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가난 하지 않고 헛되지 않은 삶

담마다사 이병욱 2015. 4. 9. 16:41

 

가난 하지 않고 헛되지 않은 삶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 있다. 악행의 과보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행위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 악행을 하면 악과보를 받아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른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법구경 66번 게송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한 것이다.

 

 

Caranti bālā dummedhā      짜란띠 발라 둠메다

amitteneva attanā          아밋떼네와 앗따나

karonta pāpaka kamma   까론따 빠빠깡 깜망

ya hoti kātukapphala   양 호띠 까뚜깝팔랑

(Dhp66)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아 방황한다.

악한 행위를 일삼으며

고통의 열매를 거둔다.

(Dhp66, 전재성님역)

 

 

あさはかな愚人どもは、

自己して仇敵(かたき)にするようにふるまう。

いをして、

(このみ)をむすぶ。
(Dhp66,
中村元역)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에게 원수처럼 행동한다.

고통스런 결과를

불러들일 몹쓸 행동을 하면서.

(Dhp66, 법정스님역)

 

 

愚人施行     우인시행

爲身招患.    위신초환

快心作惡     쾌심작악

自致重殃.    자치중앙

(Dhp66, 한역)

 

 

자기야말로 자기의 원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가 부족하여

함부로 움직이며 악행을 저지르나니

마침내 가혹한 벌을 받는다.

(Dhp66, 거해스님역)

 

 

Fools, their wisdom weak,

are their own enemies

as they go through life,

doing evil

that bears

       bitter fruit.

(Dhp66, Thanissaro Bhikkhu)

 

 

 

 

자기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자

 

자신을 적으로 삼는 자가 있다. 대단히 어리석은 자이다. 자신을 친구로 삼아야 하나 자신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Caranti bālā dummedhā amitteneva attanā : DhpA.II.36에 따르면, 여기서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자는 무엇이 이 세상을 위해 유익하고 무엇이 저 세상을 위해 유익한 것인지를 모르는 자이다. 그는 네 가지 행동양식 걷기, 서 있기, 앉기, 눕기의 행주좌와 에 관련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행한다. 그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아 방황한다.

(법구경 719번 각주, 전재성님)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적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자신을 위하여 유익한 것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앉으나 서나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한다. 이렇게 악행을 하는 것은 자신을 적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자는 악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절대로 악행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왜 그럴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해치기 때문이다. 자신을 해친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악행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살아서는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죽어서는 악처에 떨어지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

 

사랑스런 이의 경(S3.4)’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자이다. 반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자이다. 먼저 자신을 적으로 적으로 여기는 자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사랑스런 이의 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빠세나디]

세존이시여, 저는 그것에 대하여 이와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Piyasutta- 사랑스런 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 전재성님역)

 

 

자기자신을 적(원수)으로 여기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자신을 적으로 여기면 어떻게 될까? 마치 적에게 대하듯 할 것이다. 적에게 어떤 악행도 서슴없이 하듯 자신에게 악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구에서 “만약 그들이 자기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다. (S3.4)”라고 하였다.

 

자기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자가 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어떤 사람이든 신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고 정신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Piyasutta- 사랑스런 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빠세나디왕의 자문자답에 추인하며 한 말씀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착한 행위를 하는 자라는 말이다. 설령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자를 말한다.

 

쑵빠붓따와 관련된 이야기(Suppabuddhakutthivatthu)

 

자신을 적으로 삼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적으로 삼는것이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서든지 악행을 서슴없이 한다. 그러나 쓰디 쓴 과보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이다. 이 게송과 관련된 인연담이 있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 DhpA.II.33-37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나병환자 쑵빠붓따와 관련된 이야기(Suppabuddhakutthivatthu)이다.

 

어느 날 나병환자 쑵빠붓다(Suppabuddha)는 대중의 끝에 앉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취를 부처님께 알리고자 대중을 제치고 다가갈 수가 없었다. 대중들이 흩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부처님께 다가갔다. 그 순간 신들의 제왕 제석천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 쑵빠붓다여, 그대는 가난한 사람이고 불쌍한 사람이다. 나는 그대가 부처님을 부정하고, 가르침을 부정하고, 참모임을 부정하면 무한한 재산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병환자 쑵빠붓다는 그대가 나를 그대는 불쌍하고 가난하다고 했지만 나는 행복을 성취하였고 막대한 재산, 믿음의 재산, 계행의 재산, 부끄러움을 아는 재산, 창피함을 아는 재산, 배움의 재산, 보시의 재산, 지혜의 재산의 일곱 가지 재산을 얻었다. 이러한 재산을 얻는 사람은 여자이건 남자이건 가난하지 않다. 그러한 사람의 삶은 헛되지 않다.’라고 말했다. 제석천은 이 이야기를 부처님께 전했고 부처님께서는 쑵빠붓다에게 백천의 재산을 주어도 불법승 삼보를 부정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편 쑵빠붓다도 부처님을 찾아뵙고 자신의 성취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제따 숲을 나와 길을 가다가 어린 암소에 치어 죽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부처님께서는 그에 얽힌 전생의 인연담을 수행승들에게 했다.

 

그녀는 아차녀였는데 백번을 암소로 윤회하면서 네 젊은이 즉, 훌륭한 가문의 아들인 뿍꾸싸띠(Pukkhusati)[MN.140], 나무껍질을 벗기는 자인 바히야(Bahiya), 강도무법자인 땀바티까(Tambathika), 문둥이인 쑵빠붓다를 죽였다. 이들 세 청년들은 모두 전생에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는데, 한 아름다운 유녀와 놀다가 저녁에 그녀에게 준 막대한 화대를 다시 빼앗고는 그 유녀를 죽였다.

 

그 유녀는 죽을 때에 야차녀로 태어나 그들에게 복수를 하리라고 마음을 먹고는 그것을 실행한 것이다. 그리고 쑵빠붓다가 나병환자로 태어난 것은 전생에 연각불인 따가라씨킨(Tagarasikhin)에게 침을 뱉어 모욕을 주어 오랜 세월 지옥에서 고생하다가 나병환자로 태어난 것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는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의 모든 뭇삶들은 그들이 저지른 낱낱의 죄의 혹독한 과보를 거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아 방황한다.

악한 행위를 일삼으며

고통의 열매를 거둔다.(Dhp66)

 

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Dhp66 인연담, 나병환자 쑵빠붓따와 관련된 이야기(Suppabuddhakutthivatthu),전재성님)

 

 

인간사회를 수호하는 두 가지 법, 부끄러움과 창피함

 

인연담에 따르면 제석천이 쑵빠붓따를 시험하는 장면이 나온다. 쑵빠붓따가 부처님을 배신하면 막대한 재산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에 쑵빠붓따는 이미 막대한 재산을 성취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재산이다.

 

 

1) 믿음의 재산,

2) 계행의 재산,

3) 부끄러움을 아는 재산,

4) 창피함을 아는 재산,

5) 배움의 재산,

6) 보시의 재산,

7) 지혜의 재산

 

 

일곱 가지 재산 중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 왜 막대한 재산일까? 그것은 인간사회를 수호하는 두 가지의 법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란 내면적인 것이고, 창피함이란 외면적인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이는 내면적으로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악한 일을 하였을 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도 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 완전범죄를 저지른 자라도 밤에 잠못이루고 괴로워 하는 것도 내면의 부끄러워 함이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이 세상에는 양심이 실종된 자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몰래 도둑질을 하고 남을 속이고 남을 해치는 자는 양심의 거울이 마비 되어 어떤 일이든지 서슴없이 한다.

 

수치심을 느낄 때가 있다. 이는 외면적인 것이다. 다름 아닌 창피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남보기 창피해서라든가 너는 수치심도 없냐?”라는 말을 한다. 이는 외적으로 느끼는 부끄러움을 말한다. 겉으로 드러나서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창피함이다. 그럼에도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이 있다.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던 말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서슴없이 하는 자들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이 많아 졌을 때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해 놓고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고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면 약육강식의 동물사회나 다름 없다. 동물과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stn133)”라 하였다.

 

상윳따니까야 가난한 사람의 경(S11.14)’

 

나병환자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에 가난한 사람의 경(S11.14)’이 있다. 부처님이 수행승들에게 오랜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곳 라자가하에 가난하고 빈곤하고 불행한 사람으로 살았다.”라고 말씀 하신 것으로 경이 시작된다.

 

주석에 따르면 이 하늘사람은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당시에 베나레스의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때 나이든 연각불에게 악의를 갖고 욕설을 퍼부어 사후에 지옥에 태어났다. 지옥에서 대가를 치른 뒤 라자가하의 가난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문둥병에 걸려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곧 진리의 흐름에 든 님(預流者)이 되었다. 그리고 돌아다니던 소에 받혀서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 자신의 믿음 때문에 하늘나라에 태어났다.(Srp.I.349-350)”라고 설명되어 있다.

 

주석을 보면 법구경 인연담과 유사하다. 경에 따르면 문둥병 환자는 예류자가 된후에 죽어서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삼십삼천)에 태어났다. 이에 제석천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제석천]

여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잘 정립되고

고귀한 님들이 사랑하고 찬탄하는

훌륭한 계행을 잘 지키고.

 

참모임에 청정한 믿음을 지니고

통찰이 올바른 자는

가난하다고 불리지 않으니

그의 삶은 헛되지 않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

믿음과 계행의 청정,

그리고 가르침에 대한 통찰에 전념해야 하리.”(S11.14)

 

 

나병환자의 고통에 대하여

 

문둥병에 걸리면 얼마나 괴로울까?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나병환자의 고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세존]

마간디야여, 예를 들어 한 나병환자가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고, 손톱으로 상처의 구멍이 할퀴어져서,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운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를 위해 친구나 동료나 친지나 친척이 외과의사를 초빙해서, 그 외과의사가 그를 치료하게 한다고 합시다. 그는 그를 치료해서 나병에서 해방되면, 병이 없고 안락하게 자유자재로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나병환자가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고, 손톱으로 상처의 구멍이 할퀴어져서,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마간디야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은 그 나병환자가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우는 것이나 치료를 받는 것을 부러워하겠습니까?

 

[미간디야]

“존자 고따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병이 들었을 때에 치료가 필요한 것이지 병이 없을 때에는 치료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미간디야의 경, 맛지마니까야 M75, 전재성님역)

 

 

나병환자는 썩어 들어가는 부위에 대하여 불에 지지면 오히려 시원함을 느낀다. 자신의 몸을 태워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병이 치유되어 이런 고통에서 벗어났을 때 더 이상 숫구덩이에 몸을 태울 일이 없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함일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임을 말한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에 대하여 썩어 들어 가는 몸을 숯불덩이에 지질 때의 쾌감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감각적 쾌감을 즐기는 자들은 문둥병 환자와 다름 없음을 말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병이 치료 된 것과 같다. 나병이 치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태울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면 천상의 행복을 능가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간디야여, 참으로 그 감각적 쾌락의 착하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것들을 떠나면,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므로 그 보다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M75)”라 하셨다.

 

가난 하지 않고 헛되지 않은 삶

 

나병환자 쑵빠붓다는 가난하고 불행한 자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을 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이 세상 어떤 부자보다도, 이 세상 어떤 행복한 자 보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것은 이대로만 죽 가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쑵빠붓다는 일곱가지 막대한 재산을 성취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은 믿음의 재산, 계행의 재산, 부끄러움을 아는 재산, 창피함을 아는 재산, 배움의 재산, 보시의 재산, 지혜의 재산을 말한다. 이런 재산을 가진 자는 여자이건 남자이건 가난하지 않다. 그러한 사람의 삶은 헛되지 않다라고 하였다.

 

 

2015-04-09

진흙속의연꽃