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을 가져가는가? 친구와 둘이 떠난 관악산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3. 12:25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을 가져가는가? 친구와 둘이 떠난 관악산

 

 

 

 

일년 중에 가장 특색이 없는 달

 

일년 중에 가장 특색이 없는 달이 11월 일 것이다. 명절도 국경일도 없다. 또 축제등 볼거리도 없는 계절이다. 그러다 보니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의 매출이 뚝 떨어진다고 한다. 이처럼 계절적으로 특색이 없는 11월달에 대대적인 할인 행사가 열릴 것이라 한다. 가뜩이나 위축된 분위기와 계절적으로 비수기에 접어듦에 따라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한 방편이라 보여진다.

 

이처럼 무색무취한 계절이 11월이다. 더구나 가을도 깊어 가는 조락(凋落)의 계절이다. 초목의 잎사귀가 시들어 가며 떨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에 더욱 감상적으로 된다. 그러나 세상은 온통 울긋불긋하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관찰한 바에 따르면 11 20일 을 전후하여 은행나무잎이 일제히 진다. 그에 따라 단풍시즌도 끝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의 단풍은 추락을 앞두고 찬란하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 같다.

 

정보통신관련 일을 하고 있지만

 

단풍의 계절에 친구와 산행을 하였다. 관악산이다. 친구 S로부터 카톡연락을 받고 산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요즘은 전화로 연락하기 보다 문자로 하는 것이 대세이다. 그 중에서도 카톡이 대세이다.

 

카톡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두 달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락이 카톡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동창모임이 그렇다. 전화로 연락이 오는 것은 드믄 일이고 문자로 연락받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문자보다 카톡방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지난 2012년 이후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풍속이다.

 

새로운 통신수단이나 통신기기에 대하여 보수적이다. 그래서 늦게 도입을 하고 늦게 가입을 한다. 핸드폰이 본격화 되기 이전에 중간단계로서 삐삐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핸드폰 역시 늦게 사용하였다. 카톡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새로운 변화에 늦게 적응하는 편이다. 정보통신관련 일을 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것에 보수적이다.

 

아무리 바빠도 친구의 요청에는

 

S가 카톡으로 관악산등반을 제안하였다. 이에 단 몇초도 지나지 않아 흔쾌히 수락하였다. 아무리 바빠도 친구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해관계를 따져서 대응한다면 흔히 하는 말로 바쁘다라는 핑계를 댈 것이다. 바쁘다라는 말한디로 거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사이에 이해관계를 따져서는 안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사회생활을 할 때 그렇다. 사회에서 사람을 만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저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 아니면 만나서 손해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라 여겨지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한다. 그러나 친구와의 관계에 이해를 따져서는 안될 것이다. 이해를 따진다면 더 이상 친구사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친구가 만나자고 하였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특히 시간이 돈인 시대에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만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친구와 만남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전화하는 것도 실례로 여기는 요즘시대에 문자로 대화하는 것이 이제 예절 바른 시대가 되었다.

 

일요일 아침 관악역

 

일요일 아침 관악역으로 향하였다. 10시에 만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관악산 등산로가 여러 곳 되지만 관악역을 약속장소로 정한 이유는 서로 사는 곳과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관악역에는 등산객으로 가득하다.

 

 

 

 

 

흔히 물반 고기반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일요일 오전 관악역은 그런 속담이 들어 맞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등산객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관악역은 관악산등반을 위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역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작은 역 주변에는 호프집이 많다. 산행을 마친 사람들이 친구 또는 동료와 뒷풀이를 하는 장소이다.

 

호압사에서부터 시작하기로

 

S 10시에 관악역에서 만났다. 둘만의 등산이다. 카톡방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도 참여를 요청하였지만 모두 바빠서인지 결국 둘만의 산행으로 되었다.

 

S는 관악산에 대하여 잘 알았다. 관악산을 수 백번 다녔다고 하니 관악산의 지형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S의 제안으로 호압사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하였다. 관악역에서 호압사 입구까지 순환마을버스가 다녀서 이동하였다.

 

산행일정은 호압사에서 시작하여 삼성산을 목표로 하였다. 관악산이 매우 넓기 떄문에 연주암이 있는 꼭대기 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삼성산 삼막사로하여 안양유원지로 넘어 가는 코스로 잡았다. 먼저 등산의 출발지인 호압사로 향하였다.

 

금천구 유일의 전통사찰 호압사

 

호압사는 처음 들어 보는 절이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만 이처럼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다. 이렇게 본다면 서울은 매우 큰 곳이다. 천만명이 사는 서울에서 아직까지 가 보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호압사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호압사는 어떤 절일까? 안내판을 보니 눈길을 끄는 문구가 금천구 유일의 전통사찰이라 한다. 전통사찰이란 문화재 등을 보유하고 있는 역사를 지닌 사찰을 말한다. 흔히 천년고찰이라 한다. 호압사 역시 역사와 전설과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호압사는 비보사찰이다.

 

호압사 인근에는 석구상이 있다. 조선왕조 도읍설화에 따르면 경복궁 광화문 앞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한 것이라 한다. 이는 불의 성격이 강한 관악산의 기를 눌러서 도성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비록 한강 너머에 있긴 하지만 관악산의 기운이 너무 강하여 억누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비보사찰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곳이 호압사이다.

 

그런데 호압(虎壓)’이라는 말 자체에도 역시 강한 기를 억누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성에서 보았을 때 한강 너머의 삼성산이 호랑이를 닮았다고 한다. 그 강한 기를 누르기 위하여 호압사를 만든 것이라 한다. 도성을 위협하는 강한 상징으로서 호랑이의 기운을 누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의 호압사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호압사는 특별한 용도로 건립된 비보사찰이라 볼 수 있다.

 

호압사에 가을이 깊어가고

 

호압사에 가을이 깊어 간다. 오백년 되었다는 느티나무에는 단풍이 들어 있다. 그러나 어제 내린 비의 영향이어서인지 가지가 앙상한 것도 많다. 아마 몇 일만 지나면 모조리 지고 말 것이다. 추풍낙엽이라는 말이 있듯이 생명을 다하여 힘겹게 매달려 있는 이파리가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호압사는 역사와 전설과 신화를 간직한 고찰이다. 그러나 관악산에 이런 역사를 가진 전통사찰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불교인으로서 순례를 다니고 순례기를 작성하여 올리고 있지만 이렇게 전통사찰을 보게 되면 좋은 글쓰기의 소재가 된다.

 

꽃 본 듯이 반가운 것

 

약사여래를 주불로서 모시고 있는 호압사에서는 오래 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전각이나 석탑 등이 근래에 불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1월 초입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호압사에서는 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조락의 계절에 꽃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꽃 본 듯이 반가운 것이다.

 

 

 

 

 

 

 

 

 

 

 

 

 

 

 

 

 

 

 

 

 

 

 

 

 

 

 

호압사의 위치는?

 

호압사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지도검색을 해 보았다. 관악산 서쪽 시흥동 방향이다. 가까이 벽산아파트 단지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금천구 등 서울 서쪽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등산출발지로 볼 수 있다.

 

 

 

 

 

인생길 같은 등산길

 

호압사에서 시작 되는 등산로는 매우 가파르다. 오로지 오르막만 있는 길이다. 무수한 계단만 있어서 숨이 턱 막힌다.

 

 

 

 

 

어느 등산로이든지 초입이 가파르다. 이렇게 오로지 오르막만 있는 가파른 길을 올라 가다 보면 능선에 진입한다. 능선을 타면 그 다음 부터는 산행이 수월해 진다. 마치 인생길을 보는 듯 하다.

 

등산을 인생과 비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이는 인생을 순탄하게 사는 이가 있는 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굴곡진 인생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굴곡진 인생을 살아 간다. 그런 굴곡진 산길이 마치 인생길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백색의 파노라마가

 

가파른 산길을 올라 가자 보상이라도 받듯이 눈 앞에 전망이 펼쳐진다. 그것은 자연을 보았을 때의 감흥이 아니라 거대한 인공구조물을 맞이 하였을 때의 기묘한 느낌이다. 북쪽방향의 서울이 그렇다.

 

 

 

 

 

 

조망대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았다. 바로 아래에는 불과 몇 십분 전에 보았던 호압사가 보인다. 숲속에 있어서 마치 숲속의 샘터 같다는 인상이다. 더 멀리 보았다. 발아래 펼쳐진 세상은 백색이다. 눈길을 닿는 데 까지 백색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이런 기분에 산에 오르는 것일까?

 

 

 

 

 

사람들이 왜 산을 찾는지

 

발아래 펼쳐진 백색의 파노라마를 보면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일시적으로 잊어 버린다. 저 멀리 보이는 성냥갑과도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차지 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것이 허망에 보이기도 한다. 무상하게 변하고 마는 것이 자연의 이치임에도 공중에 건설된 콘크리트구조물 하나 가진 것이 성공이라고 보는 세태에 대하여 초연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답답할 때 산을 찾는 모양이다.

 

 

 

 

 

기괴하게 생긴 형상을 보고

 

관악산 지형에 익숙한 S와 가던 길을 재촉 하였다. 가던 도중에 기괴하게 생긴 형상을 만났다. 잘 보면 형상이 드러난다. S가 가르쳐 준 형상을 자세히 보니 사람 같기도 하고 괴물같기도 하다.

 

 

 

 

 

바위를 옆에서 보니 틀림 없는 얼굴 모습이다. 그러나 생긴 모습이 너무 험상굿다. 마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변신로보트의 얼굴 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위에 의미를 두고 보면 발견 되지만 무심코 지나치면 발견할 수 없는 형태이다. 그런 바위에 대하여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귀면암이라 할 것이다.

 

삶에 동반자가 필요한 이유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그 다음에는 편한 길이 나온다. 산행을 하다 보면 소위 깔딱고개라 불리우는 곳이 반드시 있는데, 이 고개만 넘으면 산행이 수월해 진다. 그 다음 부터는 능선을 타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인생길과 유사하다.

 

능선길을 타면서 S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7년만에 만났으므로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한 것도 많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산행을 하였더니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나홀로 등반하는 것 보다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훨씬 수월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삶에는 동반자가 필요한가 보다. 하지만 세상사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성공에 대한 관점차이

 

모두가 나의 마음 같지는 않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자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하물며 남도 내뜻대로 해주기를 바란다면 어리석은 행위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얼굴이 모두 다르듯이 성향 또한 모두 다르다. 이렇게 다르다 보니 관점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구는 보수주의자라 하고 또 누구는 자신이 진보주의자라 한다. S와의 대화에서도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성공에 대한 관점이다.

 

S는 성공에 대하여 경제적 요인을 크게 보았다. 가까운 사람의 성공사례를 들어 가며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하는 요인으로 본 것 같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여 모두 성공한 사람이라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모든 것은 무상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애써 모아 놓은 돈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성공요인에 대하여 오로지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할 수 없다. 우리사회에서는 경제적 성공 말고도 다른 요인에 의한 성공사례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성석제가 있는데

 

소설가 성석제가 있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그러나 졸업이후로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다만 매스컴으로만 알고 있다. 그런 성석제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사진을 보니 그 때 당시 모습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람들의 얼굴은 세월이 흐르면 바뀐다. 기본 형태는 유지하지만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반영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 마흔이면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순수한 얼굴이 있다. 그런 얼굴은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성석제의 사진을 보면서 고1 시절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석제가 고등학교 친구라 하여 그의 소설을 읽어 보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투명인간을 발표 하여 주목받고 있는데 때가 되면 사서 읽어 볼 예정이다. 이렇게 졸업이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성석제를 언급하는 것은 성공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소설을 쓴다고 하여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가난하게 산다. 그것은돈버는 일에 올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사람을 실패자라 보아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성공의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작품으로 승부한다. 그래서 가슴을 울리는 훌륭한 작품을 남기기 위하여 올인한다. 누가 알아 주건 말건 순수한 열정하나로 작품을 쓰는 것이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품이 읽혀지고 세상사람들이 알게 된다. 그리고 유명인이 된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결코 돈 많은 부자가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외롭고 고독하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 길은 험한 가시밭길이기도 하고 때로는 길 없는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 길없는 길을 가는 자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가는 자들이 결국 승리자가 된다.

 

평생진리를 추구하면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자들은 굶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사회가 아무리 각박하다고 하지만 진리의 길을 가는 자에게는 관대하기 때문이다. 두메 산골에서 일류대학에 진학하는 아이가 나오면 전 주민들이 지원해 주는 것도 이런 이치이다. 유학을 가서 공부한다고 하면 학위를 받기 까지 지원해 주는 것도 진리추구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생진리를 추구하면 어떻게 될까?

 

학업 등 일시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있다. 그럴 경우 가족이 지원해 준다. 가족의 힘이 부족하면 주변에서 지원해 준다. 놀고 먹는 자에게는 인색하고 기혹하지만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면 누군가는 도와 주게끔 되어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출세간적 관점으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순수해서일 것이고 또 하나는 세간적 관점으로서 젊은 사람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실감나는 비유가 있다.

 

초기경에 따르면 작고 하여 어리다고 하여 얕보거나 깔보아서는 안 되는 것 네 가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 네 가지는 무엇인가? 왕족, , , 수행승이다. 여기서 수행승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네 가지에 대하여 작다고 하여 어리다고 하여 무시한다면 큰코 다친다는 말이다.

 

지금 가난한 학생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 것인가? 지금 외국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유학하는 학생이 또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젊은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공부하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누가 도와 주어도 도와 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평생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생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종교인들이다.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직업을 갖지 않는 종교인들이 살아 가는 방식이 있다. 그것은 그들을 후원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진리를 추구한 자가 굶어 죽지 않고 진리의 길을 계속 나아 갈 수 있도록 후원하는 것은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일까 어느 종교에서나 헌금이나 보시가 있다. 자신이 비록 세속에서 때묻게 살고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자 앞에서는 겸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스운 말로 종교장사가 되는지 모른다.

 

진정으로 성공한 자는 누구일까?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굶어 죽지 않는다. 진리의 길을 간다고 하면 누가 도와 주어도 도와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진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특권과도 같다.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비록 외롭고 고독하고 가난한 길을 가지만 결국 남는 것은 진리 그 자체이다. 예술하는 사람이라면 예술작품으로 그 결과가 남을 것이고, 문학하는 사람이라면 시나 소설 등으로 남을 것이다. 수행하는 자라면 자신을 청정하게 함으로서 성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결과로서 남게 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면 반드시 결과로서 남게 된다. 진리 자체가 불멸이기 때문에 진리의 산물 역시 불멸이다. 누군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소설을 썼다거나 음악을 만들었다거나 영화를 만들었을 때 남는다. 결코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진리의 추구에 대한 결과물은 영원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장 가치 있는 삶은 진리의 추구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돈은 그렇지 않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 한다. 그런 돈을 위하여 사람들은 올인 한다. 일생을 다 바쳐서 콘크리트 구조물 하나 갖고자 한다. 좀더 돈버는 재주가 있는 자라면 더 많이 소유할 것이다. 그러나 죽어서 가져 갈 수 없다. 왜 그런가? 무상한 것이 때문이다. 내것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은행의 잔고나 서류에만 있을 뿐 현재 내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안도한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돈은 무상한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세에 가져 갈 수 없다. 가져 가는 것은 행위이다. 그 재산, 그 지위를 획득하기 까지의 과정만 가져 가는 것이다. 그 과정이 불법과 탈법, 불로소득, 심지어 중상모략 등 악행으로 점철 된 것이라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여 성공한 사람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성공이라면 이마의 땀과 팔뚝의 함으로 이룩한 것이야 한다. 그런 재산도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무상한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든 불로소득으로 이루었든 부는 무상한 것이다. 죽어서 가져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부를 축적하기 까지의 행위만 가져 간다. 이렇게 본다면 단지 돈만 많이 벌었다고 하여 성공한 자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성공한 자는 누구일까

 

문학, 예술 등 진리를 추구한 자의 행위는 고스란히 작품으로 남는다. 마치 책을 사 놓으면 그대로 남아 있듯이 작품은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 한끼 맛있는 황제식을 하였다면 목구멍으로 넘어 가는 순간 똥으로 나오고 말것이다. 그러나 한번 사 놓은 책은 결코 닳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듯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행위에 대한 결과는 끝까지 남는다. 돈은 결국 배신하고 말 것이지만 진리추구 결과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정한 성공은 돈과 무관한 것이다.

 

천문학적 재산을 가진 자를 성공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재화는 무상한 것이다. 언젠가 모두 없어지고 말 것이다. 특히 죽음에 임박해서 가져 갈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은 남는다. 죽어서도 어떤 이에게 감동을 준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자야 말로 진정한 성공인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진정한 성공은 무상하게 변하는 돈이 아니라 진리의 행위에 대한 결과물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성석제의 소설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석제와 같은 소설가에 대하여 성공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줄 수 있다.

 

값지게 살아야 해!”

 

진정한 성공인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작은 성공도 무수히 많다.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 하는 것이다. 이는 라이언일병 구하기에서도 볼 수 있다.

 

EBS에서 라이언일병 구하기를 보았다. 영화 말미에 총에 맞아 죽어가는 중대장은 라이언 일병에게 값지게 살아야 해!”라는 말을 남긴다. 라이언 일병은 이 말을 간직하고 평생 살아 간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부분에서 중대장의 비석을 만지면서 자신은 인생을 값지게 살았다고 보고 한다. 여기서 값지게 살아야 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삶 또는 자신의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값짐이라는 말과 가치라는 말을 동의어로 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비록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3D업종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가치를 부여 하면 전혀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할지 모른다. 새벽에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가 이세상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청소한다는 마음을 가졌을 때 어떨까? 천만금을 가진 것 보다 더 값어치 있는 일이라 여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생을 값지게 사는 것이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값지게 사는 자에게 타인의 부귀영화는 남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하루 삶은 고달프다. 그것은 자신의 등에 너무 많은 짐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삶에 대한 시가 있다. ‘내등의 짐’ 이라는 시이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내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내등의 짐)

 

 

누구나 등에 짐을 지고 살아 간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라면 짐의 무게는 더 나갈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고 가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짐은 부담이 되어 벗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짐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등에 감당할 수 없는 짐이 있었기에 늘 자신을 경책하며 조심스럽게 살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등에 잔뜩 짊어진 짐에 대하여 인생을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라 한다.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

 

모두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다. 산행을 하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또 평탄한 길도 있듯이 인생길 역시 마찬가이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더욱 더 굴곡진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인생을 산다라 하기 보다 인생길을 간다라 하는지 모른다.

 

인생길은 늘 행복과 괴로움의 연속이다. 그래서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라 하였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평온일 것이다. 이 모두는 느낌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늘 즐거움과 괴로움과 줄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발생한다.

 

느낌이 일어날 때 마다 사람들은 느낌에 휘둘린다. 그렇게 되면 괴로움이 끊임 없이 발생한다. 괴로움은 괴로움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지만 즐거움 역시 결과적으로 괴로움으로 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그 행복이 오랫동안 유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일 뿐이다.

 

행복한 느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하지만 이는 단지 바람일 뿐이다. 행복한 느낌이 오래 지속 되지 않아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느낌은 괴로운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행복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자신의 욕망의 작용이라고 알아 차리면 그 뿐이다.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을 가져가는가?

 

지금 괴로운 자는 행복을 바라고,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성공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단지 물질적인 것을 행복이라 여겨 물질적 성공에 올인하는 것은 나중에 ()’()’로 귀결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나방이 되는 것 같다.  

 

행복한 자나 성공한 자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 하는 자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값진 삶이 된다. 인생을 값지게 살았을 때 충분히 보상을 받고도 남는다. 그것은 자신의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세에 재산이나 지위를 가져 가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과보를 가져 간다. 이에 적합한 게송이 있다.

 

 

“죽음의 신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버려야 할 때

무엇이 진실로 자기의 것인가?

그는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

그를 따라 다닐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만든

공덕과 죄악, 바로 이 두 가지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것,

그는 그것을 가지고 가네.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

그것이 그를 따라 다니네.(S3.4)

 

 

사람은 죽어서 평가 받는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는 한 점에 귀결 되고 만다. 마치 영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의 대화처럼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있도록 그토록 많은 사건이 있었던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국 가져 가는 것은 재산이나 지위가 아니다. 그가 살아 오면서 지은 행위를 가져 간다. 그것은 공덕행아니면 악행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 하여 값지게 살았다면 그의 인생은 성공이다. 그래서 마치 그림자가 자신의 몸에서 떠나지 못하듯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만든 공덕과 죄악, 바로 이 두 가지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것, 그는 그것을 가지고 가네(S3.4)”라 하였다.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이지만

 

S와 산행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관점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차이를 좁혀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굴곡진 산길을 걸어 가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까지 다가 왔다. 삼성산이다.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이지만 가기에는 너무 멀다.

 

 

 

 

 

 

 

삼막사의 국수공양

 

안양유원지로 빠지기 위해서는 삼막사길로 가야 한다. 삼막사에는 늘 그렇듯이 국수를 먹기 위한 긴 줄이 형성되어 있다. 오후 1시가 약간 넘었음에도 국수공양이 계속되는 모양이다. IMF 힘든 시절에 일터를 잃은 수 많은 사람들이 관악산으로 출근하였다는데 이렇게 국수한사발 먹어도 큰 위안이 되었으리라 본다.

 

 

 

 

 

소풍왔었다는 염불사

 

삼막사에서 안양유원지길은 산 하나 넘어 가면 된다. 계속 내리막길이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내려 가다 보면 염불사가 나온다. S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초등학교 다닐 때 이곳으로 소풍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전각이 여러 개 되는 큰 절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것은 절벽 위에 만들어져 있는 석상이라 하였다.

 

 

 

 

 

길고 긴 산행이 끝나고

 

염불사에서 안양유원지로 내려 가는 길은 평탄하다. 요즘은 절 입구까지 도로가 닦여 있어서 걷기에 부담이 없다. 그러나 등반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좋은 길을 놔 두고 일부로 등산로를 이용하여 내려 갔다.

 

안양유원지에 도착하였다. 길고 긴 산행이 끝난 것이다. 마치 인생길에서 여정을 마친 것 같은 기분이다. S는 잘 아는 해물칼국수집을 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사 주었다. 사 준 것을 맛있게 잘 먹는 것도 예의 일 것이다. 다음 산행에서 보답을 하면 될 것이다.

 

 

 

 

 

 

S와 둘이서 하는 산행에서 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아마 이렇게 많이 이야기 해 보기는 처음 이다. 입학동기로서 그 동안 드문드문 만난 적이 있지만 이렇게 산행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끊임 없이 해 보기는 처음이다.

 

EBS용서라는 프로가 있다. 평소 소원하였던 친구나 가족 등이 배낭여행을 통하여 ‘화해’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본다면 친구와의 산행이야말로 매우 값진 것이다. 서로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오해할 수 있는 것도 풀려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준 친구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친구에게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것은 청력에 대한 것이다. 한쪽이잘 들리지 않아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하였다. 부디 수술이 잘 되어서 좋은 결과가 되었으면 한다.

 

단풍절정의 안양유원지

 

밖으로 나오니 가로가 온통 울굿불긋 하다. 쌀쌀한 11월 초 안양유원지 길에 단풍이 절정이다. 비록 몇 일 있으면 모두 지고 말 것이지만 그런 것이 아쉬워서일까 사람들은 열심히 단풍을 카메라에 담는다.

 

 

 

 

 

 

2014-11-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