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금 이대로가 좋은가?”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때 문제점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11. 13:16

 

 

지금 이대로가 좋은가?”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때 문제점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지향하는 목적과 이념이 없지 않을 수 없다. 하다 못해 조직폭력배들도 행동강령이라는 것이 있다.

 

언젠가 TV프로에서 어느 조폭이 말하기를 선배말이라면 하나님말과도 같이 여긴다라는 말을 하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유도부에 속해 있던 친구 역시 선배들의 말에 무조건 복종한다고 하였다. 개인 보다 조직이 우선인 것이다.

 

수 년전 일본NHK대하드라마를 인터넷으로 보았다. 2004년에 방영된 50부작신선조(新選組)’이었다. 일본의 도쿠가와막부 말기에 수도인 쿄토의 치안을 맡기 위하여 막부에서 고용한 떠돌이무사들의 모임이다.

 

드라마를 보면 처음에는 시위관의 관원 중심으로 시작하였다. 시위관장과 그의 제자 몇 명과 동료 몇 명이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도중에 대원을 모집하며 세를 불려 나가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선발된 대원 중에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 내는 등 무사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다발하였기 때문이다.

 

신선조지도부에서는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다. 오개 항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무사도이었다. 그런데 부칙이 매우 살벌하였다. 무사로서 품위를 어기는 행위가 발생하였을 때 할복한다(背候者切腹申付ベク候也)’는 부칙이 있었기 때문이디

 

신선조드라마에서는 탈주하다 붙잡힌 간부가 할복하는 장면도 보여 준다. 이렇게 엄한 규칙이 있어서이었을까 떠돌이사무라이들의 모임인 신선조는 그때 당시 최강의 무사조직이 되었고 철의 결속을 자랑하였다.

 

사업보국(事業報國)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규정이 있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사장의 방침이 있다. 회사가 좀 더 크다면 사규를 만들어 놓는다. 더 큰 대기업이라면 경영이념이라 하여 거창하게 슬로건을 만든다.

 

우리나라 최대 재벌인 삼성의 경우 삼대경영이념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업보국(事業報國)’이다. 사업을 통해서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서 기업 경영을 통해 사회 전반적인 부와 이익을 창출한다는 거창한 이념이다. 이와 같은 창업자의 이념이 있어서일까 삼성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매출로서 국가경제발전에 기여 하고 있다.

 

목적없이 모여 있다면

 

둘 만 모여도 조직이 된다. 동업을 할 때 개인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것도 조직의 틀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정도 조직이라 볼 수 있다. 부부가 서로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더구나 인원이 세 명, 네 명, 열 명 이런 식으로 불어 간다면 개인적인 행위는 점점 줄어 든다. 그 대신 조직이 지향하는 목적에 따라야 한다.

 

가장 작은 조직에서부터 가장 큰 조직에 이르기 까지 목적이나 목표가 없는 회사나 단체는 없다. 만일 목적 없이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질서도 없기 때문에 중구난방이 되기 쉽다.

 

회사가 커나가면 규모에 걸맞는 사규를 만든다. 그리고 창업자의 이념을 따르도록 한다. 창업자가 사업을 통해서 나라를 이롭게 한다라는 경영이념을 세웠다면 회사는 그 방향으로 나아 갈 것이다. 국가도 커다란 조직이나 단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국가이든지 헌법이 있다는 사실이다. 헌법이 있음으로 인하여 국가의 정체성이 규정된다.

 

상가(Sangha)의 형성

 

마찬가지로 불교에 조직이나 단체가 없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불교에 조직이나 단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에서 조직이나 단체의 개념이 상가(Sangha)’이다.

 

부처님이 사함빠띠 브라흐마의 요청을 받아 들여 세상에 가르침을 펴기로 마음 먹었다. 가장 먼저 전에 같이 수행하였던 다섯 수행자를 교화하였다. 이것이 최초 상가가 탄생된 역사적 사건이다. 이후 야사 등 양가집 자제들이 속속 들어 옴에 따라 상가로서 틀이 잡혀 지게 된다.

 

전법을 시작한지 일년이 되지 않아 율장 대품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61명의 아라한이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60명의 아라한들에게 전도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부처님 자신도 우르벨라로 전법하러 떠난다.

 

부처님이 우르벨라에서 깟사빠 삼형제를 교화함으로서 천명 가까이 늘어나 교단이 급신장하였다. 이후 계속 출가자가 늘어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부처님의 교단은 크게 성장하였다.

 

율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러나 급하게 성장하다 보니 그 중에는 어중이 떠중이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 특히 재가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 때 마다 규정을 만들어 나갔다.

 

예를 들어 빚을 지고 출가한 자가 있다. 이런 사실이 세상사람에게 알려졌을 때 율장대품에 따르면 그러자 사람들은 혐책하고 분개했다라고 하였다. 이런 비난이 있게 되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빚진 도둑을 출가시켜서는 안된다. 출가시키면 악작죄가 된다.(Vin.I.75)”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케이스 바이 케이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율장이다.

 

 

 

 

부처님이 처음 전법하였을 때는 문제가 없었다. 이미 준비된 수행자들이었고 또한 잘 배운 양가집 자제들 위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단이 급팽창하게 되자 여러 가지 문제가 노출되었다.

 

부처님 당시 상가에는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브라만에서부터 왕족, 평민, 노예에 이르기 까지 출가자의 출신성분이 다양하였다. 또 먼 지역까지 가르침이 전파 되다 보니 해당 지역에서 구족계를 받는 자가 생겨 나기도 하였다. 이렇게 수 많은 출가자가 생겨 나게 되었을 때 역시 수 많은 문제가 발생되었다. 문제가 발생될 때 마다 만든 것이 율장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율장에는 수 많은 규정이 있다. 그것도 매우 세세한 규정이다. 언뜻 보기에도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가감 없이 적혀 있다. 최근 율장을 우리말로 번역한 전재성님에 따르면 율장에는 부처님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민중의 삶의 방식이 율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장은 역사적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율장이 중요할까?

 

재가자에게 율장은 금서

 

재가자에게 있어서 율장은 금서와 다름 없다. 한국불교에서는 재가자가 율장을 읽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계신문 사이트의 기사에서도 확인 된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어느 율사스님은 “재가신도로서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일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불자의 바른 자세는 아니다.(율장 공개해야 하나, 법보신문)”라고 경고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율장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요즘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범계 행위가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구족계를 받은 스님들이 과연 율장정신대로 사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율장을 한번이라도 읽어 보았는지 의문이다.

 

경장과 논장을 잃어 버려도 율장만 있으면

 

지난해 전재성님이 우리말로 번역한 빠알리위나야(율장)을 종종 보고 있다. 니까야(경장) 못지 않게 방대한 분량이다. 출가자의 모든 것에 대하여 기록해 놓은 일종의 출가자의 지침서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율장을 보다가 이런 게송을 발견하였다.

 

 

1.

계율의 위대한 의취는

품행이 방자한 자들에게 행복을 가져오니

악한 욕망을 지닌 자를 제어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자를 섭수한다.

 

2.

교계를 포함하는

일체지의 승리자의 활동경계로

다른 것이 없는 결계.

안온하여, 잘 시설된 것으로 의혹을 떨첬으니,

 

3.

율장안의 다발과

부수와 논모 가운데

의취에 따라 행하는

착하고 건전한 님은 이치에 맞게 실천합니다.

 

4.

소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가

소떼를 보호하지 못하듯,

계행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가 제어를 수호할 것입니까?

 

5.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

 

(크나큰 다발 후렴시, 율장대품 Vin.I.98)

 

 

율장대품에서 부처님의 깨달음과 교단의 형성과정이 설명되어 있는 크나큰 다발이 끝날 때 나오는 후렴시이다. 여기서 인상 깊은 게송은 다섯 번째 이다.

 

다섯 번째 게송을 보면 경장과 논장을 잃어 버려도 율장만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속할 수 있음을 말한다. 율장, 경장, 논장 이렇게 빠알리 삼장 중에 율장하나만 남아 있어도 불교가 존속 됨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율이 지속되는 한 불교는 망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vinaye avinaṭṭhamhi punatiṭṭhati sāsana)라 한 것이다.

 

율장정신이 실종되었을 때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슬람의 침공, 힌두교와의 습합 등이 거론 된다. 그러나 위 게송에 따르면 율장정신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계율이 망가뜨려졌을 때 불교도 함께 망가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율장정신이 살아 있으면 불교도 역시 살아 있게 된다.

 

테라와다 종주국이자 교학의 나라라 불리 우는 스리랑카, 그리고 수행의 나라라 불리 우는 미얀마, 또 계율의 나라라 불리 우는 태국에서는 불교가 살아 있다. 이는 율장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민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이는 출가자들이 율장정신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율장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계율이 망가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됨을 말한다. 그렇다면 율장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상가라 볼 수 있다. 상가가 존속 되어 왔고 빅쿠들이 율장정신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계율이 망가지지 않고 불교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것이다. 그런 상가는 불자들에게 귀의의 대상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여 상가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 가지 종류의 상가가 있는데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상가가 승보로서 간주 된다. 삼귀의 문에서 상가에 귀의합니다라고 하지 빅쿠들에게 귀의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상가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하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상가에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았다. 단어만 나열한다면 ‘a multitude(다수), an assemblage(모임), the Buddhist clergy(불교도성직자)’가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상가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Sagha

,[fr. sa+h; lit. “comprising.” The quâsi pop. etym. at VvA.233 is “diṭṭhi-sīla-sāmaññena saghāabhāvena sagha”]

 

1.

multitude, assemblage Miln.403 (kāka°); J.I,52 (sakua°); Sn.589 (ñāti°); 680 (deva°); D.III,23 (miga°); Vv 55 (accharā°=samūha VvA.37).

 

bhikkhu° an assembly of Buddhist priests A.I,56, etc.; D.I,1, etc.; S.I,236; Sum I.230, 280; Vin.I,16; II,147;

bhikkhunī° an assembly of nuns S.V,360; Vin.I,140;

sāvaka° an assembly of disciples A.I,208; D.II,93; S.I,220; PvA.195, etc.;

samaa° an assembly of ascetics Sn.550. –

 

2.

the Order, the priesthood, the clergy, the Buddhist church A.I,68, 123, etc.; D.I,2, etc.; III,102, 126, 193, 246; S.IV,270 sq.; Sn.227, etc.; J.II,147, etc.; Dhs.1004; It.11, 12, 88; Vin.I,102, 326; II,164, etc. ‹-›

 

3.

a larger assemblage, a community A.II,55=Sv.400; M.I,231 (cp. gaa). -- on the formula Buddha, Dhamma, Sngha see dhamma C 2.

 

(Sagha, 빠알리사전 PCED194)

 

 

상가에 대한 설명을 보면 크게 세 가지임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로 모임(multitude, assemblage)’으로서 상가이고, 두 번째는 교단(the Order)’으로서의 상가이고, 세 번째는 공동체(a community)’로서의 상가이다.

 

모임으로서 상가(assemblage)

 

모임으로서 상가는 단지 모여 있는 것을 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빅쿠들이 여럿 모여 있을 때 그것을 상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한국불교의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하였을 때, 스님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상가로 간주 하는 것과 같다.

 

모임으로서 상가에 대하여 ‘S.I,236’을 소개 하고 있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tha kho bhikkhave sakko devānamindo vejayantapāsādā orohanto pañjaliko suda bhikkhusagha namassati.

 

[세존]

그때  수행승들이여,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베자딴따 궁전에서 내려와서 합장하고 진실로 수행승들의 참모임에 예경했다.”

 

(참모임에 대한 예경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0,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의 참모임에 대하여 ‘bhikkhusagha’라 하였다. ‘빅쿠상가라는 뜻이다. 마치 스님들의 상가와 같은 뜻이다. 스님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상가로 간주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다름 아닌 비구들의 모임 (an assembly of Buddhist priests)’ 이다.

 

상가에 대하여 단순하게 수행승들의 모임으로 간주 한다면 비구가 모여 있는 것에 대하여 비구들의 모임(an assembly of Buddhist priests)’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비구니의 모임(an assembly of nuns)’도 있고, ‘제자의 모임 (an assembly of disciples)’, ‘수행자의 모임(an assembly of ascetics)’ 등 다양하게 불리 울 것이다.

 

종단으로서 상가(the Order)

 

비구나 비구니, 또는 제자, 수행자 들이 모여 있는 것은 모임(assembly)’이다. 그래서 단지 모여 있다는 뜻으로 상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여 있으면 질서가 생겨 나게 마련이다. 어느 조직이든지 두 명 이상 만 되면 질서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 많이 모였을 때 자연스럽게 질서가 형성될 것이다. 조직으로서 틀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교단 또는 종단으로서 상가(the Order)’이다. 상가의 두 번째 의미가 교단 또는 종단으로서의 상가이다. 이에 대하여 근거가 되는 경으로서 ‘Vin.I,16’을 들 수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이제 저는 세존께 귀의 합니다. 또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수행승의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 하겠습니다.

 

(야싸출가와 최초의 재가신자 이야기, 율장대품 Vin.I,16)

 

 

율장대품에 따르면 최초의 재가신자가 된 대부호 야사의 아버지가 삼귀의를 제창하고 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삼귀의를 제창함으로서 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재가신자는 상가에 귀의한다고 하였다. 그 어디에도 빅쿠에게 귀의한다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초기경전에는 모두 상가에 귀의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께 귀의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상 한국불교에는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스님들은 있을지 몰라도 승가가 존재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불교에는 빅쿠도 불교신자도 있을 수 없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삼귀의를 제창함으로써 불교인이 되는데,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께 귀의함으로서 사실상 이귀의가 되어 삼귀의자가 없는 것이다. 그런 한국불교를 불교라 볼 수 있을까?

 

한국불교는 불교도 없고 불교신자도 없다.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고수하는 한 한국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삼귀의를 제창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님도 빅쿠가 아니고 재가불자도 진정한 불자가 아니다. 있다면 한국식의 불교가 있고 한국식의 재가불자만 있는 것이다. 세계불교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불교가 한국식 불교인 것이다.

 

공동체로서의 상가(a community)

 

상가의 세 번째 의미는 공동체로서의 상가(a community)’를 말한다. 가장 큰모임의 형태로서 가장 이상적인 상가의 형태라 볼 수 있다. 그래서 PCED194에서는 공동체로서의 상가에 대하여 공식적인 불법승(the formula Buddha, Dhamma, Sngha)’ 삼보중의 하나에 속하는 상가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공공체로서의 상가는 모임이나 교단을 뜻하는 상가 보다 훨씬 더 수승한 개념이다.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상가에 대하여 공식적 상가라 말한다.

 

공식적 상가로서 상가공동체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근거가 되는 경으로서 ‘A.II,55’를 들 수 있다. 찾아 보니 공동체로서의 상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Puna ca para bhikkhave ariyasāvako sag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hoti:

 

supaipanno bhagavato sāvakasagho, ujupaipanno bhagavato sāvakasagho, ñāyapaipanno bhagavato sāvakasagho, sāmīcipaipanno bhagavato sāvakasagho, yadida 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purisapuggalā.

 

Esa bhagavato sāvakasagho āhuneyyo pāhueyyo dakkhieyyo añjalikaraīyo anuttara puññakkhetta lokassāti.

 

Aya bhikkhave tatiyo puññābhisando kusalābhisando sukhassāhāro sovaggiko sukhavipāko saggasavattaniko iṭṭhāya kantāya manāpāya hitāya sukhāya savatt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 참모임에 관하여 이와 같이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합니다.

 

이와 같이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들로 이루어졌으니, 공양을 받을 만 하고 대접받을 만하고 선물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고 세상에 가장 훌륭한 복밭입니다.’

 

라고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춘다.

 

이것이 세 번째로 공덕을 넘치게 하고, 선행을 넘치게 하고, 행복의 자양분이 되고 , 청정한 삶의 조건이 되고, 행복의 열매를 거두고,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하고, 원하는 것, 바라는 것, 마음에 드는 것, 유익한 것과 행복한 것으로 이끈다.”

 

(Dutiyapuññābhisandasutta-공덕이 넘치는 경2, 앙굿따라니까야 A4.52, 전재성님역)

 

 

공식적 상가라 불리우는공동체로서의 상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 되어 있다. 이런 공동체로서의 상가는 재가불자들 뿐만 아니라 출가자들에게도 귀의처가 된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삼보로사 상가는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가 된다. 그런 삼보중의 하나가 승보이다. 승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상가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목적은

 

경에 따르면 고귀한 제자(ariyasāvaka)라 하였다. 이는 출가자만 말하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 않다. 경에서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는 모두 부처님의 고귀한 제자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귀한 제자가 실천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것 또한 명확하게 규정 되어 있다. 경에 따르면 상가공동체에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는 ‘1) 훌륭하게 실천합니다, 2) 정직하게 실천합니다, 3) 현명하게 실천합니다, 4)조화롭게 실천합니다라 하였다. 바로 이것이 상가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목적임을 말한다.

 

상가공동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출가자들이 모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면 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목적도 추구하는 가치도 없이 모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상가공동체라 볼 수 없다.

 

상가공동체의 네 가지 실천 항목 중에 조화롭게 실천합니다(sāmīcipaipanno)라는 항목이 있다. 영어로는 ‘entered into the proper course’로 설명되어 있다. ‘적절한 과정으로 들어간다라는 뜻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라 되어 있다. 아마 이 부분은 화합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질서도 필요 하지만 서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공동체가 오래 지속 되기 때문이다.

 

경에 따르면 공동체내에서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기업에 경영이념이 있듯이 부처님의 고귀한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공동체에 목적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가르침의 실천이다.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훌륭하게 실천하는 상가, 정직하게 실천하는 상가, 현명하게 실천하는 상가, 조화롭게 실천하는 상가로 목적을 두었다.바로 이것이 공동체로서의 상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자 목적일 일 것이다.

 

승가공동체의 특징은 자자와 포살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들로 이루어졌으니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의 상가공동체는 성스런 상가임을 천명한 것이다.

 

사쌍팔배의 성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상가공동체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성자가 아닌 자들의 모임도 상가로 볼 수 있는냐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우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가르침을 실천하였는데 성자가 출현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틀린 것이 될 것이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깨달음에 이르러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공동생활하며 자자와 포살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승가공동체의 특징은 자자와 포살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어야 사쌍팔배의 성자가 출현할 수 있다.

 

승가공동체에 들어 가는 것 없이 나홀로수행하여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 집단에 들어가서 함께 실천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럴 경우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 그런 계율 중에 자자와 포살이 있다.

 

승가공동체에 자자와 포살이 없다면 이를 승가공동체로 볼 수 있을까? 아쉽게도 한국불교에 승가가 있다고 하지만 자자와 포살이 거의 없다고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스님들이 나홀로살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 모여 살아야 승가라 볼 수 있다. 또 자자와 포살이 행해져 사쌍팔배의 성자가 출현할 수 있다. 그런데 나홀로 산다면 승가라 볼 수 없다. 더구나 자자와 포살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한국불교에는 사실상 승가가 없다.

 

한국불교에는 승가가 없다

 

한국불교에 승가가 존재 하지 않는 결정적 이유는 한글삼귀의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스님을 승보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가가 존재 하지 않는다. 승가가 없다 보니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홀로 사는 것 같다. 마치 독각승처럼 홀로 사는 것이다.

 

홀로 살면 자자와 포살이 이루어질 수 없다. 수 백가지나 되는 학습계율을 지킬의무도 없다. 그런데 홀로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 있으면 딴 생각이 난다고 한다. 홀로 살게 되었을 때 누군가 충고를 해주는 이가 없을 때 마음대로 살 것이다. 그런 삶은 재가자의 삶이나 다름 없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가?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에게 귀의하라고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스님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이다. 그러나 초기경전 어디에도 수행자(스님)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수행자를 공양하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등장한다. 스님을 승보로 보았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승가의 존속이유가 없어진다

2) 스님을 승보로 보면 자자와 포살이 있을 수 없다

3)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에게 보시하게 된다

4)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래도 스님을 승보로 보아야 할까? 더구나 스님들께 귀의하라 하며 더구나 스님을 승보로 보는 것은 웃음거리이자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불교 전통에서도 스님을 귀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불자들에게 귀의의 대상은 명백히 승가공동체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고쳐지지 않고 있다. 아니 고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스님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금 이대로가 좋기 때문이다. 속된말로 중이 제머리 못깍는다다는 말이 있듯이, 스님들 스스로가 개혁하는 것이 힘드는가 보다.

 

 

2015-01-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