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성벽을 깔고 지어진 집, 혜화동 서울성곽길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27. 22:59

 

성벽을 깔고 지어진 집, 혜화동 서울성곽길

 

 

 

초소형 오벨리스크 같은

 

추억여행 세 번째이다. 첫 번째는 중학교이었고, 두 번째는 혜화동로터리이었다. 세 번째는 고등학교이다. 고등학교와 관련하여 혜화동로터리에는 하나의 비석이 서 있다. 그것은 고등학교 다닐 당시 세워졌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서 있다는 것이 놀랍다. 모든 것을 부수고 다시 짓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반가운 것이다.

 

 

 

 

 

마치 초소형 오벨리스크 모양을 한 비석에는 한자어로 儆新 中高等學校 入口라고 써 있다. 경신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으나 한자어를 보면 경계할 경()’자에 새로울 ()’자이다. 인터넷검색에 따른 지식2.0베이스에 의하면, 경신학교는 ‘1885년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신문화 교육을 통하여 신시대의 인물을 길러내기 위하여 시작한 학교라고 설명되어 있다. 또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사로 와 있던 언더우드가 세운 종로구 혜화동에 자리잡고 있는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라 소개 되어 있다.

 

깨우쳐 새로워진다

 

자료를 보니 경신이라는 말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경신학교의 역사가 선교사 언더우드의 집에서 학생들 몇 명을 모아 놓고 무상으로 교육을 한 것이 시초라 한다. 1901년에는 종로 연지동에 미국북장로회 선교사인 게일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중등과 학생 6명으로 입학식을 갖고 학교명을 깨우쳐 새로워진다라는 뜻으로 경신(儆新)’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경신이라는 말은 구한말 선교사들이 이땅에 들어 와서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하여 만든 학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신고등학교 삼년 다니면서 늘 듣던 말이 있다. 그것은 연세대학교가 경신학당에서 갈라져 나왔다라는 말이다. 마치 이화학당에서 이화여대가 갈라져 나온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제로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1915 3월 대학부를 설치한 것이 연희전문학교의 효시이다.(경신학교)”라고 설명되어 있다.

 

경신고등학교는 1976. 1977, 19783년간 다녔다. 물론 고교평준화 정책에 따라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추첨으로 배정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교 삼년 동안 극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었다. 그것은 종교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교학교인 동대부중에서 삼년을 보냈는데, 기독교학교인 경신고등학교에서 삼년은 참으로 고통스런 것이었다.

 

총길이 1키로미터의 혜화로

 

세 번째 추억여행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경신고등학교에 이르는 혜화로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왕복 2차로에 불과한 작은 길인 혜화로는 총길이가 약 1키로미터 지나지 않는다. 도보로는 15분 걸린다.

 

 

 

 

 

혜화로 중간에는 혜화여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혜화초등학교로 간판이 바뀌었다. 혜화여고는 어디로 간 것일까? 검색을 해보니 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화계사 가는 길에 화계중학교 부근에 있는 것이다.

 

꽃밭속에 있는 것처럼

 

화계사 부근에는 화계라는 이름과 수유라는 이름의 학교들이 많은데 지역의 이름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혜화라는 이름을 가진 여고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자료를 더 검색하여 보니 2000년에 혜화동에서 수유동으로 이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혜화동로터리 주변에는 동성고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학교가 있었다. 혜화로 쪽에는 혜화여고와 보성고와 경신고가 있었다. 이렇게 세 개의 남자고등학교 가운데 유일하게 여고가 있었는데 그것이 혜화여고이었다. 그래서 하교길에 혜화로를 걸을 때에는 마치 꽃밭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빽빽이 하교 하는 여학생들 틈에 끼여 걸어 갈 때 마치 꽃밭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름도 꽃을 연상시키는 혜화이어서일까 흰교복을 입은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혜화라는 말은 꽃 화자 들어 가지 않는다. 한자어로 惠化(혜화)’라 한다. 남자고등학교만 있는 곳에 혜화여고가 있어서 마치 꽃처럼 보였다. 남자고등학교가 많은 혜화동로터리에서 유일하게 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는 것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것 같다.

 

사라진 사립명문고

 

혜화로 끝 자락에는 두 개의 학교가 있다. 경신고와 구보성고이다. 두 학교는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보성고는 그 자리에 없다. 오래 전에 이전하였기 때문이다. 검색을 해보니 1989년 방이동으로 이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보성중고등학교가 이전한 그 자리에는 한 때 서울과학고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과학고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서울시설관리공단이 들어차 있다. 그래서일까 옛날의 모습은 볼 수 없다. 

 

 

 

 

 

 

보성학교 캠퍼스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길건너에 있는 보성학교는 마치 대학캠퍼스를 연상케 하였다. 고딕식으로 지어진 본관 건물이 일반학교와 달랐다. 또 학교 안에는 커다란 너럭 바위가 있어서 주변이 공원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봄이 되면 주변에 벚꽃이 피어 마치 대학캠퍼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전 후에 주인이 몇 차례 바뀌는 과정에서 예전의 아름다운 캠퍼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빈터에는 건물이 들어차 있어서 삭막한 느낌이 든다. 보성고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마치 고향을 잃은 듯한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보성고는 왜 강남으로 이전하게 되었을까?

 

강남으로 갈아 탄 명문고

 

칠십년대 당시 사대문안에는 5대 공립고이니, 5대 사립고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평준화 되기 이전이다. 그런데 칠십년대부터 사대문안의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대거 이전하였다. 그렇다면 왜 강남이전을 하였을까?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1983년 신문보도에 따르면 1975년 이후 도심 안에 있던 18개교의 학교가 이전하고, 17개교도 이전을 추진 중이었다. 이 학교들은 모두 서울시가 개발하고 있던 영동·잠실·송파·목동·노원 등의 개발사업지구로 옮겨갔다. 당시 서울시가명문학교들을 집중 선택해 이전시키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강남개발을 성공시키기 위해 교육열을 이용하여 사대문 안, 이른바명문고교들의 이전을 강력히 권유했고, 그 결과 경기고, 서울고, 휘문고 등이 이전했다. 강남개발에 학교 이전 위력을 확인한 서울시는 그 이후 송파, 목동, 노원지구 개발에도 학교이전을 계속 추진했다.

더불어 사대문안에 있던 학교중에는 자발적으로 강남행 차를 타기도 했다. 숙명, 정신, 배재 등은 옛 교사의 협소함과 학생 수의 감소 등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이전한 경우다.

이로써 강남으로 이전한 학교들은 모두 이른바강남 8학군강남 교육특구형성하게 됐다.

 

(70~80년대 서울 명문고 강남으로 대탈출한 이유는 ?, 아시아경제, 2012-03-18)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탈출을 감행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부정책 때문이고, 또 하나는 명문학군에 편입되기 위해서이다. 한국사회에서 모든 것이 강남위주로 돌아 가다 보니 소위 평준화이전의 명문고들이 8학군에 편입되기 위하여 강남으로 갈아 탄 것이다. 그런 학교 중에 보성고등학교도 있었던 것이다.

 

혜화로 끝자락에

 

드디어 경신고등학교에 이르렀다. 혜화로 끝자락에서 구보성고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올라 가는 길은 비탈길이다. 길 너머는 성북동이다. 강남이 개발 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산다는 사람들이 모여 산 곳이다. 요즘도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소문이 나 있다.

 

 

 

 

 

 

 

경신고등학교는 산의 꼭대기에 건립되었다. 그렇다고 높은 산이 아니다. 서울 사대문안을 감싸는 성벽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쪽으로는 서울 시내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성북동과 저 멀리 북한산 남장대가 보인다.

 

2002년 월드컵 기념탑

 

이처럼 비탈길에 세워진 학교 정문 입구에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 4강신화를 이루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탑인 것이다.

 

 

 

 

 

 

동그란 모양은 축구공을 상징한다. 바위에는 월드컵4강 국명과 히딩크 감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때 당시 대표선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학교 정문입구에 왜 2002월드컵 관련 기념탑이 건립 되어 있는 것일까? 이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경신고등학교가 축구명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차범근이 경신고등학교 축구부 출신이다. 경신고등학교에서는 김진국, 차범근 등 수 많은 축구국가대표선수들을 배출 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박항서이다.

 

2002년 월드컵 기념탑을 보면 박항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핌베어벡, 정해성과 함께 박항서는 2002년 월드컵 당시 코치이었다. 국민들은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 스타일의 박항서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박항서는 고등학교 1학년때 3학년이었다. 그 때 당시 오석제와 함께 초고교급 축구선수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학교 정문에는 축구명문 답게 2002년 월드컵을 기리는 기념탑이 건립 되어 있다.

 

학교안에 교회가

 

정문을 지나면 가파른 진입로가 나타난다. 학교가 산정상에 있기 때문에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계단길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완만한 경사길이라 볼 수 있다.

 

 

 

 

 

 

진입로 옆에는 느티나무가 보인다. 학교다닐 때는 작은 나무 이었으나 나무가 크게 자랐다. 30여년을 자랐다면 나무 몸통이 매우 커야 하나 생각보다 두껍지는 않다.

 

진입로 끝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건물이 있다. 교회이다. 학교내에 교회가 있는 것이다. 학교가 미션스쿨이기 때문에 예배를 보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 주민들이 예배 보러 들어 가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학교교회가 지역주민의 교회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경신고등학교에 가면 가장 확인 하고 싶은 곳이 있다. 그것은 농구장이다. 진입로 입구를 지나면 바로 옆에 단차를 두고 농구장이 두 개 있다. 그 중에 위에 있는 농구장은 첫추억이 있는 곳이다.

 

농구장을 보니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옛날 그대로이다. 4단으로 되어 있는 축대계단도 그대로이고 농구대 위치도 그대로이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것도 부수어 새로 만드는 시대에 마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이 그대로 있었다.

 

 

 

 

 

 

무엇이든지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농구장에 4단의 계단이 있다. 학교를 배정 받고 소집일날 이곳에 모였다. 그래서 뚜렷이 기억한다. 무엇이든지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기억이 오래 가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시인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고 노래하였다. 시간이 흘러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은 있었겠지만 그녀와 나누었던 첫키스에 대한 추억은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소집일날 농구장에서 기억은 오래 동안 남아 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소집일 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었다. 일종의 학교소개서이다. 그런데 학교를 소개 하기 전에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것이 찬송가이었다. 어느 시인의 노래가사처럼 세월이 흘러도 기억에 남은 것은 찬송가의 제목이다. 그것은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으로 시작되는 찬송가이다.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같이 누리겠네

 

보아라 광야에 화초가 피고

말랐던 시냇물 흘러오네

이산과 저산이 마주쳐 울려

주 예수 은총을 찬송하네

 

땅들아 바다야 많은 섬들아

찬양을 주님께 드리어라

싸움와 죄악의 참혹한 땅에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네

 

(찬송가,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소집일날 첫날 학교소개에 앞서 배운 것이 찬송가이다. 이 찬송가를 몇 차례 연습하고 난 다음 학교소개가 있었다..소집일날 찬송가를 부르게 된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비로소 이 학교가 기독교계통의 학교라는 것이 실감 되었다.

 

변함이 없는 백악관

 

진입로를 다 올라 가자 교사가 나타났다.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변한 것이 있다면 약간 분홍빛이 도는 컬러가 가미 된 것이다. 옛날에는 모두 백색으로 되어 있어서 백악관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옛날 그대로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학교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교사를 보니 그 시절의 모습과 전혀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언더우드 동상

 

모든 것은 변한다. 아무리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세히 보면 변해 있다. 그러나 건물이나 사물은 관리만 잘 하면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교사 앞에 있는 동상 역시 변함 없이 그 자리에 있다. 언더우드 동상이다.

 

 

 

 

 

 

언드우드 동상은 일학년 때 세워졌다. 그때 당시 개교 90주년 행사가 있었는데 그 기념으로 동상이 건립 된 것이다. 미국선교사 언더우드가 구한말에 조선의 학동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모습이다. 이 동상의 역사는 38년이 된다. 38년 동안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상을 보니 마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 보인다.

 

차범근의 사인을 받고

 

이 동상이 건립 될 당시 학교에서는 9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히 개최 되었다. 그중에 하나 기억나는 것이 축구대회이었다. 그 때 당시 학교가 축구명문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졸업생 중에는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차범근을 들 수 있다.

 

개교 90주년 행사로서 OB YB팀의 축구경기가 학교운동장에서 열렸다. 여기서 OB‘Old Boy’의 약자로서 졸업생을 말하고, YB‘Young Boy’의 약자로서 현역재학생을 말한다.

 

OB팀으로서는 차범근을 비롯하여 김진국 등이 있었다. YB팀으로는 고등학교 3학년생인 오석제와 박항서 등이 있었다. OBYB의 축구경기에서 어느 팀이 이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차례 골을 주고 받았는데 아마 2:2 정도 되지 않았나 추측 된다.

 

경기가 끝나고 학생들이 차범근에게 모여 들었다. 사인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때 당시 차범근은 최고의 인기선수이었다. 이미 1972년 고등학교 3학년 때 국가 대표로 선발되어 이름을 날렸다. 이후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약하였는데, 그 날 OBYB의 경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는 단연 차범근이었다.

 

사인을 받기 위하여 여러 학생들의 틈바구니속에서 공책을 들이 내밀었다. 다행스럽게도 차범근이라고 흘려쓴 글씨에 연도와 날자가 적힌 사인을 받았다. 어렵게 받은 사인이므로 소중하게 간직 하였다. 그러나 언젠가 짐을 정리 할 때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 폐기 하였다. 잘 보존 하고 있었더라면 블로그에 사진으로 올렸을 텐데 아쉽다.

 

종교가 다름으로 인하여

 

경신고는 변한 것이 없다. 건물도 옛날 그대로이고, 농구장의 석축계단도 그대로이다. 심지어 운동장에 있는 축구 골대 위치도 그대로이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라 하였다. 일학년때 교실 역시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다. 종교가 다름으로 인하여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할 때 바깥쪽 창문을 자주 보았다. 일층에 있는 교실이다. 그곳을 보니 교사는 변함 없지만 교실 앞의 향나무는 크게 자라 있다.

 

 

 

 

 

 

일학년 때 교실은 출입구 바로 옆에 있었다. 일층에 있었기 때문에 나무로 인하여 어둑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향나무만 빼고 모두 제거 되어 있다. 그곳에서 일학년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그것은 종교가 다름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이다.

 

일촉즉발의 어색한 침묵

 

소집일 당일날에 찬송가를 가르쳐 준 곳이 미션스쿨이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다녀 보니 학교의 분위기는 마치 교회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였다. 학교에서는 예배와 찬송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방에는 항상 성경과 찬송가를 넣어가지고 다녀야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방송예배, 일주일 두 번 있는 성경시간, 그리고 매월 한번 있는 전체예배 등 거의 매일 찬송과 예배가 있다시피 하였다.

 

고교평준화로 인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종교가 다른 미션스쿨에 배정 받은 학생들은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심적 부담을 느꼈던 것은 성경시간에 한 사람씩 교단에 서서 기도를 주재하는 것이었다. 번호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계산을 해 보니 가을쯤 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될지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중단 되었다. 그것은 어느 학생의 도발적인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자신의 기도차례가 되자 교단에 올라갔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그렇게 하듯이 모두 다 같이 기도합시다라고 하며 기도를 시작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교목도 당황하고 학생들도 당황하였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약 일이분간 그대로 있다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라고 기도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단을 내려와 제자리에 앉아 버렸다

 

전에 보지 못한던 광경이다.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나름대로 하나님 아버지하며 주절주절 말하였으나 그 친구는 말없이 내려오고 만 것이다. 참으로 어색하고 이상한 분위기가 몇 분 지속 되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교목이 그 친구를 엄하게 다스릴 것으로 생각하였다. 과연 어떻게 혼 날 것인가가 문제이었다. 그러나 의외 이었다. 교목은 그냥 넘어 간 것이다. 그냥 모른 채 하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였다.

 

사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 친구는 주먹이 있었다. 반내에서 주먹으로 헤게모니 다툼을 하고 있었고 일종의 폭력써클에 가입해 있었다. 더구나 그 친구는 어떤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일년 꿇어서 다시 일학년이 된 친구이었다. 그런 것을 알고 있기에 교목과 그 친구와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하여 조마조마하게 지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교목은 그냥 넘어 갔다. 그 이후로 한사람씩 교단으로 불려나와 기도하는 것은 사라졌다. 그래서 자나깨나 고민스러웠던 것에서 해방되었다.

 

석축식 계단도 그대로

 

예전에 다녔던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 소위 평준화이전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이전 할 때에도 경신고만큼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이 자리에 섰을 때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되돌아 간 듯하다.

 

운동장 한켠에 있는 석축식 계단도 그대로이다. 축대를 쌓은 자리에 시멘트로 틈을 메꾸었는데 그런 것 까지 그대로이다. 저 축대 위에서 응원가연습을 하고 교련시간에 휴식을 취하였는데 그 대로이다. 마치 고향집 대문을 열었을 때 옛날 그대로의 집을 보는 듯하다.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봉건영주시대의 성채를 보는 듯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것은 주변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학교의 정문과 후문에 위치한 집들도 옛날 그대로이다. 강남에 아파트가 쑥쑥 올라가고 스카이라인이 매년 변화해도 이곳 주택가는 변함이 없이 옛날 그대로 모습이다. 그 중 후문 길에 보는 집이 대표적이다.

 

 

 

 

 

 

이 집을 보면 마치 봉건영주시대에 성채를 보는 듯 하다. 그런데 이 집은 고교시절 당시와 변한 것이 없다. 주차시설까지 갖춘 그 때 당시 고급주택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나무가 더 크게 자랐을 뿐이다.

 

지름길이 있었는데

 

등교할 때에는 주로 후문으로 다녔다. 그러나 하교할 때는 종로에 있는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정문으로 다녔다. 그런데 후문길에는 지름길이 있었다. 큰 길 보다 골목길을 이용하면 몇 분이라도 빨리 가기 때문에 주로 지름길로 다녔다.  그 지름길 역시 변하지 않았다. 그 중에 하나가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 있는 길이다.

 

 

 

 

 

 

삼선교에서 버스를 내려 지름길로 가는 길에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 너머에는 성벽이 있다. 서울외과성벽이다. 이 성벽을 경계로 하여 종로구와 성북구로 갈라진다.

 

성벽을 깔고 지어진 집

 

성벽길을 따라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서울외곽성벽길은 익숙하다. 그때 당시 성벽길을 걸을 때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성벽이 제대로 보존 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벽 바로 위에 집이 있는가 하면 성벽을 담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현재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근래 서울 성벽은 복원 되었다. 상당부분이 복원 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추진 되고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벽을 담벼락 삼아 집이 지어졌고, 아예 성벽을 깔고 그 위에 집이나 종교시설, 학교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땜질되고 잘리고

 

성벽이 복원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요원하다. 일부 복원된 것을 보면 마치 땜질 하듯이 되어 있다. 그리고 길을 내기 위하여 성벽이 잘려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려면

 

서울성곽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려면 옛모습대로 복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혜화동 성곽길을 보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성곽길 위에 지어진 집을 모두 철거 하지 않는 한 원형대로 복원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성곽위에 지어진 건축물은 일반집이나 빌라 뿐만이 아니다. 학교도 성곽 위에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신고등하교 교사 후면을 보면 성곽이 있다. 그런데 성곽위에 학교 건물이 지어진 것이다. 만일 성곽을 원래대로 복원한다면 학교의 건물이 철거 되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커다란 아카시아나무가 있었는데

 

등교길에 늘 성벽길로 다녔다. 그런데 오월 화창한 어느 날 성벽 아래에서 영화촬영이 있었다. 시험이 있어서 늦게 등교한 날이다. 영화제목은 오양의 아파트이다. 주연은 방희이다.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처녀가 이제 막 시골에서 상경한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렇게 영화제목과 주연을 기억하는 것은 영화촬영 도구에 그렇게 써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골처녀가 보따리를 들고 성벽을 걸어 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뒷배경에는 커다란 아카시아나무가 있었다. 오월의 신록이었기 때문에 아카시아는 매우 무성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찾아 가보니 아카시아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촬영당시와 변하지 않은 것은 성벽이다.

 

 

 

 

 

 

 

오양의 아파트를 검색하여 보았다. 19783월에 개봉된 변장호감독의 작품이다. 그런데 주연을 보니 김자옥으로 되어 있다. 성벽에서 촬영 당시 방희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방희에 대하여 검색해 보니 오양의 아파트라는 영화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1978년에 개봉된 지붕위의 남자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영화의 주연은 방희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붕위의 남자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오양의 아파트라고 기억에 남아 있을까? 도중에 영화제목이 바뀐 것일까? 촬영장에서 영화촬영을 알리는 표지판에 오양의 아파트라 되어 있었는데 기억도 재구성되는 것일까?

 

저 멀리 북한산 남장대가

 

중학교시절의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높은 빌딩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이렇게 본다면 건물은 무상한 것이다. 도시에서 멀쩡하던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는 가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런데 추억이 서려 있는 학교건물이 없어 지는 것은 마치 추억이 송두리째 날라 가는 것 같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경신고등학교가 오늘날 까지 그 자리에 변함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비록 종교가 달라 삼년 동안 마음고생을 하였지만 지나고 나니 모두 추억이 된다. 그런데 변함 없는 농구장과 교사를 보니 마치 옛날 그 자리에 서 있는 듯 보인다.

 

언제나 변함 없는 것은 저 높은 바위산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부수고 짓고를 반복하여 무상하게 변하지만 저 높은 바위산은 언제나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이 생겨 나기 이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수백년 수천년 동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성북동 너머 저 멀리 북한산 남장대가 보인다.

 

 

 

 

 

2014-12-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