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아카데믹한 혜화동로터리, SINCE1953의 동양서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23. 22:57

 

아카데믹한 혜화동로터리, SINCE1953의 동양서림

 

 

 

 

왜 대학로라 하였을까?

 

대학로는 매우 익숙하다. 그것은 중학교 다닐 때 이 길로 다녔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에는 대학로라는 말이 그다지 잘 쓰이지 않았지만 서울대학교가 있다고 해서 대학로라 하였을 것이다.

 

대학로가 널리 알려진 것은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고 난 다음 그 자리에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서면서부터라 볼 수 있다. 그런 대학로에는 플라타너스나무가 있다.

 

몸통 두께가 변함이 없는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나무를 버짐나무라고도 한다. 몸통에 마치 커다란 혹이 붙어 있는 듯 하고 또 뒤틀려 있어서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큰 버짐이 난 것처럼 얼룩달록 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버짐나무가 칠십년대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름드리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사십년전이니 그 아름드리 나무의 몸통은 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몸통 두께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성장을 멈추는 것 같다.

 

하천이 있었는데

 

대학로는 현재 왕복 6차로 이상의 대로이다. 도로 아래에는 지하철이 다니고 있다. 그러나 칠십년대의 대학로는 왕복 4차로 이었다. 이렇게 확장 된 것은 서울대 문리대 방향에 하천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복개 되어 하천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 때 당시에는 작은 하천이 있어서 그 하천을 넘어 가야 서울대 문리대로 갈 수 있었다.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로 저편에 정문의 형상을 한 조형물이 보인다. 그곳이 정문이 있던 자리이다. 그런데 정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는 것이다. 학교와 도로 사이에 하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은행나무 아래가 하천이었다

 

서울대문리대 자리에 하천이 있었다는 사실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은행나무이다. 현재 흥사단 앞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열을 지어 있다. 그 때 당시에도 몸통이 엄청나게 큰 나무 이었는데 지금쯤 두 배로 되어야 하나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은행나무가 열을 지어 있는 것은 학교의 경계를 나타낸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은행나무가 인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것은 은행나무 바로 아래가 하천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노점이 있는 인도가 그때 당시 하천이었다. 현재의 인도와 차선 한 개정도 합한 폭의 하천이 있었다.

 

혜화동 로터리는 아카데믹한 곳

 

대학로는 중학교 다닐 때 버스로 늘 다니던 길이었다. 그래서 플라타너스나 은행나무 등이 매우 익숙하다. 지금과는 달리 대학로 양 옆으로 학교가 있어서 아카데믹 하였다서울대를 캠퍼스를 관통하는 도로이었기 때문에 대학로라 하였을 것이다.

 

대학로는 원래 아카데믹한 곳이다. 대학로 북쪽 끝자락에는 가톨릭 신학대학이 있고, 좀더 멀리에는 성균관대학이 있다. 그리고 주변에 동성고, 혜화고, 보성고, 경신고, 동대부고 등 대학과 중고등학교가 좁은 반경에 몰려 있어서 늘 학생들로 넘쳐났다.

 

 

 

 

 

현재 대학로의 중심은 서울대가 있었던 자리이다. 그러나 칠십년대에는 혜화동로터리가 중심이었다.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사대문 중에 동북쪽 관문에 해당된다. 그곳에 혜화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혜화동 로터리는 아카데믹한 곳이었다.

 

고가차도는 철거 되고

 

칠십년대 혜화동 로터리에는 고가차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철거 되었다. 개발의 시대에 건립된 고가도로나 육교 등이 미관 등의 이유로 하나 둘 씩 철거 되고 있다. 혜화동로터리를 상징하였던 고가차도 역시 어느 날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자리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도시는 변화무쌍하다. 어느 날 오랜만에 와 보면 전에 볼 수 없었던 커다란 건물이 세워져 있다. 또 어느 날 오랜만에 와 보면 있던 구조물이 철거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혜화동 로터리에 있었던 고가차도가 그렇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은 건축물만이 아니다. 혜화동 로터리에는 외국인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리핀 사람들이다.

 

혜화동 로터리의 천주교타운

 

혜화동 로터리에는 일종의 천주교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종로5가에서 연지동에 이르는 길에 기독교타운이 형성되어 있듯이 혜화동 로터리에는 천주교 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가톨릭 신학대학이 있다. 그리고 천주교학교라 볼 수 있는 동성중고등학교가 있다. 여기에다 혜화동성당이 있어서 혜화동 로터리 하면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연상된다.

 

이색적인 필리핀 시장

 

그런데 혜화동성당 입구로 들어 가는 로터리길에는 오래 전에는 보지 못하던 시장이 하나 형성 되었다. 필리핀 사람들의 시장이다. 필피핀 국민들의 대다수가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는데 아마 혜화동성당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래서 자국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필리핀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런 이색적인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 혜화동로터리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우리와 피부가 다르고 생긴 모습도 다르다.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도 달라서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는 필리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수도권 전철을 타면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안산방향의 4호선에서 외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돈나라는 어디?

 

거리를 걷다 보면 필리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나 스리랑카 등 서남아시아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중국인이나 중국동포들은 우리와 생김새가 같아서 구별이 안된다. 말 하는 것으로 밖에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얼마나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살고 있을까?

 

현재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숫자는 백만명을 넘은지 오래 되었다. 또한 외국인과의 결혼도 급증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래서일까 TV에서 다문화 가정에 대한 프로를 많이 본다.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에서 시집온 여인들의 삶에 대한 프로이다.  

 

언젠가 베트남에 대하여 글을 썼다. 검색하다 보니 베트남에서 우리나라로 시집온 사람들이 오만명 가량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떤 이는 베트남에 대하여 사돈나라라고 하였다필리핀에서 수 많은 여인들이 시집을 왔다면 필리핀 역시 사돈나라가 될 것이다.

 

결혼이민자 수는?

 

그렇다면 어느 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을까? 우리나라 국민과 결혼해 합법적인 부부가 되어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2013년 기준 현재 15만명 가량 된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No

 

남자

여자

1

베트남 (Vietnam)

424 (1.07%)

39,018 (98.93%)

2

중국 (China)

4,468 (12.40%)

31,549 (87.60%)

3

조선족, 한국계 중국인 (ethnic Koreans living in China)

7,591 (28.89%)

18,682 (71.11%)

4

일본 (Japan)

1,179 (9.66%)

11,030 (90.34%)

5

필리핀 (Philippines)

285 (2.84%)

9,754 (97.16%)

6

캄보디아 (Cambodia)

12 (0.26%)

4,590 (99.74%)

7

미국 (United States)

2,193 (77.14%)

650 (22.86%)

8

태국 (Thailand)

62 (2.36%)

2,570 (97.64%)

9

몽골 (Mongolia)

80 (3.39%)

2,278 (96.61%)

10

우즈베키스탄 (Uzbekistan)

62 (2.97%)

2,028 (97.03%)

 

 

 

 

 

 

 

 

 

 

 

 

 

 

 

 

 

 

 

 

 

 

출처 :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2014 1 20)

 

 

 

표를 보면 베트남이 1위이다. 베트남신부의 숫자가 3 9천명에 달한다. 한국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사돈의 나라라 할 만 하다. 이어서 중국이 2위를 차지한다. 3위는 한국계중국인이라 불리는 조선족이다. 그런데 중국인과 조선족을 합하면 결혼 이민자는 63000명에 달하여 가장 많다. 그러나 중국인과 조선족을 분리하여 통계로 잡고 있다.

 

4위는 일본이다. 일본인 신부가 1,1000명 가량으로 남자에 비하여 월등하게 많다. 일본에서도 한국으로 많이 시집을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남자가 77%로서 압도적으로 많다. 미국인 신랑이 미국인 신부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다.

 

6년전에도 글을 썼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살면 그들만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혜화동로터리에서는 필리핀공동체가 형성되어 필리핀사람들을 상대로 매주 일요일에 장이 선다. 그래서 장터에 오면 마치 이국에 온 듯한 느낌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혜화동 로터리, 추억의 장소에 낯선 이방인들이 서성일 때(2008-12-23)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그런데 글을 쓴 날자를 보니 육년전 12 23일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날자 역시 12 23일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필리핀 이민자에 대하여 똑 같은 날자에 글을 쓰고 있다.

 

사장님 드시고 가세요

 

6년 전 꼭 이맘 때 글을 썼을 때 필리핀 주말시장에 있었다. 그 때 당시에는 시장구경만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체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물건을 사는 등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먹거리도 팔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비좁은 식당안으로 들어 갔다.

 

 

 

 

 

 

간이 식당은 가족끼리 운영하는 것 같다. 주로 필리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한국사람들도 보인다. 아마 호기심으로 왔을 것이다. 가게 여주인이 유창한 한국말로 사장님 드시고 가세요라고 권유한다. 그러면서 맛있는 것을 추천하겠다고 하며 철제로 된 식판에 이것 저것 담는다. 가격을 물어 보니 6천원이라 한다.

 

 

 

 

 

 

영하 십도 가까이 되는 날씨에

 

영하 십도 가까이 되는 날씨에 앉을 곳이 마땅치 않다. 천막 바깥에 앉을 수 있는 곳이 보였다. 그곳에 앉아 맛을 보았다.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재료로 하여 만든 것이다. 생각보다 무척 맛있었다. 한국에서 전혀 맛보지 못한 것이다. 아마 필리핀 특유의 조리법과 향신료가 첨가 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바깥의 날씨가 너무 추워서 누들을 먹지 못하였다. 영하 십도 가까이 되는 날씨에 모두 식어 버렸기 때문이다.

 

 

 

 

 

 

영하의 추운날씨이다. 필리핀의 경우 더운 날씨이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혹한에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필리핀사람들은 잘 적응 하는 것 같다. 머나먼 이국에서 살기 위하여 발버둥 치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미리 준비한 음악씨디를 하나 건네 주었다. 아까 사장님 드시고 가세요라고 말한 나이 든 필리핀 아주머니에게 주었다. 자비송(The chant of metta), 보배경(Ratanasutta), 길상승리게(Jayamangalagatha) 등이 실려 있는 불교명상음악이다.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

 

천막 뒷편에서 음식을 먹다 보니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4.19를 알리는 비석이다. 비석에는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1992년에 건립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 가톨릭신학대학이나 동성고등학교와 관련이 있는 비문처럼 보인다.

 

 

 

 

 

 

어떤 이는 자신을 휴전돌이라 하였다. 인터넷카페에서 본 글이다. 휴전동이가 아니라 왜 휴전돌이라 하였을까? 역사적 사건이 일어 났을 때 이를 기억하기 위하여 닉네임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해방동이가 대표적이다. 그래서일까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에 태어났던 사람들에게 해방동이라는 명칭을 붙여 준다. 최인호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휴전돌이라니. 휴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휴전돌이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사람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아마 일학년 때 인 것 같다. 어느 날 어느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 하기 전에 묵념을 하자고 하였다. 영문을 모른채 열세살 먹은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시대로 묵념을 하였다. 4월 19일 날이다. 그 선생님의 얼굴이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4월 19일날 아침에 그 선생님의 주도로 묵념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 선생님은 4.19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친구가 죽었다든가 하는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혁명이 일어나던 때 태어난 아이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혁명동이, 혁명돌이? 너무 지나친 것일까?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

 

혜화동로터리는 역사가 매우 오래 된 것이다. 4.19 혁명 당시는 물론 조선시대로 까지 역사가 확장 된다. 그렇다면 혜화동 로타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곡선모양의 빌딩이라 볼 수 있다. 주변이 아무리 변해도 그 건물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명륜동방향에 삼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로터리가 둥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건물 역시 곡선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건물이 1970년대 당시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변의 건물이 헐리고 새로 지어졌어도, 그리고 고가차도가 지어졌다 허물어졌어도 이 건물만큼은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그래서 마치 혜화동의 산역사처럼 보이고 혜화동로터리의 터줏대감 처럼 보인다.

 

합법적 데이트장소

 

칠십년대 당시 그 건물 일층에는 빵집이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빠리바케트 같은 제과점을 말한다. 그 때 당시 그 빵집은 일종의 데이트 장소이었다.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그 빵집에서 빵을 먹으며 이야기 하는 장소이었는데 거의 합법적 분위기의 장소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그 빵집은 보이지 않는다. 빵집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종류의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를 반복하였을 것이다.

 

‘SINCE1953’ 동양서림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집이 있다. 그것은 서점이다. 칠십년대도 있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그 서점 이름은 동양서림이다.

 

동양서림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사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아마 더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지만 간판을 보니 ‘SINCE1953’이라 되어 있다. 1953년부터 책방의 역사가 시작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양서림은 올해로 61년이 된다. 사람으로 따진다면 환갑이 넘은 것이다.

 

혜화동로터리 동양서림을 검색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발견하였다.

 

 

장욱진(張旭鎭1917-1990)은 동경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신사실파, 1954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다가 1960년 학교를 그만두면서 오직 화가의 길을 걸었다. 소탈한 성품과 그대로 소박한 그림이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1960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집을 마련했고 또 이웃에 동양서림을 개설했다. 고택은 흔적조차 없어 단지 그저 그곳이 그터였다고 할뿐이지만 동양서림은 여전하니 지나가면 꼭 들러 시집 한권이라도 구하되 그 책에는‘장욱진의 동양서림에서 구했다’고 써놓을 일이다.

 

(최열 미술유적답사 ,장욱진(張旭鎭1917-1990) 고택)

 

 

기사에 따르면 동양서림은 장욱진이라는 사람이 연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때가 1960년이라 한다. 동양서림 간판에는‘SINCE1953’라 되어 있는데 혜화동로터리 현재 자리에 책방을 낸 것은 1960년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의 책방은 54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1960 4.9혁명이 태어나던 사람들의 나이와 같은 연륜을 가진 책방이다.

 

6년전과 비교해 보면

 

2008년 당시에도 동양서림을 주목하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두었다. 6년이 지난 지금 동양서림 주변의 가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2008 12월 동양서림 주변

 

 

 

 

 

 

 

2014 12월 동양서림 주변

 

 

 

비교해 보니 큰 차이가 없다. 동양서림 왼편에는 문구점이 그대로 있고, 오른편에 약국도 그대로이다. 이층에 있는 치과의 이름도 그대로이다. 이렇게 오래 된 건물에 입주해 있어서일까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변화무쌍한 시대에

 

모든 것은 무상하여 변하게 마련이다. 특히 도시가 그렇다. 멀쩡하던 건물을 허물고 더 큰 빌딩을 짓는다. 추억이 있는 서울운동장 축구장과 야구장이 어느 해 갑자기 헐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로는 확장되고 하천은 복개가 된다. 옛날 대학로에는 하천이 흘러서 자연스러웠으나 지금은 복개 되어 넓은 도로가 되었다.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대학로를 오가는데 그 곳에 하천이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을까?

 

대학로 끝자락에 있는 혜화동로터리는 가장 아카데믹한 곳이다. 대학과 중고등학교가 로터리를 중심으로 하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책방이 하나 있었다. ‘동양서림이다. 주변이 아무리 변해도 그 책방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시대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향수를 느끼고 안도한다.

 

 

 

2014-12-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