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역류도(逆流道)를 설한 부처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13. 13:13

 

 

역류도(逆流道)를 설한 부처님

 

 

 

사람은 접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단지 이미지로만 사람을 판단한다면 큰 코 다칠 수 있다. 특히 정치인들이 그렇다. 방송과 신문 등 언론 매체에서 이미지 메이크업을 하여 보도된 것만 믿고 선택하였을 때 낭패를 보는 사례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이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속마음을 잘 알 수 없다. ‘함께 살아 보아야알 수 있는 것이고, 그것도 오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알려면 재난이 닥쳐 보아야알 수 있고, 토론을 해 보아야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상대방의 겉모습만 보고서 판단하려 든다

 

왜 이렇게 생긴 모습이 다를까?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다르다. 쌍둥이라도 자세히 뜯어 보면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성향또한 각기 다르다. 왜 이렇게 생긴 모습과 성향은 천차만별일까? 이에 대한 해법을 초기경전에서 찾을 수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사람마다 차별화가 되는 것에 대하여 업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 이전의 행위에 따라 현재 나의 모습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라 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의 나의 모습은 이전에 지은 행위의 과보로 나타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생긴 모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에 대하여 생물학자들은 ‘DNA’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라는 업자성정견을 믿는다. 여기서 업자성정견이란 세간적 정견을 말한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한다고 하였다. 지금 지은 행위가 나중에 과보로 나타날 때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업대로 산다고 한다. 또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이 성립한다. 흔히 말하는 삼계육도가 이에 해당된다.

 

부처님이 깨달은 눈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육도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은 인간으로 살아 간다. 그러나 인간도 인간나름이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의 연못에서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수중에 잠겨 자라고,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으며,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S6.1)

 

 

상윳따니까야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부처님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하였을 때 사함빠띠 하느님(Brahma: 梵天)’이 진리를 설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본 것이 위에 있는 문장이다.

 

표로 만들어 보면

 

부처님이 바라 본 세상사람들은 매우 다양하다. 이를 오염도에 따라 나눌 수 있고, 또 근기에 따라 나눌 수 있다. 또 외모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경을 근거로 하여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분

수중에 잠겨 있는

(수중에서 자람)

수면에 나와 있는

(수면에 걸쳐 있음)

수면을 벗어난

(물에 젖지 않음)

오염도

많이 오염된 뭇삶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근기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외모

추한 모습의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학습능력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죄악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

 

 

표를 보면 오염도, 근기, 선행, 외모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주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염된 삶

 

뉴스를 보면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강도, 절도, 납치, 성폭행, 살인 등 동일패턴의 범죄가 주류를 이룬다. 이런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전의 패턴으로 보아 앞으로도 유사한 범죄는 계속 발생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오염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많이 오염된 자들은 중죄를 지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오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과 같은 오염원 때문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사견, 의심, 게으름, 들뜸, 양심없음, 수치심 없음’이렇게 열 가지 오염원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흐름에 따라 내려가는 사람

 

부처님은 사함빠띠 브라흐마의 요청에 따라 진리를 설하시기로 결정한다. 그런 진리는 어떤 것일까?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탐진치로 살아 가지만, 부처님의 발견한 진리는 탐진치를 거슬러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역류도(逆流道)’라 한다.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따라 내려 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서 악한 업을 저지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에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A4.5)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자는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 사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세상사람들이 그렇게 사니 나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는데 경에서는 흐름에 따라 내려가는 사람(anusotagāmī puggalo)’이라 하였다.

 

흐름에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란 무엇을 말할까? 경에서도 표현 되어 있듯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진 사람들을 말한다. 눈이나 귀 등으로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아 다니는 사람들을 말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행태가 이렇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으로 사는 삶의 행태는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라고 말씀 하셨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

 

세상사람들의 특징은 끊임 없이 즐거움을 추구 한다오욕락을 즐기는 것이다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면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야 한다. 이를 역류도라 하였다. 그렇다면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사람들은 어떤 자들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

 

 

부처님의 발견한 진리를 실천하려면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가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하는 것이다. 세상사람들과 반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 첫째 조건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탐욕과 성냄으로 살 때,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탐욕과 성냄을 소멸시키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오염원을 소멸시키는 삶은 쉽지 않다. 많은 고통이 따르고 때로 눈문을 흘려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청정한 삶(brahmacaria)’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세상과는 반대로 사는 자들에 대하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paisotagāmī puggalo)라 하였다.

 

 

 

 

유성출가상(2014년 불교박람회)

 

 

역류도(逆流道)를 설한 부처님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사는 것을 역류도(逆流道: paisotagāmī)’라 한다. 이런 역류도를 과연 세상사람들이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에 주저하였다. 마치 소귀에 경읽기 식이 될지 몰라 곤란을 예견하고진리를 설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 것은 누군가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 되는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2015-02-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