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교개혁은 한글삼귀의문부터 뜯어 고쳐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28. 12:56

 

 

불교개혁은 한글삼귀의문부터 뜯어 고쳐야

 

 

영담스님에 대한 기사

 

불교닷컴에 영담스님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새로 개원된 종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았으나 신상발언 도중에 물러난 최다선 스님을 말한다. 현총무원장을 따르는 다수의 종회의원 스님들의 열화와 같은 집중 포화에 못이겨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내려온 것이다.

 

영담스님이 다 말하지 못한 것은 조계종단이 안고 있는 경악할 만한 비리에 대한 것이다. 승가에서 도저히 있어서는 안되는 도박, 성매수, 음주, 폭행 등을 언급하며 참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다수를 점한 여당의원들에게 묵살 되었다.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는 것에 대하여 듣기가 불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영담스님은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임시의장석에서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최근 불교닷컴 기사에서 영담스님의 못다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돈·권력의 노예됐다... 부처님만 놔두고 바꿔야"(2014-11-27, 불교닷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그런데 이 기사내용은 오마이뉴스에서도 같은 제목(2014-11-27)으로 그대로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불교닷컴과 제휴가 되어서 일 것이다.

 

오마이뉴스에서 대문으로

 

오마이뉴스는 진보매체로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인터넷 신문이다. 그런데 불교계의 치부를 드러내는 보도가 톱면에 그것도 대문으로 실렸다면 아마 수백만명이 보았을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불교망신에 해당된다. 교계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공중파방송을 탄다든가 인터넷신문에 보도 되었을 때 불교의 위상은 추락하고 만다.

 

오마이뉴스기사에서는 중앙종회개원 동영상이 올려져 있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내용과 동일 하다. 이 동영상과 관련하여 “스님들! 지금 장난해요?”조계종은 요지경(2014-11-2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오마이뉴스 기사보다 다섯 시간 빠르게 올린 글이다.

 

문제의 동영상을 보면

 

문제의 동영상을 수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다. 머리를 깍고 가사를 수한 스님들이 스님, 그러시면 안되죠?”라며 임시의장 스님을 끌어 내리려 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 국회의원들의 행태 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을 것이라 여길 것이다.

 

기사에서는 못 다 읽은 참회록이라 하여 종단의 문제점을 조목조목지적하고 있다. 특히 적광스님에 대한 납치, 감금, 폭행사건과 연수원에서의 스님들의 밤샘술판 사건을 언급하여 이것이 오늘날 조계종의 민낯이라 하였다. 이어지는 기사를 보면 어디 이뿐입니까? 결혼하거나 성 매수를 한 수행자를 문서견책하고, 술에 취해 대리운전기사를 골프채로 폭행해 징역형을 선고받아도 동국대 감사로 추천하고 수말사 주지로 임명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라 하였다. 그러자 여당의원여당의원부터 거센 반발을 샀고 급기야 단상을 내려 오게 되었다.

 

잊을만 하면 터지는 승려비리

 

잊을만 하면 승려들의 비리가 터져 나온다. 그것도 전국민들이 시청하는 지상파방송을 통하여 전파를 타고, 네티즌들이 가장 많이 본다는 인터넷뉴스의 대문에 실린다. 이런 보도를 접할 때 마다 불자로서 자괴감을 느낀다. 타종교인과 함께 어우러져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다. 속된말로 쪽팔려서 불자로서 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승려들의 범계행위가 교계내부에서 걸러지지 않고 세상 밖으로 회자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일차적으로 스님들의 잘못이 크지만 이를 감시해야 할 재가불자들의 책임도 크다. 소위 개판치는 스님, 깽판치는 스님들 때문에 불교와 불자들이 공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들이 스스로 성찰하여 참회함으로서 초심으로 되돌아 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이코패스나 이권만을 탐하는 소시오패스, 소위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개혁하기를 바라는 것은 스스로 머리 깍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재가불자들이 일어서고 있다.

 

닭발, 족발을 물려서 그런가?

 

개판치는 스님, 깽판치는 스님이 있어도 이를 나무라는 스님이 없다. 마지막 보루인 수좌회가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용두사미이다. 이는 지난 총무원장 선거 당시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수좌스님들은 천막을 치며 기세등등하게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찌 된일지 몇 일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사라진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불교저널에서는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어이없는 철수, 불교저널 2013-09-17)’라는 기사를 내 보냈다.

 

정봉주의 전국구에 출연하는 어느 스님 이야기대로 닭발, 족발을 물려서 그런 것일까? 수좌스님들 마저 침묵하다 보니 이제 조계종은 권승들의 세상이 되었다. 마치 닭들이 모이를 헤쳐 먹듯이 문중끼리 파벌을 형성하여 헤쳐 먹는 듯 하다. 이럴 때 마지막 보루가 재가불자일 것이다. 그래서 재가불자연대모임을 만들고 서명을 받고 있다. 또 재가불자들이 모여서 결의대회를 할 것이라 한다.

 

비극적인 1998년도 종권다툼

 

조계종에서 90년대 두 번의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94년과 1998년에 일어났던 종권다툼이다. 그 때는 스님들과 스님들의 다툼이었다. 승려대회를 열어 압박하는가 하면 총무원청사를 점거 하기도 하였다. 총무원청사를 점거하면 성공한 쿠데타로 간주 되던 시기이었다. 실제로 94년 종권타툼이 그렇다.

 

1998년의 종권다툼은 비극적이었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위상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스님들이 각목을 들고 마치 조폭처럼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 지상파방송을 통하여 온국민에게 전달되었고, 심지어 CNN등을 통하여 세계적인 뉴스가 되기도 하였다.

 

1998년에 일어난 종권다툼으로 한국불교는 많은 것을 잃었다. 이에 대하여 스님이 아니면 소임을 맡을 없나, 출재가 평등권과 1998 종권다툼(2011-03-2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1998년 연일 계속 되는 싸움으로 인하여 국민들은 물론 불자들도 시선을 돌렸다. 소문으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 때 당시 불교를 떠난 불자가 대략 백만명에 달하였다고 하였다. 그 사건 이후로 재가불자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교단자정센터를 만들었다. 그래서 스님들의 범계행위위 비리행위를 사전에 발견하여 문제가 터지지 않도록 하였다.

 

스님들의, 스님들에 의한, 스님들을 위한 불교인가?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종권을 쥐고 있는 스님들의 손에 달려 있다. 한국불교에 대하여 비구승의 것이라 생각하는 스님들의 합종연횡으로 부적격자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 갔기 때문이다. 이는 교단자정센터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국불교가 스님들의, 스님들에 의한, 스님들을 위한 불교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약점이 많은 총무원장스님

 

현 자승총무원장은 문제가 많은 승려이다. 현재 2선을 하여 총 8년간 한국불교를 대표하지만 수 많은 구설수에 올라와 있다. 약점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정권의 입장에서는 약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약점을 이용하여 정권에 유리하게 써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한국불교가 이렇게

 

이처럼 약점이 많은 자승스님에 대하여 교단자정센터에서는 이미 경고한 바 있다. 합종연횡에 따른 총무원장선거로 유력시 되는 자승스님에 대하여 은처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2009년 당시 미디어붓다의 이학종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고 하였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조계종 총무원장은 독신 비구여야 한다”는 이런 상식중의 상식을 고심 끝에 천명할 지경에 이르렀는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은처승, 도박승, 부패승은 교단을 붕괴시키고 불법을 쇠멸시키는 사자신충들이다. 자비행의 대상이 될지언정 그가 12백만명을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최소한의 상식이 이번 선거에서는 통용되지 않고 있다. 대중의 민의를 검증하는 축제가 아니라, 조계종은 물론 한국불교 전체를 나락에 빠뜨리는 독화살이 될까 우려스런 지경이다.

 

우리는 먼저 이번에 총무원장이 되고자 출마한 분들에게 정중히 촉구한다. 독신 비구가 아닌 분들은 최소한의 양심을 보여 즉시 총무원장 후보에서 자진사퇴하여야 한다. 은처, 도박, 부정부패의 전력이 있거나, 그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분은 후보직을 사퇴하고, 다른 방식으로 종단에 봉사할 길을 찾기를 호소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애종애불하는 자세일 것이다.

 

(獨身 아니면 후보에서 물러나라” 자정센터, 사실상 특정후보 퇴진 촉구, 미디어붓다 2009-10-13)

 

 

이 기사는 재가자들의 모임인 교단자정센터에서 발표된 성명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2009년 당시 권력승들의 합종연횡에 따라 사실상 추대로 당선이 확실시 되는 자승스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우려가 현실로

 

5년이 지난 지금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성명서에 따르면 은처의혹을 받고 있는 자승스님이 당선되자 은처승, 도박승, 부패승이 활개를 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계종은 물론 한국불교 전체를 나락에 빠뜨리는 독화살이 될까 우려스런 지경이다.”라 예언한 것이 적중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승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승려도박, 승려밤생음주 등 지상파와 인터넷뉴스에 보도 되었다.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실상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불자들은 쪽팔려서 불자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갑질 하는 것처럼

 

더 이상 한국불교를 스님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불교가 스님들만의 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는 사부대중의 불교로서 재가의 우빠사까(청신사)와 우빠시까(청신녀)도 당당히 두 개의 축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스님들이 이고 재가자들이 마치 처럼 보인다. 그런데 갑의 횡포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마치 갑질 하듯이 재가자를 하대하는 가 하면 은처, 음주, 도박, 폭력 등 망나니 짓을 한다.

 

갑을 관계에 있는 한국불교에서는 더 이상 승가가 존재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는 한글삼귀의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해할 수 없는 한글삼귀의문

 

한글삼귀의문에는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승보에 대한 것이다. 한글삼귀의문에서 세 번째 구절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불교에는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삼귀의는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상가(Sangha)에 귀의 하게 되어 있다. 그래야 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가 대신에 스님에게 귀의하라니! 대체 이건 어느 나라 불교인가?

 

있다면 재가상가일 것

 

한국불교에 상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재가의 상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 재가승가인가? 그것은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재가의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머리깍고 승복을 입긴 입었지만 수 백가지나 되는 구족계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비구라 볼 수 있을까? 또 은처하며, 음주하고, 도박을 일삼는 자라면 이를 스님이라 부를 수 있을까?

 

부처님은 행위에 의하여 브라만도 되고 농부도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머리깍은 스님들이 세속 사람들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하찮은 일에 열중하였을 때 이를 스님이라 볼 수 있을까?

 

도박에 열중하는 스님이라면 도박자일 뿐이다. 은처하여 처자식을 거느리고 있다면 재가자일 뿐이다. 머리깍은 재가자를 말한다. 그런 재가자로 이루어진 것이 재가승가이다. 한국불교에는 출가승가는 없다고 다만 있다면 일본처럼 재가승가만 있을 뿐이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못하는 것이 없는 스님들

 

행위에 의하여 신분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는 태생에 따른 것이 아니다. 스님이라 하여도 스님의 행위를 하지 않으면 스님이라 볼 수 없다. 스님임에도 사찰음식에 전념한다면 요리사일 뿐이다. 그럴 경우 차라리 승복을 벗고 음식점을 개업하여 장사를 해야 할 것이다. 노래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스님이라면 스님으로서의 행위를 하였을 때 스님인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이 못하는 것 없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그림이면 그림, 음식이면 음식, 심지어 도박이나 은처 등 세속에서 하는 모든 것을 다하는 곳이 한국불교의 스님들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속에서나 볼 수 있는 여와 야의 국회와 같은 기능을 갖는 종회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여와 야로 나누어 싸운다. 이번 개원종회에서 임시의장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끌어 내린 것도 세속화 되었기 때문이다.

 

머리깍은 재가자들로 이루어진 재가승가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출가자들이 아니다. 행위가 재가자의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불자들에게 삼배하라고 한다. 스님들을 부처님과 동급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님을 부처님과 동급으로 보기 때문에 삼배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님들이 사실상 재가자와 다름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스님들의 재가행위에서도 드러나기도 한 것이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한국불교는 승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귀의문 그 어디에도 승가 또는 상가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이유이다. 다만 있다면 재가승가가 있을 뿐이다. 머리깍은 재가자들로 이루어진 재가승가를 말한다.

 

왜 승가에 귀의해야 하는가?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서 불자가 된다. 이 때 삼보는 당연히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이다. 이는 초기경전에도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한글 삼귀의문(三歸依文) 문제점 가지(2013-04-3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스님이 아닌 승가에 귀의해야 하는가?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승가의 존속이유가 없어진다

둘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자자와 포살이 있을 수 없다

셋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에게 보시하게 된다

넷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승보에 대하여 스님으로 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대로 승가에 귀의 해야 하는 것이다.

 

재가자가 재가자에게 귀의 하지 않는다

  

재가자가 재가자에게 귀의 하지 않는다. 재가자는 삼보에 귀의 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자가 된다. 이는 마하나마경에서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가르침에 귀의 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됩니다. Yato kho mahānāma, buddha saraa gato hoti, dhamma saraa gato hoti, sagha saraa gato hoti, ettāvatā kho mahānāma, upāsako hotīti.(S55.37)”라고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글삼귀의문을 고수 하는 한 한국불교에는 승가도 없을 뿐 더러 엄밀한 의미에서 재가불자도 없게 된다.

 

정체성의 대혼란

 

한글삼귀의문을 고수하는 한 한국불교에는 승가도 없고 재가불자도 없다. 첫단추부터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님들의 이기심 때문이라 본다. 부처님 가르침 대로 승보를 상가로 해야 하나 한국불교에서는 어찌된 일이지 스님들을 귀의의 대상으로 삼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승보가 스님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스님을 부처님 모시듯 하며 삼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상한 불교가 되었다.

 

이는 정체성의 대혼란이다. 오늘날 스님들의 범계행위가 끊이지 않는 것도 시작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승가를 복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삼귀의문을 바꾸는 것이다. 기존의 한글삼귀의문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말 대신에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불교가 바로 선다.

 

삼귀의문부터 뜯어 고쳐야

 

스님들이나 불자들의 귀의의 대상은 스님들이 아니라 승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보시도 스님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승가에 해야 한다. 이렇게 승가가 있어야 스님들이 포살과 자자를 행하게 된다.

 

계율대로 살면 성자가 출현하게 되어 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사쌍팔배의 성자들을 말한다. 이렇게 사쌍팔배의 승가에 공양하면 커다란 과보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승가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의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가 된다.

 

승가가 있어야 성자가 출현하고 궁극적으로 아라한이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전승되게 하려면 승가가 있어야 한다.

 

성스런 승가가 존속한다면 스님들의 막행막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은처, 도박, 음주, 폭행 등 재가불자들을 쪽팔리게 하는 행위는 발생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 가정 먼저 해야 할 일은 삼귀의문부터 뜯어 고치는 것이다.

 

 

 

Ti-Saran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Buddham Saranam Gacchâmi.
Dhammam Saranam Gacchâmi.
Sangham Saranam Gacchâmi.

Dutiyampi Buddham Saranam Gacchâmi.
Dutiyampi Dhammam Saranam Gacchâmi.
Dutiyampi Sangham Saranam Gacchâmi.

Tatiyampi Buddham Saranarm Gacchâmi.
Tatiyampi Dhammam Saranam Gacchâmi.
Tatiyampi Sangham Saranam Gacchâmi.


띠사라나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쌈 붓다싸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쌈 붓다싸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쌈 붓다싸

 

붓당 사라낭 가차미

담망 사라낭 가차미

상강 사라낭 가차미

 

두띠얌삐 붓당 사라낭 가차미

두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두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따띠얌삐 붓당 사라낭 가차미

따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따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삼귀의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가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두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로 상가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세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로 상가에 귀의합니다.

 

 

보디찌따그룹의 띠사라나(Tisarana, 삼귀의)

 

 

 

 

2014-11-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