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연기법적 사유를 해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20. 10:03

 

 

왜 연기법적 사유를 해야 하는가

 

 

 

스님들을 많이 알지 못한다. 절에 자주 다니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어느 법우님이 말하기를 작은 절에서 스님을 만나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하였다. 뻔히 다 아는 사이에서 빈손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기자의 칼럼에 “여기 스님은 모두 밍크코트 입은 사람만 상대 하는데 난 능력이 없고 보시도 못하니 조용히 법당에 앉았다 그냥 가요”라고 말하는 재가불자의 이야기를 실었다.

 

어느 스님을 만났는데

 

이제까지 만난 스님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것도 단발성만남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경우는 매우 드믈다.

 

언젠가 어느 스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선수행을 오랫동안 한 선사이었다. 그 스님과 마음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 스님은 오래 전에 한소식을 한 것 같다. 젊은 시절 큰 스님을 찾아 다니며 자신의 공부를 점검 받았는데 법거량 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 스님에 따르면 큰스님 중에는 자신의 공부에 대하여 인정해 주는 스님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 질문의 요지도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큰스님도 있었다고 하였다. 법거량을 해 보니 모든 것이 다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간에 알려진 큰스님들의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 스님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입만 벙긋하면 어긋난다

 

그 스님은 삭발에 먹물옷을 입었다. 대면한 당사자는 유발에 속복차림이다. 한편은 수행을 오랫동안 하였다는 선사이고, 또 한편은 오로지 초기경전에 의존하여 글만 쓰는 보통불자이다. 그런데 대화를 할 때 마다 핀트가 빗나가는 것이었다. 스님은 화두와 선수행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상대방은 경전을 근거로 하여 교학에 대하여 이야기 하니 자꾸 엇나가는 것이다.

 

스님과 대화를 하였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도 불교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하는 것은 있었다. 그런데 스님이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흔히 선사들이 묻는 질문 방식이다. 이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답변을 못한 것이 아니라 답변을 하지 않은 것이다.

 

선어록에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이 있다. 이 사자성어는 입만 벙긋하면 어긋난다는 뜻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선종에 따르면 진리의 세계는 입을 열면 곧 참모습과는 어긋난다는 뜻이다. 말로서 글로서 진리의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설명하면 할수록 팔만사천리나 멀어지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진실은 말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넌지시 떠 보는 질문

 

선사의 물음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 선사가 생각하기를 상대방이 답변을 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선사가 이겼다고 볼 수 있을까? 선사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 선사가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왜 그런가? 질문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는 무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토론의 달인이다. 한글로 번역된 수십권의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대부분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것도 대화체로 되어 있다. 부처님과 제자와의 대화, 부처님과 외도와의 대화 등 대화로서 교화 하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 외도와 대화 하는 장면도 매우 많다. 어느 외도가 다음과 같이 부처님에게 질문하였다.

 

 

“세존이시여, 지각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지각과 자아는 다른 것입니까?(D9)

 

 

참으로 난해한 질문이다. 부처님은 당면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을 펼치셨는데 갑자기 형이상학적 질문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외도는 왜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였을까?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을 떠 보기 위해 넌지시 질문한 것이다라 하였다.

 

오물장과도 같은 견해로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무기하였다.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같은 것이다. 이런류의 질문을 삼세에 걸쳐서 확장하면 “세계는 영원한 것입니까?”부터 시작하여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이 된다.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철저하게 입을 다물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질문이 무익하기도 하지만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기 식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외도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였을 때 목적은 뻔하다. 외도가 자신의 견해를 감추어 두고 답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여 실책을 유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답변을 유도하여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궁지로 몰아 넣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상을 논파하면 명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질문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외도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금 유행자는 마치 마을의 돼지가 향수로 목욕하고 향료를 바르고 꽃다발을 장식하고 왕좌에 올라도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서둘로 오물장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행복을 찾듯,부처님에 의해서 유연하고 미세한 세 가지 특징으로 조직된 가르침에 목욕하고 단장하고 장식하고 소멸론(nirodhakatha)이라는 왕좌에 앉아도 거기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물장과 같은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여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Smv.376)

 

 

외도의 질문에 대하여 오물장과도 같은 견해라 하였다.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여 답도 없는 질문을 하여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한 질문의 사례가 있다. 그것은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가 없으면 어떻게 윤회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아론자에게 있어서 무아윤회는 모순이다. 그러나 무아론의 불교에서는 모순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라고 질문하는 것은 질문자가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함을 가정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유아론자의 무아윤회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왜 답을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유아론자에게 답을 해도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일 것이고, 무엇 보다 현재의 괴로움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희론(망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세상은 무한한가?세상은 유한한가?” 류의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무기 하였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 것은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때문이다. 현실의 괴로움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형이상학적 질문, 오물장 같은 견해에 입각하여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하는 질문 등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고 무기로 일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 같은 질문을 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제자들이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하면 질책하였다. 초기경에 따르면 어느 제자가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때 부처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 (S12:12)

 

 

 

Buddha

 

 

부처님의 제자는 궁금한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것 저것 질문한다. 그런데 질문의 패턴이 있다. 질문할 때 마다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 “누가 느낍니까?” “누가 갈애합니까?”와 같이 항상 ‘누가’를 붙인다. 이런 류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신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답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누가 존재합니까?”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라고 부처님은 충고한다.

 

왜 연기법적 사유를 해야 하는가

 

흔히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따르면 번뇌만 야기 하는 희론과 망상이 되기 쉽다. 어느 선사가 대화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 하였을 때 대략난감하다. 답을 하면 어긋난다고 할 것이고, 답을 하지 않으면 몰라서 답을 못한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답을 하지 않는 것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고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부처님은 누구(who)’라기 보다 무엇(what)때문에’ 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누가 느낍니까?”라고 질문 하였을 때 이는 잘못된 질문,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엉터리 질문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바른 질문을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바른 질문을 하였을 때,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연기법적 사유를 하라는 것이다.

 

 

 

2015-02-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