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여겼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3. 17:36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여겼을 때

 

 

 

네 가지 타입의 회사원이 있는데

 

조직은 사람이 움직인다. 어떤 사람이 리더로 있느냐에 따라 조직의 장래는 달라진다. 그래서 한때 멍부, 멍게, 똑부, 똑게라는 말이 유행하던 적이 있었다. 이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최악에서부터 최고의 타입까지 유형별로 분류한 것이다.

 

멍부라는 말은 멍청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꼭 멍청하지 않아도, 자기 원칙이 너무 강하거나 눈치가 없는 경우도 이 부류에 속한다. 끔찍할 정도로 최악이라 볼 수 있다. 부하라면 모를까 상사로 앉아 있으면 빨리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

 

멍게라는 말은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을 말한다. 이런 부류는 있는듯 없는듯 맡은 일만 충실히 하는 타입이다. 상사로 앉아 있다면 아랫사람이 편할 것이다.  

 

똑부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말한다. 부하가 이런 타입이라면 상사는 무척 편하다. 그러나 상사로 앉아 있다면 불편할 것이다. 부하가 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똑게는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을 말한다. 부하라면 얄미운 타입이다. 그러나 상사라면 매우 좋은 타입이다. 똑똑하기 때문에 일을 스마트하게 시킬 뿐 아니라,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긋이 기다려 주기 때문이다.

 

네 가지 타입의 사람 중에 최악은 멍부이고 최고는 똑게라 한다. 그런데 법구경에 따르면 최악인 멍부타입이 있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도 모르게 똑똑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법구경 63번 게송

 

Yo bālo maññati bālya,          요 발로 만냐띠 발량

paṇḍito vā pi tena so,           빤띠또와삐 떼나 소

Bālo ca paṇḍitamānī              발로 짜 빤디따마니

sa ve bālo ti vuccati.           사 웨 발로띠 웃짜띠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

(Dhp63, 전재성님역)

 

 

もしも愚者がみずから愚であると考えれば、

すなわち賢者である。
愚者でありながら、しかもみずから賢者だと思う者こそ、

「愚者」だと言われる。

(Dhp63, 中村元역)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알면

그만큼 그는 지혜롭다.

그러나 어리석으면서 지혜롭다고 한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Dhp63, 법정스님역)

 

 

愚者自稱愚  우자자칭우

常知善. 상지선힐혜

愚人自稱智  우인자칭지

是謂愚中甚. 시위우중심

(Dhp63, 한역)

 

 

어리석은 자가 스스로 어리석은 줄 알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현명하거니와

어리석은 자가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나니

바로 그것이 더욱 어리석은 것이다.

(Dhp63, 거해스님역)

 

 

A fool with a sense of his foolishness

is — at least to that extent — wise.

But a fool who thinks himself wise

really deserves to be called

       a fool.

(Dhp63, Thanissaro Bhikkhu)

 

 

 

 

Balavagga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첫 번째 구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이라 하였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모른다. 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모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yo bālo maññati bālya : DhpA.II.30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가 나는 어리석은 자이다.’라고 아는 것은 무지한 자가 자신이 무지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아주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것조차 알지 못한다.

 

(법구경 710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을 보면 두 가지로 설명 되어 있다. 어리석은 자와 무지한 자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 보다 더 나쁜 케이스는 무지한 자라는 사실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은 자인지 알아 차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무지한 자는 가능성이 원천 차단 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것조차 알지 못한다.”라 하였다.

 

중층적 구조의 무지

 

무지한 자는 왜 자신이 무지한지 조차도 모를까? 이에 대하여 무명으로 설명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avijjā)은 모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무엇을 모르는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것이다.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모른 채 살아 간다. 마치 깜깜한 방에서 사는 것과 같다.

 

무명의 반대말이 이다. 마치 깜깜한 방에서 불이 켜졌을 때 일시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그런 앎에 대하여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의혹이 사라진다.( kakhā vapayanti sabbā, Vin.I.2)”라 하였다. 이는 무명이 타파 되었기 때문이다.

 

무명은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인식론적 무지라고도 한다. 이런 인식론적 무지에 대하여 담마빨라는 우다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설명 하였다.

 

 

1) 발견되어서는 안 될 신체적 악행 등이 발견되므로 무명이고,

2) 발견되어야 할 신체적 선행 등은 발견되지 않으므로 무명이다.

3) 사물의 전도되지 않은 본성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무명이고,

4) 끊임 없는 윤회속에서 존재 등에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5)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 속으로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6)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 속으로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7) 앎의 반대이기 때문에 무명이다.

(UdA.41)

 

 

초기경전에서는 무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에 따르면 무명에 대하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S12:2)”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명이란 다름 아닌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성제가 있는 것조차 모른다. 이는 무지한 것이다. 그런데 사성제가 있는 것 조차 모르니 무지의 무지일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이처럼 무지에 대한 무지는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이런 무지를 ‘중층무지’라 한다. 그래서 중층적 구조의 무지에 대하여 ‘무명(無明: avijjā)’이라 한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아는 자는

 

두 번째 구절을 보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어리석은 자가 자신이 어리석은 줄 알았을 때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ṇḍito vā pi tena so : DhpA.II.30에 따르면, 이미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 때문에 현명한 자이거나 그와 같은 자이다. ‘나는 어리석다.’라고 아는 자는 다른 현명한 자를 찾아 가서 그와 사귀면서 가르침을 받고 충고를 받아 현명한 자가 된다.

 

(법구경 711번 각주, 전재성님)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가 있다. 그런 사람은 바른 길로 나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이 잘못인지 모르는 채 지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은 행위인지 아는 자는 고쳐 나갈 수 있다.

 

어리석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지혜을 얻었다는 말과 같다. 어리석음의 반대어가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하여 지혜 있는 자들과 사귀려 한다. 지혜 있는 자들과 함께 있으면 어리석은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여겼을 때

 

어리석은 자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현명한 자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에서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 운다.”라 하였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bālo ca paṇḍitamānī sa ve bālo ti vuccati: DhpA.II.30에 따르면, 그러나 어리석은 자가 자신을 현명하다고 여겨 누가 나처럼 배웠고, 가르침을 해설하고, 계율을 잘 알고, 두타행을 설하는가?’라 생각하며, 다른 현명한 자에게 가지 않고, 그와 사귀지 않고,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고 명상수행을 실천하지 않는다. 그는 소매치기 하는 도둑처럼,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법구경 712번 각주, 전재성님)

 

 

어리석은 자가 자신이 어리석은 줄 알면 다행이지만, 반대로 자신이 현명한 줄 알면 큰 일이다. 어리석은 행위 인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는 현명한 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라 하였다. 더구나 가르침을 공부하지도 않고 명상수행도 실천하지 않는 자라 하였다. 이렇게 현명한 자를 접하지 않아 가르침을 모르게 되었을 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하였다. 남의 것을 슬쩍 훔치는 도둑 같은 것이다.

 

무명이 대죄

 

불가에서 말하기를 무명이 대죄라 한다. 이는 알면서 지은 죄보다 모르고 지은 죄가 더 중하다는 것을 말한다. 알고 짓는 죄는 참회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반면 모르고 짓는 죄는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구경에서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알면이라는 구절은 알고 짓는 죄는 참회의 가능성이 열려있어서 지혜로운 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구경에서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라 하였는데, 이는 모르고 짓는 죄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두 도둑과 관련된 이야기(Ganthikabhedakavatthu)

 

게송과 관련된 인연담이 있다. ‘두 도둑과 관련된 이야기(Ganthikabhedakavatthu)’이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 DhpA.II.29-30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관계를 끊은 두 도둑과 관련된 이야기(Ganthikabhedakavatthu)이다.

 

두 명의 친구가 부처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제따 숲으로 갔다. 한 사람은 가르침을 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물건을 훔칠 기회를 노렸다. 가르침을 들은 자는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한 남자로부터 바지춤에 매인 5마싸까(masaka)의 돈을 훔쳤다.

 

도둑질한 자는 늘 그렇듯 자신의 집에서 음식을 먹었으나 흐름에 든 자의 집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의 친구인 소매치기와 그의 아내가 너는 너무 영리해서 집에서 요리할 음식을 살 수 있는 돈도 벌지 못하는구나.’라고 빈정거렸다. 다른 자는 이 자는 자신이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고는 그 사건을 친지들과 함께 제따 숲을 찾아와서 부처님에게 알렸다.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가르침을 주고 이어서 시로써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라고 가르쳤다. 가르침이 끝나자 다른 친지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

 

(Ganthikabhedakavatthu-두 도둑과 관련된 이야기, 법구경 63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역)

 

 

 

2015-03-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