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로지 자신만의 해탈을 위하여? 산 중 꽃은 저 혼자 피지만 그 꽃 향기는 산 아래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2. 19:34

 

오로지 자신만의 해탈을 위하여? 산 중 꽃은 저 혼자 피지만 그 꽃 향기는 산 아래로

 

 

 

콘트롤씨(Ctrl+C)와 콘트롤브이(Ctrl+V)

 

종종 좋은 문구를 만날 때가 있다. 그 때 메모 해 놓는다. 책상 컴퓨터 앞이라면 별도의 메모폴더가 있어서 문구를 옮겨 놓는다. 그렇다고 모두 타이핑 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문구를 하이라이트 시킨 다음에 단축키 콘트롤씨(Ctrl+C)’콘트롤브이(Ctrl+V)’를 이용하여 간단하여 붙여 넣는다. 그리고 해당 기사의 주소창을 복사하여 역시 콘트롤씨와 콘트롤브이로 붙여 넣는다. 이렇게 글을 스크랩 해 놓으면 다음에 글쓰기할 때 도움이 된다. 한번 보았던 것을 다시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활용하고자 하는 문구가 산 중 꽃은 저 혼자 피지만 그 꽃 향기는 산 아래로 흐른다고 하지 않은가.”라는 말이다.

 

산 중 꽃은 저 혼자 피지만

 

깊은 산속에 피어 있는 꽃은 남이 보건 말건 혼자 핀다. 그리고 혼자 저문다. 그런데 꽃이 필 때는 향내를 낸다는 것이다. 향내를 내면 벌과 나비가 올 것이다산중에 홀로 사는 도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해당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몇 마디 말이 끊기자 긴 침묵이 흘렀다. 묻고 싶었다. 가장 고립된 땅, 세상과 단절된 이곳에서 스님이 이룰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깨달음인가. 이런 곳에서 십수 년을 버텨낸다는 것 자체로도 세인들의 눈에는 경이롭게 보이겠지만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승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럴까. 결국 고요한 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생을 사는 자연인과 안빈낙도의 삶을 사는 유가와 도가의 도인들과 무슨 차이란 말인가. 붓다의 시대에도 이런 의문을 가졌던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한국 최고의 암자... 스님들은 꺼릴까,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하늘이 감춘 땅, 지리산 묘향대, 오마이뉴스 김종길, 2014-12-29]

 

 

이 글은 불교닷컴에 실려 있는 기사이다. 오마이뉴스와 제휴가 되어 있어서 일부 기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실은 것이다.

 

심산유곡에서 도를 닦으며 고고하게 사는 도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글에는 불편한 심기가 있다. 수십년동안 인적이 끊어지다시피 한 곳에서 도만 닦고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고통스런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는지에 대한 회의 감이다. 그래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승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럴까라고 의문한다.

 

세상사람들의 불편한 심기에 대하여

 

우리나라 스님들은 주로 산중에 머물러 있다. 좀처럼 세상에 내려 올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스님들의 생활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일반인들이나 타종교인들 뿐만 아니라 불자들도 스님들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의문을 표한다. 만일 타종교인이 스님들의 신선과도 같은 생활에 의문을 표한다면 불자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참으로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글에 따르면 잘 설명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초기경전을 이용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글에서는 초기경전 문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붓다가 기원정사에 있을 때 상가라바라는 바라문이 찾아왔다. 자신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희생을 바쳐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다 함께 행복하게 하는데, 붓다의 제자들은 자기 한 몸의 행복만을 위해 도를 닦을 뿐이 아닌가 하고 질문했다. 이에 붓다는 "여래가 도의 실천을 완성하여 번뇌가 사라지고, 해탈을 얻고 난 후 여래가 설한 결과 다른 사람들도 수행해 해탈을 얻는 이가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면 과연 한 사람만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하고 반문했다.

 

(한국 최고의 암자... 스님들은 꺼릴까,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하늘이 감춘 땅, 지리산 묘향대, 오마이뉴스 김종길, 2014-12-29]

 

 

글쓴이는 상가라바의 이야기를 들어 스님들의 산중생활에 대하여 대변하고 있다. 그 골자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인 여래가 도의 실천을 완성하여 번뇌가 사라지고, 해탈을 얻고 난 후 여래가 설한 결과 다른 사람들도 수행해 해탈을 얻는 이가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면 과연 한 사람만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라는 문구이다. 이에 대하여 별도의 설명을 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기에게 전념하고 자기의 깊은 내부를 들여다보는 수행 방식은 얼핏 보기에 다른 이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사람이란 자기의 내부에 깊이 침잠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먼저 '상구보리(上求菩提)' '자리(自利)'로 진리를 확고히 한 다음에 남을 구제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 '이타(利他)'행을 실천하는 것을 붓다의 뜻으로 보고 있다.

붓다도 처음 그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출가는 많은 사람을 구제한 셈이 됐다. 결국 상구보리의 길이 하화중생의 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산 중 꽃은 저 혼자 피지만 그 꽃 향기는 산 아래로 흐른다고 하지 않은가

 

(한국 최고의 암자... 스님들은 꺼릴까,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하늘이 감춘 땅, 지리산 묘향대, 오마이뉴스 김종길, 2014-12-29]

 

 

글쓴이는 이 말을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스님들이 세상과 등진채 수십년, 아니 평생동안 홀로 보내는 것은 나름대로 세상에 기여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산 중 꽃은 저 혼자 피지만 그 꽃 향기는 산 아래로 흐른다고 하지 않은가.”라는 멋진 문구로 마무리 지었다.

 

산중에 피는 꽃은 혼자 핀다. 그러나 꽃이 필 때는 향내가 난다. 향내가 나면 벌과 나비가 몰려 온다. 이렇게 본다면 산중에 홀로 있어도 중생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 없다. 향내 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세상을 맑게 하기 때문에 산중에 있어도 세상을 향기롭게 하기 때문에 세상에 함께 있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상가라와의 경(sagāravasutta, A3.60)에서

 

글에서 언급된 상가라바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앙굿따라니까에 상가라와의 경(sagāravasutta, A3.60)’이 있다. 바라문 상가라와가 부처님이 계신 곳에 찾아 와서 당돌하게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mayamassu bho gotama brāhmaā nāma, yañña yajāma'pi, yajāpema'pi, tatra bho gotama yo ceva yajati, yo ca yajāpeti, sabbe te anekasārīrika puññapaipada paipannā honti yadida yaññādhikaraa, yo panāya bho gotama yassa vā tassa vā kulā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o ekamattāna dameti, ekamattāna sameti, ekamattāna parinibbāpeti, evamassāya ekasārīrika puññapaipada paipanno hoti yadida pabbajjādhikaraanti.

 

[쌍가라바]

존자 고따마여, 우리는 바라문입니다. 우리는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게 만듭니다. 제사를 지내는 자나 제사를 지내게 만드는 자나 둘 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덕이 되는 행위, 즉 제사작법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이러저러한 가문 출신의 사람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오로지 자신만을 수련하고 자신만을 평안하게 하고 자신만을 해탈시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사람에게만 공덕이 되는 업, 즉 출가작법을 만들어 냅니다.

 

(sagāravasutta- 쌍가라바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0, 전재성님역)

 

 

바라문 상가라와는 먼저 제사의 공덕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는 부처님당시 바라문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으로서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면 많은 공덕을 쌓는 것이라 이야기하였다.

 

제사작법(yaññādhikaraa)

 

바라문들은 제사를 권유하는 것이 너무 지나쳐 대규모 동물희생제에 이르기 까지 하였다.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 따르면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물이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가 많습니다.(stn302)”라고 제사를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그래서 수레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게 되었습니다.(stn308)”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대규모동물희생제로 까지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바라문의 타락이다.

 

예전의 바라문들은 청정한 삶을 살았지만 부처님 당시의 바라문은 타락이 극에 달하여 제사를 지내는 자나 제사를 지내게 만드는 자나 둘 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덕이 되는 행위라 한 것이다. 이를 전재성님은 제사작법이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제사작법이라고 번역한 말은 yaññādhikaraa이다. yaññādhikaraa  ‘yañña+ adhikaraa’의 합성어이다. PCED194에 따르면 yañña‘sacrifice; alms-giving. , 牲祭, , 供養, 祭祀, 祭式, 祭壇의 뜻이고, adhikaraalaw-suit, attendance, supervision. 問題, , 事件, 作務. , 諍論, 諍事의 뜻이다. 그래서 yaññādhikaraa에 대하여 제사작법이라 번역한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덕을 닦나니 그것은 바로 제사로 인한 것입니다.”라 하였다. yaññādhikaraa에 대하여 제사로 인한 것이라 번역한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의 해탈을 위하여?

 

싱가라와는 부처님의 교단에 대하여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자신들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으로서 많은 공덕을 쌓고 있고, 또한 공덕을 쌓게 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한 수행자들은 오로지 개인적인 행복과 개인적인 해탈만 추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오로지 자신만을 수련하고 자신만을 평안하게 하고 자신만을 해탈시킵니다.”라 하여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오늘날이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종종 출가수행자를 비판하는 글을 접할 수 있다. 어느 종교전문 기자는 스님들이 출가하여 산중에서만 생활하는 것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 도시에 포교당을 세워 놓고 포교에 전념하고 있는 어느 스님은 스님들은 속히 산에서 내려 오셔야 합니다라고 호소한다. 이에 대하여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2011-09-0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글에서 헤문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스님들은 속히 산에서 내려 오셔야 합니다. 산사의 수행처를 비우고 내려 오시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여지껏 배우고, 수행하고, 익히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 내려 오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부러 저잣거리에 스스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꾸만 산속으로 숨어 들어서는 안됩니다. 산속으로 출가한 스님의 세월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물론 산속에서도 세상을 맑히고 교화하는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대다수의 민중들은 저잣가리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정기적으로 산으로 불러 모아서 불법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조건이 열악합니다.

 

산으로 오는 도중에 모든 외도들에게 모두 감화를 받고 귀의를 당해 버리고 맙니다.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 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외도들의 활동이 너무 적극적이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해 들으면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허황한지 단박에 알 수 있을 터 인데, 우리 불교계의 스님들은 산속에서 개인의 도만 닦고 계시는지, 왜 밖을 내다 보시는 것이 지난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스님들이 빨리 밖으로 나오셔서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그리고 그들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고, 웃고, 떠들면서 교류해야 합니다. 스님들은 마냥 신비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손만 벌리면 곧 옷소매가 잡히고 부르면 목소리로 응답을 해야 합니다. 왜 스님들은 숨어서 살려고만 하십니까. 아직 공부가 덜 익었습니까. 출가 하신지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요.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1 93일자)

 

 

이 글은 불교방송에서 라디오를 듣고 다시듣기에서 녹취한 것이다. 스님의 글을 보면 마치 피를 토하는 것 같다. 공부가 다 되었으면 이제 저자거리에 내려와서 중생과 함께 하라는 것이다. ‘상구보리하였으면 당연히 하화중생하여야 된다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여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한 사람이 수백, 수천, 수만 명이나 됩니다

 

바라문 상가라와는 부처님 교단의 출가자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공덕도 짓지 않고 오로지 개인적인 해탈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앞서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해탈하게 되면 수행해 해탈을 얻는 이가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면 과연 한 사람만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라고 언급 된 바 있다. 산속에서 나홀로 지낸다고 하여 개인적 해탈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오해라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ena hi brāhmaa, taññevettha paipucchissāmi, yathā te khameyya, tathā na vyākareyyāsi. Ta ki maññasi brāhmaa idha tathāgato loke uppajjati araha sammāsambuddho vijjācara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ī satthā devamanussāna buddho bhagavā, so evamāha: ethā'ya maggo, aya paipadā, yathā paipanno aha anuttara brahmacariyogadha saya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mi, etha tumhepi tathā paipajjatha, yathā paipannā tumhepi anuttara brahmacariyogadha saya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Iti aya ceva satthā dhamma deseti, pare [PTS Page 169] ca tathattāya paipajjanti. Tāni kho pana honti anekāni'pi satāni anekāni'pi sahassāni anekāni'pi satasahassāni.

Ta ki maññasi brāhmaa, iccāya eva sante ekasārīrikā vā puññapaipadā hoti anekasārīrikā vā, yadida pabbajjādhikaraanti?

 

[세존]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내가 그것에 대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마음에 드시면 대답해 주십시오. 바라문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에 이렇게 오신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이 나타나서 그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오라, 이것이 길이고 이것이 방도인데, 그것에 따라 나는 청정한 삶의 궁극적 목적을 스스로 분명히 알고 깨달아 이제 알린다. 이것이 길이고 이것이 방도인데, 그것에 따라 그대들도 청정한 삶의 궁극적 목적을 스스로 분명히 알고 깨달아 성취하라.’

 

이와 같이 스승이 가르침을 설하고 다른 자가 그 취지를 따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수백, 수천, 수만 명이나 됩니다. 바라문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한사람에게만 공덕이 되는 작법입니까? 많은 사람에게 공덕이 되는 작법입니까?”

 

(sagāravasutta- 쌍가라바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부처님 한사람만에게만 적용되는 법이 아니다. 부처님이 전법하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 한 두사람도 아니고 수백, 수천,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깨달음을 성취하여 같은 길을 가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 상가라바에게 이것은 한사람에게만 공덕이 되는 작법입니까? 많은 사람에게 공덕이 되는 작법입니까?”고 되묻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덕이 되는 작법

 

부처님의 되물음에 상가라바는 금방 이해하였다. 출가자들이 마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해탈에만 몰두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모든 사람을 위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불사의 깨달음을 이룬자가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세상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그것은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탈한 자가 출현하면 할수록 자신도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개인적 해탈의 추구는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공덕이 되는 작법이 되는 것이다.

 

바람을 거슬러 사방에 퍼지는 계의 향기

 

한사람의 도인이 세상에 출현하면 세상이 맑고 향기로워진다. 반면 한사람의 사기꾼이 세상에 출현하면 세상은 혼탁해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계의 향기로 설명된다.

 

계를 잘 지킨 수행자가 출현하였을 때 마치 꽃에서 향내가 나듯이 계의 향기가 난다. 그런데 계의 향기는 사방으로 퍼져 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a pupphagandho paivātameti,
Na candana
tagaramallikā vā,
Satañ-ca gandho pa
ivātam-eti,
Sabb
ā disā sappuriso pavāti.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

전단향도 따가리향도 말리까향도,

그러나 참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니

참사람의 향기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 간다.(Dhp54)

 

 

Candana tagara vā pi,

uppala atha vassikī,
Etesa
gandhajātāna

sīlagandho anuttaro.

 

전단향, 따가리향, 웁빠라향

또는 밧씨키향이 있지만,

이러한 향기의 종류 가운데

계행의 향기야말로 최상이다.( Dhp 55)

 

 

Appamatto aya gandho

yāya tagaracandanī,
Yo ca s
īlavata gandho

vāti devesu uttamo.

 

전단향과 따가라향과 같은

그 향기는 보잘 것 없지만,

계행을 지닌 님의 높은 향기는

실로 천상계에 이른다.( Dhp 56)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간다고 하였다. 바람을 거슬러 모든 방향으로 퍼지는데 재스민 등 그 어떤 향기 보다 더 널리 더 높이 퍼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심지어 계의 향기는 천상에 이를 정도로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산중에서 도인이 출현하였다면 계의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비록 심산유곡에 있을 지라도 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고 아무리 먼 곳이라도 도달하기 때문에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만든다.

 

꽃이 피면 벌과 나비가 몰려 오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한 사람이 아니라 수백, 수천, 수만의 도인이 출현하였을 때 이 세상은 맑고 향기로워 질 것임에 틀림 없다. 마치 꽃이 피면 벌과 나비가 몰려 오듯이 계의 향기는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세상에 살면서 향기로운 사람이 되면 어떨까? 남을 교화시키기 앞서 자신이 먼저 향기로운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감화를 받게 될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변화 시켜 자신이 먼저 변하였을 때 꽃을 보고 벌과 나비가 모이듯이 주변을 감화시켜 나갈 것이다. 그래서 “나부터 닦자, 그럼으로써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자. 그러면 먼저 나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고,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도 이익이 미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015-01-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