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교학과 수행 양 날개로 더 높이 더 멀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18. 16:00

 

교학과 수행 양 날개로 더 높이 더 멀리

 

 

 

세간에서 하는 말 중에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자에게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해 주어도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알아 듣기는커녕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그래서일까 노자 도덕경에 따르면 일반사람들에게 도()를 이야기 해 주면 대부분 크게 웃어버린다고 하였다.

 

국과 국자와 관련된 게송

 

법구경에 국과 국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국자는 국을 푸는 도구이지만 국맛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Yāvajīvam-pi ce bālo             야와지왐삐 쩨 발로

paṇḍita payirupāsati           빤디땅 빠이루빠사띠
Na so dhamma
vijānāti,          나 소 담망 위자나띠

dabbī sūparasa yathā.           답비 수빠라상 야타.

 

Muhuttam-api ce viññu            무훗따마삐 쩨 윈뉴

paṇḍita payirupāsati           빤디땅 빠이루빠사띠
Khippa
dhamma vijānāti,       킵방 담망 위자나띠

 jivhā sūparasa yathā.          지으하 수빠라상 야타.

 

 

어리석은 자는 평생을

현명한 님을 섬겨도

국자가 맛을 모르듯,

진리를 알지 못한다.

 

양식있는 자는 잠깐만

현명한 이를 섬겨도

혀가 국 맛을 알 듯,

진리를 재빨리 인식한다.

 

(Dhp64-65, 전재성님역)

 

 

愚かな者は

生涯賢者に仕えても、

理を知ることが無い。

匙が汁の味を知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

明な人は瞬時(またたき)のあいだ

賢者に仕えても、

ただちに理を知る。

___舌が汁の味をただちに知るように。

(Dhp64-65, 中村元역)

 

 

어리석은 자는 한평생을 두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섬길지라도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이라도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기면

곧 진리를 깨닫는다.

혀가 국맛을 알듯이

 

(Dhp64-65, 법정스님역)

 

 

過罪未熟     과죄미숙

愚以恬淡.    우이염담

至其熟時     지기숙시

愚人盡形壽   우인진형수

承事明知人   승사명지인

亦不知眞法   역부지진법

如杓斟酌食. 여표짐작식

 

智者須臾間   지자수유간

承事賢聖人   승사현성인

一一知眞法   일일지진법

如舌了衆味   여설료중미

 

(Dhp64-65, 한역)

 

 

어리석은 자는

설사 지혜로운 사람과 한평생 살아도

담마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이.

 

총명한 사람은 비록

지혜로운 사람과의 생활이 짧을지라도

담마를 금방 깨닫는다.

마치 혀가 국 맛을 알듯이.

 

(Dhp64-65, 거해스님역)

 

 

Even if for a lifetime

the fool stays with the wise,

he knows nothing of the Dhamma —

       as the ladle,

       the taste of the soup.

 

Even if for a moment,

the perceptive person stays with the wise,

he immediately knows the Dhamma —

       as the tongue,

       the taste of the soup.

 

(Dhp64-65, Thanissaro Bhikkhu)

 

 

 

국자는 국맛을 모른다는데

 

64번 게송에서 국자가 국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dabbī sūparasa yathā : DhpA,II,31에 따르면, 국자는 다양하게 요리된 음식이 마지막으로 부패하는 순간까지도 요리된 것의 맛을 이와 같이 이것은 짜다. 이것은 짜지 않다. 이것은 쓰다. 이것은 쓰지 않다. 이것은 아리다. 이것은 아리지 않다. 이것은 맵다. 이것은 맵지 않다. 이것은 시다. 이것은 시지 않다. 이것은 떫다. 이것은 떫지 않다.’라고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는 현자와 평생을 같이 지내도 가르침을 식별하지 못한다.

 

(법구경 714번 각주, 전재성님)

 

 

가르침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국자의 비유를 들었다. 이때 여러 맛이 나온다. 짠맛, 쓴맛, 아린맛, 매운맛, 신맛, 떫은맛 이렇게 여섯 가지 맛이다. 이런 맛을 국자가 알리 없다.

 

어리석은 자는 진리를 모른다

 

국자는 국을 푸는데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다. 그러나 국자는 짠맛 등 갖가지 맛을 식별할 수 없다. 어리석은 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국자가 맛을 모르듯, 진리를 알지 못한다.”라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DhpA.II.31에 따르면, 정말 어리석은 자는 현명한 자를 찾아가 그와 평생을 지내더라도 가르침의 실천(paipatti)과 가르침의 꿰뚫음(paivedha)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 부처님의 말씀은 이러하고, 교법(pariyatti)은 이러하고, 이것이 올바른 행위이고 이것이 잘못된 행위이고, 이것이 실천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것이 실천할 가치가 없는 것이고, 이것이 성찰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깨달아져야 하는 것이다.’라고 알지 못한다.

 

(법구경 715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가르침의 실천(paipatti), 가르침의 꿰뚫음(paivedha), 교법(pariyatti) 이렇게 세 가지를 소개 하고 있다. 이것이 불교공부를 하는 목적일 것이다. 마치 새가 양날개로 날듯이 교학과 수행을 하여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빠띠빳띠, 빠띠웨다, 빠리얏띠

 

빠띠빳띠, 빠띠웨다, 빠리얏띠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PCED194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1) paipatti

: practice, or 'pursuance' of the teaching, as distinguished from the mere theoretical knowledge of its wording (pariyatti , q.v.).

 

2) paivedha

: 'penetration', signifies the realization of the truth of the Dhamma, as distinguished from the mere acquisition of its wording (pariyatti ), or the practice (paipatti) of it, in other words, realization as distinguished from theory and practice. Cf.

 

3) pariyatti

: 'learning the doctrine', the 'wording of the doctrine'. In the 'progress of the disciple' (q.v.), 3 stages may be distinguished: theory, practice, realization, i.e. (1) learning the wording of the doctrine (pariyatti ), (2) practising it (paipatti), (3) penetrating it (paivedha) and realising its goal. (App.).

 

 

paipatti 는 수행(practice)이라 하고, paivedha는 통찰(penetration), pariyatti는 교학(learning the doctrine)이라 하였다. 교학만 해서도 안되고, 수행만 해서도 안되고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야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교학과 수행은 양날개와 같다. 양날개가 갖추어져야 비상할 수 있듯이 한쪽에만 치우쳐 있다면 진리를 맛 볼 수 없음을 말한다.

 

오래 전부터 블로그를 보았다는 M스님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주로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이다. 그러다 보니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수행을 하라는 이야기이다. 수행을 해 보아야 진리의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교학에 근거하지 않은 수행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견을 갖추지 못하였을 때 엉뚱한 방향에서 헤맬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한국불교에서도 볼 수 있다.

 

최근에 어느 스님을 만났다. 불자들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M스님이다. M스님이 말하기를 수행도 좋지만 교학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수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M스님은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출가하였다고 한다. 스님에 따르면 어머니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삶은 험난하였는데 그럴 때 마다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할까?”라 생각하며 삶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스님을 만나서 왜 사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고등학교 3학년 때라 한다. 이후 전국의 선방에서 정진하며  지금까지 수행자로서 삶을 살고 있지만 한국불교의 수행방법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런 스님은 한때 봉은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M스님은 블로그도 열심히 보고 있다고 하였다. 더구나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는 블로그 명을 말씀 하신다. 이는 현재의 블로그 명칭 이전의 이름이다. 참고로 블로그 이름은 세 번 바뀌었다. 블로그를 오래 전부터 방문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승의 바다’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진흙속의연꽃순으로 변경 되어 왔다. 그런데 M스님에 따르면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는 이름의 블로그이었을 때부터 보아 왔다고 하니 오륙년 전부터 보아 왔다는 이야기이다.

 

M스님은 올려진 글을 죽 보아 왔고 최근에도 보고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유명인이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놀랐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 스님들이나 학자 등도 블로그를 접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터넷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본다. 그런데 스님은 올려진 글에 공감하였다. 특히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에 대하여 칭찬하면서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본다. 또 글쓴 이가 어떤 분인지 매우 궁금해 하였다고 한다.

 

생각지도 않게 M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최근 불교NGO단체에 가입하였는데 이 단체를 주도 하고 있는 H박사의 권유로 현재 두산위브 빌딩에 머물고 있는 M스님을 함께 찾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M스님은 현재 종회의원이기도 하고 바른 불교모임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스님은 자신의 자서전이라 볼 수 있는 스님의 사춘기를 사인하여 선물로 주었다.

 

 

 

 

 

 

 

 

 

 

 

 

스님들은 일반적으로 특유의 성질이 있다. 그러나 M스님은 매우 겸손하였다. 스님들이 일반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님들 마다 스님상이 있기 때문이라 본다. 그래서 대게 일반인들에게는 권위적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이는 스님들은 일반사람들과 다르다라는 의식이 은연중에 깔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일종의 스님상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M스님에게서 스님상은 찾아 볼 수 없다. 친근한 동네 아저씨 또는 큰 형님 정도로 보인다. 그래서 비록 미천한 자라 하여도 고귀한 자 못지 않게 평등하게 대해 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체로 살이 쪄서 탐욕스럽게 보이는 권승들과는 달리 꼿꼿하고 청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M스님은 한국의 수행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대부분 깨닫기만 하면 된다는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학에 대하여 무지한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점이 봉은사 주지로 있을 때 나타났다고 하였다. 법문을 해야 하나 교학적 지식이 없어 대략난감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법문하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오히려 사람들이 감동하였다고 한다. 일종의 생활법문이라 볼 수 있다.

 

M스님은 교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교학과 수행이 함께 가야 함을 말하였다. 한국불교는 아직까지 수행위주의 한국불교이어서 교학이 뒷받침 되어야 제대로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A6.46)’에서

 

수행이 더 중요할까 교학이 더 중요할까? 주요한 논쟁거리이다. 수행의 맛을 본 사람들은 교학보다 수행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학의 즐거움을 맛본 사람들은 수행도 좋지만 교학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논쟁이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A6.46)’에 실려 있는 교학승과 선정승의 논쟁이 그것이다.

 

선정승을 비난 하는 교학승

 

선정승은 선정의 즐거움을 안다.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반면 교학승들은전승된 가르침을 외고 독송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교학승들에게 있어서 선정승들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정승은 교학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험담을 한다. .

 

 

벗들이여, 세상에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들은 선정을 닦는 수행승들을 이와 같이 이들은 우리는 선정에 든다. 우리는 선정에 든다.’라고 선정에 들고 명상에 든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라고 헐뜯습니다.

 

(마하쭌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46, 전재성님역)

 

 

선정승의 불만에 대한 것이다. 교학승에 대한 비판이다. 교학승들은 선정의 경지를 경험해 보지도 않고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학승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라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교학승을 비난하는 선정승

 

교학승들은 확실한 대상이 있다. 그것은 말이나 글로서 전승되어 온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말로서 가르침을 표현 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체험한 것을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선정승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학승들은 말로만 수행하는 것처럼 비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학승은 선정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험담을 한다.

 

 

벗들이여, 선정에 드는 수행승들은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들을 이와 같이 이들은 그러나 이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중시한다. 우리는 가르침을 중시한다.’라고 생각하지만, 들뜨고 오만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은 거칠다.’라고 헐뜯습니다.

 

(마하쭌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46, 전재성님역)

 

 

교학승의 불만에 대한 것이다. 선정승들은 교학승들에 대하여 말만 앞서는 수다쟁이 정도 취급하는 것이다. 말이 많다는 것은 말이 사로 잡혀 본질을 놓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선정승은 말 많은 교학승들에 대하여 그다지 좋지 않게 본다. 경에 따르면 들뜨고 오만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은 거칠다라고 비난한다.

 

지향하는 목표는 같은데

 

선정승과 교학승은 서로 헐뜯고 비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수행승들이 지향하는 공통적인 목표는 같다. 그것은 행복이다.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학을 하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 헐뜯고 다투는 모습은 볼썽 사나울 것임에 틀림 없다. 이에 마하쭌다는 양시론적 입장에서 두 부류의 수행승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벗들이여, 이와 같이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선정에 드는 수행승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벗들이여, 이와 같이 선정에 들면서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마하쭌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46, 전재성님역)

 

 

두 종류의 수행승에 대하여 각각 장점을 칭찬해야 함을 말한다. 선정위주의 수행이든 교학위주의 수행이든 모두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모르는 점을 지적하기 보다 각각의 경지를 인정해 주어 서로 배우자는 것이다.

 

교학승이 선정승승에게 배워야 할 것은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의 경지이다. 실제로 수행을 하여 체득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선정승이 교학승에게 배워야 할 것은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음이다. 이는 다름아닌 통찰지를 말한다. 교학을 공부하는 것으로도 통찰지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선정수행을 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정승이 수행승 보다 더 수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점만을 말한다면 비난이 되지만 장점을 말한다면 칭찬이 된다. 서로 장점을 칭찬함으로서 서로 배우자는 것이 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잘못된 비유

 

국자는 국의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이 게송을 이용하여 교학에만 몰두하는 것에 대하여 국자가 국의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부처님가르침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에서 선정에 들면서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A4.46)”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교학수행만 하는 것에 대하여 국자가 국의 맛을 모르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비유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통찰지는 반드시 선정수행을 해야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학수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선정수행(paipatti) 과 교학수행(pariyatti)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은 자가 되려면

 

깨닫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참선만 하면 깨닫게 되는 것일까? 교학만 한다고 깨닫게 될까? 반드시 그렇지 않다. 숫따니빠따에 따르면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새의 양날개와 같다. 새가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듯이 교학과 수행이 받침이 되었을 때 훨씬 더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Sn3.7)’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Abhiññeyya abhiññāta,  

bhāvetabbañca bhāvita;   

Pahātabba pahīna me,    

tasmā buddhosmi brāhmaa.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stn558)

 

 

여기서 알아야 할 것(pariññeyyā)’은 일반적으로 교학을 말하고, ‘닦아야 할 것(bhāvetabbā)’수행을 말한다. ‘버러야 할 것(pahātabbā)’은 오염원을 버린다는 뜻이다. 오염원 소멸 되었을 때 청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교학과 수행으로 통찰지를 증득하였을 때 깨달은 자(buddha)’가 된다고 하였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알아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과 함께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실현해야 할 것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두루 알아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을 말한다. 곧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이 있는데, 이것들은 두루 알아야 할 것이다.

 

2)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버려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무명과 존재의 갈애가 있는데, 이것들은 버려야 할 것이다.

 

3)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닦아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멈춤과 관찰이 있는데, 이것들은 닦아야 할 것이다.

 

4)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명지와 해탈이 있는데, 이것들은 실현해야 할 것이다.

 

(Mahāsaāyatanika sutta-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9,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오온이라 하였다. 버려야 할 것은 무명과 갈애라 하였다. 또 닦아야 할 것에 대하여 멈춤과 관찰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실현해야 할 것은 명지와 해탈이라 하였다.

 

혀가 국 맛을 아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는 현명한 자가 옆에 있어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현명한 자와 평생을 살아도 가르침을 접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자가 국의 맛을 모른다는 국자의 비유로 설명된다. 그러나 양식이 있는 자는 금방 알아 챈다. 현명한 자의 행동거지를 보고 잠시만 보아도 섬기는 것이다. 마치 혀가 국 맛을 아는 것과 같다.

 

국맛은 혀로 맛보아야 한다. 혀끝으로 대자마자 짠맛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자는 현명한 사람과 잠시만 사귀어도 진리를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그로부터 교법을 배우고 질문하고 이해한다. 그로부터 명상주제와 실천수행, 그리고 출세간적 가르침도 곧바로 이해한다.(717번 각주)”라 하였다. 이는 혀끝으로 국 맛을 곧바로 아는 것과 같다.

 

교학과 수행 양 날개로 더 높이 더 멀리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글을 생산한다.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려서 공유한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비난을 일삼는 자들도 있다. 그것은 백날 교학만 공부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경을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국자의 비유로 비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 그런가? 교학으로도 통찰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학은 한계가 있다. 불사의 경지, 즉 열반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의 영역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교학과 수행을 병행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교학과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고 셀라의 경(Sn3.7)’에서도 말씀 하셨다. 또 수행은 멈춤()과 통찰()을 병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법구경에서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한다.(DHP372)”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궁극적 목적에 가장 빨리 도달 하기 위해서는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다. 마치 새가 양 날개로 날듯이,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 갈 수 있을 것이다.

 

 

 

2015-03-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