 2009년도의 일이다. 그 때 당시 ‘한국위빠사나선원’이라는 이름의 명상센터이다. ‘묘원법사’가 지도법사로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약 3-4시간 씩 법회가 열렸다. 법문과 경행과 좌선과 인터뷰로 이로어져 있다. 이렇게 매주 토요일 3-4시간 씩 일년간 50회의 법회에 참석하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첫날에 대한 것은 ‘[위빠사나 수행기1] 나도 수행을 잘 할 수 있을까(2008-12-28)’라는 제목의 글이다.
지금은 한국명상원에서의 일년간의 배움으로 인하여 초기불교의 맛을 알게 되었다. 이후 오로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것만 생각하게 되었다. 풀리지 않는 근본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먼 시중의 명상센터
버스정거장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니 이제 명상도 상품화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명상을 상품화 하여 기업화 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시중의 명상센터를 접하여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멀다. 부처님이 성도과정에서 ‘버린’ 것들이다. 이는 사마타명상수행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자신과 우주가 하나가 되는 합일에 대한 것이다.
나와 우주가 합일을 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주의 근원이라는 궁극적 실재를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자아와 궁극적 실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으로서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로 대표되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로 대표 되는 육사외도의 견해를 부수었다. 이렇게 본다면 요즘 명상센터에서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였을 때 기쁨은 어떤 것일까? 가르침을 실천하여 해탈과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가야의 봄 축제에 온 것은
내게는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으신 분께서
최상의 가르침을 설하시는 것을 보았다.
환히 빛을 발하는 무리의 스승, 최상의 경지에 이른 분
견줄 바 없는 통찰력을 갖추신 인도자.
신과 인간의 승리자, 그 분을 보았다.
그분은 위대한 코끼리, 위대한 영웅,
번뇌를 여윈 위대한 광채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신 분
어디에도 두려움은 없다.
진정 오랜 세월 그른 길로 갔고
잘못된 견해의 사슬에 묶여 있던
나, 세나까를 부처님은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켰다.
(테라가타 287-290, 세나까비구, 일아스님역)
2)
오! 자유! 정말로 나는 벗어났다.
세 가지 굽은 것들에서 벗어났다.
절구, 절구공이, 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생사에서 벗어났다.
윤회로 이끄는 것은 뿌리째 뽑혔다.
(테리가타 11, 뭇따비구니, 일아스님역)
3)
출가한지 25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였다.
마음의 평화, 마음을 다스림,
오랜 세월 찾아 헤맸으나 얻을 수 없었다.
그때 언뜻 승리자(부처님)의 말씀
떠올리고는 전율하였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정적으로 분투노력하였다.
그리고 갈애를 부수어 버렸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성취되었다.
오늘은 갈애를 끊은 지 7일째 날.
(테리가타 39-41, 다른 사마 비구니, 일아스님역)
4)
예전에 나는 흉적으로서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예전에 나는 손에 피를 묻히는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존재의 그물을 끊고
내가 귀의한 것을 보라.
이와 같이 나쁜 곳으로 이끄는
많은 악업을 짓고
아직 그 업보에 맞닥뜨리지만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기네.
어리석어 무지한 사람들은
오로지 방일에 탐닉한다.
슬기로운 자는 방일하지 않기를
마치 최상의 보물을 수호하듯 하네.
방일에 빠지지 말라
감각적인 쾌락에서 기쁨을 찾지 말라.
방일하지 않고 명상하는 자
크고 한없는 즐거움을 얻으리라.
밝혀진 가르침들 가운데
그 최상의 것에 나는 도달했다
내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나는 환영하여 거절하지 않네.
나는 세 가지 밝은 지혜를 얻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했다.
내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나는 환영하여 거절하지 않네.
(Aṅgulimāla suttaṃ-앙굴리말라의 경,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201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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