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인연 없는 중생도 구제 할 수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13. 12:12

 

인연 없는 중생도 구제 할 수 있다

 

 

아무리 진흙탕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중에는 오염이 덜 된 자, 가르치기 쉬운 자, 근기가 수승한 자가 있다. 경에 따르면 수면을 벗어난 자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S6.1)”이라 하였다.

 

다양한 사람들 중에서도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즉, 수면을 벗어난 자들은 가르침을 받아 들이기 쉬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수면에 있는 자나 수면 아래 있는 자들은 포기의 대상일까?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고 말씀 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마디로 세상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자비의 마음으로 진리를 설하였다. 탐욕과 성냄 등으로 오염된 채로 삶을 사는 자들의 말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염된 자들이 진리를 진리로써 받아 들이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인연 없는 중생은

 

불가에서 흔히 인연 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는아무나 구제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진리는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설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도 세 번 청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초기경을 보면 세 번 청원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우리나라 찬불가에 청법가가 있다. 가사에 대자비를 베푸사 법을 설하옵소서라는구절이 있는데, 이는 법사에게 법을 설해달라고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청법가의 원류는 초기경전에 있다는 것이다.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부처님에게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S6.1)”라는 대목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은 청해야만 설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법을 청원하지도 않았는데 설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길거리 전도사와 똑 같은 자가 될 것이다. 길거리 전도사들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아무나 붙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다.

 

누군가 부처님 법이 좋다고 하여 아무나 붙들고 법을 설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피곤해 할 것이다.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법을 설해 보았자 소귀에 경읽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법은 듣고자 청원하는 자에게만 설해야 한다.

 

약발이 먹히지 않는 자들에게

 

오염될대로 오염된 자에게 가르침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소귀에 경읽기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약을 주어도 약발이 먹히지 않듯이, 아무리 부처님 법을 알려 주어도 알아 들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환자들 가운데 적당한 자양분을 얻어서 적당한 자양분이 결여 되지 않고, 적당한 의약품을 얻어서 적당한 의약품이 결여 되지 않고, 적당한 간병인을 얻어서 적당한 간병인이 결여 되지 않으면, 그의 질병이 치유되는 그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환자의 음식이 결정되며, 환자의 의약품이 결정되며, 환자의 간병인이 결정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다른 환자들도 간호될 수 있다.”(A3:22)

 

 

a sick monk and Buddha

 

 

부처님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이를 약으로 비유하였다. 약을 주었을 때 약발이 잘 듣는 사람이 있고, 약을 주어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 또 약을 주거나 주지 않거나 잘 듣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약은 가르침으로 비유된다.

 

왜 포기해서는 안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이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중간 정도의 사람이라 볼 수 있다. 마치 약을 주면 약의 효과가 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주어도 듣지 않는 자들이 있다. 너무 오염되어 약발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길거리전도사처럼 쫒아 다니며 법을 알려 주어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법은 청해야 설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설한다면 상대방만 피곤하게 할 뿐이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앙굿따라니까야 환자의 경(A3.22)’에 따르면 이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다른 환자들도 간호될 수 있다라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주석에 따르면 첫번째의 희망이 없는 환자도 간호를 해서 섭섭하게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때문에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때문에 괴로운 세계로 윤회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의 치료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환자도 간호해서 빨리 회복이 되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 (Mrp.II.191)”라 하였다.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마치 환자를 돌 보듯이 의약품을 주고 간호 해 주어야 함을 말한다.

 

인연 없는 중생도 구제 할 수 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자들이 있다. 매우 오염되었기 때문에 악행을 저질러 행위에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오염된 자들을 교화하기는 쉽지 않다. 청소년처럼 마치 약을 주면 약발이 먹히듯이 교화 되는 것이 아니다.

 

극심하게 오염된 자들은 약을 주어도 약발이 먹히지 않듯이 쉽게 교화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그것을 인연으로 하여 언젠가는 교화 될 수 있다. 중병에 걸린 환자를 포기할 수 없다. 다른 환자에게 약을 주고 간호 해 주듯이 중병에 걸린 자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환자에게 해 주듯이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주면 교화할 수 있다.  

 

부처님이 진리를 설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갖가지 근기를 가진 사람들을 보았다.그 중에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근기가 낮은 자나 오염된 자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환자의 경에서 보는 것처럼 다른 환자에게 약을 주고 간호 하듯이 똑 같이 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연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어렵다가 아니라, “인연 있는 중생은 누구나 제도할 수 있다가 될 것이다.

 

 

 

2015-02-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