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죄많은 사랑 때문에, ‘두(Du)-사(Sa)-나(Na)-소(So)’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24. 10:28

 

 

죄많은 사랑 때문에, ‘(Du)-(Sa)-(Na)-소(So)이야기

 

 

 

맹목적 사랑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맹목적으로 되기 쉽다. 마치 눈이 먼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조건이 상황을 고려하거나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의 대상을 쟁취하기 위하여 맹목적으로 돌진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무리수가 따른다.

 

권력이 있는 자는 권세를 이용하여 사랑을 쟁취하려 한다. 요즘 문제 되는 군부대내의 성군기문란사건이 대표적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사회에서 지위를 이용하여 아래 계급의 여부하를 성추행하며 심지어 성폭행까지 하는 사건이 언론에 보도 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부자라면 돈으로 마음에 드는 대상을 가지려 한다. 몇 년 전 인기탤런트가 부자클럽의 성접대에 동원 되어 목숨을 끊은 바 있다. 권력이나 돈이 없어도 좋아 하는 대상이 있으면 기어이 차지 하려 하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일반사람들에게서도 맹목적인 사랑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스토커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스토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의 경우 광팬이 스토커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을 때 광팬에서 스토커로 변신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쉬운 것이다. 이렇게 스토커가 되는 것은 과도한 집착이라 본다. 좋아 하는 상대가 있었을 때 자신의 것을 만들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집착으로 인하여 모두가 불행해진다.

 

법구경 60번 게송에서

 

좋아 하는 대상이 있을 때 집착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더 멀리 도망 가 버린다. 그럴 경우 폭력적 방법이 동원 된다. 권력이나 재산의 힘으로, 또는 완력으로 정복코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폭력이 동원 되었을 때 모두 불행해진다. 이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법구경 게송이 있다.

 

 

Dīghā jāgarato ratti,            디가 자가라또 랏띠

dīgha santassa yojana,        디강 산땃사 요자낭

Dīgho bālāna sasāro           디고 발라나 삼사로

saddhamma avijānata.          삿담망 아위자나땅.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전재성님역, Dhp60)

 

 

眠れない人には夜は長く、

疲れた人には一里の道は遠い。
正しい
理を知らない愚かな者どもには、

生死の道のりは長い。
(
中村元역,
Dhp60)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지쳐 있는 나그네에게는 지척도 천리

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윤회의 밤길이 아득하여라.

(법정스님역, Dhp60)

 

 

不寐夜長 불매야장

疲倦道長 피권도장

愚生死長 우생사장

莫知正法 막지정법

(한역, Dhp60)

 

 

갈망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여행자에게 1요자나는 멀며

참된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생사윤회는 한없이 길다.

(거해스님역, Dhp60)

 

Long for the wakeful is the night.

Long for the weary, a league.

For fools

unaware of True Dhamma,

                  samsara

is long.

(Thanissaro Bhikkhu, Dhp60)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법구경 60번 게송은 어리석은 자의 품에 실려 있는 첫 번째 게송이다. 첫 번째 구절에서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다.(dīghā jāgarato ratti)’라고 하였다. 잠을 자지 못하면 밤이 길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dīghā jāgarato ratti: DhpA.II.12에 따르면, 밤이라는 것은 초야, 중야, 후야로 이루어져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 길이가 서너 배나 길다. 태양이 떠오를 때 까지 뒤척거리면서 잠자는 게으른 사람이나 잘 먹고 호화로운 침대에서 자는 관능주의자들은 결코 그 길이를 모른다.

 

그러나 명상수행에 돌입하여 밤을 지새우며 정진하는 자, 진리의 말씀을 설하는 해설자, 그에게 가까이 앉아 설법을 듣는 자, 머리 등에 통증이 있는 자, 손발 등에 고통을 겪는 자, 밤을 길에서 지새우는 여행자는 그 길이를 알게 된다.

 

(698번 각주, 전재성님)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고

 

두 번째 구절을 보면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dīgha santassa yojana)’라 하였다. 이는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다. 갈 길 먼 나그네에게 해는 저물어 간다면 목적지는 길게 느껴질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dīgha santassa yojana: DhpA.II.13에 따르면, 1 요자나는 겨우 4가바따(gavata)이다. 그러나 피곤하고 괴로운 자에게 그것은 실제보다 두 배처럼 보이기도 하는 먼 거리이다.

 

길을 하루 종일 걸으면서 피곤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면 ‘마을이 여기서 얼마나 먼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한 요자나 정도 된다고 답한다. 그리고 조금 더 가서 다른 사람이 오면, 그에게도 ‘마을이 여기서 얼마나 먼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그 사람도 한 요자나 정도 된다고 대답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도 역시 마찬가지로 대답한다. 그러면 그는 ‘모두 한 요자나라고 대답하는데, 한 요자나가 얼마나 먼가! 나에게는 두세 요자나 정도는 된다.’라고 생각한다.

 

(699번 각주, 전재성님)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세 번째 구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dīgho bālāna sasāro)’고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dīgho bālāna sasāro: DhpA.II.13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유익한 것을 모르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종식시킬 수 없고, 윤회를 끝내는 서른일곱 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길을 모른다. 그에게는 윤회는 참으로 길다.

 

(700번 각주, 전재성님)

 

 

경전을 읽을 때 주석을 참고하면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일 주석을 참고 하지 않고 원문의 내용만으로 파악하려 할 때 마치 컴컴한 방에서 헤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주석을 참고 하면 마치 방안에 불을 켜듯이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

 

주석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는 윤회할 수밖에 없다. 가장 첫 번째 이유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사성제, 팔정도 등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서른일곱 가지의 수단, 37조도품을 모르는 것이라 하였다.

 

탐진치로 사는 어리석은 자는 윤회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탐욕으로 살기에 삼계 육도를 윤회하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는 유신견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어떤 존재도 윤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빛나던 범천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말도 있다.  

 

팔만사천대겁을 사는 천신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윤회하게 된다. 빛나던 범천도어떤 세상에 태어날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유신견을 가지고 어리석게 살아 가는 존재는 삼계와 육도를 마치 두레박처럼 끝없이 윤회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뭇삶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이분은 나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으로 헤아려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의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빠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버릴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

 

 

인연담을 보면

 

법구경 60번 게송에 인연담이 있다. 게송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이야기 형식이다. 전재성님이 번역한 법구의석의 인연담 어떤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Annatarapurisavatthu)’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I.1-12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어떤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Annatarapurisavatthu)이다.

 

어느 축제날 꼬쌀라 국의 왕 빠쎄나디는 뿐다리까라는 흰 코끼리를 타고 왕의 위엄을 갖추어 싸밧티 시를 시계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그런데 칠층 저택의 가장 높은 베란다에서 한 가난한 남자의 아내가 왕을 쳐다 보고는 사라졌다. 왕에게는 보름달이 나타났다가 구름 속에 다시 들어 간 것이다.

 

왕은 정신을 잃고 코끼리 위에서 떨어질 뻔 하였다. 왕은 그녀가 결혼했는지를 알아보고 결혼 한 것을 알자 그 남편을 제거하기로 하고 그를 불로 시종으로 만든 다음 일 요자나 떨어진 강으로 가서 적색대지와 청백수련을 가져와 저녁 목욕시간 전까지 가져오라.’라고 말했다. 불가능한 일을 시켜 항명죄로 처벌하려고 했다.

 

그는 여행객에게 자신의 밥의 일부를 나누어 주며 여행하다가 강으로 가서 강물에 밥을 던지며 용왕에게 빠쎄나디 왕의 계략을 말하고 적색대지와 청백수련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용왕에게 그것들을 받아 받아 싸밧티 시로 돌아 왔으나 성벽은 봉쇄되어 있었다. 그는 적색대지와 청백수련을 성벽에 붙이고 싸밧티 시의 시민들에게 나는 왕의 지시대로 이행했으나 왕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호소 했다.

 

빠쎄나디 왕은 우연히 성에서 얼굴을 마주친 한 여인에게 사랑에 빠져 그녀를 차지할 욕심으로 그녀의 남편을 제거하고자 했다. 죄 많은 사랑 때문에 밤새도록 왕은 잠을 못이루고 사람이 끓는 물속에서 내지르는 듯 한 두---소라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악몽에 시달렸다.

 

왕은 사제인 바라문에게 해몽을 부탁했다. 그 바라문은 모든 종류의 뭇삶들, 100마리의 코끼리, 100마리의 말, 100마리의 황소, 100마리의 암소, 100마리의 염소, 100마리의 당나귀, 100마리의 산양, 100마리의 돼지, 100명의 소년, 100명의 소녀를 희생시키는 큰 제사를 통해서만 위협적인 공포를 미연에 방지하고 왕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왕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나의 목숨을 구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큰 희생제를 준비하도록 시켰다. 왕은 바라문에 모든 종류의 뭇삶들을 빨리 마련하라.’라고 시켰다.

 

바라문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필요한 것 보다 많은 뭇삶들을 동원시켰다. 500마리의 큰 황소와 500마리의 황소와 500마리의 암소와 500마리의 산양과 500마리의 양들이 제사를 위해서 기둥에 묶였다. 또한 왕의 노예와 심부름꾼과 하인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처벌을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면서 슬피 울며 희생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친지를 위하여 비탄해하며 땅이 갈라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왕비 말리까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왕에게 가서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고는 부처님을 찾아 갔다. 부처님께서는 빠쎄나디에게 꿈의 참다운 뜻을 일러주었다.

 

꿈에서의 비명은 수천 년 전에 바라나씨의 젊은 상인들이 간통한 뒤에 지옥의 불속에 떨어졌는데, 그들 네 명의 지옥주민들의 경고였다. ‘우리가 행한 악한 일, 가진 재산을 주지 않고 가진 재산으로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고, ‘육만년을 지옥에서 삶아져 지냈으니 언제 끝날 것인가?’라는 뜻이고, ‘끝이 없으니 언제 죄악이 끝날 것인가?’라는 뜻이다. ‘내가 여기를 나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관대하고 계행을 지키고 선행을 하리라.’라는 뜻이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희생제를 준비하는 것이 소용없는 짓임을 알게 된 왕은 그 준비를 거두었다. 그러자 부처님께 잠못 이루는 자에게 하룻 밤이 얼마나 긴 것인가를 말했고, 왕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던 사람은 일 요자나가 얼마나 먼 것인가를 토로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사람에게 밤은 얼마나 긴가를 말했고 다른 사람은 일 요자나가 얼마나 먼가를 말했다.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Dhp 60)’라고 가르쳤다.

 

빠쎄나디왕은 부처님께 절을 하고 가서 그 뭇삶들을 기둥에서 풀어주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들도 속박을 풀어주고 머리를 감기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들은 말리까 왕비의 덕행을 칭송하며,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신 자애로운 말리까 왕비는 만수무강하옵서소!’라고 말했다.

 

(Annatarapurisavatthu-어떤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 법구경 60번 게송 인연담)

 

 

한순간 마음이 끌린 보름달 같은 여인

 

아름다운 꽃이 있으면 쳐다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면 쳐다 볼 것이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자꾸만 보면 어떻게 될까? 그 여인에 대하여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꾸만 쳐다 보게 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발동한다. 더구나 권세 있고 재산이 있는 경우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쟁취하려고 한다.

 

고대인도에서 한나라의 왕은 어떤 위치일까? 오늘날과 달리 옛날 전제군주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나라의 국토는 물론 백성들도 왕의 소유나 다름 없었다. 국가가 곧 왕인 시대에 왕은 왕권으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이 주어졌다. 그런 왕에게 눈에 띄는 여인이 있었을 때 어땠을까? 아마 자신의 후궁으로 두고자 할 것이다.

 

인연담에 따르면 빠세나디왕은 축제의 날에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을 접하게 된다. 마치 보름달처럼 아름다운 여인에 대하여 한순간 마음이 끌린 것이다. 그래서 왕은 정신을 잃고 코끼리 위에서 떨어질 뻔 하였다라 하였다.  

 

왕이 한눈에 반하였다면 사실상 그 여인은 왕의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남편이 있음에도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 결과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왕은 ---라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Du)-(Sa)-(Na)-소(So)이야기

 

---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생활속의 아비담마에서 ‘네 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의 후회’라는 이야기를 말한다. 업보가 무르익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오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네 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이 읊은 네 가지 음절로 된 두(Du)-(Sa)-(Na)-소(So)라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그들은 매우 부유한 젊은이들이었지만 아무런 공덕행도 짓지 않았을 뿐더러 오직 불선업만 지었다. 예를 들면 도덕적 계율을 파하고 성적인 비행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들은 죽어서 로하꿈비 지옥(Lohakumbhī-niraya)에 떨어져 육만 년 동안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과거 생에 나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공덕의 길을 닦지 않고 성적인 비행에 몰두했네.

 

그는 자신의 악행을 크게 후회하였다. 하지만 오직“두(Du)"라는 단어만 입 밖에 내고는 다시 무시무시한 솥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선행을 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또 다른 젊은이는 이렇게 말하고자 했다.“고통스런 과보는 끝이 없내. 나는 인간으로 있을 때 악업을 지었다.”하지만 그도 완전한 문장을 말하지는 못하고 오직 “나(Na)"라고 하는 말만 입 밖에 내었다. 그는 자신의 지은 불선업을 후회하였다.

 

악업의 고통스런 과보는 “두(Du), (Sa), (Na). 소(So)"라고 말한 네 명의 젊은이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내생에 가서야 비로소 무르익는 것은 아니다. 현생에서도 악업을 지은 자는 자신의 악업에 대한 생각으로 쇠해간다. 그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정도에 이르기 까지 몸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네 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의 후회, 생활속의 아비담마, (15) 제 2장 - 인색, 후회, 해태와 혼침, 회의적 의심)

 

 

빠세나디왕이 꿈속에서 끔찍한 외침을 들은 말이 ---라는 비명 소리라 하였다. 법구경 주석에 따르면 오로지 , , , …”라고만 외치는 자는 우리가 행한 악한 일, 가진 재산을 주지 않고 가진 재산으로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다.”라는 뜻으로 절망적 상황에서 외치는 후회의 비명이라 하였다.

 

오로지 , , , …”라는 말만 외치는 자는 “‘육만년을 지옥에서 삶아져 지냈으니 언제 끝날 것인가?”라는 뜻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외치는 비명이라 하였다.

 

, , , …” 라는 말만 외치는 자는 끝이 없으니 언제 죄악이 끝날 것인가?”라는 뜻으로 역시 절망적 상황에서 외치는 비명이라 하였다.

 

, , , …” 라는 말만 외치는 자는 내가 여기를 나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관대하고 계행을 지키고 선행을 하리라.”라는 뜻으로 절망적 상황에서 다짐의 뜻으로 외치는 비명이라 하였다.

 

빠세나디왕은ㅇ , , , …” “, , , …”“, , , …”“, , , …”라는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를 들었을 때 잠을 못 이루었을 것이다. 그래서 밤은 매우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빠세나디왕은 동물희생제와 인신공양을 그만 두었다. 한 여자를 차지 하기 위하여 동물과 인간이 희생되면서 울부짖을 때 그 처절함이 꿈속에서 , , , …” “, , , …”“, , , …”“, , , …”라는 끔찍한 비명으로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죄많은 사랑 때문에

 

인연담에서는 빠세나디왕이 대규모동물희생제와 인신공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인연담의 모티브가 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제사의 경이 그것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런데 그때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큰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5백 마리의 큰 황소와 5백 마리의 숫소와 5백 마리의 암소와 5백 마리의 산양과 5백 마리의 양들이 제사를 위해서 기둥에 묶여 있었다.

 

또한 왕의 노예와 심부름꾼과 하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짐승을 도살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공포에 떨며 슬픈 얼굴로 울면서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많은 수행승들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싸밧티로 들어갔다. 싸밧티에서 탁발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발우를 물리고 나서 세존께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예배를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아서 그들 수행승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커다란 제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5백 마리의 큰 황소와 5백 마리의 숫소와 5백 마리의 암소와 5백 마리의 산양과 5백 마리의 양이 제사에 쓰이기 위해 기둥에 묶여 있습니다. 또한 왕의 노예와 심부름꾼과 일꾼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짐승을 도살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공포에 떨며 슬픈 얼굴로 울면서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Yaññasutta–제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3.9,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왕의 노예와 심부름꾼과 일꾼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짐승을 도살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공포에 떨며 슬픈 얼굴로 울면서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사람들도 희생시킬 계획이었다.”라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 인연담에서는 ‘100명의 소년, 100명의 소녀를 희생시키는 큰 제사라고 구체적으로 표기 되어 있다. 이렇게 대규모희생제를 준비하는 것은 왕이 죄많은 사랑 때문에밤마다 꿈속에서 시달렸기 때문이다.

 

무익한 제사와 훌륭한 제사

 

바라문은 큰 희생제를 통해서만 위협적인 공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당시 바라문의 타락상을 말해 준다. 살아 있는 생명을 바쳐 큰 제사를 지내면 위협과 공포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서는 막대한 이득을 챙긴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런 행위가 어리석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세존]

"말을 희생하고 사람을 희생하는 제사

나무봉을 던져 제단을 쌓는 제사

승리의 축배를 드는 제사, 무차(無遮)의 제사는

많은 수고만 있을 뿐 공덕은 크지 않네.

 

산양과 양과 소 등을 희생하는 그 곳

올바른 길을 가는 지혜로운 자는 그러한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네.

 

거창한 행사 없이 언제나 순조롭게 행하는

산양과 양과 소 등을 희생하지 않는 제사

올바른 길을 가는 지혜로운 사람은 그러한 제사에 참여하며

현자들은 살생이 없는 제사를 행하니 그 제사는 큰 공덕을 가져온다네.

 

훌륭한 제사를 행하는 자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은 없네.

살생이 없는 제사는 위대한 것 하늘사람조차 기뻐한다네."

 

(Yaññasutta–제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3.9, 전재성님역)

 

 

 

2015-02-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