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꼬삼비 비구들의 분열과 열여덟 가지 원칙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1. 12:50

 

꼬삼비 비구들의 분열과 열여덟 가지 원칙

 

 

 

주말 청계산에 올랐는데

 

지난 주말 토요일 청계산에 올랐다. 학교친구들과 함께 올랐다. 모두 세 명이다. 카톡방에는 이십여명이 등록되어 있지만 한달에 한차례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산행에 참가하는 인원은 적었다. 이유를 들어 보니 모두 사정이 있다. 모두 바빠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일년내내 바쁘지는 않을 것이다.

 

청계산은 생각보다 큰 산이다. 산이 높아서 크다기 보다 너른 지역에 걸쳐 있어서 큰 산이다. 서울과 성남과 의왕에 걸쳐 있어서 면적만으로 본다면 관악산이나 북한산 만큼이나 크다. 그래서일까 토요일임에도 등산객으로 넘쳐난다. 약속장소인 청계산입구역은 온통등산객들 뿐이어서 그야말로 등산역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등산로 초입에 목탁소리가

 

청계산입구역에서 등산이 시작되었다. 등산로 초입에 이르자 목탁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비구니스님이 가사를 입고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목탁을 치고 있다. 불자로서 보기가 민망하였다. 혼자 가면 모를까 옆에는 친구 두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친구는 모두 성당에 다닌다.

 

비구니스님을 지나쳐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또 목탁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번에는 비구스님이 목탁을 치고 있다. 역시 가사를 수하고 있다.

 

 

 

 

 

그런데 아래에서 본 비구니스님이나 위에서 본 비구스님은 감관이 맑게 생겼다. 앞에는 보시함이 있어서 목탁으로서 보시를 유도하고 있지만 누구도 함에 돈을 넣지 않는다.

 

탁발을 금하는 한국불교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는 목탁치는 스님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렇게 등산로에서 만나는 스님들을 볼 때 마다 불자로서 착잡하다. 한국불교에서는 공식적으로 탁발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적 상황에서는 불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테라와다에서는 탁발하는 것은 적법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탁발하는 것이 불법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서 등산로는 물론 거리에서 탁발행각을 하는 스님들을 보면 보기에도 민망하고 또 한편으로 안쓰러워 보인다. 그래서 탁발하는 스님을 보면 항상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이날 청계산입구 등산로에서 본 비구니와 비구스님 역시 그랬다

 

달마도부적을 파는 스님

 

탁발행각을 하는 스님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수 년 전 식당에서 겪은 경험 때문이다. 그 때 당시 이번에 등산을 함께 한 친구 두 명과 또 다른 친구 두 명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명이 영등포에서 저녁을 함께 하였다. 함께 한 친구들 네 명은 모두 교회와 성당에 다니고 있다.

 

식당에 비구니 스님 두 명이 들어와 테이블을 돌아 다녔다명함 크기의 달마도를 파는 것이었다. 일종의 부적이다.

 

 

 

 

 

 

스님은 테이블을 순례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우리 테이블로 가까이 오게 되었다. 그러자 피하고 싶었다. 술집에서 스님들이 탁발행각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자로서 자존심이 상하였기 때문이다. 옆에는 교회다니는 친구도 있고 성당다니는 친구도 있는데 그들 보기가 민망하였다.

 

스님이 테이블로 다가오자 옆에 있는 친구가 뭐해!”라며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었다. 불자로서 아는 체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만원을 주고 달마도를 구입하였다.

 

나중에 달마도를 확인 하여 보았다. 수덕사에서 만든 것이다명함크기러 금박이 입혀진 달마도에는 수덕사라 쓰여 있었다. 그래서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수덕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랫더니 전화를 받은 비구니 스님은 수덕사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수덕사를 사칭하여 돈벌이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달마부적과 수덕사, 식당을 돌아 다니는 비구니 스님(2010-09-0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청계산입구에서 본 목탁치는 스님을 보기가 민망하였던 것이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탁발하는 스님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테라와다불교처럼 순수한 의미의 탁발이 아니라 장사속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발행각에 대한 비판의 글을 여러 차례 올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탁발하는 스님들의 계행이 어떤지는 알 수 없어도 걸식하는 그 정신 만큼은 존중해 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간은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최근 조계종단 권승들의 행태를 보고 나서 부터이다.

 

조계종단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스님들의 행태에 대하여 재가불자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최근에 송담스님의 탈종사태가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승려들의 도박, 음주, 폭행, 은처 등의 범계행위가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근본 원인이다.

 

이런 문제가 교단 내부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지상파방송을 타고 신문에 보도 되어 수 백만명의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불자들은 자신이 불자라고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다종교사회에서 개신교인이나 천주교인과 함께 어루러져 살아야 하는 불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속된 말로 쪽팔려서 불자노릇 하기 힘든 것이다 

 

등산로 입구에서 목탁을 치는 스님을 만났을 때 민망하였다. 그러나 가장 염려 하는 것은 모임에서 승려들의 도박이나 음주 등이 회자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불자로서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대략난감하다.

 

포교원이 있으면 뭐하나?

 

스님들이 매스컴에 나쁜 일로 뉴스거리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잊을 만하면 스님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한번씩 뉴스에 오르내릴 마다 신도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포교원을 만들어 아무리 포교를 열심히 한다고 하여도 스님들이 밤샘도박을 하고, 밤샘술판을 벌였다는 뉴스가 보도 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린다. 그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였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재가불자들이 나선 것이다. 이때 명분으로 들고 나오는 말이 꼬삼비비구이야기이다.

 

최후의 방법이 있는데

 

꼬삼비이야기는 문제를 일삼는 빅쿠들을 효율적으로 제압하는 이야기이다. 승려들이 분열을 일으켜 서로 싸울 때 공양을 거부함으로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재가자의 공양거부는 비구가 비구를 견제 하는 것 보다 매우 효율적이다. 특히 탁발의 전통이 있는 곳에서 그렇다. 하지만 탁발의 전통이 없는 한국적 상황에서 재가자들이 문제승려에게 공양을 거부한다고 하여 해결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통하지 않는 공양거부

 

한국의 승려들은 공양을 거부해도 충분히 살아 갈 수 있다. 축적된 사유재산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목 좋은 관광사찰을 차지 하고 있다면 입장료 수입으로 인하여 재가불자들에게 의지 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 갈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한국의 스님들은 더 이상 출가자가 아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재가자의 공양없이도 충분히 혼자서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재가자나 다름 없다.

 

탁발전통이 실종된 한국불교에서 출가자들은 재가자들에게 크게 의지 하지 않는다. 조상이 물려준 수억평에 달하는 사찰 토지가 있는가 하면 또 조상이 물려준 각종 문화재가 있어서 관람료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살아 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재가자들이 공양을 거부한다고 하여 승려들의 범계행위를 뿌리 뽑을 수 없다. 사실상 한국의 승려들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집단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한국불교는 절망적이다.

 

16국사는 누구인가?

 

인터넷에서는 16국사라 하여 명단이 돌아 다니고 있다. 열 여섯명의 명단을 보면 종단고위층이 총망라 되어 있다. 그리고 요직을 차지 하고 있다. 그 중에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최고책임자도 있고, 종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승려도 있고, 한번 결혼했다고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 승려도 있다. 또 강남의 노른자위에 해당 되는 거대사찰의 주지도 있다. 대체로 자항렬과 자항렬이 많다. 이렇게 도박승 혐의를 받고 있음에도 승승장구 하며 요직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이런 권력승을 어떻게 재가불자들이 몰아 낼 수 있을까?

 

권력승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

 

권력승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선방에서 수행에만 열중하는 이판승일까?  권력승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집단이 재가자일 것이다. 왜 그런가? 같은 스님들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입막음을 할 수 있다. 정봉주의 전국구에 나오는 스님의 말처럼 닭발, 족발을 물려 놓으면 잠잠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재가자는 아쉬울 것이 없다. 닭발, 족발이 먹혀 들어 가지 않는 것이다. 각자 생업이 있어서 충분히 자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기에 처한 한국불교를 구원할 수 있는 세력은 재가불자 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일부 진보적인 스님들은 재가불자의 활동에 상당히 기대를 거는 듯 하다.

 

재가불자들이 나서면 스님들이 두려워 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 된다. 꼬삼비구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꼬삼비비구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니까야에 꼬삼비구이야기가 있지만

 

니까야에서 꼬삼비이야기는 맛지마니까야에서 보인다. ‘오염의 경(M128)’이 그것이다. 하지만 재가자가 출가자를 견재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법구경 인연담에도 꼬삼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6번 게송 인연담에서 볼 수 있다. 꽤 긴 길이의 인연담을 보면 어떻게 분쟁이 발생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재가자의 역할이 보인다. 그것은 분열을 일삼는 수행승에게 공양을 거부하는 것이다.

 

니까야에서 언급된 꼬삼비비구이야기는 단편적이고 우화적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꼬삼비비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율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율장대품에는 꼬삼비의 다발이라 하여 60페이지 달하는 긴 길이로 취급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나 법구경인연담에 등장하는 꼬삼비 이야기는 율장에서 근거한 것이다.

 

출가자를 견재하는 장면

 

율장대품에서 재가신자들이 문제를 일으킨 출가자를 견재하는 장면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재가신자들]

이 꼬삼비 시의 수행승들은 우리에게 불익을 끼쳤다. 그들에게 시달리다가 세존께서 떠났다. 자 우리는 꼬삼비 시의 수행승들에게 인사를 하지 말고, 영접하지도 말고, 합장하여 맞이 하지도 말고, 가까이 와도 음식을 주지 말자. 만약 이들이 우리에게서 존경받지도 못하고, 존중받지도 못하고, 공경받지도 못하고, 공양받지도 못하면, 섬김을 받지 못하는 까닭에 이곳을 떠나거나 환속하거나 세존과 다시 화해 할 것이다.’

 

(5. 꼬삼비 시에서의 승단의 화합, 꼬삼비의 다발, 율장대품 Vin353)

 

 

꼬삼비에서 승단의 분열이 일어난 것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어떤 수행승이 죄를 지었는데, 그 죄를 인지하였는지 인지 하지 못하였는지에 대한 것에서부터 시작 된다.

 

이렇게 아주 사소한 견해 차이가 나중에 파가 갈리고 파벌이 형성되어 서로 싸웠다. 이에 대하여 입에 칼을 물고 서로를 찔렀다라고 하였다. 급기야는 서로 손찌검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사람들은 어찌 싸끼야의 아들들인 수행자들이 식당의 사내에서 다투고 싸우고 쟁론하고 서로 부적절한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를 하고, 손찌검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부대중의 두 개의 축인 재가자가 직접 개입한 것을 의미한다. 빅쿠들이 싸우는 것에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잘못을 지적하고 나선 것을 말한다.

 

왕따 시켜 버리면

 

꼬삼비에서 재가자는 적극적으로 승단에 개입하였다. 문제 있는 승려 들에게 취한 조치는 인사하지 않기, 영접하지 않기, 합장하지 않기, 공양하지 않기 이렇게 네 가지이다. 탁발에 의존하는 승려들에게는 있어서는 치명적인 사항이다. 재가가자 탁발 나온 빅쿠들을 모른 채 한다면 굶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가자가 비리승려를 단죄 하는 방법은 소위 왕따를 시키는 것이다. 이는 상대해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꼬삼비이야기를 보면 빅쿠들은 승단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부처님이 말씀도 듣지 않았다. 마침내 부처님도 포기 하고 떠날 정도가 된 것이다. 승단 내부적으로 더 이상 통제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럴 때 단 한가지 방법은 재가자가 나서는 것이다. 빅쿠들끼리 해결 안되었을 때 재가자들이 개입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양거부이다. 그렇다고 하여 탁발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인사도 하지 않고, 영접도 하지 않고, 합장도 하지 않는 것이다. 빅쿠로서 인정을 해 주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왕따시키는 것이다.

 

환속할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

 

재가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빅쿠들은 코너에 몰렸다.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승단을 떠나 환속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에게 잘못을 빌고 화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꼬삼비비구들은 어떻게 하였을까?

 

환속한다면 재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화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꼬삼비빅쿠들은 벗들이여, 우리는 싸밧티 시로 가서 세존의 앞에서 이 쟁사를 끝냅시다.”라고 말하였다. 재가불자들의 압박에 항복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승단의 분열을 일삼는 타락한 승려들을 압박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재가불자들의 공양거부임을 알 수 있다. 빅쿠로서 대우을 해 주지 않았을 때 환속하거나 화해 하거나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조계종 권승들의 행태에 대하여 재가자의 압박은 효과가 있을까?

 

재가자들 수천명이 총무원앞에서 농성을 한다면

 

불교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는 승가이다. 그러나 승가가 타락하면 불교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승가의 타락을 승가에서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최후의 수단은 재가자가 나서는 것이다.

 

재가자가 나섰을 때 승가는 긴장할 것이다. 90년대 두 차례의 종권다툼에서는 스님들과 스님들이 각목을 들고 싸웠는데, 만약 스님들과 재가자가 각목을 들고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일은 있어도 안되고 일어나서도 안된다.

 

승가와 재가가 싸우면 승가에서 피할 것이다. 같은 스님들끼리는 모를까 승가와 재가가 각목을 들고 싸우는것은 상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가자들 수천명이 총무원앞에서 농성을 한다면 한국불교의 역사는 달라질지 모른다. 깡패나 용역, 또는 어용불교단체를 동원하지 않는 한 스님들이 재가불자들과 싸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재가불자들이 힘을 모으면 도박승, 은처승, 폭력승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사실상 재가불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여덟 가지 판단근거

 

재가불자들의 공양거부에 따라 꼬삼비빅쿠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였다. 환속이냐 화해냐 두 갈래의 길에서 화해의 길을 선택한 꼬삼비빅쿠들은 부처님에게 찾아 가기로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부처님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 지를 묻는다. 견해차이로 서로 싸우는 빅쿠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물은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열 여덟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율장 대품에 따르면 이 열 여덟 가지 방법에 대하여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다. 사리뿟따, 목갈라나, 깟짜야나, 꼿띠따, 깝삐나, 쭌다, 아누룻다, 레바따, 우빨리, 아난다, 라훌라 등 무려 11명의 제자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문제가 있는 빅쿠인지 아는 방식은 어떤 어떤 것일까? 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

싸리뿟따여, 열여덟 가지 근거를 통해서 원칙이 아닌 것을 설하는 자를 알아야 한다. 세상에 수행승이

 

1)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 설하고,

2) 가르침을 가르침이 아닌 것이라 설하고,

3)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라 설하고,

4) 계율을 계율이 아닌 것이라 설하고,

5) 여래가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말하고 설한 것이라고 설하고,

6) 여래가 말하고 설한 것을 여래가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하고,

7)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행한 것이라고 설하고,

8) 여래가 행한 것을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하고,

9) 여래가 시설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시설한 것이라고 설하고,

10) 여래가 시설한 것을 여래가 시설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하고,

11) 죄가 아닌 것을 죄라 설하고,

12) 죄를 죄가 아닌 것이라 설하고,

13) 가벼운 죄를 무거운 죄라 설하고,

14) 무거운 죄를 가벼운 죄라 설하고,

15) 용서할 수 있는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설하고

16)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죄라고 설하고,

17) 거친 죄를 거칠지 않은 죄라고 설하고,

18) 거칠지 않은 죄를 거친 죄라고 설한다.

 

싸리뿟따여, 이와 같은 열여덟 가지 근기를 통해서 원칙이 아닌 것을 설하는 자를 알아야 한다.”

 

(5. 꼬삼비 시에서의 승단의 화합, 꼬삼비의 다발, 율장대품 Vin354)

 

 

분쟁을 일삼던 두 그룹의 꼬삼비빅쿠들은 재가자들의 압박에 굴복하였다. 그래서화해 하기 위하여 부처님을 만나러 떠났다. 이에 제자들은 어느 편을 들어 주어야 할지에 대하여 묻자 부처님은 위와 같이 열여덟 가지 판단근거를 제시하였다.

 

무거운 죄를 가벼운 죄라 설하고

 

열여덟 항목 중에서 열두번째 항목에 무거운 죄를 가벼운 죄라 설하고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보면 한국불교의 현실에 딱 들어 맞는다. 승단추방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었음에도 여전히 스님 행세를 하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어느 승려가 미국에서 혼인한 사실이 있음에도 여전히 중책을 맡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도박을 하여 전국민이 알게 되었음에도 16국사 중의 하나인 W스님은 도박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번 사태는 나쁜 의도로 인해 생긴 만큼 억울한 측면이 있다. 해당 스님들에 대해 법원도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만큼 호법부가 이 점을 잘 참조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습도박혐의를 받고 있는 스님의 입에서 선처를 호소하는 것이다.

 

이뿐일까? 적광스님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린치를 가하여 죽도록 폭행한 스님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종회의원이 되었다. 은처혐의를 받고 있는 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

 

한국불교의 미래는 재가자의 손에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 왜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반대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죄를 죄가 아닌 것이라 설하고(12)” 라든가, “무거운 죄를 가벼운 죄라 설하고(14)”라는 항목에 딱 들어 맞는다. 도박승, 은처승, 음주승, 푹력승, 횡령승이 활개를 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공양할 필요도 없다. 멀리서 그들을 보았을 때 꼬삼비의 재가불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본채만채 해야 한다. 당연히 합장도 하지 않아야 한다. 스님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도박을 일삼았다면 도박자로서 대하고, 음주를 일삼았다면 술주정뱅이로 대하면 그뿐이다. 숨겨 놓은 처자식이 있다면 같은 재가불자로 보면 그 뿐이다. 그들이 머리를 깍았다고 하여, 그들이 승복을 입었다고 하여 스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불자들이 꼬삼비의 재가불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사를 하지 말고, 영접하지도 말고, 합장하여 맞이 하지도 말고, 가까이 와도 음식을 주지 말자라고 실천한다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한국불교를 지켜 내는 최후의 보루는 재가불자들이다.

 

 

2014-12-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