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교의 역사는 진보일까 퇴보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14. 11:56

 

 

불교의 역사는 진보일까 퇴보일까?

 

 

 

한국불교는 선종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이 산에서만 사는 것 같다.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마치 신선처럼 사는 듯이 보여 주는 것이 한국불교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세상사람들과 소통이 없다.

 

불자라도 불교를 접하려면 험한 산길을 힘들게 올라 가야 한다. 그나마 나이가 들어 관절이 아프면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선불교는 불교의 완결판일까?

 

선종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는 한국불교는 초기불교를 계승한 것일까? 조계종의 종지에 따르면 분명히 조계종 종헌에 따르면 “제 2 조 본종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 함을 종지 로 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이로 본다면 초기불교를 계승한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뒤에 붙는 직지인심 견성성불라는 말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한국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초기경전에 근거한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초기경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경우는 드물다. 초기불교에서 변형된 불교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선종이 대표적이다.

 

선종이 정착되기 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불교의 역사를 보면 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소위 소승불교에서부터 보살사상을 표방하는 대승불교로 변화 하여 왔다. 대승불교는 공사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후 유식 , 여래장 , 선불교로 발전되어 왔다고 한다 .

 

각묵스님은 사부니까야 봉헌법회에서 여덟 가지 불교를 말하였다. 불교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1)초기불교, 2) 아비담마 불교 , 3) 반야중관 불교, 4) 유식불교, 5) 대승불교, 6) 여래장불교, 7) 밀교, 8) 선불교 이렇게 여덟 단계의 불교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단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여덟 단계에 대하여 불교의 진화라 본다면 현재의 선불교가 완결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권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의 진화가 아니라 불교의 변질로 보는 것이다. 심지어는 전혀 다른 종교로 본다.

 

? 석가도 알지 못했다고?

 

불교는 왜 세월이 흐를수록 변화 되었다. 그래서 수 많은 불교가 생겨 났다. 왜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혹시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덜 완성되어서 후대에 부처님과 버금가는 깨달음을 얻은 자, 예를 들어 용수보살과 같은 대성인 출현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완성하지 못한 것을 완성한 것일까? 선불교에 따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선시에서 알 수 있다.

 

 

古佛未生前 고불미생전

凝然一相圓 응연일상원

釋迦猶未會 석가유미회

迦葉豈能傳 가섭기능전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선가귀감)

 

 

선가귀감에 따르면 석가도 알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을 일원상(一相圓)’으로 표현하였다. 그 일원상은 무엇일까? 말이나 문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단지 이해차원에서 동그라미, 즉 일원상이라 한 것이다.

 

일원상에 대하여 옛부처가 나기 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석가도 알지 못하던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진리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미완성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에서는 불교가 계속 진화해 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불교는 진화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초기불교가 미완성이라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미완성이었을까? 대승주의자들에 따르면 불교는 진화를 거듭하여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원형에서 계속 변형이 가해졌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는 진화일까 퇴보일까?

 

대승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대승불교는 진화의 역사라 볼 수 있다. 이는 김성철 교수가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주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초기불교를 낮추어 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 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라는 선시가 나왔을 것이다.

 

실제로 선사들은 초기불교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원시불교라 하는데 이는 미완성된 것의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대승불교는 원형이 변형되어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세계불교의 주류라고 볼 수 있는 테라와다불교에서 보는 시각이다.

 

테라와다불교입장에서는 동아시아의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초기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난 것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본다. 심지어 러시아의 불교학자 체르바츠키는  “마하야나(대승)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부처님이 정등각자(正等覺者)인 이유

 

초기불교는 미완성된 것일까? 마하야나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불완전한 것일까?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 그 자체는 완전한 것으로 본다.

 

만약 부처님이 덜 깨달은 상태에서 진리를 선포하였다면 부처님이 전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계속 일어나야 했다. 그래서 전법초기와 열반에 이를 때 깨달음이 달라야 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도중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보리수나무아래에서 최초로 깨달은 진리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새로운 깨달음이 일어났다면 이전에 깨달은 것은 불완전한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은 처음이나 열반에 든 순간이나 똑 같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성제의 진리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최초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는 초전법륜경에서 가르침과 열반에 들 때 말씀하신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의 가르침이 동일하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르침을 설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고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어서 위없는 깨달음이라 하고 또한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 하여 무상정등정각이라 한다. 이렇게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한 자를 정등각자(sammā-sambuddha, 正等覺者)’라 하는데 부처님의 십호 중의 하나로서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붙여 주는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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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십이행상 (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ṃ)

 

정등각자로서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가르침이다. 만일 부처님이 생각하기를 깨달음이 완전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라 불리우는 초전법륜경에 그대로 기록 되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 있는 그대로 완전히 청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S56.11)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무려 세 번이나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마하시 사야도는 자신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부처님께서는 정등각자가 되셨음을 선포하시길 얼마동안이나 유보하셨을까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진리를 아는 지혜인 삿짜 냐나,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인 끼짜 냐나, 이루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사성제에 관한 지혜가 완전하고 명료하지 않다면 부처님은 그러한 선언을 유보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 하였다.

 

부처님은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라 하였다. 여기서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에 대하여 한자어로 삼전십이행상이라 한다. 삼전은 사성제를 세 번 굴린 것을 말하고, 십이행상은 고집멸도가 세 번 굴려진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무려 세번이나 굴렸다. 만일 처음에 굴려서 선포하였다면 이는 불완전한 진리가 된다. 오염원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청정한 상태에서 사성제를 굴렸을 때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있게 선언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이다. 사성제의 진리를 세 번 굴려 완전히 청정해졌을 때 아라한 선언을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이것 이상 깨달음은 없는 것이다.

 

이것 이상 깨달음은 없다

 

 사성제의 진리를 열 두 가지 형태로 세번 굴려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였을 때 깨달음은 완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완성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자신의 법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성제에 대한 지혜가 명료해지기 전에 부처님께서 정등각을 이루었다는 선언을 하셨다면 이들 천인, 마라, 범천들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질문, 문의, 쟁점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대답과 답변을 주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인간들과 밀접한 교류가 없는 이러한 천인, 마라, 범천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지구상의 인간세계에는 바라문과 사문으로 알려진 고행자와 유행자(流行者)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또 천인이라고 널리 알려진 왕들과 일반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탐문 조사하여 준비한 질문과 문의에 답변을 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당시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주장하는 푸루나 까사빠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학식 있는 사람, 사문과 재가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면밀히 검증해보니,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이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정등각의 지혜를 증득하기 전에 부처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다면 역시 비슷한 곤경에 처하셨을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제8)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사성제의 진리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에서 깨달은 진리는 부처님이 열반할 때 까지 설한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다. 도중에 나이가 듦에 따라 사성제 이외의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이것 이상의 깨달음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처음부터 완전하였다. 마하야나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은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마하야나주의자들이 초기불교에 대하여 미완성된 것이라 간주하였다. 그 결과 중관이나, 유식이니, 여래장이이 하는 불교가 생겨났다. 그러면서 불교는 계속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불교학자는 21세기에 적합한 대승경전을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하고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완성된 것이고 완전한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처음 깨달은 진리나 열반에 이르러 설한 진리는 내용에 있어서 변함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전법을 함에 따라 새로운 깨달음이 계속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하였다. 이띠붓따까(여시어경)에 실려 있는 가장 마지막 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Yañ-ca bhikkhave ratti Tathāgato anuttara Sammāsambodhi abhisambujjhati, yañ-ca ratti anupādisesāya nibbānadhātuyā parinibbāyati, ya etasmi antare bhāsati lapati niddisati, sabba ta tatheva hoti no aññathā tasmā Tathāgato ti vuccati.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Lokāvabodhasutta-세계에 대한 이해의 경, 이띠붓따까 112, It121,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최초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한 이래 완전한 열반에 들기 까지 설한 내용이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최초로 깨달음을 증득한 후 젊었을 때 설한 것이 다르고 노년이 되어 설한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털끝만큼도 잘못도 없다

 

만약 노년이 되어 젊었을 때 한 설법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최초의 깨달음에 의심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마하야나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불교는 계속 진화한다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를 예상하였던지 부처님은 처음 깨달었 던 것과 열반에 이르렀을 때 말씀 하신 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ItA.II.190에 따르면, 그 사이에 가르친 일체의 경과 게송 등의 아홉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의 부처님의 말씀은 의미상으로 형식상으로 비난의 여지가 없고,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이 없으며 일체의 형태를 갖추고, 탐욕의 광기, 성냄의 광기, 어리석음의 광기를 쳐부수고, 털끝만큼도 잘못도 없이, 설해진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고,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니다.

 

(이띠붓따까 1568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서 아홉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 것은 구분교라 하여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을 말한다. 이런 구분교의 가르침이 비난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또 털끝만큼도 잘못도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 그 자체는 완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마하야나 주의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완전한 것이라 하며 미완성된 것이라 하여 불교는 계속 진화하여 왔다고 한다. 그리고 더욱더 진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더구나 석가도 몰랐던 것이 있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고 부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불교는 퇴보의 역사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불교의 진수를 맛본다. 비록 교학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부처님이 어떤 분이고,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부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리를 설하였다. 그런 진리는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었다.

 

진리는 도중에 변질 되었다. 더욱더 변질되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찾아 볼 수 없는 불교가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변질의 역사이다. 마하야나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 아니다. 반대로 퇴보에 퇴보를 거듭해 온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불교의 퇴보의 역사이다.

 

어느 것이든지 원본 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최초로 깨달은 것 이상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 없는 깨달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부처님이 열반에 든 그 순간부터 퇴보의 역사라 볼 수 있다. 불자들이 왜 원음을 찾으려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디.

 

 

[세존]

일체의 세계를 곧바로 알고

일체의 세계에서 여실히 알아

일체의 세계에서 벗어나

일체의 세계에 의착하지 않는다.

 

현명한 자로서 일체에서 승리하고

일체의 계박을 풀고

그는 최상의 적멸,

두려움 없는 열반을 얻는다.

 

번뇌가 부서지고 고뇌가 없고

의혹을 끊은 그 깨달은 님은

일체의 업의 소멸에 이르러

의착이 완전히 파괴되어 해탈했다.

 

그 분이 세존이신 깨달은 님,

바로 위없는 사자.

천상과 더불어 세계를 위해

하느님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이처럼 신들과 인간이

깨달은 님에게 피난처를 찾고

위대한 두려움 없는 자에게

무리지어 귀의한다.

 

길들여진 자로서 길들여진 자 가운데 최상자

고요한 자로서 고요한 자 가운데 선인.

해탈한 자로서 해탈한 자 가운데 위없는 자

건넌 자로서 건넌 자 가운데 최승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대한

두려움 없는 님에게 귀의하니,

천상을 포함한 세계에서

그와 비교될 만한 자는 없다. (It121)

 

 

 

2015-03-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