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삶이 팍팍할 때 떠나는 추억여행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22. 20:05

 

 

삶이 팍팍할 때 떠나는 추억여행

 

 

 

콘서트7080

 

매주 일요일 밤에 7080노래를 들을 수 있다. 이름 하여 콘서트7080’이라 한다. 벌써 십년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장수프로이다. 한때 보컬그룹의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가수가 지금은 머리가 하얗게 센채로 사회를 진행한다. 약간은 어눌해 보이는 듯한 말투이지만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많이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출연한 가수나 객석의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모두 행복해 보인다. 그 시절 그때가 아마 좋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본다면 콘서트7080은 칠십년대와 팔십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을 위한 잔치라 볼 수 있다.

 

과거로 돌아 가고 싶으세요?

 

7080노래를 즐기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간 시절이 그다지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를 회상하며 산다는 것이 현재를 허무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7080음악을 듣지 않고 별도로 발굴한 불교명상음악을 듣는다.

 

과거를 떠 올리는 것이 유쾌할 수도 있고 불쾌할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그 시절이 행복한 경우도 있지만 또 다른 사람에는 아픔으로 다가 올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유명 여성작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에  다시는 돌아 가고 싶지 않아요라 답하였다. 너무나 힘겨운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다시 예전의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아마 그 여성작가에게는 가난과 노동에 찌든 그 시절이 지금과 비교하면 되돌아 보기도 싫은 끔찍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시절이 그다지 유쾌 하지 않다. 그럼에도 종종 지나간 시절을 떠 올릴 때가 있다.

 

성냄을 뿌리로 하는 후회

 

이미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행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후회는 성냄을 뿌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후회이다.

 

후회하는 마음은 어리석다. 왜 그런가? 그 때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에는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회하는 마음을 해로운 마음으로 보고 있다.

 

지나간 시절을 후회 하면 해로운 마음이 된다. 그러나 지난 시절에 대하여 회상하면 아름다운 마음이 된다. 그때 당시에 내가 왜 그랬을까?”라고 후회하면 성냄에 뿌리박은 해로운 마음이지만, “그때 그랬지라며 지난 일을 회상하며 단지 알아 차라면 아름다운 마음이다.

 

지난 일을 회상하며 추억여행을 떠났다. 그것은 누군가 옛날 학교 근처에 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자기 옛날 학교에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예전에 다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찾아 가기로 하였다. 나에게 중고교시절은 어떤 의미일까?

 

청소년시절

 

중고등학교 시절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청소년기라 한다. 십대 후반의 나이로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할 때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재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는 단 한명도 없다. 지방에서 학교를 졸업하였다면 마음을 터 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를 서울이라는 광역에서 보내서일까 아직까지 소통하는 친구가 없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낸 것이 행운이라 보지는 않는다.

 

청소년시절의 친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학교가 공동학군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모두 사대문안에 있는 공동학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서울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다 보니 집 주변에 사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또 한가지는 평준화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추첨에 의해 배정 받았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부터 아주 못하는 사람에 이르기 까지, 또 아주 잘사는 집안의 사람부터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사람들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한반에 모여 있다 보니 동질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 계층적으로 서로 다른 이질감이 있어서일까 급우들 모두에게 탄탄한 우정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친구가 없는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로서 종교문제를 들 수 있다. 특히 고교시절이 그렇다.

 

중학교의 경우 불교학교에 다녔다. 종로구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으로서73, 74, 75년에 다녔다. 고등학교는 기독교학교에 다녔다.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경신고등학교로서 76, 77, 78년에 다녔다. 이렇게 이질적인 학교를 다니다 보니 고교삼년이 무척 힘들었다. 그것은 불교를 먼저 접하였기 때문이다.

 

미션스쿨 삼년 동안 머리속에서는 늘 부정하기에 바빴다. 참으로 불행한 청소년시기를 보냈다고 본다. 아마 평준화시대의 가장 큰 희생자이었다고 본다. 이런 연유로 고등학교 친구가 없다. 고교시절 삼년은 그다지 유쾌 하지 않았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명학역으로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 30여년이 흘러 40년 가까이 된 시점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며 추억여행을 떠나려 한다. 가장 먼저 전철을 타는 일이다.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명학역으로 향하였다.

 

 

 

 

 

 

 

명학역은 자그마한 역이다. 수도권전철에서 천안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안양역과 금정역 사이에 위치한 일반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져 않은 작은 역이다. 그래서일까 출구가 1번과 2번 출구 단 두 개 밖에 없다. 물론 오르내르는 에스컬레이터도 없다.

 

어느 역이든지 대학이 부근에 있으면 대학명을 함께 명기 해 준다. 이곳 명학역 부근에도 학교가 있다. 그래서 역명과 함께 명학역(성결대학교)’이라고 표기 되어 있다.

 

종로5가에서 혜화동까지

 

수도권전철을 이용하면 단 한시간만에 종로에 도달한다. 조계사나 시청, 광화문 등에서 행사가 있으면 한시간 밖에 걸리지 않으므로 큰 부담이 없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지만 시간적으로 따졌을 때 먼 거리는 아니다. 사실상 서울에 사는 것과 다름 없다.

 

전철로 이동하여 종로5가역에 도착하였다. 종로5가에서부터 혜화동까지 추억여행 코스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걸어 가기로 하였다. 먼 거리 같지만 산행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다. 인터넷검색을 해 보니 종로5가에 혜화동 경신고등학교 까지 2.6키로미터이다. 소요시간은 41분으로 되어 있다.

 

 

 

종로5가에서 경신고까지 2.6Km

 

 

 

이렇게 긴 길이를 잡은 것은 도중에 동대부중이 있었고 혜화동로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대번성을 보는 듯

 

구동대부중이 있는 곳을 향하여 걸었다. 걸어 가는 도중에 거대한 기독교 관련 빌딩들과 마주쳤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독교방송국이다. 중학교 시절 당시에는 가장 크고 높은 빌딩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존재감이 없다. 주변에 높은 빌딩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종로 5가에서 구동대부중에 이르는 구역은 마치 거대한 기독교타운 같다. 기독교 관련 빌딩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방송국 주변에 기독교회관빌딩이 있고 너머에는 연동교회가 있다. 또 그 너머에는 한국기독교 백주년기념관이 있고, 좀 더 떨어진 곳에는 여전도회관이 있어서 크고 높고 우람해 보여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하게 만드는 빌딩으로 가득하다. 마치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의 대번성을 이곳에서 보는 듯 하다.

 

기독교회관 빌딩은 매우 크고 높다. 그런데 바로 앞에는 보호수가 있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수령이 오백년 가까이 되는 은행나무이다.

 

 

 

 

 

아마 예전에도 이 보호수를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새삼스러워 보이는 것은 주변에 높다란 기독교관련 빌딩 속에서도 지금까지 그 자리를 꿋꿋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연동교회에서 3일간

 

연지동 일대에는 거대한 기독교 타운이 형성 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연동교회이다. 지역의 동명이 연지동임에도 연동교회라 이름 붙인 것이 지명과 일치 하지 않는다. 

 

 

 

 

 

 

 

연동교회는 중학교 다닐 때 지어졌다. 표지석을 보니 “1894년 이곳 연못골에 교회를 세우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아마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연못골로 불렸던 모양이다. 연못골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한자어 연지동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 연동교회가 1894년에 생겨났다 하니 현재 시점으로 보았을 때 12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동교회를 간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고교시절 3일간 연동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다.그 때 당시 미션스쿨에서는 일년에 한번은 수업을 전폐하고 교회에서 보냈다. 일학년 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보냈다. 그때 당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마치 장충체육관을 반으로 잘라 놓은 것처럼 보였고, 마치 대한극장처럼 무대와 객석이 있는 공연장처럼 보였다. 거대한 교회에 전교생이 다 들어가 예배와 찬송을 하고 간증을 들었다. 그런데 연지동에 있는 연동교회에서도 3일간 보낸 것이다. 그때가 아마 고등학교 이학년때라 보여진다. 그래서 연동교회를 볼 때 마다 그 시절 기억이 떠 오른다.

 

정신여중고가 있던 자리에

 

연지동 일대는 거대한 기독교타운이다. 계속 길을 걸어 올라 가니 이번에는 한국교회 백주년기념관이 나타난다. 그 자리에는 예전에 정신여중고 자리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강남으로 이사 갔지만 그 때 당시에는 동대부중고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이전인 칠십년대에는 서울의 사대문안에 학교가 많았다. 그러나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 되면서 명문학교들이 하나 둘 이사를 가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현재 사대문안에 남아 있는 학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정신여중고 역시 강남개발붐에 따라 강남으로 이전하였다. 그런데 이전한 자리에는 학교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하게 만드는 거대한 한국교회 백주년기념관이라는 교회와 빌딩이 들어차 있다.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은 곳

 

중학교시절을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교회나 기업의 빌딩이 들어차 있다. 그러나 주변에는 아직까지 옛날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도 많았다.

 

추첨으로 중학교를 배정 받았다. 소집일 날 처음으로 학교에 갔었다. 도봉구에 있는 달동네 산동네라 불리우는 곳에 살다가 버스를 타고 종로에 오니 마치 시골에 있는 사람이 서울에 간 것처럼 느껴졌다. 같은 서울이라도 변두리와 중심부는 달랐던 것이다.

 

학교를 처음 찾아 갔을 때 주변 분위기가 아카데믹 하였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대부중고와 정신여중고가 자리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학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곳도 있다. 골목길이다. 대학로 끝자락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지름길로 통하는 골목길을 이용하였는데 예전 그대로이다.

 

 

 

 

 

 

 

바뀌지 않은 모습에 오히려 안도 하였다. 학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주변에는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채로 수십년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반가웠다.

 

그런데 가장 바뀌지 않은 곳이 있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이다. 마치 일제시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바뀌지 않은 광경에 오히려 안도 한다.

 

 

 

 

 

 

효제초등학교에 어디로?

 

강북이 강남 보다는 낙후 되었다. 종로5가 지역을 보면 특히 그렇다. 그 중에서도 5가에서 이화로 사거리에 이르는 길이 그런 것 같다. 예전과 달리 도심이 공동화 되고 인구가 줄어 들다 보니 초등학교도 보이지 않는다. 늘 타고 내리던 버스정류장 아래에 있었던 효제초등학교에는 중고자동차 매매시장으로 변해 있다.

 

 

 

 

 

 

이화예식장자리에

 

대학로의 끝자락에 해당되는 이화사거리 아래 길에는 이화예식장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 늘 보던 예식장이다. 그러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 대신 유럽풍의 멋진 빌딩이 서 있다. 이름 하여 엘가모아 웨딩홀이라 한다.

 

 

 

 

 

 

시대에 따라서 건물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름까지 바뀐 것이다. 이런 서구풍 건물도 지은지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 이전에는 그 자리에 또 다른 추억의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삶이 팍팍할 때

 

추억여행을 떠나는 날 무척 추웠다. 영하 십도가 넘는 날씨에 단단히 무장하고 떠났다. 종종 카톡방 법우님과 대화도 하였다. 그럴 경우 손이 무척 시렸다. 그럼에도 추억의 장소를 찾아 나서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종종 되돌아 볼 줄도 아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이다.

 

삶이 각박할수록 옛날을 돌이켜 보게 된다. 삶이 팍팍할 때 그땐 그랬지하며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져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 전에 살았던 집이나, 옛날에 근무하였던 부대, 그리고 학창시절의 학교를 돌이켜 보고 찾아 가보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 가라고 한다면 결코 되돌아 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빌딩만이 그 자리에

 

발길을 동대부중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렸다. 그러나 예전의 동대부중은 그 자리에 있지 않다. 오래 전에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이사 간곳에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지고 있을 것이다.

 

칠십년대 그 자리에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그곳이 학교 이었다는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높게 치솟아 있는 대기업 빌딩만이 그 자리에 있다.

 

 

 

 

 

 

중학교가 있던 곳은 연지동이다. 종로에는 동이름이 매우 많은데 그 많은 동이름 중의 하나가 연지동이다. 연동교회 표지석의 내용처럼 이곳에 연못이 있어서 연지동이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지동에 자리 잡고 있던 학교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의 빌딩 두 동이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 후문이었던 자리가

 

대기업에 사용되는 두 동의 건물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입구를 지나야 한다. 그런데 그 작은 입구 자리가 예전에는 후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대그룹 동관과 서관

 

옛날 후문자리에 있었던 작은 출입구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서쪽에는 학교 본관 건물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운동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현대그룹 동관과 서관의 건물이 치솟아 있다.

 

 

 

 

 

 

학교가 도심에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대각선으로 백미터 가량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작지도 않았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동대부중고와 은석초등학교가 함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운동장이 있었던 곳에는 빌딩이 올라가 있고, 학교 전체 부지에 해당되는 영역에는 거대한 지하주차장이 형성되어 있다.

 

 

 

 

 

 

학교의 흔적을 찾아 보려 하였으나

 

지금은 몰라 보게 달라진 곳에서 학교의 흔적을 찾아 보려 하였다. 그래서 이곳 저곳 살펴 보았다. 최소한 이곳에 동대부중고가 있었던 자리이었다라는 표지석이 혹시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곳저곳 살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일요일 매우 추운날 이렇게 이곳 저곳 살피며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였나보다. 경비가 나와서 퉁명스럽게 여기서 무엇 하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그래서 예전에 이곳에 학교가 있었음을 말하고 추억을 떠 올리기 위해서 왔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나이 든 경비도 대충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경비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곳에 있는 두 동의 커다란 빌딩은 원래 현대그룹의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삼성카드로 부터 사들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삼성카드에서 지은 것 보다 더 오래 전에는 기독교관련 빌딩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학교가 이전하고 난 후 그 자리에 기독교관련 단체의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이는 종로5가에서 연지동에 이르는 일대가 요즘 거대한 기독교 타운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영향이어서일까 학교 부지 한편에는  여전도회관이라는 명칭의 거대한 기독교 관련 빌딩이 서 있다.

 

 

 

 

 

 

칠십년대 연지동에 있었던 학교의 모습은

 

칠십년대 연지동에 있었던 학교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오래 된 졸업앨범을 꺼내 보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서쪽에 위치한 본관 건물은 다음과 같다.

 

 

 

 

 

 

칠십년대에는 오층짜리 건물로서 복층으로 되어 있었다. 복도를 중심으로 하여 양 옆에 교실이 있는 형태를 말한다. 서쪽방향의 교실에서는 그 때 당시 창경원과 종묘의 숲이 한눈에 보였고, 숲 너머에는 빌딩이 또 숲을 이루고 있었다. 동쪽방향의 교실에서 밖을 보면 동대문의 팔작지붕형태의 기와지붕이 보였다.

 

은석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운동장은 동서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쪽방향에는 은석초등학교가 있었다. 불교계 학교로서 그때 당시 최고의 사립학교로 알고 있다. 요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본다. 그때 당시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이 은석초등학교이다. 좌측 건물이 동대부고 부속건물이다. 저 멀리 서울대병원이 보인다. 한창신축중임을 알 수 있다. 오각형 모양의 거대한 건물로서 중학교 삼년 내내 공사중이었다. 그리고 더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북한산 끝자락에 해당되는 남장대이다.

 

사진으로 보면 그 때 당시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두 헐려서 사라졌다. 다만 사진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사라진 학교에는 현대그룹 빌딩 두 동이 서 있다.

 

 

 

 

 

 

그곳에 흔적이 있었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면 변했다고 말한다. 세월에 따라 어디가 변해도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라지면 변한 모습도 볼 수 없다. 동대부중이 있던 자리가 그렇다. 아주 오래 전에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변하고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흔적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흔적을 하나 보았다.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옛날집이 그것이다.

 

 

 

 

 

 

 

초현대식빌딩 바로 옆에 허름한 가옥이 보인다. 아마 이 지역의 산 역사와 같은 집일 것이다. 그 동안의 변화를 지켜 보아 왔을 것이다. 정문 길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그 때 당시 보았을 것이지만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에 그 자리에 아직까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반가워 보인다.

 

또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정문길이다. 허름한 주택가 바로 옆에는 대로로 통하는 길이다. 개발의 시대에 무상하게 변화하지만 그래도 잘 찾아 보면 옛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정문길이 바로 그렇다.

 

 

 

 

 

 

 

추억속의 이십대 여선생님

 

중학교를 찾았으나 옛날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그자리에는 낯선 빌딩들이 서 있다. 어디 흔적이 없을까 하고 이곳 저곳 돌아 다녀 보았지만 이곳에 학교가 있었다라는 표지석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기억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기억속에만 남아 있는 학교, 사진속에만 남아 있는 것은 건물만이 아니다. 그 시절에 선생님들의 모습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었다. 국어를 가르치던 여선생님이었다.

 

그 때 당시 대학교를 졸업한지 몇 해 안된 K선생님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학생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보통신의 시대에 인터넷상으로접한 것이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K선생님의 글을 사진과 함께 보았다.

 

K선생님의 사진을 접하였을 때 놀랐다. 칠십년대의 이십대 선생님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육십이 된 초로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눈 등 모습이 옛날 모습과 같았다. 다만 세월이 흘러 늙게 보였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 눈매와 입매는 그 모습 그 대로, ‘생()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네’를 보고(2009-12-2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중학교 시절 K선생님은 일종의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때 당시 선생님의 나이는 아마 이십대 중반 정도 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인터넷으로 접한 선생님의 얼굴은 젊은 시절의 얼굴이 아니었다. 일종의 환상이 깨진 것이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선생님의 얼굴은 항상 이십대이었으나 사진속의 얼굴은 초로의 육십이 된 얼굴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서

 

2009년 당시 조선일보에 K선생님의 수필이 실렸다. 어느 작가와의 인연을 소재로 하여 기고한 것이다. 기고문에 따르면 그 작가는 중학교 시절 K선생님의 지도를 받던 제자라 하였다. 이제 유명작가가 된 제자와의 재회에 대하여 선생님은 34년 만에, 28살의 처녀 선생과 15살의 앳된 남학생이 61살의 노교사와 48살의 장년의 나이로 대면한 것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15살의 앳된 남학생은 연탄불의 작가 이철환이다. 검색을 해 보니 2년 후배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생님과의 나이 차이는 열한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K선생님의 글을 인터넷에서 보고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는 학교시절에 선생님과 관련된 몇 개의 이야기를 곁들였다. 또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볼 수 있도록 블로그 주소를 링크 하여 놓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답신을 보내 주었다.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아는 내용도 있고 모르는 내용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서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한번도 메일도 보내지 않았고 들르지도 않았다. 왜 그런 것일까? 아마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 대신 선생님이 지은 수필집 종이속 영혼을 구매하여 보았다. 책을 보니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선생님의 삶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십대로 항상 머물러 있던 선생님의 이미지가 갑자기 수십년 확장된 듯 하였다. 수필에는 누구에게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 교육자로서의 고뇌에 대한 이야기 등 이 실려 있었다.

 

내 영혼의 뜨락

 

이번 추억여행을 나서면서 선생님의 책을 검색해 보았다. 새로운 책이 보였다. 제목은 내 영혼의 뜨락이다. 선생님의 또 다른 수필집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택배로 받았다. 책의 뒷면에 신경림시인의 추천사가 보였다.

 

 

이 작가는 평생을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온 교사다. 또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성실하게 살아온 주부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런 그의 삶속에서 겪고 느낀 일이며 생각들을 조용하고 차분하게 풀어 놓는다. 누구를 깨우치고 일깨우겠다는 높은 자리에서 하는 얘기들이 아니라서인지 읽기가 편하고 가볍다. 세상을 가르쳐 보겠다고 목청을 높인 소리가 온통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판에 그녀의 글들은 그래서 오히려 값지다. 평범한 것 같은 이 글들이 벌처럼 날아와 따끔하게 우리의 살갗을 쏘는 것을 맛보는 것도 그녀의 글이 주는 재미다.

 

(신경림-시인, ‘내영혼의 뜨락추천사)

 

 

 

 

 

 

선생님이 발간한 책이 몇 권 된다. 그런데 수필집 내 영혼의 뜨락2013년에 발간 되었으니 이제 나온지 일년 밖에 되지 않는 우스개 소리로 따끈따끈한책이다. 과연 이 책속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천천히 음미해 볼 작정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지금은 사라진 학교를 멀리 하고 길을 내려 왔다. 대학로를 거쳐서 경신고등학교가 있는 혜화동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길을 내려 오다 보니 예전에 보았던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은석초등학교 맞은 편에 있었던 창경초등학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사라진 학교가 동대부중고를 비롯하여, 정신여중고, 효제초등학교, 은석초등학교, 창경초등학교이다. 근처 대학로 있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과 법과 대학까지 합하면 수 많은 학교가 사라진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어느 것도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그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제행무상 법칙에 따르면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게 되어 있다. 예전에 다녔던 학교가 사라진 것도 역시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른다. 또 학교가 있던 곳에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빌딩들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옛 중학교 자리에서 지난 날을 회상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이곳에 학교가 있었다라는 표지석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옛날 정문길  끝자락에서 하나의 비석을 발견하였다. ‘무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다.

 

 

無常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하네.

 

이천일년 십이월 십일

 

 

 

 

 

 

비석의 글을 보니 2001 12 10일에 건립된 것이다. 지금 처럼 추운 겨울에 세워진 것이다. 내용을 보니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시이다. 그런데 이 시의 내용은 대단히 불교적이라는 사실이다. 검색하여 보니 나옹선사(1262-1342)가 지은 것이다.

 

나옹선사의 한문게송을 보면 靑山兮要 我以 無語 蒼空兮要 我以 無垢 聊無愛 而無憎兮 如水 如風 而終我로 되어 있다. 게송의 내용을 보면 두 번째 구절에서 티없이 살라하네(無垢)라 하여  청정한 삶을 노래 하고 있다. 세 번째 구절에서는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聊無愛 而無憎兮)”라 하여 불교에서 소멸시켜야 할 탐진치를 내려 놓자고 하였다. 마치 법구경에서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 (Dhp183)”라는 게송을 연상하게 한다.

 

그곳에 학교가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나옹선사의 게송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아름다운 시로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시비가 하필이면 왜 옛날 동대부중고자리에 있을까? 비석의 뒷면을 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누군가 예전에 이곳에 학교가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시비는 분명히 동대부중고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학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지만 시비로 인하여  이곳에 학교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추운 겨울날 추억여행을 하면서 이 無常이라는 이름의 시비로 인하여 비로소 이곳에 불교학교가 있었다라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14-12-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