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희망의 전조, 해남기행(1) 땅끝에서 본 해맞이
특별난 여행을 하였다. 해남이 고향인 친구가 있어서 ‘땅끝마을’까지 가게 되었다. 여행의 본래 목적은 친구의 결혼식 참석이다. 그 나이에 무슨 결혼식이라 할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결혼식이다. 친구자녀의 결혼식이 아니라 친구 본인의 결혼식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혼식’이다.
머나먼 땅끝으로
친구결혼식은 몇 달전부터 공지되었다. 카톡방을 통하여 공지되었고, 한차례 함께 산행을 하였다.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라 하는데 동기들 모임의 정기산행에 참가 함에 따라 모두 알게 되었다.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머나먼 땅끝 마을까지 가게 되었다.
땅끝마을까지 가게 된 것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가장 큰 목적은 서혼식에 참석 하는 것이고 부차적으로 정기산행을 하기 위해서이다.
서혼식은 토요일 오후 5시에 열린다. 레저용 차량에 5명이 탑승하여 목적지로 출발하였다. 토요일 오전에 달마산 산행을 하고 오후에 서혼식에 참석하는 일정이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남으로 남으로 향해 차를 달렸다. 갈데까지 끝까지 가는 것이다. 땅의 끝까지 간 것이다.
땅의 끝에 도착한 것은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 이었다. 무려 5시간 반 가량 차를 타고 온 것이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매우 불편하였다. 그러나 오랜 만에 함께 떠나는 ‘일박이일’의 여행이어서일까 재잘재잘 떠들며 가다 보니 시간이 금방 시간이 지나간 것 같다.
땅끝 팬션에 도착하여
주방시설이 되어 있는 팬션에 도착하였다. 어디를 가나 ‘땅끝’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팬션 역시 땅끝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팬션에 들어 가니 방이 매우 넓다. 주방시설도 갖추어져 있어서 요리를 해 먹을수 있다. 짐을 풀고 난 다음 주변을 한번 둘러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주변은 썰렁하였다. 비수기이어서 일 것이다. 단 한집만이 문을 열었다. 팬션 바로 옆에 있는 수퍼를 겸하고 있는 해물 칼국수 집이다. 일행이 들어 가니 주인이 반갑게 맞이 해 준다.
지역에서 생산된 미역과 전복 등 해산물로 상차림을 준비해 준다. 장시간 이동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따끈한 해물칼국수를 접하자 쌓인 피로가 풀린다. 남도 특유의 맛에 지역 특산품을 곁들인 상차림이다.
늦은 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되돌아 왔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 한방에 함께 있는 것도 매우 오랜만이다. 아마 수학여행을 간 이래 처음인 것 같다.
그 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 왔으나 본질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머리는 반백이 다 되어 가고 피부는 거칠어져 세월의 티가 나지만 성격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세월무상과 함께 신체무상이 되었으나 마음만은 무상을 거부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나서일까 쉽게 잠을 못 이루는 것 같다. 자정이 훌쩍 넘었지만 그냥 자기가 아쉬웠나 보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함에도 옛날 했던 습관들이 나온다. 잔디밭에서 즐겨 하던 카드놀이에 몰두 한다. 세월만 흘렀을 뿐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잠을 자는 사람은 잠을 자고 노는 사람들은 떠들며 보낸다. 그러나 새벽 세 시가 되자 잠잠해졌다. 다음 일정을 위하여 잠을 자야 했다.
아침이 되었다. 너무 늦게 잠에 들어서 일까 창밖이 훤하게 밝았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땅끝에서는 왜 희망을 이야기할까?
창밖이 밝아지자 후다닥 일어났다. 그것은 땅끝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이다. 모두 자고 있는 틈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해안가로 분주하게 발걸음 하였다.
바다가 보이는 땅끝마을에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그러나 차갑지는 않다. 절기상으로 이미 봄이기 때문에 바람이 세차지만 얼굴로 체감하는 느낌은 부드럽다.
이른 아침 땅끝 마을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디론가 떠나는 커다란 페리호가 출항을 대기하고 있다. 주변을 보니 각종 조형물로 넘쳐 난다. 주로 희망과 관련된 것들이다. 조형물 중에 ‘희망의 손’이라 하여 두 손을 형상화한 것이 눈에 띈다.
두 손 조형물은 어떤 의미일까? 설명문을 보니 ‘희망의 손’이라 한다. 땅끝을 찾는 사람들이 희망을 기원하는 의미의 조형물이다. 더구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희망의 손, 희망의 종, 희망공원 등 땅끝에는 희망이라는 말로 가득하다. 땅끝에서는 왜 희망을 이야기할까?
땅끝에는 여러 시비도 있다.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는 땅의 끝에서 시인들은 어떻게 노래 하였을까? 명기환 님의 땅끝의 노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땅끝의 노래
(명기환)
더 이상 갈 곳 없는 땅끝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노래 부르게 하소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욕심의 그릇을 비우게 해 주시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용서의 빈 그릇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소서
땅의 끝
새로운 시작
넘치는 희망으로
출렁이게 하소서
시인은 땅끝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하였다. 더 이상 갈 수 없어서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 지난 날을 되돌아 보게 되고 잘못을 뉘우치며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음을 노래 하고 있다.
땅의 끝, 이 세상의 끝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는 곳이 있다. 벼랑, 동굴, 해안가 등을 말한다. 벼랑 끝에 내 몰렸을 때 심정은 어떠할까?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이 벼랑에 섰을 때 삶의 기로에 서 있을 것이다.
시인 김지하의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2002년 프레시안에 연재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를 말한다. 땅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꽃들이 지고 계절이 가고 있었다. 나의 짝사랑, 그 애틋했던 사랑도 가고 혁명도, 그 순결했던 혁명도, 세계 현대사에 새로운 에포크를 만들어낸 학생 주도의 그 새 타이프의 혁명도 가고 없었다. 선배인지 동료인지 후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무렵 한 대학가의 음유시인의 시에는 이런 유행가같은 구절이 있었다.
“계절도 사랑도 혁명도 가고 ….”
함께 미학과를 다니던 한 라디오 드라마 작가의 주제가에도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그러나 그 무렵 나의 고통은 낭만이 아니었다. 하물며 감상(感傷)은 더욱 아니었다.
잎새 빛 짙어가는 초여름 한낮 눈부신 땡볕 아래 나는 내 고향 목포의 한 부두에 혼자 우뚝 서 있었다. 대낮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입에서는 가끔씩 핏덩이를 뱉어내며…. 브리지의 한 간판에는 ‘땅끝행’이라고 행선지 표식이 있었다.
땅끝! 이 세상의 끝! 이 지구의 끝! 그런 곳이 정말로 있는 것일까? 땅 끝에 가고 싶다. 가서 이 목숨을 이제 그만 접고 싶다. 내겐 살 이유가 별로 없었다.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스물 한 살이었던 김지하 시인은 “땅끝”이라는 말에 눈과 귀가 번쩍 뜨여 무작정 “땅끝”행 버스를 탔다. 4.19혁명의 꿈도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목숨처럼 사랑했던 연인도 떠났고, 붉은 각혈만 쏟아내는 부실한 몸으로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김지하에 있어서 땅끝은 어떤 의미일까? 기사에 따르면 “결국 땅끝이었다. 이 세상의 끝! 그것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정치 프로그램도 없는 반란, 세계와 역사와 성스러운 모든 가치 자체에 대한 원생명(原生命)의 반역이었고 바로 그 원초적 반역이 불지피는 미친 기쁨의 세계였다. 이것이 나의 '땅끝'이었다.”라 하였다. 그에게 땅끝은 마음의 끝이었고, 세계의 끝이었고, 방황의 끝이었고, 삶의 끝이었던 것이다.
김지하는 땅끝에서 자살하고자 하였다.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였을 때 땅의 끝, 세상의 끝에서 생을 마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땅끝 속으로 인생을 마감하지 못하였다. 그의 서툰 자살시도는 실패로 끝난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이 있다. 벼랑에내 몰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땅의 끝이다. 땅의 끝이라는 말이 암시 하듯이 세상의 끝과도 같다.
그런데 땅끝의 이미지는 땅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이든 땅끝이 된다. 절벽도 땅끝이고 동굴도 땅끝이다. 해안가 역시 땅의 끝이다. 삶에도 땅끝이 있다.
유명기도처는 왜 막다른 곳에 있을까?
현재 잘 나가는 사람에게는 앞길이 구만리와도 같다. 그러나 지금 곤란에 직면한자에게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깊이를 알 수 없고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한없이 추락한다. 그 끝을 알 수 없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끝이 확인되면 반전할 수 있다. 바닥이 확인 되었을 때 바닥을 치고 올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벼랑에 내몰렸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해안가에 이르렀을 때 되돌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절벽에 이르렀을 때 역시 되돌아 갈 수 있다. 그래서일까 유명기도처는 막다른 곳에 있다.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세워져 있는 기도처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막다른 곳에 몰린 자들이 막다른 곳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동굴에도 기도처가 많이 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끝이 보인다. 그곳을 막장이라 부를 수도 있다.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는 곳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해변이 있다. 육지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인 해안 절벽가에는 유명기도처가 많이 있다. 사대관음성지가 모두 해안가에 있는 이유이다.
유명기도처에서는 한발만 앞으로 내딛으면 떨어져 죽고 만다. 삶의 기로에 선 자들이 막다른 곳에서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더 이상 막다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끝을 확인하였기에 되돌아 갈 수 있다.
새벽은 희망의 전조
이른 아침 땅의 끝으로 같다. 우리나라 최남단으로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저 멀리서 해가 떠 오른다. 그것도 커다란 해가 불쑥 솟아 오른다.
막다른 골목, 절벽, 동굴, 해안가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네.
막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이
삶의 벼랑에 서 있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네.
이 거센 삶의 흐름을
도저히 건널 수 없네.
삶의 끝에 이른 사람이
갈 데까지 가보네.
가다 가다 가보니
땅의 끝이네.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는
그곳 삶의 끝에 서 있네.
떠 오르는 태양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보았네.
이른 아침 저 멀리 바다
먼 곳에서 해가 솟구치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 아침에도 커다란
시뻘건 불덩이가 솟았네.
해가 뜨기 전에 날이 밝는다. 새벽은 해가 뜨는 전조와 같다. 동녁이 훤해 지는 것은 해가 뜬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다. 이른 아침 사방이 환하게 되었을 때 마침내 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땅의 끝에 이르렀다는 것은 희망의 전조와 같은 것이다.
2015-04-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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