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죽음의 침대에 누웠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27. 15:31

 

죽음의 침대에 누웠을 때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식과 재산이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자신의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 갈 수 없다. 이와 관련된 게송이 있다.

 

 

“Puttā matthi dhanam-matthi”   뿟따 맛티 다낭 맛티

iti bālo vihaññati,              이띠 발로 위한냐띠

Attā hi attano natthi            앗따 히 앗따노 낫티

kuto puttā kuto dhana.          꾸또 뿟따 꾸또 다낭

 

 

실로 내 자식, 내 재산이라고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한다.

자기도 자기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자식, 하물며 재산이랴!

(Dhp62, 전재성님역)

 

 

「わたしたちにはがある。わたしにがある。」

ってかなむ。
しかしすでに
自己自分のものではない。

ましてどうして自分のものであろうか。

どうして自分のものであろうか。
(Dhp62, 中村元)

 

 

'내 자식이다' '내 재산이다' 하면서

 어리석은 사람은 괴로워한다.

제 몸도 자기 것이 아닌데

어찌 자식과 재산이 제 것일까.

(Dhp62, 법정스님역)

 

 

有子有財 유자유재

愚唯汲汲 우유급급

我且非我 아차비아

何有子財. 하유자재

(Dhp62, 한역)

 

 

내게 아들이 있고 재산이 있다고

어리석은 자들은 집착하나니

제 몸도 오히려 자기 것이 아니거늘

어찌 자식과 재산이 자기 것이랴?

(Dhp62, 거해스님역)

 

 

'I have sons, I have wealth' —

the fool torments himself.

When even he himself

doesn't belong to himself,

       how then sons?

       How wealth?

(Dhp62, Thanissaro Bhikkhu)

 

 

Death Bed

 

 

게송을 보면 크게 네 가지 문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사구게라 한다. 그런데 각 문구마다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의미를 갖는 네 가지가 모여서 하나의 게송을 이룬다. 그래서 법구경 주석서를 보면 각 문구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최종적으로는 인연담 형식으로 그 의미를 분명하게 만든다.

 

자식과 재산에 집착하는 자

 

첫 번째 문구를 보면 실로 자식과 재산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내 자식, 내 재산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 한다고 하였다. 자식을 위하여 살며, 노후를 대비하여 재산을 축적하며 사는 것이 세상의 흐름임에도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이라 하였다. 그래서 실로 내 자식, 내 재산이라고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한다. (puttā matthi dhanam-matthi” iti bālo vihaññati)”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puttā matthi dhanam-matthi” iti bālo vihaññati: DhpA.II.28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는 자식과 재산에 관하여 애착 때문에 걱정하고 괴로워한다. 그는 나의 자식들이 죽었다. 나의 자식들이 죽어 가고 있다. 나의 자식들이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그는 나의 재산을 잃었다. 나의 재산을 잃어가고 있다. 나의 재산을 잃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그는 이렇게 여섯 가지로 밤낮으로 뭍에서나 물에서나 길에서나 나는 자식을 먹여 살릴 것이다.’라고 걱정한다. 그는 농사나 장사 등을 하면서 나는 재산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걱정한다.

 

(법구경 706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범부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식과 재산, 이렇게 두 가지를 주로 걱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걱정이라는 것이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걱정하였고 미래에도 걱정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앉으나 서나 자식걱정, 재산걱정인 것이다. 이렇게 걱정으로만 살게 되었을 때 그 삶의 질은 어떨까?

 

삶의 노예처럼

 

TV프로에 극한직업이 있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소위 3D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프로를 보면 공통적으로 듣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말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이렇게 힘든 일도 마다 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가족을 위하여 일을 한다고 한다. 마치 처자식을 위하여 먹여 살리기 위하여 사는 것처럼 비추어진다. 그렇다면 처자식이 없다면 어떤 말이 나올까? 어렵고 더럽고 힘든 3D업종에서 목숨을 걸고 또는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에게 부양할 가족이 없다면 아마 가족을 위해서라든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라는 말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다. 일을 해야 삶이 유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을 하는 목적이 단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든가, 노후에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노후자금을 모아 놓기 위해서일을 한다고 하면 삶이 각박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마치 삶의 노예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에서 실로 내 자식, 내 재산이라고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한다.”라 하였다.

 

호의호식하지만

 

세 번째 문구는 자식이나 재산에 대하여 집착하는 자에 대하여 자기도 자기 것이 아니거늘(attā hi attano natthi)”이라 하였다. 이 문구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attā hi attano natthi : DhpA.II.29에 따르면, 걱정으로 고통스러울 때에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사람의 경우,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거기에 자신의 행복을 위한 자기는 없다. 죽음의 침대에 누웠을 때, 타오르는 불꽃처럼 죽음의 고통에 삼켜져 그의 관절과 인대는 찢어지고 그의 뼈와 해골은 깨지고 눈을 열면 이 세상이 보이고 눈을 닫으면 저 세상이 보인다. 그러한 자기는 하루에 세 번 먹이고, 향료와 꽃으로 치장하면서 평생을 부양해도,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반자가 된 고통에 대항하여 수호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구경 707번 각주, 전재성님)

 

 

사람들은 자기자신에게 많은 투자를 한다. 배가 고프면 먹고 갈증 나면 물을 마시는 것도 어쩌면 자신의 몸을 위해서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삼시 세 때 자신을 위해 공양한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위한 치장도 마다 하지 않는다. 때 되면 좋은 옷을 입고, 화장품과 향수로 아름답게 꾸미고자 한다.

 

주석에 따르면 자신의 몸을 위하여 호의호식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하지 않다. 죽음이 닥쳤을 때, 죽음의 침대에 누워 임종순간이 다가 왔을 때 몸이 보호 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왜 그런가? 그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몸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호의호식하는 삶을 살아 간다는 것이다.

 

죽음의 침대 위에 놓였을 때

 

몸이 자신의 것이라면 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임종순간을 기다린다면 자신의 몸이라 볼 수 없다. 그런 몸을 위해 평생 호의호식하는 삶을 살아 왔다.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닐 진데 자식과 재산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물며 자식, 하물며 재산이랴!(kuto puttā kuto dhana)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kuto puttā kuto dhana: DhpA.II.29에 따르면, ‘그 때가 되면 자식과 재산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뜻이다.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나누어주지 않고 부를 쌓아 모은 상인 아난다가 있었다. 그가 예전의 죽음의 침대 위에 놓였을 때 죽어가는 순간에 그에게 자식과 재산이 죽음의 고통을 가져가고 평안을 가져왔던가?

 

(법구경 708번 각주, 전재성님)

 

 

임종순간을 기다리는 자는 자식과 재산을 가져 갈 수 없다. 평생 자신의 자식이라 하여 앉으나 서나 걱정하며 애지중지 하였건만 죽음의 순간에 동행할 수 없다. 노후를 대비한다 하여 안먹고 안쓰고 평생일구어 놓은 재산도 죽음의 침대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죽음 너머로 가져 갈 수 없기 때문이다자식과 재산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자신의 소유물처럼 한평생 살아 왔지만 죽음의 순간에는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게송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인연담

 

법구경 60번 게송은 자식과 재산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 자식과 재산을 자신의 분신처럼 보아서 오로지 자식과 재산을 위하여 평생을 살지만 죽음에 이르러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가지고 간다면 자식과 재산을 위한 삶에서 지은 행위만을 가져 갈 뿐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인연담이 있다. 게송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한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I. 25-27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에 계실 때, 부호 아난다와 관련된 이야기(Anandasetthivatthu)이다.

 

싸밧티시의 부호 아난다는 80꼬띠의 재산을 가졌으나 매우 인색했다. 그는 보름마다 친지를 모아놓고 그의 아들 물라씨리(Mulasiri)에게 80꼬띠의 재산이 많다고 생각하지 말라. 일단 소유한 것은 써서는 안되고 더욱 얻도록 힘써야 한다. 동전 한 잎이라도 손에서 빠져나가면, 차츰 틀림없이 그 재산이 소모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물감이 어떻게 색이 바래고, 개미가 어떻게 창고를 채우고, 꿀벌이 어떻게 꿀을 모으는 지 관찰하여, 지혜로운 자는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리.’라고 노래했다. 그 후 그는 아들에게 다섯 개의 보물창고를 보여주고 죽었다.

 

그가 죽어서 불가촉천민 짠달라(Candala)의 집안에 태어났다. 왕은 그의 죽음을 알고 그의 아들을 재정관에 임명했다. 한편 수천명의 짠달라들은 몸으로 품을 팔아 살았는데, 한 짠달라 여인이 임신하고 부터는 양식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가운데 재수 없는 자가 있다.’라고 결론 내리고 두 그룹씩 나누어 조사하여 이 집에 재수없는 자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녀를 추방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으나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손발과 눈귀코가 모두 기형이고 괴물처럼 흉물스러웠다. 그녀는 그 아이를 데리고 구걸하기조차 어려웠다. 그 아이가 혼자 구걸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혼자 구걸하여 살도록 했다.

 

그는 집집마다 구걸하다가 마침내 전생에 자신이 살던 집에 도착했다. 그는 세 번째 방까지 들어갔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네 번째 방에 들어가자 재정관 물라씨리가 그를 보고서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하인들이 달려와 그를 보고 괴물이라고 욕하면서 붙잡아 때리고 질질 끌어 쫒아냈다.

 

부처님께서는 장로 아난다와 함께 탁발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 물라씨리를 불러 괴물 같은 아이가 재정관이여. 그대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했다. 괴물 같은 아이는 부처님의 지시대로 물라씨리에게 보물창고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전생의 부호 아난다임을 입증했다. 물라씨리는 부처님께 귀의 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가르침을 주고 이어서 시로써 실로 내 자식, 내 재산이라고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한다. 자기도 자기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자식, 하물며 재산이랴!(Dhp62)’라고 가르쳤다. 가르침이 끝나자 팔만 사천의 뭇삶들이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다.

 

(Anandasetthivatthu-부호 아난다와 관련된 이야기, 법구경 62번 게송 인연담)

 

 

인연담을 법면 인과의 법칙이 매우 냉혹함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재물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한 나머지 낭비되는 것에 대하여 마치 자신의 허벅지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여기는 수전노의 말로는 비참하다. 평생 인색하게 굴며 모을줄만 알았지 쓸 줄 모르는 구두쇠는 그 돈을 다 써 보지 못한 채 죽었다. 죽어서 매우 가난한 집에 태어났는데, 그것도 천대 받는 흉물스런 모습으로 태어났다.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면 사람들은 관습대로 살아 간다. 그 사회에 태어나면 그 사회의 인습과 관례대로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되면 결혼하고, 처자식이 생기면 부양하고, 노후를 위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형태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모두 가정을 이루어야만 하고 정상적이라 여기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돈벌기 선수가 되어야 만 하는 세상이 되었다.

 

자식과 재산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하면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게 된다. 그런 바탕에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위하여 온갖 치장을 하고 삼시 세 때 공양하는 것이다.

 

죽음의 침대에 누웠을 때 그 동안 자신의 것이라 여겼던 모든 것이 배신한다. 죽음의 침대에 누웠을 때 사랑하는 사람도, 아끼던 재산도, 호의호식 하였던 몸도 따라 주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자식과 재산,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자식과 재산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면 근심과 걱정이 생겨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실로 내 자식, 내 재산이라고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한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어리석은 자라 하였을까? 그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자식과 재산이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라면 죽어서도 가져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침상에 눕는 순간 어느 것도 권한을 행사 할 수 없다. 만일 평생 호의호식 시켜 준 이 몸이 진정으로 나의 몸이라면 나는 죽지 않아야 될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임종의 순간을 기다린다면 나의 몸이라 여겼던 이 몸은 내 몸이 아님에 틀림 없다.

 

사람들은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이라고 착각하며 집착하며 산다. 자식과 재산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한 나머지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 아무 것도 가져 갈 수 없다, 가져 가는 것이 있다면 행위일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만을 가져 갈 뿐이다.

 

 

 

2015-02-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